[도서증정][번역가와 함께 읽기] <전차 B의 혼잡>

D-29
모쿠아미풍으로 단정히 가르마 탄 머리는 아마 잔기리아타마(ざんぎり頭)겠죠? 카부키 극작가 모쿠아미가 잔기리모노를 유행시켰다고 들었는데.. 이전 에도시대의 이마 정수리 머리카락을 시원하게 깎아서 뒤에 상투를 튼 변발(촌마게)과 뒤에 상투튼 소하츠에서 메이지유신때는 뒷머리는 자르고 앞머리는 기르고가르마탄 잔기리 헤어스타일이 유행했다고 하네요.
옛날 고향에서 귀가 닳도록 들은 행상인 소리는 이제 거의 다 자취를 감췄다. 생각해보면 무척 다양했다. 개중에는 어릴 적 친숙한 기억과 밀접히 이어져서 잊히지 않는 소리가 제법 많다.
전차 B의 혼잡 139, 데라다 도라히코 지음, 안은미 옮김
이걸 읽으면서 우리나라는 어떤 소리가 있을까?하면서 생각나는 건 "계란이~ 왔어요~"랑 "찹쌀~떡~ 메밀~묵~"하는 행상인 소리.. 그런데 정작 나는 메밀묵도 찹쌀떡도 사먹어본적이 없다.. '정작 비파잎탕이 대체 어떤 음식인지 맛을 보기는커녕 구경조차 하지 못했다'는 것과 비슷하게 '이미 대중성을 잃고 과거의 타성에 기대 겨우 흔적만 조금 남겨진 상태'가 아니었을까.. 지금 우리 아이들은 어떤 소리를 듣고 자랐을까.. TV에 나오는 선전, 유튜브 등 sns 쇼츠의 홍수에 휩쓸려서 이젠 바깥의 행상인 소리가 어디 들리기나 할까? 하긴.. 한동안 '오로나민씨~ 노래를 부르며 춤추기는 했지만.. 스타벅스에서도 인간적 소통을 위해 있었던 제로 진동벨 원칙을 없앨 거라는 얘기가 있던데... 그래도 에버랜드 직원들의 정신없이 휘몰아치는 랩?타령?은 다녀온지 오래 되었는데도 귀에서 맴돈다.
소년잡지나 동화책 하나 없던 시절이라 변변찮은 인쇄물조차 아이 눈에는 신기했던 걸까. 상당히 질 낮은 목판인쇄였음에도 요즘 어린이 그림책에 실린 알록달록한 도판과 비교하면 오히려 어설프고 촌스러워서 멋이 난다.
전차 B의 혼잡 141, 데라다 도라히코 지음, 안은미 옮김
옛날 에이브문고나 계몽사의 디즈니 그림명작동화처럼 좀 구린 그림에 촌스런 번역에도 불구하고 옛날의 추억이 그리워 웃돈 주고 중고책방에서 찾는 이들 중 하나가 나..;; 정작 지금은 훨씬 더 좋은 책이 널려있는데 아이들은 책이라면 질색하는 애들이 많다.
실은 조금 있으면 절판된다고 해서 부랴부랴 산 책 중 이 책과 느낌이 비슷한 책이 있는데요. 이것 또한 일본의 물리학자(이름을 보고 한국인이라고 생각했는데 일본에서 태어나고 미국 워싱턴에서도 오래 살았던 것 같습니다.)가 쓴 에세이인데요. 느낌이 비슷해서 찾아보니 아니나다를까 40회 데라다 도라히코 기념상 수상작이라네요..^^;; 이런 우연이!
은하의 한구석에서 과학을 이야기하다 - 물리학자가 들려주는 이 세계의 작은 경이이론물리학자 전탁수가 쓴 과학에세이다. 저자는 어렵게 느껴지고 접근하기 어려운 과학의 참된 매력을 때로는 시적이고 때로는 흥미진진한 22편의 이야기들로 들려준다. 지난해 일본에서 출간되어 제3회 야에스책 대상, 제40회 데라다 도라히코 기념상을 수상하였다.
물리 체계에서 '자유도(degree of freedom)'가 증가할수록 그 상태를 지정하는 데 필요한 척도의 판독 수치는 무한정 늘어난다. 요즘 들어 걸핏하면 '학문의 자유'가 논의되지만, 이 자유에서 자유도가 아직 숫자로 정해지지 않는 한 정밀과학적으론 완전히 무의미한 단어일 뿐이다. 100년을 논쟁해도 이 자유의 한계는 결코 숫자로 정해질 것 같지 않다. 이에 반해 갖가지 진기한 기록은 어쨌든 저마다 하나의 '자유도'에 대응하는 수량적 기록을 위한 어설픈 시도의 첫걸음으로 각각 고유한 어떤 문화적 의미를 가진다.
전차 B의 혼잡 154, 데라다 도라히코 지음, 안은미 옮김
내친김에 개별 원자에 저마다 생명을 부여함으로써 과학 근원을 가로지르는 '생명'과 '물질'이라는 두 개 요소를 하나로 묶을 수는 없을까. 별사탕을 둘러싼 물리에서 출발해 점점 공상의 사다리를 기어오르다가 마침내 영원한 비밀이자 수수께끼인 생명의 기원까지 파고들어 조금 궤도를 벗어나고 말았다.
전차 B의 혼잡 166, 데라다 도라히코 지음, 안은미 옮김
예전에 고등학교 때 유럽입자 물리연구소(CERN) 근처에 살아서 거기서 근무하시는 물리학자 분 두 분께 수학과외를 받은 적이 있었는데 한 분은 아주 착실하게 수학만 가르쳐주셨는데 다른 한 분은 수학보다는 술을 좋아하고 술만큼 좋아하는 게 이렇게 실없는 물리학적 공상에 대해 수다 떠는 거였어요. 그래서 별사탕을 만드는 방법(전 양귀비씨를 쓰는 건 몰랐네요)에서 Lichtenberg figure의 프랙탈 수학이 나오는 것이 낯설지가 않습니다.ㅎㅎㅎ 물리학자들은 MBTI로 치면 극 N에 해당되는 분들이 많은 듯..
와! 진정한 이과인 삶을 걸어오셨군요. 과학 지식이 부족한 저로선 부러울 따름입니다.
아무 관계 없는 여러 공장에서 제조된 오만 가지 물건이 이런저런 경로를 거쳐 어느 집 휴지통에 집합한 뒤 다른 집에서 버린 쓰레기와 한데 합쳐져 제지공장 물통으로 들어가기까지, 얼마나 복잡한 세상사가 얽혀 있을까. 한 장의 쥣빛 재생지가 돼 버린 이상 거슬러 올라가 확인할 길은 없다. 그저 일상을 가로지르는 인과의 그물이 한없이 혼잡하단 사실을 막연히 실감할 뿐이다.
전차 B의 혼잡 170, 데라다 도라히코 지음, 안은미 옮김
온갖 분야에서 모인 재료가 한 가마솥에서 뒤섞이고 이겨져 하나의 새로운 물건으로 태어나는 과정은, 인간의 정신세계에서 제작되는 예술 작품에도 존재한다. (...) "가치 있는 독창성은 남과 다르다는 뜻이 아니다." "최고의 천재는 부채가 가장 많은 사람이다." (...) 아무리 위대한 작가가 쓴 걸작이라도, 아니 오히려 대가의 작품일수록 다른 문헌에서 나온 재료가 잔뜩 섞여 있는 법이다. 그 재료를 속속들이 탐색하는 작업은 흥미롭고 유익한 일이지, 작품과 작가의 가치를 부정하는 일이 아니다. 요컨대 재료를 얼마나 잘 삭혔느냐, 부정한 성분을 얼만큼 씻어냈느냐가 중요하다.
전차 B의 혼잡 170-171, 데라다 도라히코 지음, 안은미 옮김
"어떤 사상 혹은 어떤 발명의 기원을 찾으려는 노력은 하늘 아래 새로운 건 없다는 허무한 결론으로 끝나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진짜로 위대한 모든 것이 다 차용물은 아니다. 여하튼 남이 주는 것이 무엇이든 좋은 것이라면 굳이 쓸데없이 따지지 말고 흔쾌히 받아 든 채 감사 인사를 전하는 쪽이 가장 현명한 사람이자 행복한 사람일 테다.
전차 B의 혼잡 172, 데라다 도라히코 지음, 안은미 옮김
대부분 요즘 모기장에 만족하지 못하면서도 푸념을 늘어놓지 않은 채 밤마다 치고 들어가 자는 이유는 아버지와 어머니도 그 아버지와 어머니도 치고 잤기 때문이다. 모기장이란 원래 이런 거야, 하며 체념했을 뿐이다. 결코 이상적 모기장은 아니다.
전차 B의 혼잡 176-177, 데라다 도라히코 지음, 안은미 옮김
꺼림칙하고 불안한 전조가 애매하게 오래 이어지는 동안 점점 뭔가가 다가온다. 그것이 돌연 터지는 순간 위험은 이미 코앞이다. 막상 위험이 현실이 되면 더는 꺼림칙한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전차 B의 혼잡 182, 데라다 도라히코 지음, 안은미 옮김
증기 난방기처럼 내 병도 왠지 전조, 파열, 평온이라는 세 단계를 주기적으로 반복하는 것 같다. ... 가장 싫은 것은 '전조'의 길고 불안한 간격이다. '파열'은 가장 무서운 순간인 동시에 가장 아름다운 절정의 순간이다. ... 불안의 압박에서 풀려나 귀중한 '평온'으로 넘어가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모든 어두운 그림자가 세상에서 사라지고 만물이 일제히 아름다운 빛을 받으며 오래도록 바라 마지않던 평온한 천국이 찾아온다. 설령 그 평온이 죽음을 뜻할지라도 오히려 그 편이 몇 배는 더 아름답지 않을까.
전차 B의 혼잡 182-183, 데라다 도라히코 지음, 안은미 옮김
선천적 뇌혈관 질환으로 뇌출혈이 일어나 중환자실에서 정신은 말짱한데 꼼짝도 않고 침대 위에서만 절대 안정을 취하고 몇일을 지낸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이렇게 여러가지 신기한 소리에 귀를 쫑긋하고 시간의 흐름을 가늠해보며 지냈는데 그 후 두번째 출혈이 일어나서 응급수술에 들어갔죠. 저도 실은 선천적인 질환이기도 하고 어느 정도 이 질병에 관한 사전지식도 충분히 얻은 상태라 '파열'의 순간이 오자 사람들이 신기해할 정도로 차분했습니다. 저도 그래서 '전조'가 제일 불안한 시기라는 것, 하지만.. 번역가분 말대로 평온의 순간이 조금은 더 나중에 오길 바라는 마음도 공감이 가네요..
마지막 짧고 인상적인 작품 '빨강'을 읽고서는 저는 아, 그건 closed eye visualization (CEV)같은데.. 눈꺼풀 위의 혈관을 통한 빛이 남기는 잔상인데 빨강색이 가장 긴 파장이어서..라는 식으로 자동적으로 해석 모드에 들어가는 걸 보구 저도 어김없이 이과생이라는 실감이 오네요;; T라 미숙해~
데라다가 좋아했을 법한 감상이네요. 전 당시 세계를 휩쓸던 열강들의 제국주의가 떠올랐는데.
고양이가 앉아서 졸다니 신기했다. 대단한 발견이라도 한 양 남들에게 말했더니 익히 알던 사람은 다 웃었고 모르던 사람은 아무도 재미있어하지 않았다. 고양이의 이런 행동에 비친 인간의 자태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노라면 익살과 비애가 섞인 묘한 기분이 들었다.
전차 B의 혼잡 43쪽, 데라다 도라히코 지음, 안은미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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