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여수의 사랑』 : 미래가 없는 자들을 위한 2026년의 시작

D-29
그녀에게는 미래가 없는 것이었다. 무엇이 젊은 그녀에게서 미래를 지워내버린 것인지, 아무런 희망 없이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옮겨 다니게 하는 것인지 나는 알 수 없었다.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자흔이 지쳤다는 것, 이십몇 년이 아니라 천 년이나 이천 년쯤 온 세상을 떠돌아다닌 사람처럼 외로워하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다만 신기한 것은 때때로 자흔의 얼굴에 떠오르는 웃음이었다. 모든 것에 지쳤으나 결코 모든 것을 버리지 않은 것 같은 무구하고도 빛나는 웃음이 순간순간 거짓말처럼 그녀의 어둠을 지워내버리곤 했다. 그런 자흔을 보면서 나는 종종 어떻게 사람이 저토록 희망 없이 세상을 긍정할 수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에 의아해지곤 했던 것이었다.
여수의 사랑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개정판 p33~34, 한강 지음
'여수, 그 앞바다의 녹슨 철선들은 지금도 상처 입은 목소리로 울부짖어대고 있을 것이다.' p9 '녹슨 철선'들은 왜 '노후한 휴식'이 되지 못했을까...
58p에 같은 의미의 문장이 나오네요. "여수, 그 앞바다는 아직도 검푸른 파도를 세우며 선착장의 철선들을 향해 밀물져 오르고 있을 것인가." 뒤에 가족사가 나오는 것을 보면, 아마 철선은 잃은 동생을 상징하는 걸까요?
이렇게 고요해질 통증인 것을, 지난밤에는, 또 수없이 반복되었던 그 밤들에는 이런 순간을 믿지 못했었다. 마치 밤이 깊을 때마다 새벽을 믿지 못하듯이, 겨울이 올 때마다 봄을 의심하듯이 나는 어리석은 절망감에 사로잡히곤 했던 것이다.
여수의 사랑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개정판 p.25, 한강 지음
mission1. 내 몸이 먼저 반응한 문장 기쁘고 슬픈 순간에는 왜 그 순간이 마치 영원할 것 같은 느낌이 들까요. 모든건 지나가기 마련이고 그것을 이성적으로는 알고 있지만 매번 감정과 감각에 속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더 기쁠 때도 많지만, 그 기쁨이 실망을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반면 슬픔이 영원할거라는 착각 때문에 더 우울해지기도 하는 것 같아요.
@말티 앗! 저도 이 문장이 마음에 깊이 남았습니다. 한 때가 지나면 또 새로운 한 때가 찾아올테니... 아무런 희망도 미래도 없어보이는 때가 와도, 매순간을 버텨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세월이 흘러 그 시간을 반추할 때, '그 땐 참 어리석었던 거 같아' 하지 않도록 말이에요...!
실제 몸의 통증을 삶의 진실로서 이토록 아름답게 표현할 수 있다니, 감탄하게 되는 문장이에요. 한강 작가님께는 죄송하지만 실제로 작가님은 많이 아파보신 분 같아요. 꿈을 소설의 소재로 자주 활용하시는 것을 보면, 꿈을 많이 꾸시는지 숙면도 못취하시고... 아무렴 이런 글을 써낸다는게 보통 일은 아닐 거예요. 작가님의 표현을 빌린다면, '온갖 욕망과 고통과 좌절이 뒤범벅되어 있던 시궁창'을 끊임없이 상상하다 보면 아플 수밖에 없을 것 같기도 하고요. 생각해 보면 그런 감각이 가장 생생했던 시기가 사춘기 시기가 아닐까 해요. 결국 망각될 텐데, 영원할 것처럼 기뻐하거나 슬퍼했던 것 같아요. 여전히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있죠. 내가 도대체 왜 그랬지? 하는 순간의 연속들인 시기였지만 이렇게 소중하게 추억이 될 경험이라면 오춘기가 있어도 좋을 것 같아요.
실제로 작가님께서는 많이 아파하신 것 같아요... 신판 작가의 말에 보니까 그런 내용이 있더라고요! 출처: https://www.yes24.com/product/goods/6396011 신판 작가의 말 중에서 문장에 대한 고심보다 어렵게 느껴진 것은 기억들이었다. 한 편씩 읽어가는 동안 그 시절의 공기, 내 몸과 마음의 상태 같은 것들이 차츰 생생하게, 종내에는 숨 막히도록 강렬하게 가까워오는 것을 느꼈다. 이를테면 「어둠의 사육제」는 새로 쓰는 것이 아니라 그저 교정을 보는 것인데도 힘에 부쳐 여러 번 쉬었다. 이 소설을 쓴 것은 기록적으로 무더웠던 1994년 여름이었는데, 석 달 가까이 ‘명환’을 죽이지 않아보려고 소설을 붙들고 있었다. 마지막 밤의 ‘영진’처럼 때로 몸이 떨리고 뜨거운 눈물이 솟았던 캄캄한 시간들이 아직 원체험처럼 남아 있다. 그 밖의 다른 소설들을 읽을 때에도, 아무도 모르게 그 속에 숨겨둔 사적인 경험들이 고스란히 다시 떠올랐다. 한 사람―이 소설들을 쓰던 나―에게 이상한 방식으로 뒤늦은 인사를 건네는 기분이었다. 낯설고도 친숙한 그 사람, 가까스로 그렇게 태어나고 있던 그 사람과, 불가능한 굳은 악수를 나누고 싶었다.
아... 몸으로 쓰셨군요. 그래서 작가님이 쓰신 책 <빛과 실>에 이런 내용이 담겨 있었어요. "그 소설을 시작하던 시점과 같은 사람일 수 없는, 그 소설을 쓰는 과정에서 변형된 나는 그 상태에서 다시 출발한다. 다음의 질문들이 사슬처럼, 또는 도미노처럼 포개어지고 이어지며 새로운 소설을 시작하게 된다. (중략) 그런데 ‘나’는 원래 누구였던가? 예전에 나였던 사람은 이미 이 소설로 인해 변형되었으므로 이제 그 사람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저도 한강 작가님의 글을 채식주의자, 소년이 온다 그리고 지금 여수의 사랑까지 세 편을 읽어보았는데 매번 우울하고 슬픈 느낌을 받았어요...ㅎㅎ 오춘기가 있어도 좋을 것 같다는 말씀은 조금 신선하네요! 사실 저는 다시는 사춘기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더라구요 그렇지만 동시에 그 시절이 있었기에 지금의 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삶의 모든 순간을 다 끌어안고 가고 싶어요!
미래의 측면에서 '오춘기의 유용성'을 고려했지만 오춘기가 정말 다시 온다면.. 싫네요. 사춘기 시절의 제가 정말 안타까워요. 그런데 그때의 모습만큼 '나 자신'을 순수하게 보여준 때가 없지 않았나 싶어요. 물론, 충동적이었죠. 여러 장면들이 기억나는데, 몇몇 장면은 정말로 픽션이었다고 믿고 싶네요. 그런데 말티님 말씀대로.. 모든 순간을 끌어안기로.. 모든 순간이 나였다!
때늦은 두꺼운 외투를 걸친 여자의 얼굴에는 쉴 새 없이 땀이 흐르고 있었는데, 그녀는 손수건도 없이 그리 깨끗해 보이지 않는 손바닥으로 그 땀을 닦아내고 있었다. 그녀는 얼굴을 닦는 동작에 너무도 몰입해 있어서 이를테면 마치 이목구비까지, 더 나아가 고유한 존재까지도 손바닥으로 닦아내버리려는 것처럼 보였다. 흡사 들지 않는 칼날로 단단한 과일의 내피를 도려내려는 것 같은 집요한 손놀림이었다.
여수의 사랑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개정판 p.18, 한강 지음
그믐에서 함께 책 읽는 것은 <여수의 사랑>이 처음입니다. 아직 그믐의 화면에 적응이 안된 것 같은데, 차차 적응해보도록 하겠습니다~ :) 그리고 소설 속 '과로하시는군요?'(p.24)란 문장에 뜨끔했습니다 ㅎㅎ 새해엔 과로하지 않기로 했는데... 과로하지 말고 건강한 26년이 되길요... :)
놀랍게도 금방 적응이 됩니다! 사용하다 보면 그믐 창업자분께서 사용자 경험을 매우 신경써주신 것이 느껴집니다. 보통의 과로가 아니고선 이렇게 사용자 친화적으로 온라인 독서 플랫폼을 만들 수 있을까 싶어요.
mission2. 여수, 상처인가요 구원인가요? 저는 정선의 여수행은 '여수를 고통이 아닌 사랑의 장소로 여기고 싶다'는 의지가 담긴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상처이기도 하고 구원이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구원을 위해 여수로 갔다는 점에서 이전까지는 상처, 여수에 도착한 시점부터는 구원에 가깝다고 봅니다. 정선은 가족을 모두 잃고 (심지어 굉장히 트라우마틱한 이유로) 뿌리내릴 곳 없이 살았습니다. 강박적인 결벽을 가졌던 이유도 이런 심리적 외상 때문일 것 같아요. 자취방에 누군가를 들여서 '함께살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 또한 명목상으로는 월세비 절감이었지만,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서인 것 같기도 하구요. 이런 외로움과 고통은 그 근원지인 여수에서의 상처를 피하는 한 해결되지 않는 부분이었을 것 같아요. 하지만 정선은 여수를 언급하는 것조차 꺼릴 정도로 도망치고, 회피하기만 했습니다. 그때 자흔이 정선의 삶에 등장합니다. 마치 자매처럼 사이좋게 지내며 정선이 어린 시절에 받지 못했던 따뜻한 챙김, 보살핌을 제공합니다. 그런데 이토록 소중한 자흔이 정선을 떠납니다. 그리고 자신이 '사랑하는' 여수에 가겠다고 말합니다. 그렇기에 정선은 여수에 갈 수밖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더 이상 과거를 회피하지 않고, 따뜻한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꼭 여수에 갔어야했던 것입니다. 물론 자흔을 만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자흔을 매개로 여수에 간다는 행위 자체가 상처를 직면하는 행위인 것 같아요. 그래서 이후 정선이 무언가 긍정적인 변화를 겪지 않을까하는 상상을 해보았습니다.
써놓고 보니 이게 mission3과도 연결되네요! 저는 뭔가 정선이 여수에서 상처를 극복하고 자신의 삶과 뿌리를 다시 사랑할 용기를 얻을 것 같다는 긍정적인 생각이 들었습니다ㅎㅎ
상처 그 자체인 '여수'를 덮기 위해 결벽증 환자가 되어야 했던 '정선'이 참 아프게 느껴지는 것 같아요. 말티님이 해석하신 대로라면, 정선의 '의지적인 행동', 그러니까 자신의 상처까지도 안아내고 마주하려는 결말에서 희망을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자흔과 만나서 여수 맛집도 찾아가는 소박한 일상을 기대해보고 싶네요. 한편으론, 마지막 장면에서 정선이 여수에 도착했을 때, 여수의 날씨가 정선을 때리는 것처럼 묘사가 되어 제3의 결말을 상상하게 만들기도 해요. 책 <콜카타의 세 사람>에는 '외부 변수'가 끼칠 수 있는 '최악의 영향'을 끝까지 밀어붙이거든요.
@말티 저도 말티님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자흔을 찾는 것과는 별개로, 아픈 기억에서 한걸음 떨어져, 있는 그대로의 여수를 관조할 수 있는 기회가 되지 않을까요? 전 상처를 치료하는 건 외면과 회피가 아니라 직면이라고 생각하기에... 또 @베오 님께서 적요한 햇빛 대목을 긍정적으로 해석해주셨던 것처럼 이미 정선에게는 변화가 찾아왔기에, 분명 좋은 방향으로 달라지는 게 있을 거라 믿습니다!
누군가의 가슴이 찢어지고 그것이 영원히 아물지 않는 것 같은 빗소리가 아련한 뇌성을 삼켰다. p10
여수의 사랑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개정판 한강 지음
적요한 햇빛 속으로 무수한 먼지 입자들이 흩날리고 있었다. 아름답구나, 하고 나는 문득 생각했다. 먼지는 진눈깨비 같았다. 먼 하늘로부터 춤추며 내려와 따뜻한 바닷물결 위로 흐느끼듯 스미는 진눈깨비......, 여수의 진눈깨비였다. p13
여수의 사랑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개정판 한강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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