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여수의 사랑』 : 미래가 없는 자들을 위한 2026년의 시작

D-29
저는 이 문장이 좀 의아했어요. 아름답다고 해놓고서 갑자기 주인공에게 상처였던 '여수'의 진눈깨비라니.
@내로 저도 진눈깨비가 가지는 상징적 의미가 무엇인지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제일 첫 페이지의 시 구절에도, '상처가 주는 시절'과 연결되는 거면 그리 밝은 이미지는 아닐 것 같은데... 어쩌면 '고통'을 상징하는 여수와 관련되면서, '사르르 녹는' 어떤 것과 연결되는 것일까요? 다른 분들의 생각도 궁금하네요!
저는 처음에 나오는 시를 보고 약간 니체스러운 느낌을 받았어요. 나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나를 강하게 만든다고 하잖아요. 그런 상처의 시절 덕분에 '진눈깨비(불안정한 상태, 고통들, 그러나 결국 사라지는)'가 오히려 귀여워 보이는 느낌인가 싶기도 해요. 정선도 여수를 떠나고 숱한 경험으로 꽤 고통에 면역이 된 상태에 이르지 않았나, 그래서 다시 여수로 향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해요. 301p 해설에 뭔가 설명되는 것 같은데, 아직은 들여다보고 싶지 않네요. 다른 분들의 생각도 궁금합니다.
진눈깨비.. 안식을 찾아 흩날리는 슬픔 같다.. 생각했습니다..
저도 이 문장을 마크하려고 했는데 이미 고호님도 남겨놓으셔서 좀 빌릴게요. 이 부분이 소설 앞부분에 나오는데 여수를 언급해서 우선 독자를 집중시킵니다. 그리고 소설 말미에 다시 적요한 햇빛의 먼지가 나옵니다. 처음 읽을 때의 독자에게는 먼지가 큰 의미를 갖지 않을 것입니다. 그저 일상에서 우리가 겪는 그 순간을 묘사한 여타 장면 같거든요. 하지만 후반부에서 한번 더 되풀이 될 때 이미 선정의 청결 강박증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아는 독자는 더 이상 일반적인 묘사가 아니라 선정에게 큰 변화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미장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뒷부분에 나오는 묘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창문 틈으로 적요한 햇빛이 춤을 추었다. 자흔의 말간 얼굴이 그 햇빛과 먼지 속에 고요하게 흔들리고 있었고,] 나흘이나 먼지를 닦지 않은 선정이 발견한 것은 먼지와 더불어 떠오르는 자흔의 얼굴이었던 것이죠. 그것이 아름답고 따뜻했던 것일 겁니다. 먼지가 매 순간 닦아내고 없애야 할 오염이었다가 아름다운 것으로 변 한 것처럼, 여수에 속한 것이라서 더욱 차갑고 불쾌하게 느껴져야 했을 진눈깨비가 춤추며 내려와 따뜻한 바닷물결에 흐느끼듯 스며든 것이겠죠. 진눈깨비는 어쩌면 미선일지도 모르겠어요. 그러면 바닷물결을 따뜻하다고 표현한 것이 이해가 가요. 진눈깨비가 내리는 계절의 바다가 따뜻할 리 없어요, 얼음처럼 차갑지. 하지만 동생이 잠들어 있는 저 바다는 따뜻해야만 해요, 그래서 흐느끼는 스치는 동생을 따뜻하게 품어줘야 하거든요.
아하... 그러고보니 진눈깨비가 내리는 바다가 따뜻할 리가 없겠네요... 왜 그런 당연한 점을 놓쳤던 걸까요? 첫페이지 시 구절처럼, 차가워야 했던 진눈깨비조차 참 따뜻한 나라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은, 이제 먼지와 진눈깨비 같은 것에 대한 정선의 인식이 바뀌고 있다는 걸 알려주는 걸까요? 소설의 뒷이야기가 점점 긍정적인 방향으로 예상되는 거 같아 기분이 좋습니다.
네 저는 정선이 바뀌었다고 봅니다. 다만 마음 따뜻한 진제님이 소망하는 정선과 자흔이 같이 잘 사는 그런 미래가 아쉽게도 저한테는 느껴지지 않아요 ㅠㅠ. 자흔의 찬란한 소멸과 정선의 담담하고 견고한 독립을 그려봅니다. 그걸로도 괜찮다고 느끼고, 한강작가님 작품으로서는 그게 최선의 긍정적 결말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사실 저도 주저리주저리 썼지만, 제가 예상한 결말은 지나친 희망편이라고 생각합니다... 물에 빠짐으로써 지칠 대로 지친 자신의 삶을 끝냈을 것 같아요. 다만 제가 자흔의 결말을 죽음으로 놓아주지 못하는 건, '자흔은 왜 진작 여수 바다에 가지 않았던 것일까?' 라는 질문에 아직은 답하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무엇이 그녀의 죽음을 보류시켰던 걸까요? 그냥 순전히, 같이 사는 사람이 있어서? 그렇다기엔 같이 있는데도 외로운 순간들이었을텐데... 아니면 순전히 그 다짐을 실천으로 옮기기까지 시간이 걸려서? 어쩌면 특별한 이유가 없었던 걸수도 있죠. 이미 미래가 없는 사람인데, 이런들 어떠하고 저런들 어떠했겠어요. 오만가지 생각을 해봤지만 그 중 딱 이거다 할만한 이유는 아직 못 찾은 것 같습니다. 혹시 다른 분들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저는 자흔이 여수의 그 바다에서 죽음이 아닌.. 오히려 죽음을 초월한 삶의 찬란함을 느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자흔은 정선을 같은 곳으로 이끌죠..
녹아내려 찬란히 소멸하여 안식을 찾는, 결국 바다의 온기를 머금는 진눈깨비, 정선의 상처의 흔적, 동생 미선의 상징, 쌍둥이 혹은 분신, 찬란한 소멸의 장소로 이끄는 사람, 자신과 같은 존재를 찾고 싶어했을지도 모르는 사람 등등... 저 혼자서는 생각해보지 못했을 관점들을 @GoHo @내로 @베오 세 분의 글을 통해 접해서 참 감사합니다. @내로 님 말씀처럼, 자흔은 자신과 같은 사람을 찾고 있었던 걸지도 모르겠단 생각도 드네요...
아하! 저랑 같은 고민을 하셨었군요 ㅎㅎ 아직 대화량이 많지 않은데도 이렇게 놓칠뻔했어요. 자흔이 과연 찬란한 소멸을 할까? 하는 지점에서는 <어둠의 사육제>에서 작가님이 주인공과 그 외의 인물을 어떻게 다루는지를 보면 조금은 힌트가 있는 것 같기도 해요. 자흔의 결말을... 두 번째 단편까지 함께 끌고가 봅시다 ㅎㅎ
다음날 오전 나는 괜찮다는 자흔을 억지로 병원에 끌고 가 엑스선 촬영을 했다. 촬영 결과를 기다리기 위해 복도 철제 의자에 나란히 앉았을 때, 그녀는 줄곧 내리깔고 있던 눈길을 들어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았다. 자흔의 눈길에는 온갖 미움과 질책과 원망 대신 형언할 수 없는 쓸쓸함이 아득하게 배어 있어서, 어깨를 맞대고 있었지만 마치 불러도 들을 수 없을 만큼 먼 곳에 떨어져 앉은 낯선 사람처럼 느껴졌다.
여수의 사랑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개정판 한강 지음
당황한 내가 머뭇거리며 지폐를 받아 들자 그녀는 무거운 외투를 벗어 아무렇게나 방바닥에 내던졌다. 그녀는 "아아" 하고 음울하게 가라앉아 있던 눈을 빛냈다. 마치 방금까지 꾸어온 무서운 꿈에서 깨어난 것 같은 얼굴이었다.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그녀는 나에게 말했다. 물 좀 주세요. 목말라요.
mission1. 내 몸이 먼저 반응한 문장 자흔을 보며 마음이 아팠습니다. 잠시 머물 곳이 생긴 것만으로 눈을 빛내던,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어하던, 괴로운 이에게 도움이 되어주고 싶어하던, 더 이상 외로워하지 않아도 되는 곳을 애타게 갈망하던 자흔. 그녀는 얼마나 닳아버렸길래, 미움조차 없이 그저 쓸쓸함만 남은 모습이 되었을까요. 안 그래도 마음이 아팠는데, 정선이 여수의 흔적으로부터 벗어나고자 자흔을 지독히도 자신에게서 배척하는 대목에서는 누가 숨구멍을 탁 막기라도 한 것 마냥 순간 호흡을 멈췄습니다. 처음엔 워낙 감정적으로 강렬한 장면이라 그랬다고 생각했는데요. 돌이켜보니, 어렴풋이 비슷한 기억을 발견하게 됐습니다. '이렇게 하면 되겠지', '기다리면 상황이 더 나아지겠지' 같은 기대가 매일처럼 좌절되던 기억이 말이에요. 한때 슬프고, 어떨 때는 우울하고, 가끔은 분노하는 과정을 거치다, 어느 새부터 그와 관련해 아무 기대 없이 그저 공허함만 느꼈던 기억이 납니다. 별 거 아닌 일에 느꼈던 그런 흐릿한 기억이 겹쳐지면서, '미래가 없는 것' 같은 자흔에게 감정 이입했던 것 같아요.
내가 원하는대로 다 이루어지면 참 좋겠지만 사는게 그렇지 않다보니, 결국 체념하게 되는 것 같아요. 그게 인생의 일부가 아니라 거의 전부가 되면 자흔같은 태도로 살게 되는듯하다는 생각도 드네요
'체념'하니 괴테가 떠오르네요. 괴테의 빌헬름 시리즈를 읽고 있는데, 괴테는 '체념'의 순간이 와야한다고 말했어요. 물론, 책이 청년을 주인공으로 다루다 보니 의사나 법률가, 장사꾼 등 그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방식, 즉 '직업적인 관점'에서 체념을 말했죠. 다른 관점에서는, 끝까지 체념하지 않는 태도도 상상해볼 수는 있을 것 같아요.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죽음'까지 불사하는 사람들이 역사에는 있어왔잖아요. 스토아 학파에서는 고귀한 인격? 또는 아름다움? (정확히 어떤 표현인지는 기억이..)을 유지할 수 없다면 자살도 하나의 선택지라고 말하기도 했고요. 그밖의 종교인이나 사무라이.. 등도 떠오르네요.
자흔은 그날 이후 몇 차례 나에게 말을 붙여보려 했으나 잔인하게도 나는 아무 대답도 표정도 없이 뒷모습을 보여버리는 것으로 응수햇다. 그때마다 그녀는 꺼내려던 첫마디를 더듬으며 되삼켰고, 내 정수리 깊숙이 내리꽂히는 듯한 고통스러운 한숨을 몰아쉬곤 했다.
여수의 사랑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개정판 한강 지음
mission 2. 여수, 상처인가요 구원인가요? 정선에게 여수는 본디 고통의 상징이었습니다. 어머니의 죽음(콜레라 얘기 중 기침 장면), 선착장에서 겪은 아버지의 동반자살 시도, 동생의 손을 뿌리친 자신의 더러운 손바닥, 게워낸 토사물과 찝찔한 여수 바닷물의 기억이 정선의 결벽을 형성합니다. 여수는 그녀에게 ‘거짓말 같은 젊음’, ‘스스로 기쁨을 저버렸던 저 모든 나날’을 떠올리게 하는, 여전히 끔찍한 상처의 공간입니다. 그런 공간에 어떻게 ‘사랑’이라는 단어가 연결될 수 있는지 처음에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어디를 보아도 여수는 사랑보다는 절망에 가까워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꾸 읽다 보니, 여수 뒤에는 ‘사랑’이 붙을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1. 정선은 자흔과 함께 다닐 때면 행여 차에 치이지는 않을지, 걸려 넘어지지는 않을지 한시도 방심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자흔은 정선이 구토를 하고 힘들어할 때, 마치 따뜻한 어머니의 손과 품처럼 그녀를 감싸줍니다. 한때 자신을 그토록 배척했던 사람임에도, 정선의 트라우마가 극에 달했을 때 그녀를 진정시켜 줍니다. 둘은 서로의 아픔을 완전히 공유하지는 못했지만, 각자가 지닌 상처를 애틋하게 여겼던 것처럼 보입니다. 이 관계를 떠올리며 ‘동병상련’이라는 단어가 스쳤습니다. 자신의 ‘운명’과도 같은 쓸쓸함을 견디며 마음 붙일 데 없이 떠돌아 살아온 자흔, 만성적인 신경통과 위경련에 시달리고 모든 사물에서 썩은 냄새를 맡을 정도로 트라우마에 질린 삶을 살아온 정선. 그럼에도 자흔은 괴로워하는 정선을 신경 쓰고, 정선은 자신 때문에 갈수록 시들어가는 자흔을 보며 마음 아파합니다. 2. 이런 공감, 내지는 연민이 정선을 움직이게 합니다. 사실 정선과 자흔은 여러 면에서 물과 기름처럼 정반대의 인물입니다. 자흔은 여수에 마지막 희망을 걸지만, 정선은 여수를 혐오합니다. 자취 초반 자흔은 정선을 스트레스 받게 만드는 행동들을 반복하고, 정선은 자흔에게서 여수가 겹쳐 보이자 그녀를 자신에게서 철저히 격리시키려 합니다. ‘더럽다’는 말까지 내뱉으며, 자흔을 볼 때마다 더 심해지는 결벽증을 차마 견디지 못합니다. 그러나 정선은 떠나간 자흔을 찾으러 떠납니다. 자흔의 모든 것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할지라도, 그녀가 죽지 않기를, 떠나지 않기를, 자신과 함께 있기를 바랍니다. 그곳 바다의 찝질한 냄새를 상상만 해도 토해내는 사람이, 제발로 죽음으로 덧칠된 장소를 향해 나아갑니다. 저는 이것이 '사랑'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너무 가기 싫은데. 견딜 수 없을 것만 같은데. 그럼에도 제발로 고통을 향해 나아가게 만드는 곳이기에, 여수는 절실한 사랑이 있는 장소가 아닐 수 없는 것 같습니다. * 혹시 A River Runs Through It이라는 영화를 아시나요? '낚시 영화'로도 유명한데요, 저는 이 영화의 핵심을 관통하는 명대사를 소개하고 싶습니다. We can love completely without complete understanding. (우리는 완전한 이해 없이도 완전히 사랑할 수 있다.)
와, 여수 앞바다처럼 아주 깊이 감상해주셨군요. 사랑이 붙을 수밖에 없다, 사랑이 있는 장소가 아닐 수 없다, 라는 의견에 감탄의 웃음이 새어 나왔어요. 그럴 수 있겠어요. 물도 기름을, 기름도 물을 사랑할 수 있겠어요. 가장 배타적이지만 반대로 지켜주는 존재라고도 볼 수 있겠네요. 영화도 꼭 보고싶네요. 그런데 진제님... 어쩜 이 단편을 이토록 세심하게 들여다보셨는지요!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그것은 단지 외로운 표정일 뿐이었다. 오랫동안 무엇인가를 기다려온 사람들에게서 손쉽게 발견되는 표정이기도 했다. 열차를 기다리며 승강장에 서 있는 얼굴들, 늦은 밤 버스 손잡이에 매달려 차창 밖의 휘황한 네온사인을 바라다보는 눈빛들, 출근 무렵 살갗이 터질 듯한 지하철에 올라 말없이 몸 부대끼는 사람들의 메마른 광대뼈 같은 데서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표정이었다. "기쁠 흔(欣) 자예요" 라고 뇌까리는 자흔의 목소리는 마치 그 모든 사람들의 외로움을 빻아다가 반죽해놓은 흰 떡살같이 고즈넉했다.' p14 삶과 죽음이 소슬하게 배어 있다는 한강 작가의 '흰'을 여기서도 만나네요.. 왠지 저들 속에 헛헛하게 삶을 짊어지고 있는 제 모습도 있는 것만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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