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여수의 사랑』 : 미래가 없는 자들을 위한 2026년의 시작

D-29
......오래 못 있을 것 같아요. 자흔의 마지막 독백을 들으며 나는 어렴풋한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에게는 미래가 없는 것이었다.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자흔이 지쳤다는 것. 이십몇 년이 아니라 천 년이나 이천 년쯤 온 세상을 떠돌아다닌 사람처럼 외로워하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다만 신기한 것은 때때로 자흔의 얼굴에 떠오르는 웃음이었다. 모든 것에 지쳤으나 결코 모든 것을 버리지 않은 것 같은 무고하고도 빛나는 웃음이 순간순간 거짓말처럼 그녀의 어둠을 지워내버리곤 했다. 그런 자흔을 보면서 나는 종종 어떻게 사람이 저토록 희망 없이 세상을 긍정할 수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에 의아해지곤 했던 것이었다. p34
여수의 사랑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개정판 한강 지음
고호님 문장 수집이 저와 괘를 같이 하네요. 또 좀 빌리겠습니다. ^^;; 정선의 눈으로 보았을 때 자흔은 미래가 없는 인물입니다. 어린 시절부터 버려져 전국을 떠돌며 살아왔기에, 언젠가 삶이 나아질 것이라거나 진짜 삶이 시작될 것이라는 기대에 매달리지 않습니다. 역설적이게도 기대를 놓아버린 상태 즉 희망의 부재의 상황에서, 현실의 고단함에도, 개자식들 같은 욕설 조차 부드러운 노래로 바꾸어 부를 수 있는 견고한 평화를 얻게 된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됩니다. 자흔은 고통을 지워야 할 오염으로 여기지 않고 삶의 일부로 수용합니다. 자전거 사고로 온몸에 멍이 들고 통증이 심한 상황에서도 그녀는 괜찮다며, 아프지 않다고 말하며 견뎌냅니다. 인생의 첫마디가 “너무 아파요”였던 그 아이가, 그 이후로 얼마나 일상적으로 아픔을 삼켜야 했을지를 떠올리면 마음이 저려 옵니다. 자흔은 얼굴도 모르는 어머니의 품속에 돌아와 있는 것 같은 여수의 갯벌에서 근원적인 안도감을 느낍니다. 그녀에게 여수는 실제의 고향이라기보다, 먼지나 진눈깨비가 결국 내려앉아야 할 안식처에 가까운 장소일 것입니다. 더 이상 외로울 필요가 없는 상태에 이르고자 하는 것은 하나의 실존적 결단이며, 이러한 소멸에 대한 긍정이 세상을 너그럽게 받아들이는 자흔의 태도를 설명해 줍니다. 작품 속에서 자흔은 이십 몇 년이 아니라 천 년이나 이천 년쯤 온 세상을 떠돌아다닌 사람처럼 외로워하고 있다고 묘사됩니다. 그 정도의 세월이라면 고통은 이미 달관의 경지에 이르렀을지도 모릅니다. 자흔은 상처를 치유하려 애쓰는 인물이 아니라, 이미 상처와 한 몸이 되어 살아가는 존재처럼 보입니다. 그렇기에 그녀는 고통이 지나간 결말 이후의 시간을 살고 있으며, 그래서 그토록 쉽게 무구한 웃음을 지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희망없이 세상을 긍정할 수 있는 것 어찌보면 너무 슬픈일입니다. (물론 자흔은 더이상 슬프지 않겠습니다만)
와, '소멸에 대한 긍정'이라는 표현이, 아리지만 아름답게 느껴져요. 먼지와 진눈깨비도.. 마음편히 내려앉을 수 있는 공간이라니.. 감히 <여수의 사랑>이 조금씩 입체적으로 느껴지기 시작하네요. 또, 베오님이 정리해 주신 '그녀는 고통이 지나간 결말 이후의 시간을 살고 있다, 그러니 무구한 웃음을 지을 수 있었다.'라는 말씀에 깊이 공감하면서 정선이 생각했던 '그녀에게는 미래가 없는 것이다.'라는 말이 다시 한번 콕 박히네요. 왜 그녀에게는 미래가 없는 걸까? 베오님의 생각대로라면, 자흔은 이미 '미래를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어요. '고통스러운 현재'는 이미 달관했기에(혹은 달관하기 위해) 결말 이후 즉, 미래를 이미 살고 있다.
< 유추에 도움을 얻기 위한 문장들 모음집> 1. 그 물고기들은 죽었다. 2. 이렇게 고요해질 통증인 것을, 지난밤에는, 또 수없이 반복되었던 그 밤들에는 이런 순간을 믿지 못했었다. 마치 밤이 깊을 때마다 새벽을 믿지 못하듯이, 겨울이 올 때마다 봄을 의심하듯이 나는 어리석은 절망감에 사로잡히곤 했던 것이다. 3. 조금 큰 활엽수들은 의연하게, 줄기가 여린 묘목들과 갈대숲은 송두리째 제 몸을 고통에 바치며 흔들리고 있었다. 그들도, 그들의 뿌리를 움켜 안은 대지도 놀라운 힘으로 인내하고 있었다. 4. 그러나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그것은 단지 외로운 표정일 뿐이었다. 오랫동안 무엇인가를 기다려온 사람들에게서 손쉽게 발견되는 표정이기도 했다. 5. '함께 있다' '지금 함께 있다'하고 주문처럼 외우면서 선잠에 들었다가 눈을 뜨면 그 사람은 옆에 없었지요. 당연한 일인데도 그걸 견딜 수 없었어요. 6. 모든 것에 지쳤으나 결코 모든 것을 버리지 않은 것 같은 무구하고도 빛나는 웃음이 순간순간 거짓말처럼 그녀의 어둠을 지워내버리곤 했다. 7. 개자식들, 개자식들, 개자식들...... ... 그러나 뜻밖에도 자흔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없었다. 오히려 그 얼굴에는 견고한 평화가 어른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8. 그때까지 나한테는 모든 곳이 낯선 곳이었는데, 그 순간 갑자기 가깝고 먼 모든 산과 바다가 내 고향하고 살을 맞대고 있는 거예요. 난 너무 기뻐서 바닷물에 몸을 던지고 싶을 지경이었어요. 9. 내 옆자리에 앉은 오십대 후반의 아낙은 이 객실 저 객실을 옮겨 다니며 두 좌석이 나란히 비어 있는 곳이 눈에 띄면 거기 눕는 식으로 하여 세 시간 넘게 잠을 잤다고 했다. 누운 곳마다 자리 주인들이 비켜줄 것을 요구하는 바람에 아무 데에서도 잠들 곳이 없어진 뒤에야 아낙은 비로소 자신의 자리를 찾아든 것이었다. 여태 난 편안히 잤어, 아가씨두 나 없는 새에 누워서 한숨 붙이지 그랬어?
여수의 사랑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개정판 한강 지음
mission 3. 정선의 '그 후'를 상상해 봅니다 <여기는 미션과 관련없는 잡설입니다> 소설 '이처럼 사소한 것들' 맨 뒷부분에 번역가분이 남긴 말이 있습니다. 작가님이 번역 시 한 요청의 일부라고 합니다. 그 중 이런 내용을 공유하고 싶습니다. --- 소설가 존 맥가헌은 좋은 글은 전부 암시이고 나쁜 글은 전부 진술이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이 책을 처음 읽는 독자가 이야기를 다 읽고 첫장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 도입 부분이 전체 서사의 일부로 느껴지고 이 부분에서 느껴지는 감정이 그 뒤에 이어질 내용의 특징을 잘 드러낸다고 느낄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 제가 감히 한강 작가님의 생각의 깊이와 밀도를 다 헤아리지는 못하겠지만, 작가님께서 깔아두신 복선이라거나, 암시 같은 단어와 문장들이 많은 것처럼 느껴집니다. (물론 너무 과한 넘겨짚기일 가능성도 큽니다...) 예컨대, 첫 문장부터 시작되는 여수에 대한 표현은, 이후 정선이 자신의 상처를 독자들에게 드러내는 데 거의 그대로 사용됩니다. 단어들(녹슨 철선, 상처 입은, 멍든 속살, 몸 섞으며, 찝찔한, 통곡하는, 가슴이 찢어지고 그것이 영원히 아물지 않는 것 같은, ...)도 정선의 트라우마나 자흔에 대한 묘사에 계속해서 사용되는 것 같아요. 그 외에도 - 자흔이 물고기를 사랑한 이유는 무엇일지 - 계속해서 손바닥, 손가락이 강조되어 나오는 이유는 무엇일지 - 자흔의 행동을 묘사할 때 '어머니의' 무언가를 비유로 드는 이유는 무엇일지 - 자흔이 '세상에 있는 모든 물은 바다로 흘러가고, 그 바다는 여수 앞바다하고 섞여 있어요'라고 말하며 무엇을 희망했을지 등이 뒤에 나올 줄거리를 함축하여 은연 중에 드러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여기부터 미션 내용입니다> 제가 생각할 땐 자흔과 정선이 함께 살 것만 같은데, 마냥 억지로 밀어붙일 수는 없는 노릇이니 책 속 구절을 들고와 하나씩 풀어가보려 합니다! (물론 제 생각일 뿐입니다...) 1: 물 속에 섞이고 싶어하던 자흔은 물고기를 키우는 일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녀가 키우던 물고기는 주인의 부재 후 얼마 되지 않아 모두 죽고 맙니다. 관점에 따라, 자흔은 이미 물 속에 가라앉아 죽었다는 비유일 수도 있겠고, 또는 그저 정선의 감정선을 심화시키기 위한 장치에 불과할 수도 있습니다. 2~3: 그러나 악천후의 고통 가운데서도 놀라운 힘으로 인내하는 묘목과 갈대숲처럼, 자흔과 정선이 각자의 상처들을 꾸역꾸역 견뎌내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조금 가져봅니다. '더 이상 미래는 없을 거야'라고 생각하던 과거 자신들의 모습이 되돌아보니 어리석은 절망감에 사로잡혔던 거라며, 이렇게 고요해질 통증이었다며 말입니다. 4~8: 자흔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고 싶었습니다. - 자흔은 '오랫동안 무엇인가를 기다려온' 사람인 듯합니다. - 그 무언가는 '함께 있'는 것 같습니다. '함께 있'고 싶어하고, 그러지 못해 그 외로움을 견디기 힘들어합니다. - 지금까지의 수많은 기대가 다 무너졌음에도, 자흔이 진작 생을 포기하지 않고, 여수의 바다에 몸을 던지지 않고 어떻게든 쓸쓸함을 감내하는 모습을 봅니다. 어쩌면 '모든 것에 지쳤'어도 '결코 모든 것을 버리지 않은' 상태였을 수도 있습니다. - 너무도 지쳐 희망이라 할만한 것조차 닳아 없어진, 삶과 죽음의 경계선 위에 서 있는 상태. 또 한편 그렇기에 순간의 충족감에 '어둠을 지워내버리'는 웃음을 지어낼 수도 있는 상태인 것 같습니다. 설령 그것이 옆에서 뉴스를 보고 욕을 하는 사람일지라도, 그런 사람이 나와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 '견고한 평화'를 얻었는지도 모릅니다. - 자흔이 여수 바닷물에 몸을 던지고 싶었던 이유도, 지금까지의 외로운 운명에서, '모든 곳이 낯선 곳'에서 벗어나서, 내가 머물어도 되는 '고향'의 모든 것과 함께 닿을 수 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죽고 싶은 게 아니라, 그만큼 함께하고 싶었기에 정선과 함께 살았던 것 아닐까요? - 다만, 정머리 없는 서울에 오래 못있을 것 같다고 했던 것처럼, 정선이 자신을 배척하는 모습에서 겨우내 고개 내민 기대가 꺾여버리고, 결국 여수로 가는 것만이 답이라는 결론을 내렸는지도 모릅니다. 9: 사실 오십대 아낙의 말이 저는 강한 암시가 아닌가 생각했는데요. 자흔은 여수로 가자마자 물에 몸을 던졌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소설에서 자흔의 과거와 묘하게 겹쳐보이는 '오십대 후반의 아낙'의 말이 하나의 암시라면, 자흔은 지금까지 고향에서 그저 '편안히 잤'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정선을 떠나는 것이 자흔 '없는 새에 누워서 한숨 붙이'게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을까요? === 결론적으로, 저는 자흔이 아직 살아 그 동네 아무 여관에나 잠시 신세를 지며 지내고 있고, 정선이 그런 자흔을 겨우 찾아낼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번엔 정선이 자기 이야기를 들려주고, 자흔에게 자신을 떠나지 말고 같이 지내자고 간청할 것 같습니다. 어쩌면, 자흔은 이렇게 누군가가 자신을 붙잡은 경험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자흔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함께 있을 누군가라고, 이 외롭고 지리하고 쓸쓸한 삶을 함께 해주고, 자신이 무언가 의미있는 존재가 될 수 있게 도와주는 누군가라고 한다면, 자흔은 꼭 여수가 아닐지언정 다시 둘의 자취방으로 돌아갈 것 같습니다. 애초에 여수는 자흔의 고향인지 아닌지도 불분명하니까요. 말이야 쉽지, 정선이 그 지독한 결벽과 트라우마를 이겨내는 것은 끝없는 고통의 과정일 수도 있습니다. 여수로 도착하자마자 만난 악천후나, 사라지지 않는 위경련과 신경통 같은 것이 말입니다. 그럼에도 풀뿌리가 서로 힘을 합치든, 대지와 뿌리가 힘을 합치든, 둘이 서로를 놓지 않고 버텨내지 않을까요? 삶은 고통이고 미래는 없으나 두 부서진 존재가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 줄 수 있으니까 말입니다. 삶에 대한 절망 없이는 삶에 대한 사랑도 없다했던 카뮈의 말처럼, 누구보다도 긴 절망을 겪은 둘 이기에, 그만큼 서로에게 얽매인 사랑의 뿌리로 기어코 삶을 긍정해내리라고 내심 기대해봅니다. (제발요...) (석 달 가까이 소설 속 인물을 죽이지 않으려고 하신 한강 작가님의 마음을 백만 분의 1 정도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도 이 둘을 어떻게든 살리고 싶네요...)
존 맥가헌의 좋은 글 정의에 따르면 한강 작가님의 글은 그야 말로 좋은 글의 정점이지 않나 싶습니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거의 모든 문장을 붙잡고 상징과 의미를 분석하고 싶어지는 그런 문장들입니다. 그래서 장편을 읽으면 힘이 드는 느낍입니다. 끊임없이 물길을 헤엄쳐 가야 하는 느낌이라서요. 여수의 사랑을 읽고 고민한 진제님의 흔적이 역력히 느껴지는 글이네요. 저도 위에 짧은 글을 남기긴 했지만 문장별로 남기고 싶은 말들이 많아서 자중했어야 했어요. 너무 비약적인가 싶은 자기검열도 있었고요. 글로 남긴다는 것이 그래서 힘드나봐요. 말을 나누는 독서모임이었다면 날것으로 토해내듯 정제되지 않은 생각들이 쏟아져나왔을거라는 생각을 했어요. 마지막에 둘이 서로 기대면서 같이 살아내는 것을 간절히 소망하는 진제님 마음이 너무 따뜻하게 느껴져요. 진제 님은 좋은 사람인가 봅니다.
존 맥가헌 님의 말씀이 인상적이에요. 저는 줄리언 반스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를 읽었을 때, 꼭 그런 기분을 느꼈어요. 그런데 이번 한강 작가님의 <여수의 사랑>과 다음 편인 <어둠의 사육제>를 읽을 때, 다시 한번 느꼈네요. 2-3년 전에 같은 이유로 <작별하지 않는다>를 중도 포기했던 것 같아요. 제 그릇에 비해 조금 과하게? 느껴젔던 것 같은데, 이번에 읽으면 또 어떨지 모르겠어요^^ 이 작은 단편에도 진제님이 언급하신 포인트처럼 무수한 질문들이 있을텐데, 하, 뭔가 벽돌책은 아닌데 벌써부터 무겁게 느껴지는 이유는 뭘까요.
저는 오십대 아낙의 말을 무심코 지나쳤습니다. 아마 작중에 표를 들이밀며 '나오세요 아줌마. 제자리에요.' 라고.. 무심히 외쳤을 사람이 바로 저입니다.. 그런데 그 아낙에게 자흔의 모습이 비쳤네요. 고즈넉한 웃음이나 피로함 같은 것들.. 자흔은 정말로 여수와 '함께' 죽음을 택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진제님은 새로운 결말에서 자흔을 살렸고, 정선과 '함께'하는 것으로 이 남은 생을 살아가게 하셨네요. 저도 그 결말이 참 좋네요. 해피엔딩이.. 좋습니다. 마지막으로, 자흔이 '함께 있'고 싶어하는 존재라는 진제님의 주장에 하나의 근거를 보태고 싶네요. 44p에서 자흔이 말하죠. "여수에 가보기 전까지는 그랬어요. 하루하루가 지옥이었어요." 라고. 이어서 "지금은 그렇지 않아요... 괴롭지도 않아요..." 하고 말하죠. 그리고, 정선을 불가해한 표정으로 물끄러미 바라보죠. 그때 정선의 잠든 혈관이 깨어나요. 뭔가 자흔의 고통이 비로소 '함께 있'음으로 인해 해소되는 대목 같았어요. 그러고보니 32p에서 자흔이 짝사랑했던 남자를 떠올리며 '함께 있다' '지금 함께 있다'고 주문까지 외울 정도면..ㅠㅠ
그리고, 읽으면서 궁금한 점이 하나 있었는데요. 자흔이 "여수에 가보기 전까지는 그랬어요. 하루하루가 지옥이었어요." 라고 말하잖아요. 저는 그때 속으로 '응? 그럼 계속 있지 그랬어. 왜 다시 서울로? 마치 구원자처럼...?" 하고 생각했어요. 자흔 마음 한켠에 '나와 같은 사람'이 어딘가에 있다는.. 어떤 희망을 품고 전국을 돌며.. 마지막으로.. 마지막으로.. 가장 정없는 서울에서 희망을 찾으려 했던 걸까요?
@진제 님도 같은 의문을 제기하셨죠. 저는 이 부분을 일종의 소설적 장치로 보았어요. 소제 마을에 들르게 된 상황 자체가 버스 고장이라는 설정이니, 다른 곳으로 가기로 되어 있었다는 게 현실적인 차원의 대답일 테고요. 그런데도 여기저기 떠돌던 자흔이 굳이 책임감에 묶여 떠날 필요가 있었나 하는 생각은 자연히 들죠. 그렇다고 자흔이 그냥 머물러 버리면 소설은 거기서 끝나버리거나 여수 밤바다 같은 서정적인 노래처럼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되어버리겠지요. 그렇다보니 독자들은 작가가 쥐어주지 않은 이유를 자꾸 찾게 되는 것 같아요, 지금의 우리처럼요. 소설에 뚜렷한 복선이 없으니까, 독자는 상상력을 발휘해서 흩어져 있는 상징들을 이어붙여 보게 되는 거겠죠. 저는 자흔이 그때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던 게 아닐까 싶었어요. “이 거추장스러운 몸만 벗으면 더 이상 외로울 필요가 없겠다”는 걸 깨달았지만, 아직은 그 몸을 벗을 준비가 안 된 상태였던 거죠. 그래서 기력이 다할 때까지 몸을 입고 있어야겠다고, 서울 같은 곳에서 마지막의 힘을 소진해야겠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어요. 자전거 사고가 그 시간을 앞당겼을 수도 있고요. 이쯤 되면 자흔은 언제 자신의 별 B612로 돌아가야 하는 지를 아는 어린 왕자처럼, 어디로 가야 하는지는 이미 알고 다만 때를 기다리다 떠나는 기이한 존재로 보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그래서 복선이 없었을지도 모르겠네요. 자흔의 모든 행동이 논리적으로 설명되는 순간, 그는 이해 가능한 인간이 되어버리니까요. 한강 작가님은 끝까지 자흔을 우리가 완전히 따라갈 수 없는 저 너머의 어떤 존재로 남겨두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드네요.
오.. 정말 그래요. 우리는 그녀의 '때'를 결코 알 수 없지요. 우리가 소설의 여러 복선을 통해 그녀의 서울행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면, 당연히 여수행도 예상했어야 하는데 그녀는 별안간 주인공에게 떠나지 않겠다고 약속하고는 다음 날 휙 하고 떠나버리죠. 마치 작가님이 여러분 자흔을 다 안다고 착각하지 마세요, 하고 말하는 것 같아요.
그외 좀 갸우뚱했던 내용 표현들 1. 두 살 무렵 강보에 싸여 기차에서 발견되었다는 구문 : 보통 강보는 태어난지 몇 달 안되는 갓난 아기를 싸는 것이지요. 두살이면 거의 뛰어다닐 시기인데 강보에 싸여서 발견되었다고 해서 .. 의아했더랍니다. 차라리 두어달 무렵이라고 했다면 여러 면에서 더 이치에 맞았을 것 같아요. 2. 늘어난 테이프의 가수가 테너라는 점 : 하바네라는 여성 소프라노인데 테너라고해서.. 아침마다 채찍처럼 자흔의 허리를 내리치던 곡이 아닌 다른 곡이라고? 그 테이프 안에 여러 곡이 있는데 그 중 테너의 다른 곡도 같이 있었나? 그렇다고 해도 갑자기 왜 테너 목소리라고 콕 집어 말했을까? 아니면 메조 소프라노의 여성 목소리가 테이프가 늘어져서 테너 같이 들렸었나? ㅎㅎㅎ 이런저런 망상을 하게 했던 대목입니다.
@베오 헉! 생각해보면 2살 애기가 강보에 과연 얌전히 싸여줄까 싶내요.. 생각도 못했습니다. 노래에 대해서는 저도 갸우뚱한 게 있었어요. 소설에 적혀있는 노래 제목으로 검색한 노랫말에는 '그대여 내게 와달라'는 식의 내용으로 해석될만한 부분이 안 보이더라고요. 또 남자 테너가 아니라 카운터테너거나 여자 소프라노 노래인 거 같은데, 이 노래가 정녕 그 노래가 맞나? 싶어 의아했었습니다. 혹시 잘 아시는 분이 계실까요...?
@진제 역자가 없는 소설에 주석이 달려 있으면 원작자가 주석을 달았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야겠죠, 그러니 카르멘의 하바네라가 맞을 겁니다. 딱 그대여 내게 와달라라는 일대일 문구는 없지만 카르멘이 유혹하는 노래니까 그렇게 해석해도 큰 무리는 없을 것 같습니다만.. 그냥 카르멘이 담긴 테이프니까 테너곡도 있었겠지 라고 넘어가려고요.ㅎㅎ https://youtu.be/BXqMAe4H8Pw?si=5D3xKLQShLoKXcKd
해당 노래 가사는 앞서 32p에서 짝사랑하는 남자가 읽었던 '시'와 연결되는 것 같은데요. 근데 책에 테너라고 되있나요? 저는 못찾았어요.
오늘 여수의 사랑을 모두 읽었는데요, 혼자라면 끝까지 읽지 못했을 것 같아요. 물론 한강 작가님 너무 좋아합니다. 그...그런데 소설 속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어둠이 감당하기 힘드네요 ㅠㅠ 그믐에서 함께 읽어서 다행입니다 :) mission 1. 내 몸이 먼저 반응한 문장 여수, 그 앞바다의 녹슨 철선들은 지금도 상처 입은 목소리로 울부짖어대고 있을 것이다. 여수만의 서늘한 해류는 멍든 속살 같은 푸릇푸릇한 섬들과 몸 섞으며 굽이돌고 있을 것이다. 저무는 선착장마다 주황빛 알전구들이 밝혀질 것이다. 부두 가건물 사이로 검붉은 노을이 불타오를 것이다. 찝찔한 바닷바람은 격렬하게 우산을 까뒤집고 여자들의 치마를, 머리카락을 허공으로 솟구치게 할 것이다.(p.9) 한동안 소설의 첫 문장을 수집했을 정도로 소설의 첫 문장들을 좋아합니다!ㅎㅎ <여수의 사랑>의 첫 문장을 읽으며 어둡고 슬픈 소설이겠구나 예상했는데 이 정도였을 줄은...! 아무튼 <여수의 사랑>을 다 읽고 나서도 다시 한번 읽어본 것은 바로 첫 문장이에요. 축축하고, 어둡고... 그래도 아름답습니다! :) mission 2. 여수, 상처인가요 구원인가요? 상처로 기억되는 곳이지만 동시에 구원이기도 한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린 정선이 그곳에서 평생 잊을 수 없는 큰 상처를 얻었지만, 끝내 회피하지 않고 여수를 향하니까. mission 3. 정선의 '그 후'를 상상해 봅니다 p.61에서 정선이 지인들에게 연락을 하지만 닿지 못하고 '이제 이곳에서 내가 할 일은 남아 있지 않았다'라고 하는데 뭔가... 마지막으로 신변정리를 한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음.. 그곳에서 자흔은 찾지 못할 것 같고요, 아마 바다에 몸을 던지지 않을까 하고 저만의 결말을 써봅니다. 하지만 '죽음'이라는 게 끝이기만 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너무 시끄러운 고독>에서 한탸가 자신이 사랑해온 책들을 압축하는 압축기에 몸을 우겨넣었던 것처럼, 자신의 트라우마를 회피하지 않고 여수로 향하는 것 역시 상처의 근원으로 들어가겠다는, 정선 나름의 치열한 투쟁이라고 생각합니다.
깊어도 너무 깊지요. 다 읽어보니, 첫 문장에 정선의 죄책감이 강하게 배어있어서 놀랐어요. 결국, 죄책감을 둘러싼 참 고단했던 여정이었구나, 싶어요. 자흔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평생 죄책감을 가리고 지우려고 힘든 삶을 살았을텐데.. 자흔을 만나 참 다행이에요. 그런데 죄책감의 결말이 플라뇌르님 말대로 '죽음'이라면, 그 이유가 어찌됐든 저는 마음이 좀 아프네요ㅠㅠ <너무 시끄러운 고독>은 읽어보질 못했는데.. 내용이 파격이에요!
단 한 순간이라도 그 사람이 보고 싶어서, 한마디라도 목소리를 듣고 싶어서 나는 불을 켜고 서가를 서성거렸어요. 아무 책이라도 붙들고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활자들을 읽고, 또 읽고······
여수의 사랑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개정판 한강 지음
자흔의 스치듯 짧은 사랑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보고 싶어서 읽히지도 않는 책들을 읽고 또 읽는 모습이 아련하고 아득합니다
그러네요. 다시보니 더 인상적이에요. 20대 한강 작가님의 사랑 방식인가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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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수를 세는 책 읽기ㅡ2026. 2월] '이월되지 않는 엄마 ' [날 수를 세는 책 읽기ㅡ2026. 1월] '시쓰기 딱 좋은 날'
마음껏 상상해요! 새로운 나라!
[그믐밤] 44. <걸리버 여행기> 출간 300주년, 새로운 세상 상상하기
계속계속 책읽기 by Kiara
2024.01.19. <콜카타의 세 사람> 메가 마줌다르2024.01.17. <참 괜찮은 눈이 온다 _ 나의 살던 골목에는> 한지혜2024.01.16. <이 별이 마음에 들어> 김하율2024.01.14. <각자 도사 사회> 송병기2026.01.01. <아무튼, 데모> 정보라2026.01.02. <버드 캐칭>
한 권의 책이 한 인간과 한 사회를 변화시킨다
[한길사 - 김명호 - 중국인 이야기 읽기] 제 1권[도서 증정] 1,096쪽 『비잔티움 문명』 편집자와 함께 완독해요[도서 증정] 소설『금지된 일기장』 새해부터 일기 쓰며 함께 읽어요!
경계를 넘나드는 이야기꾼, 정보라
[책방연희 북클럽] 정보라, 최의택 작가와 함께 <이렇게 된 이상 포항으로 간다> 읽기[박소해의 장르살롱] 5. 고통에 관하여 [책 증정] <지구 생물체는 항복하라> 읽고 나누는 Beyond Bookclub 2기
도스토옙스키와 함께 하기
도스토옙스키와 29일을[그믐밤] 5. 근방에 작가가 너무 많사오니, 읽기에서 쓰기로 @수북강녕
함께 읽은 논어 vs 혼자 읽은 논어
[벽돌책 독파] 주자와 다산의 대결 <두 개의 논어> 편집자와 함께 읽기 《논어》 혼자 읽기
🎁 여러분의 활발한 독서 생활을 응원하며 그믐이 선물을 드려요.
[인생책 5문 5답] , [싱글 챌린지] 완수자에게 선물을 드립니다
<코스모스>를 읽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
코스모스, 이제는 읽을 때가 되었다!2026년 새해 첫 책은 코스모스! 코스모스, 이제는 읽을 때가 되었다![인생 과학책] '코스모스'를 완독할 수 있을까?
희곡 함께 읽을 친구, 당근에선 못 찾았지만 그믐에는 있다!
플레이플레이땡땡땡
김규식의 시대
[책걸상 '벽돌 책' 함께 읽기] #31. <김규식과 그의 시대> (1)[책걸상 '벽돌 책' 함께 읽기] #20. <3월 1일의 밤>
소설로 읽는 인류세
[소설로 읽는 기후위기・인류세 - 우리는 왜·어떤 다른 세상을 꿈꾸는가?] 1회차-마션[소설로 기후위기/인류세 읽기] 『야성의 부름』 잭 런던, 1903.
브랜드는 소비자의 마음속에 심는 작은 씨앗
[루멘렉투라/도서 증정] 나의 첫, 브랜딩 레슨 - 내 브랜드를 만들어보아요.스토리 탐험단 세번째 여정 '히트 메이커스' 함께 읽어요![김영사/책증정] 일과 나 사이에 바로 서는 법 《그대, 스스로를 고용하라》 함께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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