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제 님도 같은 의문을 제기하셨죠.
저는 이 부분을 일종의 소설적 장치로 보았어요. 소제 마을에 들르게 된 상황 자체가 버스 고장이라는 설정이니, 다른 곳으로 가기로 되어 있었다는 게 현실적인 차원의 대답일 테고요.
그런데도 여기저기 떠돌던 자흔이 굳이 책임감에 묶여 떠날 필요가 있었나 하는 생각은 자연히 들죠. 그렇다고 자흔이 그냥 머물러 버리면 소설은 거기서 끝나버리거나 여수 밤바다 같은 서정적인 노래처럼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되어버리겠지요.
그렇다보니 독자들은 작가가 쥐어주지 않은 이유를 자꾸 찾게 되는 것 같아요, 지금의 우리처럼요. 소설에 뚜렷한 복선이 없으니까, 독자는 상상력을 발휘해서 흩어져 있는 상징들을 이어붙여 보게 되는 거겠죠.
저는 자흔이 그때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던 게 아닐까 싶었어요. “이 거추장스러운 몸만 벗으면 더 이상 외로울 필요가 없겠다”는 걸 깨달았지만, 아직은 그 몸을 벗을 준비가 안 된 상태였던 거죠. 그래서 기력이 다할 때까지 몸을 입고 있어야겠다고, 서울 같은 곳에서 마지막의 힘을 소진해야겠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어요. 자전거 사고가 그 시간을 앞당겼을 수도 있고요.
이쯤 되면 자흔은 언제 자신의 별 B612로 돌아가야 하는 지를 아는 어린 왕자처럼, 어디로 가야 하는지는 이미 알고 다만 때를 기다리다 떠나는 기이한 존재로 보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그래서 복선이 없었을지도 모르겠네요. 자흔의 모든 행동이 논리적으로 설명되는 순간, 그는 이해 가능한 인간이 되어버리니까요. 한강 작가님은 끝까지 자흔을 우리가 완전히 따라갈 수 없는 저 너머의 어떤 존재로 남겨두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드네요.
한강, 『여수의 사랑』 : 미래가 없는 자들을 위한 2026년의 시작
D-29

베오
내로
오.. 정말 그래요. 우리는 그녀의 '때'를 결코 알 수 없지요. 우리가 소설의 여러 복선을 통해 그녀의 서울행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면, 당연히 여수행도 예상했어야 하는데 그녀는 별안간 주인공에게 떠나지 않겠다고 약속하고는 다음 날 휙 하고 떠나버리죠. 마치 작가님이 여러분 자흔을 다 안다고 착각하지 마세요, 하고 말하는 것 같아요.

베오
그외 좀 갸우뚱했던 내용 표현들
1. 두 살 무렵 강보에 싸여 기차에서 발견되었다는 구문 : 보통 강보는 태어난지 몇 달 안되는 갓난 아기를 싸는 것이지요. 두살이면 거의 뛰어다닐 시기인데 강보에 싸여서 발견되었다고 해서 .. 의아했더랍니다. 차라리 두어달 무렵이라고 했다면 여러 면에서 더 이치에 맞았을 것 같아요.
2. 늘어난 테이프의 가수가 테너라는 점 : 하바네라는 여성 소프라노인데 테너라고해서.. 아침마다 채찍처럼 자흔의 허리를 내리치던 곡이 아닌 다른 곡이라고? 그 테이프 안에 여러 곡이 있는데 그 중 테너의 다른 곡도 같이 있었나? 그렇다고 해도 갑자기 왜 테너 목소리라고 콕 집어 말했을까? 아니면 메조 소프라노의 여성 목소리가 테이프가 늘어져서 테너 같이 들렸었나? ㅎㅎㅎ 이런저런 망상을 하게 했던 대목입니다.
진제
@베오 헉! 생각해보면 2살 애기가 강보에 과연 얌전히 싸여줄까 싶내요.. 생각도 못했습니다.
노래에 대해서는 저도 갸우뚱한 게 있었어요. 소설에 적혀있는 노래 제목으로 검색한 노랫말에는 '그대여 내게 와달라'는 식의 내용으로 해석될만한 부분이 안 보이더라고요. 또 남자 테너가 아니라 카운터테너거나 여자 소프라노 노래인 거 같은데, 이 노래가 정녕 그 노래가 맞나? 싶어 의아했었습니다. 혹시 잘 아시는 분이 계실까요...?

베오
@진제 역자가 없는 소설에 주석이 달려 있으면 원작자가 주석을 달았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야겠죠, 그러니 카르멘의 하바네라가 맞을 겁니다. 딱 그대여 내게 와달라라는 일대일 문구는 없지만 카르멘이 유혹하는 노래니까 그렇게 해석해도 큰 무리는 없을 것 같습니다만.. 그냥 카르멘이 담긴 테이프니까 테너곡도 있었겠지 라고 넘어가려고요.ㅎㅎ
https://youtu.be/BXqMAe4H8Pw?si=5D3xKLQShLoKXcKd
내로
해당 노래 가사는 앞서 32p에서 짝사랑하는 남자가 읽었던 '시'와 연결되는 것 같은데요. 근데 책에 테너라고 되있나요? 저는 못찾았어요.
플라뇌르
오늘 여수의 사랑을 모두 읽었는데요, 혼자라면 끝까지 읽지 못했을 것 같아요. 물론 한강 작가님 너무 좋아합니다. 그...그런데 소설 속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어둠이 감당하기 힘드네요 ㅠㅠ 그믐에서 함께 읽어서 다행입니다 :)
mission 1. 내 몸이 먼저 반응한 문장
여수, 그 앞바다의 녹슨 철선들은 지금도 상처 입은 목소리로 울부짖어대고 있을 것이다. 여수만의 서늘한 해류는 멍든 속살 같은 푸릇푸릇한 섬들과 몸 섞으며 굽이돌고 있을 것이다. 저무는 선착장마다 주황빛 알전구들이 밝혀질 것이다. 부두 가건물 사이로 검붉은 노을이 불타오를 것이다. 찝찔한 바닷바람은 격렬하게 우산을 까뒤집고 여자들의 치마를, 머리카락을 허공으로 솟구치게 할 것이다.(p.9)
한동안 소설의 첫 문장을 수집했을 정도로 소설의 첫 문장들을 좋아합니다!ㅎㅎ <여수의 사랑>의 첫 문장을 읽으며 어둡고 슬픈 소설이겠구나 예상했는데 이 정도였을 줄은...! 아무튼 <여수의 사랑>을 다 읽고 나서도 다시 한번 읽어본 것은 바로 첫 문장이에요. 축축하고, 어둡고... 그래도 아름답습니다! :)
mission 2. 여수, 상처인가요 구원인가요?
상처로 기억되는 곳이지만 동시에 구원이기도 한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린 정선이 그곳에서 평생 잊을 수 없는 큰 상처를 얻었지만, 끝내 회피하지 않고 여수를 향하니까.
mission 3. 정선의 '그 후'를 상상해 봅니다
p.61에서 정선이 지인들에게 연락을 하지만 닿지 못하고 '이제 이곳에서 내가 할 일은 남아 있지 않았다'라고 하는데 뭔가... 마지막으로 신변정리를 한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음.. 그곳에서 자흔은 찾지 못할 것 같고요, 아마 바다에 몸을 던지지 않을까 하고 저만의 결말을 써봅니다. 하지만 '죽음'이라는 게 끝이기만 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너무 시끄러운 고독>에서 한탸가 자신이 사랑해온 책들을 압축하는 압축기에 몸을 우겨넣었던 것처럼, 자신의 트라우마를 회피하지 않고 여수로 향하는 것 역시 상처의 근원으로 들어가겠다는, 정선 나름의 치열한 투쟁이라고 생각합니다.
내로
깊어도 너무 깊지요. 다 읽어보니, 첫 문장에 정선의 죄책감이 강하게 배어있어서 놀랐어요. 결국, 죄책감을 둘러싼 참 고단 했던 여정이었구나, 싶어요. 자흔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평생 죄책감을 가리고 지우려고 힘든 삶을 살았을텐데.. 자흔을 만나 참 다행이에요.
그런데 죄책감의 결말이 플라뇌르님 말대로 '죽음'이라면, 그 이유가 어찌됐든 저는 마음이 좀 아프네요ㅠㅠ <너무 시끄러운 고독>은 읽어보질 못했는데.. 내용이 파격이에요!

반달
“ 단 한 순간이라도 그 사람이 보고 싶어서, 한마디라도 목소리를 듣고 싶어서 나는 불을 켜고 서가를 서성거렸어요. 아무 책이라도 붙들고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활자들을 읽고, 또 읽고······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