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여수의 사랑』 : 미래가 없는 자들을 위한 2026년의 시작

D-29
그러나 무엇보다도, 더위와 눈병과 콜레라보다도 나를 괴롭혔던 것은 자흔에게서 풍겨오기 시작한 여수의 냄새였다. p47
여수의 사랑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개정판 한강 지음
......여수 앞바다의 해안을 따라 한없이 동쪽으로 가면 소제라는 이름의 시골 마을이 있어요. 길 여기저기에 소들이 쟁반만 한 똥을 갈겨놓은 진짜 시골이었어요. 뒷짐 진 손으로 염소를 끌고 다니는 백발 성성한 노인도 보고, 하얗고 누런 머릿수건을 동치고 탈곡하는 아낙네들, 그 옆에서 일을 거드는 상고머리 소년들도 보고...... 그렇게 한없이 올라가니까 논이 끝나는 곳에 착하고 둥글둥글하게 생긴 무덤 몇 개가 비석도 없이 길가에 돋아 있었어요. p56
여수의 사랑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개정판 한강 지음
자흔..이 이곳에서 마음을 쉬며 정착했으면 어땠을까.. 자흔..은 왜 어머니 품속 같은 그곳에 머물지 않고 떠나왔을까.. 자흔..이 정선..에게 과거의 고통을 마주하고 딛고 나아가게 하는 길이었기 때문일까요..
이미 제가 한 고민을 앞서 해주셨었네요. 저는 @베오 님이 설명해주신 '소설적 장치'라는 설명이 가장 그럴듯 하게 받아들여졌어요. 저에게는 영웅 서사에서 위대한 스승을 만나는 것처럼 주인공에게 꼭 필요한 "운명적인 만남"과 같은 것, 말이에요.
저 정다운 하늘, 바람, 땅, 물과 섞이면 그만이었어요, ......이 거추장스러운 몸만 벗으면 나는 더 이상 외로울 필요가 없겠지요, 더 이상 나일 필요도 없으니까요...... 내 외로운 운명이 그렇게 찬란하게 끝날 거라는 것이 얼마나 기뻤는지, 얼마나 큰 소리로 그 기쁨을 외치고 싶었는지, 난 그때 갯바닥을 뒹굴면서 마구 몸에 상처를 냈어요. 더운 피를 흘려 개펄에 섞고 싶었어요. 나를 낳은 땅의 흙이 내 상처 난 혈관 속으로 스며들어 오게 하고 싶었어요...... p57
여수의 사랑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개정판 한강 지음
'스물다섯 살의 나이로 세상을 등진 어린 어머니의 아련한 품속처럼, 수천수만의 물고기 비늘들이 떠올라 빛나는 것 같던 봄날의 여수 앞바다처럼 자흔의 가슴은 다사롭고 포근하였다.' p62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하루가 시작될 때마다.. 길을 잃은 기분으로 살아가는 그 깊은 외로움은.. 여수.. 가족을 삼킨 곳.. 나를 삼킨 곳.. 토악질로 고통을 마주해야 하는 곳..이라 할지라도.. 내면의 안식을 기대고 싶은 곳이었나 봅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물은 바다로 흘러가고, 그 바다는 여수 앞바다하고 섞여 있어요.' p28 자흔..이.. 소제 마을의 완만한 능선에서 지는 해와 함께.. 무해한 웃음으로 정선..을 맞이해주면 좋겠다 생각했습니다.. 흰 떡살같이 고즈넉한 외로움을 그러안고 살더라도.. 서로 무해하게 기댈 수 있는 존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여수의 사랑..은 그런 사랑이 아닐까 싶어요.. 고통.. 슬픔.. 외로움..이 모두 섞여 있지만 무해한 모습으로 위로를 건네는.. 진눈깨비를 따뜻한 온기로 품듯이..
덕분에 진눈깨비에 대한 이해를 넓힐 수 있었습니다. 제가 꼭 바라는 결말 같아서 마음이 애잔하지만 따뜻해지네요. 말씀하신 내용들이 이미지로도 그려지는 것 같아요.
저는 '자흔' 이라는 이름이.. 자흔.. 自痕.. 이렇게 다가왔었습니다.. '정선' 자신의 상처의 흔적.. 그 부스러진 흔적이 진눈깨비로 내리지만.. 결국에는 바다의 온기를 머금지요..
그녀의 머릿속에 무엇이 스쳐 가고 있는지 나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그녀의 지치고 외로운 얼굴에 여수(麗水)가 아닌 여수(旅愁)가 어두운 그림자를 끌고 지나가는 것을 나는 보았다.
여수의 사랑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개정판 한강 지음
mission 1. 내 몸이 먼저 반응한 문장 짧지만 깊이 있는 글이라서 그런지 미션에 대한 답이 쉽게 떠오르지 않아서, 생각을 조금 내려놓고 단순하게 접근해 답을 남겨봅니다 ㅎㅎ.. 이 문장은 가장 먼저 언어를 다루는 방식에서 눈길이 갔습니다. 한 번 읽는 것으로 내용의 깊이를 다 헤아리고 제 생각을 정리하기 힘들 것 같아 여러 번 다시 보았는데, 그때마다 이 문장이 눈에 밟히더라고요. 여수를 麗水와 旅愁로 나누어 쓰면서, 장소의 이름이 자연스럽게 감정의 상태로 바뀌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 그 이유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 문장이 특히 마음에 남았던 이유는 자흔과 마주하고 있는 정선, 둘 사이의 미묘한 거리감이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정선이 (애써)느끼려는 거리감일 것 같네요. 정선은 자흔에게 늘 선을 그어버렸지만, 자흔의 얼굴 위로 지나가는 피로와 외로움만큼은 또렷하게 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문장이 정선이 끝까지 거리를 유지하려 하면서도 결국 스쳐 지나가는 자흔의 감정을 보게 되는 순간처럼 읽혀서 마음이 갔던 것 같습니다.
mission 2. 여수, 상처인가요 구원인가요? 제가 생각하기엔 여수는 따뜻한 사랑이 기다리는 장소라기보다는 정선이 더 이상 외면할 수 없게 된 마음의 방향/행선지에 가깝다고 봅니다. 정선은 소설 내내 자신을 지키기 위해 철저하게 거리를 유지해 온 사람입니다. 그런 정선이 굳이 여수로 향한다는 것은 상처가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움직이기로 했다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여수는 자신이 아프다는 사실을 확인하러 가는 장소에 가깝다고 느꼈습니다. ‘여수의 사랑’ 역시 안전하거나 다정한 사랑이 아니라 도망치지 않고 감정의 무게를 감당하려는 태도를 가리키는 말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굳이 하나를 고르자면 상처에 가깝겠지만, 구원에 살포시 맞닿아있는 상처.. 정도라고 생각합니다. ㅎㅎ..
도망치지 않고 감정의 무게를 감당하려는 태도 넘 멋진 표현이네요 ♥️
문장 수집해주신 내용의 해석도 그렇고, 주인공의 '거리를 두는 방식'으로 이렇게 작품을 해석하니 또 새롭게 보이네요. 아프다는 사실을 확인하러 가는 장소에 가깝다는 표현이, 안타깝지만 수긍하게 돼요. 결벽으로 모든 것을 가리려고 했지만 결국 자신과 남을 힘들게 할 뿐이고.. 무엇보다 욕지기는 끝까지 남아 고통을 주었죠. 토해낼 것도 없을텐데, 뭔가를 토해내야 하는 정선의 입장에서 힘들었을 것 같아요. 아마 정선이 여수에 도착해 가장 먼저 한 일은 지금도 상처 입은 목소리로 울부짖어대고 있을 여수 앞바다의 녹슨 철선들을 향해 미안하다고, 너무 늦게왔다고 통곡하는 일이었을 것 같아요.
mission 3. 정선의 ‘그 후’를 상상해 봅니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저는 정선의 삶이 그 이후로도 크게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수에 간다고 해서 곧바로 무언가가 해결되거나, 새로운 삶이 시작되지는 않았을 테니까요.. 그렇지만 정선이 여수에 잠시동안은 머물렀을 가능성이 높다고 느꼈습니다. 그 곳에서 자흔을 다시 만났을 수도 있고 만나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그 만남 여부가 정선의 미래에 아주 큰 영향을 주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결국 정선에게 중요한 것은 여수에서 누군가를 '다시 만났는지'가 아니라 더 이상 예전처럼 '완전히 모른 척할 수는 없게 되었다'는 점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정선이 머지않아 다시 서울로 돌아갔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이전과 같은 마음으로 돌아오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여전히 조심스럽고 쉽게 마음을 열지는 못하지만, 자신이 피하고 있는 감정이 무엇인지는 예전보다 조금 더 분명히 알고 있는 사람으로 왔을 것이라는 것. 이것 하나는 명확히 제가 그린 정선의 미래에 보입니다. 정선의 미래가 마냥 동화처럼 밝다고 말하기도 그렇다고 완전히 절망적이라고 말하기도 어렵지만, 적어도 이 단편의 끝에서 정선은 아프지 않기 위해 살아가던 방식에서, 아플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 상태에 도달한 인물처럼 보였습니다. 그 정도의 변화가 가장 현실적인 ‘미래’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JIN 님의 시각화 능력이,, 대단히 날카롭고 무섭게 느껴집니다 ㅎㅎ 정말 그럴 것 같아서요. 반대로 '완전히 모를 척할 수는 없게 되었다.'라는 표현에서는 무라카미 하루키 특유의 넘겨짚어 말하지만 굳이 설명하지 않는 신비함이 드러나네요. 저런 표현들 때문에 제가 하루키를 놓치 못하나 봅니다. 표현하신 말들 대부분이 인상 깊지만, '자신이 피하고 있는 감정이 무엇인지는 예전보다 조금 더 분명히 알고 있는 사람으로 왔을 것.' 이라는 문장이 콕 와닿네요. 오늘도 산책하면서 회피나 후회가 인간에게 끼치는 영향에 대해 생각해봐서 그런 것 같아요. 잘 읽었습니다.
여수의 사랑을 지나 질주, 어둠의 사육제를 읽는 중입니다. 소재가 슬픈 것은 맞지만, 주인공들이 그리 나약하지 않아 사는게 힘들지언정 슬프다는 느낌은 많이 들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생각보다 정신적, 육체적으로)폭력의 강도가 상당히 크다는 점이 미처 예상하지 못한 점입니다.
아! 질주가 2번째로 나온 여수의 사랑 <초판>을 읽고 계시군요. 개정판에서는 순서가 조금 바뀌었습니다. (첨부 사진 참고) 괜찮으시면 아래 일정대로 함께 읽어나갔으면 좋겠습니다^^ 📖 함께 읽기 일정 한강 작가가 배치한 호흡 그대로, 3~5일에 단편 한 편씩 깊게 읽습니다. - 1.10(토)~1.13(화): 여수의 사랑 - 1.14(수)~1.18(일): 어둠의 사육제 - 1.19(월)~1.22(목): 야간열차 - 1.23(금)~1.25(일): 질주 - 1.26(월)~1.28(수): 진달래 능선 - 1.29(목)~1.31(토): 붉은 닻 & 마무리
mission 1. "...... 그 책의 첫 구절은 아직도 기억나요. 사랑이여, 그대는 내 영혼이 애타게 갈망하는 모든 것...... " p 32. 이 문장을 통해 제목 '여수의 사랑'에서의 '사랑'이 어떤 의미로 사용됐는지 알 수 있습니다. 자흔이 마음에 품던 대학생이 사실 다른 여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상황에서 등장하는데, 자흔의 대학생을 향한 사랑이 어떠한 것인지 드러내어 줍니다. 이와 더불어 자흔은 여수에 대한 엄청난 사랑을 갖고 있습니다. 영혼이 애타게 갈망하는 듯한 여수, 고향에 대한 향수를 보여줍니다. "난 그때 갯바닥을 뒹굴면서 마구 몸에 상처를 냈어요. 더운 피를 흘려 개펄에 섞고 싶었어요. 나를 낳은 당의 흙이 내 상처 난 혈관 속으로 스며들어 오게 하고 싶었어요." p. 57 위 문장처럼 자흔은 여수에 대한 사랑을 가감없이 드러냅니다. 위 문장들은 제게 있어서, 나는 영혼이 갈망하는 정도의 사랑을 했던 적이 있는가? 와 같은 질문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무의식 속의 사랑 속의 외로움을 자극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mission 2. 정선은 결벽증 증상이 심해져 자흔을 떠나보내게 된 후, 홀로 남은 집에서 자흔이, 자흔의 여수가 자신의 뼛속으로 스며들었다고 느낍니다. 이후, 정선은 여수로 떠나게 됩니다. 정선이 결벽증 환자라는 점을 고려해보면, 여수는 본인에게 뭍은 더러운 것입니다. 실제로도 트라우마의 원천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정선은 청소를 하기로 마음먹은 것 같습니다. 정선은 손이 더러우면 손이 아플때까지 손을 씻습니다. 이처럼 정선은 여수에서 트라우마를 상기하게 되는 고통을 느낄 것입니다. 하지만, 자흔이 뼛속에 있기에, 여수의 상처를 걷어내면 여수의 사랑이 드러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결국 상처를 확인하는 고통의 장소이지만, 그 고통이 구원으로 승화되는 장소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mission 3. 위에서 언급했듯이, 정선은 여수를 찬찬히 둘러보며 어린시절의 기억을 하나하나 떠올릴 것 같습니다. 떠올린다라는 단어로는 부족하고, 과거 경험을 다시 체험하는 수준의 여정이 될 듯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자흔은 여수에서 재등장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후, 서울이든 어딘가에서, 여수에서 상처를 치유받고 구원받은 정선과, 여수에서 어린시절의 공허함을 채움받은 자흔이 다시 만나 지갑을 도둑맞아 못봤었던 영화를 다시 보게 된다면 참 좋을 것 같습니다.
아.. 결벽의 완성이군요...! 자흔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구원. 말씀하신 대로 함께 영화를 보고, 맛있는 것을 먹으며 하루를 지내는 소소한 일상이 정선에게 가능해졌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영혼이 갈망하는 정도의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57p에서 표시한 사랑이 과연 그러한 사랑이라면... 하.. 정말 그게 사랑일까 싶기도 하네요. 저는 다른 사람과 섞이는 방식이 아니라 서로가 구별된 존재로 존중하고 수용하는 방식이 사랑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사춘기 때에는 좀 달랐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음, 기억이 나진 않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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