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여수의 사랑』 : 미래가 없는 자들을 위한 2026년의 시작

D-29
[1번 질문] 저는 워낙 유리멘탈이라... 미래가 없는 것 같은 기분을 확 풀어내는 좋은 방법을 아직 모릅니다. 우울이 심하지 않을 때는 한숨 자면서 뇌를 초기화시킵니다. 기분이 한결 낫습니다. 그 상황에서 잠시 떨어져 관조할 수 있어 좋습니다. 슬픔이 심할 때는 인간에게 주어진 커다란 축복, 망각을 기다립니다. 다만 그 선물이 도착할 때까지 버텨야하니, 미친 듯이 청소하기도 하고, 워커홀릭마냥 일정표를 온갖 스케줄로 가득 채우기도 했네요. 침대에서 한 발자국도 안 나온 적도 있었고요. 평소 안 보는 유튜브에 확 빠져버리기도 하고, 혼자 명상의 시간을 가지기도 합니다. 망각이 나를 찾아올 때까지, 우울함이 나를 집어삼키지 못하게 달음박질하는 기분이었던 저를 발견합니다. 요새는 달리기에 어떻게든 발 붙여보려고 노력하는 중인데, 숨 쉬는 거랑 몸을 움직이는 일에만 집중하다보니 확실히 몸 건강에 정신건강까지 좋더라고요. 한때 내 인생의 모든 것을 망가뜨릴 것만 같았던 순간들도 이제는 흐릿하게 남아, 덜 아플 수 있는 지금이 참 감사합니다. 돌이켜보면 그토록이나 괴로워하지 않아도 됐을 것을, 그 고통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거라고 비관하지 말 것을... 하는 생각도 듭니다.
덜 아플 수 있는 지금이 참 감사하다는 사실은, 아파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이에요. 그죠? 저는 단순한 고름이었는데.. 쉽게 짜면 해결될 것을 왜 그리 오래 묵혀두었는지 후회가 되었던 적도 있어요. 그래서 그런지, 지금은 지금 이 순간에 무엇이 옳은 선택인지 집중하려고 애쓰고 있어요. 그러기 위해 '맑은 컨디션'을 만드는 나만의 루틴이 필요한 것 같아요. 진제님의 시행착오가 애잔하면서 아름답고 멋지게 느껴지네요.
[2번 질문] a)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겉으론 멀쩡해보여도, 누구나 '진규'같은 아픔을 하나씩은 가슴에 묻고 사는 거 같아요. 자꾸만 진규 어머니 뱃속의 혹이 갓난아이의 머리의 심상으로 표현되는 걸 봤는데, 진규 어머니께선 그것이 자신을 죽이는 혹임에도 후회와 슬픔 때문에 '다시 진규를 낳고 싶다'는 표현을 쓰며 수술을 거부하신 건 아닐까 싶습니다. 그 감정을 무어라 표현해야 할진 모르겠지만, 인규는 '동병상련'하기에 어머니를 향해 달려갔다고 생각해요. b) 껍질이 깨지는 순간, 여전히 그 시절에 머물러있던 어린 인규가 드디어 세상을 향해 고개 내밀지 않았을 조심스레 추측해봅니다. 그래서 어린 시절에 못한 원망을 이제서야 쏟아낼 거 같습니다. 왜 그랬어. 왜 진규를 그렇게 대강 묻었어. 왜 진규를 잊자고 한 거야. 왜... 왜 그랬어... 육중한 원망을 밖으로 내보내지 않고 버티던 댐에 꽤나 큰 균열이 생겼습니다. 틈이 벌어지고 사이로 참아왔던 울분이 콸콸 쏟아지면, 충분히 빠질 때까지 비워내고 나면, 그제야 화해하지 않을까요. 어머니도 힘들어하셨구나. 나만 그런 게 아니었어. 그동안 내색하지 않으셨던 것뿐이었구나... 하고 안아주지 않을까요?
혹과 진규를 대응시킨 거라면, 놀랍도록 치명적인 설정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얼마 전 제 아내도 자궁내막종 수술을 했어요. 수술이야 워낙 기술이 발전했다보니 잘 진행되었지만 마취가 깨고 회복하는 그 3시간 남짓한 시간들 속에서 추워하고 고통스러워하는, 마취약을 넣으려해도 몸에 맞지 않아 토를 하고 통증을 참아내는 아내가 가여웠습니다. 자궁에서 자라는 모든 혹에 대해 알지 못하지만, 크기가 지속적으로 커지다 보니 무조건 수술을 해야한다고 들었습니다. 정말로 인규의 어머니는 자신의 혹이 자라듯 진규에 대한 죄책감이 커져간 것이, 그 '진규를 다시 낳고 싶다'는 외침으로 이어진 게 아닌 가 생각해요. 인규도, 인규 어머니도 오랜 시간 서로 연민하지 못하고 버텨왔다는게 안타까워요.
[3번 질문] 열등감을, 괴로움을, 슬픔을, 변화의 초석으로 삼아오기도 했음을 방금 깨달았습니다. 밑바닥을 찍어야만 다시 도약할 수 있듯, 그런 고통을 딛고 이전과 다른 방향을 찾아 여태껏 발전해온 제가 있었네요. 참 신기해요. 저는 제가 부족한 사람인 거 같아 자존감이 확 떨어졌던 적이 있는데, 신기하게도 그 슬픔 가운데서 원동력을 얻어 모자라다고 생각했던 부분에 과감히 도전하고, 발전하고, 돌이켜보면 그렇게까지 괴로워하지 않았어도 됐을 일이라고 회상하기도 합니다. 안 찾아오면 제일 좋겠지만... 올해도 아마 높은 확률로 제게 찾아올 그 깊은 밤, 절망으로 점철된 가장 어두운 시간이 지날 무렵, 새벽과 빛과 또 다시 태어난 제가 있길 바랍니다. 상처가 아물고 더 단단해진 제가 있을 거라 믿습니다.
그믐에서 자주 봬요~ㅎㅎ 마음 같아선 웰다잉오디세이 두 번째 시간에 참여하고 싶지만, 일단은 세 번째 시간 <이반일리치의 죽음>을 노려보고 있습니다.
죽은 사람들의 방에서는 환하게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는데, 앓는 사람들의 방은 어두웠다. 마치 하나하나의 창이 지쳐 눈을 감은 것 같았다. 덫에 걸린 수많은 짐승들이 새벽을 기다리며 잠을 청하고 있는 것 같았다. p225
여수의 사랑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개정판 한강 지음
Q3.. 살아 있다.. 고통을 느끼다.. 희망을 갖다.. 감각과 감정을 벼리는.. 그래서 단단한 깊이를 갖는 사람이고 싶네요..
인규는 올해 들어 서른 살이 되었다. 그런데 그의 치아는 칠십 노인의 그것보다도 부실했다. 인규는 찬물로 양치할 수 없었다. 시거나 단 음식을 먹으면 잇속이 참을 수 없을 만큼 아릿해 곧바로 미지근한 물에 헹구어내야 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떡니부터 어금니까지 가볍게 밀고 당기기만 해도 모조리 건들리곤 했다. 그 이유를 인규는 알고 있었다. 주먹을 불끈 쥘 때면 그는 곧 욕설을 내뱉으 사람처럼 이를 악물고 있었다. 잘 때면 바드득바드득 이를 갈았다. 웃을 때도 이를 악물고 웃었다.
여수의 사랑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개정판 p.204, 한강 지음
저는 한강 작가님의 인물 설정이 조금 과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고 생각했는데요. 아래 영상을 보면서 그럴 수 있겠구나, 하고 생각을 고쳐 먹었습니다. https://youtube.com/shorts/hpYhPP1NlV8?si=82wL3-cOxGCePgG_
저는 한강 작가님의 글을 보면..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로 이야기들의 고통과 감정을 느끼는 분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렇게 자신을 관통하는 고통을 문장 문장에 꼭꼭 박아 글을 쓰시는 것 같아요..
정말로요. 몸을 다 바쳐서 쓰신다는 느낌이요.
Mission 1. 돌이켜보면 저는 한동안 도피에 가까운 행동을 해왔던 것 같습니다. 지금보다 더 어리고 여렸던 시절에는 정신적으로 극한에 몰렸을 때마다 피어싱을 하나씩 더 늘리곤 했습니다. 살면서 귀와 얼굴에 열 번 넘게 구멍을 냈네요.. 뚫는 순간의 통증에 집중하면서 스트레스를 잊기도 했고, 반짝이는 피어싱을 바라보며 해소되는 감정도 분명 있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나약해 보이고 싶지 않다는 마음도 컸던 것 같습니다. 어쩌면 저를 보호하기 위한 일종의 방어기제였을지도 모르겠네요.. 지금은 그런 방식에 더 이상 미련이 남아 있지 않아서 하나둘 피어싱을 빼고 다니고 있습니다. 대신 요즘의 저는 치유든 도피든 스스로를 극단으로 몰아붙이는 행동을 거의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힘든 순간이 와도 “아 액땜 제대로 하네” 하고 받아들이는 쪽에 가까워졌습니다. 이게 회복탄력성이 좋아진 건지 아니면 뭔가 내려놓게 된 건지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만, 예전처럼 자해에 가까운 도피에서 벗어났다는 점 하나만큼은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싶습니다. 여담이지만 이런 성격 때문인지 요즘은 종종 사람이 아닌 것 같다는 말을 듣기도 합니다..ㅎㅎㅎ
피어싱 이야기는 뭔가, 제게 굉장히 이국적으로 다가오네요. 종종 사람이 아닌 것 같다는 말의 근원이 어쩌면 @JIN 님의 남다른 과거에서 찾아볼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AI와 진지하게 얘기를 나눌만한 사안인지는 모르겠으나 '현재'를 이해하는 데 '과거'는 충분히 도움이 되는 것 같습니다. 물론, '현재'가 꿈꾸는 것을 '과거'가 온전히 이해하는 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Mission 2. 희망을 담아 말하자면 화해였으면 좋겠지만.. 아마도 형언하기 어려운 절망에 더 가까웠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왜 이제서야”였을 것 같습니다. 지난 20년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왜 이제 와서 이런 고백을 하는지에 대한 원망과 혼란이 동시에 밀려왔을 것 같습니다. 어쩌면 인규는 조금만 더 일찍 솔직해졌다면, 서로의 고통을 보듬을 기회라도 있었을 텐데 그 시간조차 허락되지 않았다는 사실 앞에서 더 깊은 상실감을 느꼈을 것 같네요..
엄마도 새로운 남편, 새로운 자식을 통해 회복하고 싶은 마음이 컸던 것 같아요. 훗날 자궁 안에 혹이 커다랗게 발견될 줄 알았을까요? @진제 님이 말하신 것처럼 그게 '진규'라고 느끼는 환상적 경험을 하신 것 같아요. 결국, 평생동안 도피를 해온 것이죠. 자기도 몰랐던 눌려진 고통이 자기 안에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Mission 3. 인규가 다시 달리기 시작하는 마지막 장면에서 저는 아주 희미하지만 분명한 ‘밝은 정표’를 느꼈습니다. 지금의 자신을 이대로 끝내고 싶지는 않다는 미약한 소망이 전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제 생각컨데 삶에서 가장 어두운 시기를 비교적 이른 나이에 겪은 편인 듯합니다. 당시에는 그 시간이 끝나지 않을 것처럼 느껴졌고 매일을 버티는 것만으로도 벅찼던 기억이 납니다. 그래서 인규가 “다시 태어나고 싶다”고 생각하며 달리는 장면이 완전히 낯설게 느껴지지는 않았습니다. 지금의 저는 그 시기를 지나왔다고 말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고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때의 경험 이후로 조금 더 용감해지려고 애쓰며 살아가고 있다는 점입니다. 도전을 피하지 않으려 하고, 실패 앞에서도 예전만큼 쉽게 무너지지는 않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질주의 끝에서 마주하게 될 ‘다시 태어난 나’는 완전히 새로워진 모습이라기보다는.. 여전히 흔들리면서도 멈추지 않으려는 사람에 가까울 것 같습니다..ㅎㅎ
거리를 달릴 때 귀밑으로 느껴지는 차가운 밤바람과, 자신의 내부에서 솟구치는 속력만을 인규는 사랑하고 있었다.
여수의 사랑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개정판 한강 지음
새벽은 고통을 멎게 해줄 것이었다. 박명 속에서 신의 얼굴을 한 사냥꾼이 걸어올 것이었다.
여수의 사랑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개정판 한강 지음
그가 살아 있음을 느낄 수 있는 순간은 달릴 때뿐이었다. 그때만은 별들의 운행이 그의 귀에만 거대한 음향을 들려주는 것 같았다.
여수의 사랑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개정판 한강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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