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여수의 사랑』 : 미래가 없는 자들을 위한 2026년의 시작

D-29
오늘 여수의 사랑을 모두 읽었는데요, 혼자라면 끝까지 읽지 못했을 것 같아요. 물론 한강 작가님 너무 좋아합니다. 그...그런데 소설 속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어둠이 감당하기 힘드네요 ㅠㅠ 그믐에서 함께 읽어서 다행입니다 :) mission 1. 내 몸이 먼저 반응한 문장 여수, 그 앞바다의 녹슨 철선들은 지금도 상처 입은 목소리로 울부짖어대고 있을 것이다. 여수만의 서늘한 해류는 멍든 속살 같은 푸릇푸릇한 섬들과 몸 섞으며 굽이돌고 있을 것이다. 저무는 선착장마다 주황빛 알전구들이 밝혀질 것이다. 부두 가건물 사이로 검붉은 노을이 불타오를 것이다. 찝찔한 바닷바람은 격렬하게 우산을 까뒤집고 여자들의 치마를, 머리카락을 허공으로 솟구치게 할 것이다.(p.9) 한동안 소설의 첫 문장을 수집했을 정도로 소설의 첫 문장들을 좋아합니다!ㅎㅎ <여수의 사랑>의 첫 문장을 읽으며 어둡고 슬픈 소설이겠구나 예상했는데 이 정도였을 줄은...! 아무튼 <여수의 사랑>을 다 읽고 나서도 다시 한번 읽어본 것은 바로 첫 문장이에요. 축축하고, 어둡고... 그래도 아름답습니다! :) mission 2. 여수, 상처인가요 구원인가요? 상처로 기억되는 곳이지만 동시에 구원이기도 한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린 정선이 그곳에서 평생 잊을 수 없는 큰 상처를 얻었지만, 끝내 회피하지 않고 여수를 향하니까. mission 3. 정선의 '그 후'를 상상해 봅니다 p.61에서 정선이 지인들에게 연락을 하지만 닿지 못하고 '이제 이곳에서 내가 할 일은 남아 있지 않았다'라고 하는데 뭔가... 마지막으로 신변정리를 한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음.. 그곳에서 자흔은 찾지 못할 것 같고요, 아마 바다에 몸을 던지지 않을까 하고 저만의 결말을 써봅니다. 하지만 '죽음'이라는 게 끝이기만 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너무 시끄러운 고독>에서 한탸가 자신이 사랑해온 책들을 압축하는 압축기에 몸을 우겨넣었던 것처럼, 자신의 트라우마를 회피하지 않고 여수로 향하는 것 역시 상처의 근원으로 들어가겠다는, 정선 나름의 치열한 투쟁이라고 생각합니다.
깊어도 너무 깊지요. 다 읽어보니, 첫 문장에 정선의 죄책감이 강하게 배어있어서 놀랐어요. 결국, 죄책감을 둘러싼 참 고단했던 여정이었구나, 싶어요. 자흔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평생 죄책감을 가리고 지우려고 힘든 삶을 살았을텐데.. 자흔을 만나 참 다행이에요. 그런데 죄책감의 결말이 플라뇌르님 말대로 '죽음'이라면, 그 이유가 어찌됐든 저는 마음이 좀 아프네요ㅠㅠ <너무 시끄러운 고독>은 읽어보질 못했는데.. 내용이 파격이에요!
단 한 순간이라도 그 사람이 보고 싶어서, 한마디라도 목소리를 듣고 싶어서 나는 불을 켜고 서가를 서성거렸어요. 아무 책이라도 붙들고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활자들을 읽고, 또 읽고······
여수의 사랑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개정판 한강 지음
자흔의 스치듯 짧은 사랑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보고 싶어서 읽히지도 않는 책들을 읽고 또 읽는 모습이 아련하고 아득합니다
그러네요. 다시보니 더 인상적이에요. 20대 한강 작가님의 사랑 방식인가 싶어요.
그러나 무엇보다도, 더위와 눈병과 콜레라보다도 나를 괴롭혔던 것은 자흔에게서 풍겨오기 시작한 여수의 냄새였다. p47
여수의 사랑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개정판 한강 지음
......여수 앞바다의 해안을 따라 한없이 동쪽으로 가면 소제라는 이름의 시골 마을이 있어요. 길 여기저기에 소들이 쟁반만 한 똥을 갈겨놓은 진짜 시골이었어요. 뒷짐 진 손으로 염소를 끌고 다니는 백발 성성한 노인도 보고, 하얗고 누런 머릿수건을 동치고 탈곡하는 아낙네들, 그 옆에서 일을 거드는 상고머리 소년들도 보고...... 그렇게 한없이 올라가니까 논이 끝나는 곳에 착하고 둥글둥글하게 생긴 무덤 몇 개가 비석도 없이 길가에 돋아 있었어요. p56
여수의 사랑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개정판 한강 지음
자흔..이 이곳에서 마음을 쉬며 정착했으면 어땠을까.. 자흔..은 왜 어머니 품속 같은 그곳에 머물지 않고 떠나왔을까.. 자흔..이 정선..에게 과거의 고통을 마주하고 딛고 나아가게 하는 길이었기 때문일까요..
이미 제가 한 고민을 앞서 해주셨었네요. 저는 @베오 님이 설명해주신 '소설적 장치'라는 설명이 가장 그럴듯 하게 받아들여졌어요. 저에게는 영웅 서사에서 위대한 스승을 만나는 것처럼 주인공에게 꼭 필요한 "운명적인 만남"과 같은 것, 말이에요.
저 정다운 하늘, 바람, 땅, 물과 섞이면 그만이었어요, ......이 거추장스러운 몸만 벗으면 나는 더 이상 외로울 필요가 없겠지요, 더 이상 나일 필요도 없으니까요...... 내 외로운 운명이 그렇게 찬란하게 끝날 거라는 것이 얼마나 기뻤는지, 얼마나 큰 소리로 그 기쁨을 외치고 싶었는지, 난 그때 갯바닥을 뒹굴면서 마구 몸에 상처를 냈어요. 더운 피를 흘려 개펄에 섞고 싶었어요. 나를 낳은 땅의 흙이 내 상처 난 혈관 속으로 스며들어 오게 하고 싶었어요...... p57
여수의 사랑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개정판 한강 지음
'스물다섯 살의 나이로 세상을 등진 어린 어머니의 아련한 품속처럼, 수천수만의 물고기 비늘들이 떠올라 빛나는 것 같던 봄날의 여수 앞바다처럼 자흔의 가슴은 다사롭고 포근하였다.' p62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하루가 시작될 때마다.. 길을 잃은 기분으로 살아가는 그 깊은 외로움은.. 여수.. 가족을 삼킨 곳.. 나를 삼킨 곳.. 토악질로 고통을 마주해야 하는 곳..이라 할지라도.. 내면의 안식을 기대고 싶은 곳이었나 봅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물은 바다로 흘러가고, 그 바다는 여수 앞바다하고 섞여 있어요.' p28 자흔..이.. 소제 마을의 완만한 능선에서 지는 해와 함께.. 무해한 웃음으로 정선..을 맞이해주면 좋겠다 생각했습니다.. 흰 떡살같이 고즈넉한 외로움을 그러안고 살더라도.. 서로 무해하게 기댈 수 있는 존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여수의 사랑..은 그런 사랑이 아닐까 싶어요.. 고통.. 슬픔.. 외로움..이 모두 섞여 있지만 무해한 모습으로 위로를 건네는.. 진눈깨비를 따뜻한 온기로 품듯이..
덕분에 진눈깨비에 대한 이해를 넓힐 수 있었습니다. 제가 꼭 바라는 결말 같아서 마음이 애잔하지만 따뜻해지네요. 말씀하신 내용들이 이미지로도 그려지는 것 같아요.
저는 '자흔' 이라는 이름이.. 자흔.. 自痕.. 이렇게 다가왔었습니다.. '정선' 자신의 상처의 흔적.. 그 부스러진 흔적이 진눈깨비로 내리지만.. 결국에는 바다의 온기를 머금지요..
그녀의 머릿속에 무엇이 스쳐 가고 있는지 나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그녀의 지치고 외로운 얼굴에 여수(麗水)가 아닌 여수(旅愁)가 어두운 그림자를 끌고 지나가는 것을 나는 보았다.
여수의 사랑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개정판 한강 지음
mission 1. 내 몸이 먼저 반응한 문장 짧지만 깊이 있는 글이라서 그런지 미션에 대한 답이 쉽게 떠오르지 않아서, 생각을 조금 내려놓고 단순하게 접근해 답을 남겨봅니다 ㅎㅎ.. 이 문장은 가장 먼저 언어를 다루는 방식에서 눈길이 갔습니다. 한 번 읽는 것으로 내용의 깊이를 다 헤아리고 제 생각을 정리하기 힘들 것 같아 여러 번 다시 보았는데, 그때마다 이 문장이 눈에 밟히더라고요. 여수를 麗水와 旅愁로 나누어 쓰면서, 장소의 이름이 자연스럽게 감정의 상태로 바뀌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 그 이유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 문장이 특히 마음에 남았던 이유는 자흔과 마주하고 있는 정선, 둘 사이의 미묘한 거리감이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정선이 (애써)느끼려는 거리감일 것 같네요. 정선은 자흔에게 늘 선을 그어버렸지만, 자흔의 얼굴 위로 지나가는 피로와 외로움만큼은 또렷하게 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문장이 정선이 끝까지 거리를 유지하려 하면서도 결국 스쳐 지나가는 자흔의 감정을 보게 되는 순간처럼 읽혀서 마음이 갔던 것 같습니다.
mission 2. 여수, 상처인가요 구원인가요? 제가 생각하기엔 여수는 따뜻한 사랑이 기다리는 장소라기보다는 정선이 더 이상 외면할 수 없게 된 마음의 방향/행선지에 가깝다고 봅니다. 정선은 소설 내내 자신을 지키기 위해 철저하게 거리를 유지해 온 사람입니다. 그런 정선이 굳이 여수로 향한다는 것은 상처가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움직이기로 했다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여수는 자신이 아프다는 사실을 확인하러 가는 장소에 가깝다고 느꼈습니다. ‘여수의 사랑’ 역시 안전하거나 다정한 사랑이 아니라 도망치지 않고 감정의 무게를 감당하려는 태도를 가리키는 말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굳이 하나를 고르자면 상처에 가깝겠지만, 구원에 살포시 맞닿아있는 상처.. 정도라고 생각합니다. ㅎㅎ..
도망치지 않고 감정의 무게를 감당하려는 태도 넘 멋진 표현이네요 ♥️
문장 수집해주신 내용의 해석도 그렇고, 주인공의 '거리를 두는 방식'으로 이렇게 작품을 해석하니 또 새롭게 보이네요. 아프다는 사실을 확인하러 가는 장소에 가깝다는 표현이, 안타깝지만 수긍하게 돼요. 결벽으로 모든 것을 가리려고 했지만 결국 자신과 남을 힘들게 할 뿐이고.. 무엇보다 욕지기는 끝까지 남아 고통을 주었죠. 토해낼 것도 없을텐데, 뭔가를 토해내야 하는 정선의 입장에서 힘들었을 것 같아요. 아마 정선이 여수에 도착해 가장 먼저 한 일은 지금도 상처 입은 목소리로 울부짖어대고 있을 여수 앞바다의 녹슨 철선들을 향해 미안하다고, 너무 늦게왔다고 통곡하는 일이었을 것 같아요.
mission 3. 정선의 ‘그 후’를 상상해 봅니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저는 정선의 삶이 그 이후로도 크게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수에 간다고 해서 곧바로 무언가가 해결되거나, 새로운 삶이 시작되지는 않았을 테니까요.. 그렇지만 정선이 여수에 잠시동안은 머물렀을 가능성이 높다고 느꼈습니다. 그 곳에서 자흔을 다시 만났을 수도 있고 만나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그 만남 여부가 정선의 미래에 아주 큰 영향을 주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결국 정선에게 중요한 것은 여수에서 누군가를 '다시 만났는지'가 아니라 더 이상 예전처럼 '완전히 모른 척할 수는 없게 되었다'는 점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정선이 머지않아 다시 서울로 돌아갔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이전과 같은 마음으로 돌아오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여전히 조심스럽고 쉽게 마음을 열지는 못하지만, 자신이 피하고 있는 감정이 무엇인지는 예전보다 조금 더 분명히 알고 있는 사람으로 왔을 것이라는 것. 이것 하나는 명확히 제가 그린 정선의 미래에 보입니다. 정선의 미래가 마냥 동화처럼 밝다고 말하기도 그렇다고 완전히 절망적이라고 말하기도 어렵지만, 적어도 이 단편의 끝에서 정선은 아프지 않기 위해 살아가던 방식에서, 아플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 상태에 도달한 인물처럼 보였습니다. 그 정도의 변화가 가장 현실적인 ‘미래’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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