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북 클럽> 세 번째_편집자와 함께 읽는 서리북 겨울호(20호) 누가 여성을 두려워하랴

D-29
요컨대 문제는 비교 분석 자체가 아니라 비교의 전략이다. 여러 노예제를 시기, 장소, 사회의 발전 수준에 따라 일차적으로 분류한 뒤 이 분류를 염두에 두고 사회가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궤적을 찾아 공시적 유형과 통시적 변천을 함께 제시했다면 노예제의 본질을 묻는 저자의 문제의식에 더 설득력 있게 답할 수 있었을 것이다.
서울리뷰오브북스 20호 173, 한승혜 외 지음
고전은 완성품이 아니라 디딤돌이자 주춧돌이며 번역은 고전을 박물관에 봉인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 되살려 내는 신호탄이다.
서울리뷰오브북스 20호 176, 한승혜 외 지음
실은 이번 20호의 서평 중 가장 관심이 없었던 책이 그래픽 크리틱일 것이다. 미술은 순수미술 정도면 좀 읽고 봤지만 디자인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게 없고 디자인에 대한 크리틱에 대해서는 더더욱 문외한인 나로서는 이걸 읽으면서 거의 이해하거나 공감하는 부분이 없을 것이라고 미리 단정내렸다. 하지만 웬걸? 서평가의 첫 문장부터 아직 책을 읽지도 않은 내게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는 실정이다. 디자인계는 SNS처럼 약간 피상적이고 한시적이며 유행에 민감한 그런 얄팍함 때문에 글이나 책의 세계, 그것도 단순한 광고카피 정도의 글 외에는 무슨 상관이 있나하는 선입견이 앞선 나를 일깨워준 서평이었다. 처음에 텍스트의 부재에 대한 공감을 얻지만 그 후 또 이것은 소수에 국한된 문제이고 여태까지 관심받지 못했던 점을 지적하지만 이에 맞서 도전한 작가 전가경에 대해 꽤 자세하게 (실은 처음에 관심을 끌다가 이 부분에서 다소 이렇게 주석에 작가의 인터뷰까지 자세히 다룰 필요가 있을까?했다. 하지만 이어서 이 책을 쓰게 된 동기와 이 책의 부족한 점에 대해 비판하면서 왜 작가의 이런 배경까지 들어간 지 어느 정도 짐작이 되었다) 다루었다. 어쩌면 작가의 페미니스트 역사관이나 계급 의식 부족 등은 여성으로서 그리고 어느 정도 엘리트적인 성장환경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또한 그런 그녀가 쌓아온 활동과 환경들은 이런 책을 쓰고 연구를 계속 진행하는 동기가 되기도 했을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디자인 크리틱 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이런 역사 구축과 정치적 서사의 비판점이자 앞으로 나아가야 할 새로운 방향을 서평가는 제시하면서 마무리한다. 개인적으로는 나같은 디알못으로서도 공감할 수 있고 그 비판점 또한 다른 곳에서도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해서 예상치 못한 곳에서 보석을 발견한 serendipity의 발견이었다.
'텍스트 없음'은 한국 그래픽 디자인계에 꾸준히 제기되어 온 화두다. '텍스트' 자리를 비평, 역사, 담론, 이론, 연구, 필자 등으로 바꿔도 무방하다.
서울리뷰오브북스 20호 179, 한승혜 외 지음
SNS 기반의 관심 경제 사회가 되면서 디자인 관련 정보를 얻거나 작업물에 대한 사람들의 의견을 체감하기는 과거 그 어느 때보다 수월해졌다. 그러나 만남이 끝나면 사라지는 대화나 하트의 개수, 타임라인 뒤편으로 즉각 밀려나 버리는 글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구멍이 있는 것이다. 그 구멍 속에는 이 일을, 그 일을 하고 있는 나를, 내가 만든 작업물을, 나와 작업물이 속한 세계를 누군가가 진지한 시선으로 자세히 보고 읽고 기록해 주기를, 그럼으로써 이 모든 것이 잊히지 않고 가치 있는 것으로 남기를 바란다는 욕망이 있다. 분량은 시선에 담긴 성의의 바로미터다.
서울리뷰오브북스 20호 180, 한승혜 외 지음
실은 이것은 가끔 올라오는 인터넷 한줄평들이나 별점을 보면서도 느끼는 것이다. 서리북에 나온 서평 정도는 아닐지라도 어느 정도 '재미있어요' '참 좋아요' '별로에요' '개판이에요' 그런 정도로 사춘기 자식과 나눌 법한 단답식 평을 보면 숨이 턱 막히는 욕망.. SNS 세대는 안 느끼나? 요즘에는 챗gpt 등 AI로 인해 거의 위키피디아 복붙한 듯한 요약 및 감상문들이 올라오는데 분량은 많지만 이 또한 성의가 없어 보인다..;; 하긴 책 자체를 안 읽는 이 시대에는 그런 한줄평이나 별점이나 좋아요도 감지덕지인가..
문제는 이것이 근원적인 감정일지언정 다수의 욕망은 아니라는 점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궁극적으로 불멸을 지향하는 이 헛되고 장구한 욕망을 충족할 일차적 수단으로 본인이 하는 일과 그에 대하여 타인이 쓴 글을 떠올리는 사람은 소수다. 그 욕망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글을 쓰는 사람은 거기서도 일부다. .... 그렇기에 '텍스트 없음'이란 수는 적지만 세대를 이어가며 어쩐지 꾸준히 발생하고 있는, 아무튼 텍스트는 중요한 것이라고 빋는 사람들이 욕구 불만을 견디지 못하고 튀어나와서 이어 부르는 작은 돌림 노래였다.
서울리뷰오브북스 20호 180, 한승혜 외 지음
큰 건물을 지으려면 많은 자재가 필요하다. 연구자로서 저자가 지닌 성실함과 열정이 빛을 발하는 것이 이 부분이다. ... 저자가 발굴해 내는 자료의 생생한 현장성은 그가 고고학자인 동시에 발굴 현장의 일부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 내가 서 있는 이곳이 디자인 역사의 한가운데라는 강한 자의식. 눈앞에 있는 그토록 중요한 것들이 시간 속에서 소실되어 간다는 안타까움. 이 망각을 거스르려는 사람이 자신밖에 없다는 외로움과 사명감. '그래픽 크리틱'을 구축하는 사료의 벽돌들 틈에는 이렇나 감정의 줄눈이 있다.
서울리뷰오브북스 20호 184-186, 한승혜 외 지음
기록의 중요성과 더불어 강조된 것이 기록의 정치성이다. ... 이제껏 평온하던 '텍스트 없음' 돌림 노래 동아리 역시 페미니즘의 맹공 앞에서 자기 자신과 텍스트를 이 새로운 맥락 안에 다시 위치시켜야 하는 과제에 직면한다.
서울리뷰오브북스 20호 186-187, 한승혜 외 지음
책 곳곳에서 페미니즘과 탈식민주의적 언어들이 보이지만 결국 사료들을 해석하고 의미화하는 저자의 역사관은 목적론적이다. 저자는 한국 그래픽 디자인사라는 본질을 상정하고 수많은 자료와 인물을 이 본질을 향해 나아가는 인과적 관계, 전체를 구성하는 개별요소로 엮는다. 거대 서사를 향한 강한 지향은 연구 대상에 필요 이상으로 거대한 의미를 부여하는 행동의 반복으로 나타난다.
서울리뷰오브북스 20호 188, 한승혜 외 지음
또 다른 문제는 사회적 관계로서 계급성에 대한 인식 부족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연구 대상은 권력에 의해 배제되고 주변화된 소수자로 규정된다. ... 책에서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약자와 강박은 페미니즘 리부트가 저자에게 던진 난제, 즉 '여성이 없는' 디자인사 연구 결과들을 어떻게 남성 중심의 매끈한 영웅 서사라는 막다른 길로 빠져들게 하지 않으면서 한국 그래픽 디자인사를 구축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돌파하려다가 생겨난 부작용으로도 읽힌다. 남성의 이야기지만 그들의 약자성을 강조함으로써 발언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지닌 또 다른 사회적 측면과 권력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기 때문에 주장의 설득력이 약해진다. 연구의 역할이 반드시 약자 조명이기만 할 필요는 없다. 무결함에 대한 부담감을 조금은 내려놓아도 괜찮지 않을까.
서울리뷰오브북스 20호 189-191, 한승혜 외 지음
이런 비판은 디자인사에 국한된 게 아니어서 더 관심이 갔다. 이에 대해 맞설만한 페미니스트 및 탈식민주의 비평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까.
FDSC에서 만든 디자인의 가치를 조명하기 위해 FDSC 이외의 전부를 모더니즘이라는 여집합으로 묶어서 논의의 틀을 거칠게 단순화하거나, 세부적 활동마다 거대한 의미를 장식처럼 붙여 주는 것은 지식인으로서 진실하지 못하고 이데올로그로서도 영리하지 못한 처사다. 사람들은 주례사 비평에 잘 설득되지 않는다.
서울리뷰오브북스 20호 191, 한승혜 외 지음
사실 대문자 역사의 구축을 목적으로 하는 이상 누구든 언제까지나 실패할 수밖에 없다. 역사가 탄생한다 한들 그것은 아주 먼 미래일 테니 말이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역사관의 재고를 고려해 봐도 좋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중한 유산들을 현재의 인과적 기원으로 정식화하고 싶다면 그것의 중요성을 역설함과 동시에 그것이 왜 공통의 기억으로서 역사가 되는 데 실패했는지 현재와 과거를 내적으로 이어 주는 이야기가 필요할 것이다. 외부에 의해 소외되어 부당하게 조명받지 못한 약자이기 때문이라는 서사만으로는 오늘날 디자인계와 역사적 대상 사이에 존재하는 깊은 단절을 메울 수 없다.
서울리뷰오브북스 20호 192, 한승혜 외 지음
사실 친구들 중에도 디자인 전공을 한 친구들, 그 중 해외 유학을 가기도 한 해외파들이 있는데 그들 중 갑까지는 아니어도 을, 약자의 입장보다는 오히려 요즘 예체능 전공은 (그것도 해외유학까지 다녀온 이들은) 엘리트에 속하는 경우가 많아서 이들이 약자 입장에서만 소외받았다는 논지는 약해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면 디자인 업계의 텍스트 부재는 업계의 다른 특성이나 시대적 흐름, 디자인계의 정치적 역사적 담론의 참여 부족 등에서 찾아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패터슨의 작품에서 노예제에 대한 담론 중 혹시 매춘이 다루어질까요? 만약 그렇다면 매춘에서 self-sale의 자기 노예화나 경제적 기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제프리 밀러의 비판에서 괄호 안의 (좋음)과 (매우 나쁨)이 제프리 밀러의 생각인지 저자의 생각인지 아니면 서평가의 생각인지 그리고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잘 모르겠는데 어떤 것일까요?
남겨 주신 질문은 필자 선생님들께 전달 후 답변이 오는 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 다른 독자님들도 서평에 대한 감상을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오늘 아침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 리뷰를 읽으면서 앗 그런데 요즘은 공감을 하는 척 하면서 실은 공감하는 척만 하고 마는 이수지의 '제이미맘'같은 엄마들이 많지 않나.. 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나오네요. 조너선 하이트의 '불안세대' '나쁜 교육' 등에서 많이 언급되었던 문제점을 이 리뷰에서 콜럼바인 사건과 이수지의 대치맘 코미디를 통해 보니 새삼 더 와닿기도 하고 역사가 반복될까봐 두려워지기도 합니다. 안 그래도 송파 강남에 있는 수많은 소아정신건강의학과 및 상담센터들을 보면 걱정되는 부분입니다. 다른 페미니즘 리뷰도 그렇지만 이 리뷰는 정말 아이를 키우는 불안한 대한민국 엄마로서 와닿는 리뷰네요. 제 SNS는 많이 안 알려줘서 활동이 별로 없지만 지역맘커뮤니티에도 이 글에 대해 알리고 싶네요. 특히 저희 동네 구립도서관에는 구독잡지 중 아직 서울리뷰오브북스가 들어와 있지 않아서 신청을 해봐야겠어요.
더욱 많은 생각이 모여서 문제를 논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안그래도 저도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으면서 광주사태가 아닌 제주 4.3을 외부인의 눈으로 바라봐서 그런지 '소년이 온다'에 비해 평이 그렇게 좋지 않아서 아쉬웠는데 이런 제3자의 필터를 통해서 봐서 그런게 아닐까 생각했는데 오히려 그런 당사자들의 증언, 아니 당사자들의 존재 자체가 지워진 부재가 더욱더 그 비극을 방증하고 강조하는 게 될 수 있겠네요. 제 자신도 외국에서 오래 살아서 모국어가 한국어지만 오히려 영어가 모어에 가깝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는데.. 그래서 그런지 '작별하지 않는다'의 제주 방언도 다소 어려워서 그런 '번역'을 통해서 잃은 느낌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리뷰를 쓰신 임은정님께 최근 부커상 shortlist에 올랐던 한인2세 Susan Choi의 Flashlight가 한국어로 번역되어 나오면 추천드리고 싶습니다. 제주 4.3도 식민지 시대의 재일교포 및 재미교포 등 난민적 관점, 난민의 의미 등 시사하는 점이 많아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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