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같은 책을 두고 이렇게 서로 다른, 많이는 상반된 해석을 내리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런 점에서 <논어>는 하나가 아니다. "티베트에는 승려 수만큼의 불교가 있고", "아버지의 집에는 수많은 방이 있다"고 하지 않던가? 그처럼 여러 <논어>가 밤하늘의 별처럼 빛나고 있다. ”
『두 개의 논어 - 철학자 주자와 정치가 다산, 공자의 가르침을 논하다』 42, 한형조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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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빛
2번 질문은 좀 어려운데
고전을 읽을 때
이 말이 언제, 어떤 상황에서 나왔는지를 따지는 게 중요할까,
아니면 지금 내 삶에 어떤 기준을 주는지 더 중요할까 이런 의미이실까요? ㅎㅎ
( 저는 이 질문에서 굳이 하나를 고르자면, 다산의 독법이 먼저라고 느꼈습니다.
보편적 진리는 매력적이지만, 어떤 맥락에서 나온 말인지 모르고 받아들이면, 오히려 폭력적인 기준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이 구절도 주자의 해석대로 읽으면 “중화는 언제나 옳다”는 말처럼 들리지만,
다산의 해석을 따라가면 이 말은 특정 집단을 낮추는 게 아닙니다.
정치적 무책임에 대한 비판으로 생각됩니다.
그래서 저는 다산의 방식이 공자의 말을
도덕 교훈적으로 보지 않고 현실 참여의 의미에서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다만 모든 문장을 정치적 사건과 연결하는 다산의 태도가
조금 벅차게 느껴지기도 해요.... 이런 부분은 아마도? 공자의 사상을 더 현실 가까이 끌어오기 위함이 아니었을까요
김영사
글빛님, 답변을 읽다가 '맥락을 모르는 보편적 진리는 폭력적인 기준이 될 수 있다'는 문장에서 잠시 멈췄습니다. 정말 깊이 있는 통찰입니다. 주자의 해석이 편안하고 도덕적이지만 때로는 공허하거나 강압적으로 느껴질 때가 있는데, 그 이유를 정확하게 짚어주신 것 같습니다. 다산이 왜 그렇게 집요하게(때로는 벅찰 정도로) 사건의 현장을 파헤쳤는지, 그 이유가 바로 '책임 있는 현실 참여'를 위해서인 것 같기도 합니다. 다산의 꼼꼼함이 읽는 우리를 조금 지치게 할 때도 있지만, 그 덕분에 공자가 박제된 성인이 아니라 '살아 있는 인간'으로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남은 챕터에서도 그 치열한 현장을 함께 목격주세요.
멜리멜로
오늘 그믐에 가입해서 공고를 늦게 봤습니다. 혹 신청이 가능한지요?
김영사
그럼요. 환영합니다, 멜리멜로님!!
루나보름
두 개의 논어 독자들을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전문적인 지식이 없어도, 논어의 입문서로도 손색이 없는 책입니다. 어디를 펼쳐도 곱씹을 내용이 나오고, 여러 번 읽을 수록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책이니 이 독서 여행이 부디 즐거우시기를 빌겠습니다.
김영사
루나보름 선생님, 반갑습니다. 루나보름 선생님이 한형조 교수님의 제자 분이세요! 선생님 많은 도움 부탁드립니다~!!
심우당
루나보름님의 논어를 읽어 오신 과정이 궁금합니다. 어떤 책들부터 읽기 시작해서, 어떤 판본을 파고 드셨을지...한형조 교수님의 유작을 빼고, 꼽을 만한 논어 책을 소개해 주신다면?
김영사
심우당님, 루나보름 선생님께 답변을 요청드렸습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루나보름
저는 대학 때 전공수업과 강독모임을 따라 읽었습니다.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에서 나온 經書라는 책이 있는데 사서집주가 실려있습니다. 주희의 해석을 먼저 접한 것이지요. 전통문화연구회의 성백효 선생님 번역(?)을 참고했고요. 그 뒤에 다산의 사서 연구서들을 읽었습니다. 그때는 이을호 선생님의 번역을 참고하면서 <논어고금주>를 읽었습니다. 지금은 이지형 선생님의 번역서를 더 많이 볼 겁니다.
김영사
선생님, 답변 주셔서 감사합니다!!
심우당
@루나보름 전공자들의 코스를 알려주신 것 같군요. 그런데, 일반인들을 위한 인문교양서들 중에서는 마음에 드는 책은 없으셨던지요? 지난해 방인 교수님 통해, <<17~18세기 프랑스 예수회 신부들의 역경 이해>> 작업 중임을 알았는데, 책이 나왔더군요. 뜻깊은 번역/연구 작업에 함께하신 분 맞지요?
루나보름
예 맞습니다. 정체가 자꾸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 일반인을 위한 인문교양서는 추천드리기가 참 어렵습니다. 김용옥 선생님이나 배병삼 선생님, 김형찬 선생님의 <<논어>> 해석이 떠오르는데요. 모두 주자학적 해석을 따르고 있습니다. 혹시 심우당님께선 어떤 인문교양서를 인상 깊게 읽으셨는지 궁금합니다.
작가와책읽기
◈ 공자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 주자와 다산 사이에서 읽는 고전의 현재성 ◈
현대에 이르러 문학 이론서로 손꼽히는 『문학이론입문』의 저자이자 영국의 대표적 비평가 테리 이글턴(Terry Eagleton)은, 『문학을 읽는다는 것은(How to Read Literature)』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텍스트 상의 증거는 보통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고, 이런 해석들 사이에는 갈등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 해석 중에서 어느 한 가지로 결정하기 위한 확실한 방법은 없습니다. … 어쩌면 아직 태어나지 않은 독자가 작품의 잠재적 의미를 완전히 밝혀 주기를 기다리며, 놀랍도록 새로운 방식으로 해석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작품들도 있겠지요.”
또한 미국의 영화평론가 데이비드 덴비(David Denby)는 『위대한 책들과의 만남』에서 고전을 이렇게 표현한다.
“고전은 사람을 기죽게 하는 점령군이 아니라, 서로 싸우고 다시 또 독자와 싸우는, 길들지 아니한 야수들의 왕국이다.”
이 두 문장을 함께 떠올리게 되는 이유는, 『두 개의 논어』가 보여주는 주자와 다산의 해석 대립이 바로 고전이 살아 있는 텍스트라는 사실을 극적으로 증명하기 때문이다.
주자는 『논어』를 인간 내면의 수양과 본성 탐구라는 ‘명상의 철학(Contemplativa)’의 관점에서 읽는다. 공자는 도덕적 완성을 향해 자기 성찰을 요구하는 스승이며, 논어의 문장들은 보편적 윤리의 좌표로 기능한다. 반면 다산은 『논어』를 구체적 역사, 정치적 상황, 권력과 제도의 맥락 속에서 읽는다. 공자는 난세 속에서 현실을 설계하고 개입했던 전략가이며, 논어의 문장들은 당시의 사건과 선택을 반영하는 실천적 언어가 된다.
이 차이는 단순한 학설의 차이가 아니라, 텍스트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에 대한 근본적 질문의 차이다. 주자에게 고전은 인간을 도덕적으로 단련시키는 내면의 지도이고, 다산에게 고전은 사회를 작동시키는 현실의 매뉴얼이다. 동일한 문장을 두고 전혀 다른 세계가 열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지점에서 이글턴의 말은 매우 설득력을 가진다. 텍스트에는 단 하나의 확정된 의미가 존재하지 않으며, 해석은 언제나 갈등 속에서 생성된다. 주자와 다산의 논쟁은 공자의 진짜 모습이 누구인가를 가리는 싸움이기 이전에, 고전이 시대마다 새롭게 태어나는 과정 자체를 보여준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독자조차 또 다른 공자를 발견할 수 있다는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덴비의 표현처럼, 고전은 길들여진 교본이 아니라 끊임없이 독자와 싸우는 야수다. 『논어』 역시 마찬가지다. 주자의 논어와 다산의 논어가 서로 충돌하듯, 독자는 그 충돌 속에서 다시 자기 자신의 질문과 부딪히게 된다. 고전 독서는 순응이 아니라 긴장이다.
그렇다면 오늘의 독자에게 더 필요한 공자는 ‘명상의 철학자’인가, 아니면 ‘난세의 정치가’인가. 나는 이 질문 자체가 이미 주자와 다산을 동시에 요청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현대 사회는 개인에게는 극도의 자기 관리와 도덕적 책임을 요구하면서도, 동시에 정치·경제·기술의 구조적 위기를 해결할 집단적 판단을 요구한다. 내면의 수양과 제도의 설계는 더 이상 분리될 수 없는 문제다.
다산이 복원한 ‘인간적이고 전략적인 공자’가 낯설게 느껴지는 이유는, 우리가 그동안 공자를 너무 도덕 교과서 속 인물로만 길들여 왔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실을 움직이지 못하는 도덕은 쉽게 공허해지고, 인간의 욕망과 권력을 외면하는 윤리는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다산의 공자는 오늘의 정치와 사회를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불편한 질문을 던진다.
동시에 모든 구절을 정치적 사건으로 환원하는 해석 역시 위험할 수 있다. 텍스트가 갖는 윤리적·존재론적 울림까지 소거해 버린다면, 고전은 단지 역사 자료로 축소된다. 주자의 방식이 여전히 유효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인간이 어떻게 자기 자신을 다스릴 것인가라는 질문은 어떤 시대에도 사라지지 않는다.
결국 『두 개의 논어』가 우리에게 던지는 핵심 메시지는, 어느 한 해석의 승리가 아니라 해석의 긴장 자체를 견디는 독서의 태도일 것이다. 고전은 답을 주기보다, 독자를 더 깊은 질문 속으로 밀어 넣는다. 공자는 이미 끝난 사상가가 아니라, 아직도 독자와 논쟁 중인 사상가다.
어쩌면 이글턴이 말한 ‘아직 태어나지 않은 독자’란,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두 개의 논어』를 다시 읽고 있는 우리 자신일지도 모른다. 주자와 다산이라는 두 시선 사이에서 흔들리며 사유하는 이 독서의 긴장감 자체가, 고전이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음을 보여주는 가장 확실한 증거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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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확장 읽기 안내 : 이 글에서 다룬 “텍스트의 다층적 해석”과 “고전의 개방성”에 대한 문제의식은, 제가 과거에 쓴 문학평론 「T.S. 엘리엇의 문학 세계에 대한 종합주의적 접근」에서도 같은 방식으로 탐구한 바 있습니다. 테리 이글턴과 데이비드 덴비의 논의를 바탕으로, 엘리엇의 작품 세계를 단일한 의미 체계로 환원하기보다, 서로 충돌하고 공존하는 해석들의 장(場)으로 읽어야 한다는 논지를 전개했습니다.
아울러 한국문학이 세계문학의 ‘수신자’에 머무르지 않고, 사유와 해석을 발신하는 주체로 자리매김하기를 바라는 문제의식 역시 이 글에 담았습니다. 그런 점에서 한형조 교수의 『두 개의 논어』가 주자와 다산이라는 두 개의 해석 체계를 병치함으로써, 고전이 어떻게 고정된 교리가 아니라 끊임없이 새롭게 해석되는 살아 있는 텍스트인지를 보여준다는 점은, 해당 비평과 깊이 맞닿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관심 있으신 분들께서는 아래 링크를 통해 함께 읽어보셔도 좋겠습니다. 사상·문학·고전이라는 서로 다른 영역이 결국 “해석은 언제나 열려 있으며, 독자가 의미를 완성한다”는 하나의 질문으로 수렴되는 지점을 확인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 T.S. 엘리엇의 문학 세계에 대한 종합주의적 접근 https://blog.naver.com/jiahn68/223443530982
김영사
작가와책읽기님, 장문의 댓글 감사합니다. 댓글이라기보다 한 편의 훌륭한 서평 혹은 비평문 같습니다.^^ 고전을 '길들여지지 않은 야수들의 왕국'이라 표현한 덴비의 말과, 주자와 다산의 대립을 '해석의 긴장'으로 읽어내신 작가와책읽기님의 시선이 어우러져, 이 책이 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지를 명확하게 보여주네요. 특히 '아직 태어나지 않은 독자'가 바로 지금 우리 자신일지도 모른다는 마지막 문장은 가슴 벅찬 울림을 줍니다. 우리가 느끼는 혼란과 고민이 헛된 것이 아니라, 고전을 살아 숨 쉬게 하는 증거라는 격려로 들립니다. 소개해주신 T.S. 엘리엇 평론도 꼭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우리 모임의 사유를 한층 더 넓혀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신나는아름쌤
고전은 순응이 아니라 긴장이다.
어느 한 해석의 승리가 아니라 해석의 긴장을 견디는(즐기는)독자의 태도.란 문구가 두개의 논어를 명쾌하게정리하는 한문장같습니다👍👍👍 올려주신 링크도 넘 감사히 읽어보겠습니다~♡♡
김영사
신나는아름쌤님, <두 개의 논어>를 즐겁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처음 이 원고를 접했을 때, 다산의 해석을 보며 무척 흥미로웠던 기억이 납니다. 노란 포스트잇에 글자를 그림처럼 적으셨네요. 아름쌤의 댓글 톤과 함께 유쾌함이 느껴집니다,
신나는아름쌤
3장까지 어쩌면 이리도 수월하게 고전을 해석하시는지..한형조 교수님의 탁월한 깊이와 시간을 가늠하기 어려울만큼 리스팩하며 읽고있습니다~♡♡
본주르~란 봉쥬르~처럼 본성에 집중한 주자학을 되새기며 읽고파 끄적여본 메모이구요~^^; 그보다도 다산의 정치학적 해석부분이 너무 흥미로워서 흐름에 따라 견해가 생기고 쌓이며 변해가는 걸 즐겨보고 있어요~^^;;
신나는아름쌤
2번)
질문에 대한 의견이자 이견은
不政에 대한 다산의 철학적 해석을 보며
같은 상황과 문맥,단어조차 받아들이고 소화하는이의
시선과 의지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매력을 느꼈다고 할까요~? 삶을 해석하는 방식으로의 주자와 다산의
內적이고 外적인 매력을 후반부가 되면 어떻게 바라보게될지..더욱 기대됩니다~♡♡
김영사
네, 후반부로 갈수록 더욱 세세하게 주자와 다산의 서로 다른 시선을 느끼실 수 있습니다. 전 개인적으로 다산과 주자가 공자의 제자들을 바라보는 시선 차이가 가장 재밌었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사진을 공유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름쌤 덕분에 이 모임이 활기를 더 얻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