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돌책 독파] 주자와 다산의 대결 <두 개의 논어> 편집자와 함께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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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주차 2. '위기지학(爲己之學)' : 나를 위한 공부란? 공자가 말한 나를 위한 공부는 '자발적인 공부'를 가리킨다고 생각합니다. 즉, 알고 익히는 것 자체에서 기쁨을 누릴 줄 알아야지 공부를 출세나 돈벌이를 위한 수단으로만 여겨선 안 된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공부가 개인의 내적 만족으로 끝나는 것만을 지향했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다산이 설파해듯 공자의 지향은 결국 나라와 백성을 평안케 하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공부하는 자세와 공부의 목적을 구분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공부하는 자세는 '나의 기쁨과 발전'에 초점이 있어야 하지만 배우고 익힌 것의 쓰임은 세상을 위해서. 조금 타협적으로 보이지만 그래서 전 주자나 다산이나 다 어느 정도 맞는 애길 한 게 아닌가 싶네요.
다니엘님, '알고 익히는 것 자체에서 기쁨을 누릴 줄 알아야 한다'는 말씀, 정말 공감합니다. 억지로 하는 공부가 아니라, 내 안의 호기심과 성장을 위해 하는 '자발적인 공부'야말로 공자님이 말씀하신 '위기지학'의 참뜻이 아닐까 합니다. 그렇게 채워진 내면의 힘이 결국엔 흘러넘쳐서 타인과 세상을 이롭게 한다는 말씀이 참 따뜻하게 다가옵니다. 다산의 실용성도 좋지만, 가끔은 주자처럼 아무 목적 없이 책 읽는 즐거움 그 자체에 빠져보는 것도 필요한 것 같습니다!
📘 『두 개의 논어』에 대한 비평적 독해 : ‘學’과 삶의 장(場) — 작가와책읽기 | 신춘문예 등단 문학평론가 『두 개의 논어』(한형조, 김영사, 2025)는 단순한 고전 해설서가 아니다. 이 책은 고전을 다시 읽는 방법을 해설하는 메타 텍스트이며, 동시에 텍스트 자체가 다시 사유의 장(場)으로 작동하도록 설계된 현대적 독서 실험이다. 공자 이후 2,500년에 걸쳐 축적된 해석의 전통이 주자와 다산이라는 두 거장의 대립적 독법을 통해 압축되고, 그 긴장이 다시 오늘의 독자에게 사유의 에너지를 전이한다는 점에서 이 책은 고전을 “닫힌 권위”가 아니라 “열린 운동장”으로 복원한다. 특히 3부 1장 「學」은 『논어』의 첫 문장을 다루는 장이면서, 동시에 이 책 전체의 철학적 토대를 형성하는 핵심부다. 이 장에서 ‘學’은 더 이상 시험 대비나 교양 축적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존재로 살아갈 것인가를 설계하는 삶의 기술로 재정의된다. 1. 주자와 다산: ‘學’에 대한 두 개의 방향 주자에게 배움은 잃어버린 본성을 회복하는 내면 정화의 과정이다. 인간은 본래 선하지만 기질과 욕망이 이를 흐린다. 독서, 성찰, 경건한 자기 점검은 마음을 맑게 하여 본래의 도덕적 질서를 회복하게 한다. 주자의 ‘學’은 윤리적 복원 프로젝트이며, 인간 내면의 투명성을 회복하려는 긴 수양의 여정이다. 반면 다산에게 배움은 사회 속에서 작동하는 실천 기술이다. 효도, 공경, 직무 수행, 행정 능력, 재정 운영, 정치 판단은 모두 학습의 대상이다. 다산의 ‘學’은 인간을 제도적 책임 주체로 성장시키는 훈련이며, 윤리는 현실 운영 능력과 분리되지 않는다. 학문은 곧 사회를 작동시키는 기술이다. 주자의 학문이 ‘내면의 정합성’을 향한다면, 다산의 학문은 ‘현실의 작동성’을 향한다. 한쪽은 인간의 도덕적 깊이를, 다른 한쪽은 사회의 구조적 안정성을 지향한다. 2. 한형조의 개입: ‘學’을 존재의 장치로 읽다 한형조는 이 두 해석을 단순히 병렬 비교하지 않는다. 그는 ‘學’을 하나의 존재 형성 장치(anthropotechnics)로 읽는다. 인간은 태어날 때 완성된 존재가 아니라, 텍스트를 읽고, 관습을 해석하고, 제도를 통과하며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재구성한다. 고전 독해는 과거의 권위를 소비하는 행위가 아니라, 현재의 자기 존재를 재설계하는 실천이다. 여기서 ‘學’은 더 이상 지식 축적이 아니라, 자기 형성의 기술, 곧 삶을 편집하는 기술이 된다. 3. 동서 비교 1차 축: Plato – Aristotle – Michel Foucault 『두 개의 논어』 1장 「學」의 구조는 동서양을 관통하는 인간 학습 모델의 보편 구조와 겹친다. ① 내면 정화 (Plato / 주자): 플라톤에게 배움은 영혼이 이데아를 회상하는 과정이며, 주자에게 학문은 본래의 도덕 본성을 복원하는 수행이다. 둘 모두 진리는 외부가 아니라 인간 내면에 잠재되어 있다. ② 실천 기술 (Aristotle / 다산): 아리스토텔레스는 덕을 습관화된 행위로 이해했고, 다산 역시 윤리를 사회적 기능과 분리하지 않는다. 배움은 삶의 기술이며, 정치·경제·윤리는 실천 속에서 형성된다. ③ 존재 설계 (Foucault / 한형조): 푸코는 주체가 권력·담론·훈련 장치 속에서 구성된다고 보았고, 한형조 역시 고전 독해를 존재 재구성의 장으로 읽는다. 인간은 스스로를 만드는 존재다. 4. 계보 확장: 사유의 계열들 이러한 삼각 연결 구조는 서양 사상사에서도 반복된다. ① 주자형 계열: 아우구스티누스(내면 성찰), 플로티노스(영혼 상승) ② 다산형 계열: 존 듀이(경험·실천 교육), 한나 아렌트(행위의 공적성) ③ 한형조형 계열: 피에르 아도(철학=삶의 훈련), 후기 하이데거(존재의 실천), 니체(자기 형성) ‘學’은 단지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 자신을 어떤 존재로 만들 것인가라는 존재론적 질문임이 분명해진다. 5. 생몰 연대를 고려한 6면 비교 렌즈 ① 주자(1130–1200) ↔ 토마스 아퀴나스(1225–1274) : 둘 다 정전·주석·교육체계를 통해 학문을 표준화했다. 지식은 질서이며, 윤리는 체계 속에서 안정된다. 학문은 사회의 규범 인프라다. ② 다산(1762–1836) ↔ 제러미 벤담(1748–1832) : 둘 다 제도 설계자형 지식인이다. 추상적 도덕보다 행정, 법, 정책, 효과가 중요하다. 학문은 사회를 개선하는 도구다. ③ 한형조(1958–2024) ↔ 베르나르 스티글레르(1952–2020) : 둘 다 현대 문명의 위기(기술·사회·기억)를 고전/인문 재해석으로 대응한 철학자다. 이들에게 학문은 존재를 지키는 전략이다. 이러한 6면적 사고의 3각 연결 비교는 『두 개의 논어』 1장 「學」이 단지 동양 사상의 문제가 아니라, 인류 보편의 학습 구조를 재현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6. 결론 : '學'은 인간을 설계하는 기술이다 — 공자로 돌아가다 공자는 『논어』의 첫 문장을 이렇게 시작한다.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배우고 때때로 익히니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이 문장은 흔히 ‘공부의 즐거움’을 말하는 격언처럼 소비되어 왔다. 그러나 『두 개의 논어』가 주자와 다산의 긴장된 해석을 통해 복원하는 것은, 이 문장이 단순한 학습 윤리가 아니라 인간 형성의 구조 선언이라는 점이다. ‘學’은 지식을 축적하는 행위가 아니라, 반복되는 실천(習)을 통해 인간이 스스로를 다시 빚어가는 과정이다. 여기서 기쁨(說)은 성취의 감정이 아니라, 존재가 제자리를 찾아가는 안정감에 가깝다. 공자는 또 이렇게 말한다. 「吾十有五而志于學」 나는 열다섯에 학문에 뜻을 두었다. ‘志’는 목표가 아니라 방향이다. 공자에게 학문은 직업 준비도, 시험 준비도 아닌, 인생 전체의 궤도를 설정하는 최초의 결단이었다. 배우는 행위는 곧 살아가는 방식의 선택이며, 인간이 어떤 존재로 형성될 것인가를 스스로 결정하는 윤리적 약속이었다. 그리고 공자는 학습의 균형을 이렇게 경고한다. 「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어둡고,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 여기서 공자는 지식과 사유, 실천과 성찰, 경험과 원리 사이의 순환 구조를 이미 제시한다. 이는 주자의 내면 수양과 다산의 실천 기술이 충돌하면서도 결국 하나의 구조로 수렴하는 지점이며, ‘下學而上達’이라는 공자의 학문 모델이 단선이 아니라 왕복 운동임을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공자는 이렇게 자신의 삶을 회고한다. 「下學而上達 知我者其天乎」 나는 아래에서 배우고 위에 이르렀다. 나를 알아주는 것은 하늘뿐이로다. ‘아래에서 배운다’는 것은 일상의 삶, 인간관계, 실패, 책임, 노동, 정치, 갈등 속에서 학습한다는 뜻이다. ‘위에 이른다’는 것은 추상적 이념이 아니라, 삶 전체가 하나의 의미 체계로 통합되는 경지다. 공자의 학문은 관념적 상승이 아니라, 삶을 통과한 존재적 상승이다. 이 네 문장을 종합하면, 공자가 말한 ‘學’은 다음과 같이 정의될 수 있다. " 學이란 인간이 자기 삶을 반복적으로 훈련하여, 자기 자신을 책임질 수 있는 존재로 형성해 가는 기술이다." 주자의 학문은 이 기술을 내면 윤리의 정련 장치로 정교화했고, 다산의 학문은 이를 사회 운영의 실천 기술로 확장했으며, 한형조의 독해는 이를 현대적 존재 설계의 사유 장치로 다시 열어 놓는다. 그러나 그 모든 해석의 출발점과 귀착점은 결국 공자다. 공자에게 배움은 지식을 소유하는 일이 아니라, 자기 삶을 감당할 수 있는 인간이 되어 가는 과정이다. 우리는 더 많이 아는 존재가 아니라, 더 깊이 책임지는 존재가 되기 위해 배운다. 『두 개의 논어』 1장 「學」이 오늘의 독자에게 던지는 가장 강력한 메시지는 바로 이것이다. "배움은 정보의 축적이 아니라, 존재의 형성이다. 공부는 성적이 아니라, 삶의 구조를 만드는 일이다. 그리고 학습의 최종 성과는 성공이 아니라, 자기 삶을 스스로 떠받칠 수 있는 인간이 되는 것이다." 공자가 말한 ‘學’은 지금도 끝나지 않았다. 그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다시 어떤 인간이 될 것인지를 묻는 가장 오래되고도 가장 급진적인 질문이기 때문이다. 아아, 배우고 때때로 익히니 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아후 늘 방대하고 폭 넓게 사유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작가와책읽기 님의 글은 서평을 넘어선 하나의 철학 에세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어 보입니다. 동양의 고전을 서양의 현대 철학과 가로세로로 엮어내는 지적 사유의 깊이가 엄청나네요. 특히 '學은 정보의 축적이 아니라 존재의 형성'이라는 통찰은 마음에 새길 만한 명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두 개의 논어>를 단순히 주자와 다산의 대결로만 보지 않고,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푸코로 이어지는 서양 철학의 계보와 연결하여 '인간 학습의 보편 구조'로 확장하신 시각에 감탄했습니다. 특히 한형조 교수님과 베르나르 스티글레르를 연결하여 '현대 문명의 위기에 대응하는 전략으로서의 학문'을 도출해내신 부분은, 한형조 교수님이 살아서 보셨다면 무척 흐뭇해하셨을 같습니다. 이 책이 고전을 '닫힌 권위'가 아니라 '열린 운동장'으로 복원한다는 말씀처럼, 작가와책읽기님 덕분에 이 모임이 단순한 독서 모임을 넘어 거대한 지적 사유의 장이 된 것 같습니다. 귀한 글 나눠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어떤 존재로 만들 것인가라는 존재론적 질문임이 분명해진다." 다시 정독합니다~♡♡ 푸코의 구조주의까지 동서양을 아우르는 탁월한 비교로 더 깊어지게 해주셔서 다시금 감사드려요~♡♡♡
아름쌤님, 다정한 관심과 응원의 댓글 감사합니다 , 고맙습니다. 덕분에 더욱 신나는 시간이 되었어요. 늘 건강하시고 행복 하세요.
오늘도 짧은 독서 후 출근^^; 조삭비야를 새기며~삭비문으로 아가들 이끄는 피리부는 아름쌤 노리하러 다녀오겠습니다~^^/ 윗글들 정독 후 미션답도 주말까지 완성해보겠습니다~♡♡
출근 전 틈새 독서라니,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피리 부는 아름쌤'이라니 상상만 해도 아이들이 졸졸 따르는 행복한 풍경이 그려지네요.ㅎㅎ 아이들에게 즐거운 에너지 듬뿍 전해주고 오세요. 주말에 남겨주실 미션 답변도 아름쌤님만의 생생한 이야기로 채워질 것 같아 벌써 기대됩니다.
화제로 지정된 대화
2장 天에 대한 질문드립니다. 1. 내면의 양심인가, 절대자의 시선인가? (하늘을 대하는 태도) 주자는 '하늘(天)'을 우주 만물을 관통하는 '자연의 이치(천리)'로 보았습니다. 따라서 주자에게 '하늘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내 마음속의 양심과 본성을 잃지 않으려는 내면적 노력을 의미합니다. 반면 다산은 하늘을 인간의 선악을 감시하고 심판하는 '인격적 주재자(상제)'로 보았습니다. 다산에게 '하늘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나를 지켜보는 절대자의 시선을 의식하며 행동을 조심하는 것(신독)을 뜻합니다 . 여러분은 삶에서 올바른 길을 가려 할 때, "내 안의 양심이나 원칙(주자)"을 더 의식하시나요, 아니면 "나를 지켜보는 외부의 시선이나 절대적인 존재(다산)"를 더 의식하시나요? 어느 쪽이 도덕적 행동을 하는 데 더 강력한 동기가 된다고 생각하시나요? 2. 지천명(知天命) : 세상의 이치를 깨닫는 것 vs 나의 소명을 아는 것 공자는 "오십에 천명을 알았다(五十而知天命)"고 했습니다. 주자는 이를 "우주와 만물이 돌아가는 근본 원리를 완전히 이해하게 된 상태"로 해석하여, 지적인 깨달음의 완성으로 보았습니다. 하지만 다산은 이를 "하늘이 나에게 부여한 구체적인 정치적·문화적 사명을 자각한 상태"로 해석했습니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어른이 된다는 것(지천명)'은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를 통달하여 마음에 흔들림이 없는 상태(주자)"에 가까운가요, 아니면 "내 남은 생을 바쳐 완수해야 할 구체적인 과업이나 소명을 발견하는 것(다산)"에 가까운가요? 질문에 국한하지 않은 다양한 의견도 너무 소중합니다. 또한 답하기 어려운 미션은 넘기셔도 됩니다. 자유롭게 글을 남겨주세요.
@모임 그믐 회원 분들의 이야기를 기다리며, 제가 먼저 스타트를 끊어봅니다. 1. 저는 주자의 방식인 내 안의 '양심'을 믿고 싶습니다. 외부의 시선이나 벌이 무서워서 하는 행동은 왠지 타율적인 것 같아요. 내 마음이 편안하기 위해서, 내 본성을 지키기 위해서 올바른 선택을 할 때 비로소 진정한 자유를 느끼는 것 같습니다. 물론 그만큼 유혹에 흔들리기도 쉽지만요. 2. 여기서는 다산의 손을 들어주고 싶습니다. 단순히 세상 돌아가는 원리를 아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안에서 '나의 소명'을 찾아내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앎이 아닐까요? 공자가 천하를 주유하며 고생을 사서 했던 것도, 결국은 자신이 깨달은 이치를 세상에 실현하려는 소명 의식 때문이었을 테니까요. 다른 분들의 '하늘'은 어떤 의미인지, 또 '어른이 된다는 것'은 어떤 느낌인지 정말 궁금합니다.
1. 내면의 양심인가, 절대자의 시선인가 외부의 시선이나 절대적인 존재가 내면화되어 내 안의 양심이되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합니다. 인간동물의 행위의 기준이 되는 도덕/가치/양심 등은 모두 인간의 발명품이라는 글을 오랫동안 읽어왔습니다. 그리고 프로이트식으로 말하면 이것이 내면화 되어 우리의 초자아를 형성하는 것이 아닐까요. 2. 지천명에 관하여 어른이 된다는 것(지천명)이 무엇인지에 대한 답도 저는 역시 주자와 다산 양쪽의 모두 해석을 뒤섞어 대답하고자 합니다.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를 통달하여 마음에 흔들림이 없는 상태"는 나이를 먹어가면서 인격적 성숙을 이루어야만 얻을 수 있는 상태입니다. 한편 인격적 성숙을 이루고 원만하게 살아가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사회나 공동체에 무관심하다면 철저히 개인적인 삶이라 할 수 있겠지요. 저는 나이를 먹어가면서 갈수록 중요한 것은 우리의 공동체/사회이구나 그것을 깨닫고 있습니다. 행복이란 결국은 사회적 행복이었어요. 제 모든 행복은 사회에서 비롯됨을 구구절절 깨닫고 있습니다. "내 남은 생을 바쳐 완수해야 할 구체적인 과업이나 소명"은 결국 사회적 삶에 연결된다고 보아요. 작가 데이비드 브룩스의 말을 빌리자면 '두 번째 산'에 올라이 (공동체와 얽힌) 과업이나 소명을 발견하는 것이 진정으로 성숙한 인간상[우리 시대에 필요한 어른상]이라고 봅니다.
우주먼지밍님, 동양의 고전과 서양의 현대 철학(심리학)을 넘나드는 놀라운 통찰력을 보여주시네요! 특히 혼자만 고고하게 도를 닦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과 부대끼며 그 안에서 과업을 발견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지천명'이자 어른의 모습이라는 말씀에 100% 공감합니다. 데이비드 브룩스의 '두 번째 산' 비유도 정말 찰떡입니다. 나를 위한 성취(첫 번째 산)를 넘어 타인을 위한 헌신(두 번째 산)으로 나아가는 과정이 곧 공자가 걸었던 길이 아닐까 싶습니다. 깊은 통찰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매번 질문과 상관없는 댓글만 남기다가 처음으로 편집자님의 질문에 나름대로 답을 적어봅니다. 1. 저는 "내 안의 양심이나 원칙"을 우선시하고 싶지만, 정작 행동할 때는 "나를 지켜보는 외부의 시선"을 더 의식하게 되곤 합니다. 무언가를 하려다 멈칫하게 되는 순간도, 대개 누군가 나를 보고 있지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2. 오십이 됐다고 해서 "세상의 이치를 통달해 마음에 흔들림이 없는 상태"가 되기는 쉽지 않아 보입니다. 그 정도면 거의 열반의 경지가 아닐까 싶거든요. 오히려 다산이 말한 의미가 제가 오십이 됐을 때 지향하고 실천할 수 있는 현실적인 목표라는 생각이 듭니다. 결국 제 마음은 다산의 해석으로 기우네요. 팬심을 조금 보태긴 했지만, 그 마음을 빼고 보더라도 다산의 이야기가 훨씬 깊이 와닿습니다.
리버풀님, 드디어 질문에 대한 첫 답변을 남겨주셨군요! 정말 반갑고 감사합니다. 다산의 해석에 마음이 기우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팬심을 빼고 보더라도 다산의 이야기가 더 와닿는 이유는, 그가 '땅에 발을 디딘 철학'을 했기 때문이겠죠. 1번 답변을 읽으며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우리는 모두 내면의 양심만으로 살고 싶어 하지만, 솔직히 누군가 보고 있을 때 더 착해지니까요. 다산도 바로 그런 나약함을 알았기에, 하늘이 보고 있다는 긴장감을 그토록 강조하셨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3부 1장 「學」의 여운이 너무나 크게 남는지라, 《論語》〈陽貨篇〉에 보면, 공성께서 자로(仲由)에게 하신 말씀을 Excel 표로 정리해 봅니다. 이 말씀에 감히 저는 아무런 반박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原文為「子曰:『由也,女聞六言六蔽乎?』對曰:『未也。』『居,吾語女。 好仁不好學 其蔽也愚 好知不好學 其蔽也蕩 好信不好學 其蔽也賊 好直不好學 其蔽也絞 好勇不好學 其蔽也亂 好剛不好學 其蔽也狂
작가와책읽기님, 육언육폐(六言六蔽)를 통해 3부 1장 '學'의 핵심을 정리해주셨네요. 아무리 좋은 仁도, 勇도, 直도 배움이 받쳐주지 않으면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는 공자의 통찰은 반박의 여지가 없는 것 같습니다. 특히 자로처럼 열정이 넘치는 사람에게는 이 가르침이 날카로운 조언이었을 것 같습니다. 3부 1장에서 느꼈던 여운을 이토록 완벽한 구절로 정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두 개의 논어』 2장 「天」에 대한 독해 — 하늘을 의식하는 방식과 지천명의 의미 ◐ 2장 「天」은 ‘하늘이 무엇인가’를 설명하는 장이 아니다. 이 장은 오히려 인간이 무엇을 의식하며 살아야 하는가를 묻는다. 주자와 다산의 해석은 그 출발점이 다르다. 주자는 하늘을 우주 만물을 관통하는 자연의 이치(天理)로 본다. 따라서 하늘을 두려워한다는 말은 외부 존재에 대한 공포가 아니라, 내면의 양심과 본성을 잃지 않으려는 자기 성찰의 태도를 뜻한다. 도덕은 외부에서 강제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안에서 스스로를 규율하는 힘이다. 반면 다산은 하늘을 인간의 선악을 살피는 인격적 주재자(上帝)로 본다. 하늘은 나를 지켜보고 있으며, 인간은 그 시선을 의식하며 행동을 삼가야 한다. 여기서 도덕은 내면의 자율성보다 신독(愼獨)이라는 긴장감에서 비롯된다. 아무도 보지 않을 때조차 스스로를 경계하는 태도가 강조된다. 그러나 이 둘은 상반되는 관점이 아니라, 도덕이 작동하는 두 개의 축에 가깝다. 내면의 양심만으로 인간은 쉽게 느슨해지고, 외부의 시선만으로 인간은 쉽게 위선에 빠진다. 주자의 하늘이 방향을 잡아 준다면, 다산의 하늘은 행동을 바로잡는 긴장을 부여한다. 도덕은 이 두 힘이 함께 작동할 때 현실 속에서 유지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이 책의 저자 한형조의 역할이 분명해진다. 그는 주자와 다산의 해석을 단순히 병렬로 소개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오히려 두 해석이 서로를 비추도록 배치함으로써, 독자가 ‘하늘’을 관념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삶의 태도로 체험하도록 만든다. 『두 개의 논어』에서 주자와 다산의 긴장은 학설의 차이가 아니라, 독자의 내면에서 윤리적 감각을 흔들어 깨우는 장치로 기능한다. 이 책이 고전 해설서가 아니라, 고전을 통해 독자의 삶을 재배치하는 사유의 장이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지점에서 책의 후반부에 등장하는 다산의 한 문장이 이 논의를 결정적으로 재정렬한다. 다산은 공자의 평생 학습을 꿰는 원리가 주자가 말한 ‘천리(天理)’가 아니라 ‘충서(忠恕)’라고 말한다. 유교를 한 글자로 집약한다면 ‘理’가 아니라 ‘恕’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곧 공자가 의식한 하늘이 형이상학적 질서가 아니라, 타인을 대하는 태도로 귀결된다는 뜻이다. 공자가 「논어」 〈팔일〉편에서 말한 구절, 「獲罪於天,無所禱也」 하늘에 죄를 지으면 빌 곳이 없다 는 바로 이 지점을 정확히 가리킨다. 하늘은 제사를 통해 달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이미 인간의 삶 속에서 드러나는 윤리적 기준이다. 하늘을 의식한다는 것은 곧, 타인을 향한 나의 태도를 끊임없이 점검하는 일이다. ◑ 지천명(知天命)에 대한 해석 공자가 “오십에 천명을 알았다(五十而知天命)”고 한 말에 대해, 주자는 이를 우주의 근본 원리를 통달한 상태로 해석한다.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지적 완성의 경지다. 그러나 다산은 이를 하늘이 자신에게 부여한 구체적인 소명을 자각한 상태로 본다. 세상을 이해하는 것보다,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 사람인가를 아는 것에 가깝다. 이 해석은 매우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세상을 많이 아는 사람보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분명히 아는 사람이 더 단단해 보이기 때문이다. 지천명은 철학적 통찰이라기보다, 이제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자기 몫의 책임을 받아들이는 순간처럼 느껴진다. ● 2장 「天」에 대한 최종 인식 : 개인적 성찰 2장 「天」을 통해 드러나는 것은 ‘하늘’이라는 관념이 아니라, 인간의 삶을 지탱하는 윤리적 구조다. 하늘은 형이상학이 아니라, 인간의 태도를 통해 드러나는 윤리적 기준이다. 주자의 하늘은 내면을 단단하게 하고, 다산의 하늘은 행동을 긴장시키며, 다산이 강조한 ‘충서’는 그 모든 하늘 의식이 결국 사람 사이의 관계로 귀결됨을 보여준다. 지천명을 지나 이순을 목전에 둔 나이에 이 장을 읽으며, 공자의 말이 비로소 다른 울림으로 다가왔다. 이제 하늘의 이치를 이해하려 애쓰기보다, 사람을 어떻게 대하며 살아왔는가를 돌아보게 된다. 양심과 시선, 이치와 소명, 성찰과 실천의 문제는 모두 결국 인간관계 속에서 드러난다. 공자가 말한 하늘은 멀리 있지 않았다. 그것은 언제나 사람 사이에서 나를 시험하고 있었다. 하늘은 언제나 나의 말투에 있었고, 나의 선택에 있었고, 나의 태도에 있었다. 그래서 2장 「天」은 하늘에 대한 철학이 아니라, 인간이 어떻게 사람답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물음으로 읽힌다. 나는 그동안 사람을 어떻게 대하며 살아왔는가. 공자는 제나라 경공이 정치를 묻자 이렇게 답했다. 齊景公問政於孔子。孔子對曰:君君,臣臣,父父,子子。 하늘의 이치를 설명하지 않았다. 대신, 사람의 자리를 말했다. 은하수의 가장 빛나는 별, 공자가 말한 ‘하늘을 의식하는 삶’은 결국 각자가 자기 자리에서 사람답게 사는 일로 나타나야 한다는 뜻이었다. 이 「天」에 대한 장을 덮는 순간, 비로소 깨닫게 된다. 공자가 말한 하늘은 머리로 이해하는 대상이 아니라, 삶으로 드러나는 기준이었다는 사실을. 하늘을 의식한다는 것은, 내가 다른 사람에게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묻고 또 묻는 일이라는 것을 말이다.
작가와책읽기님, 한형조 교수님이 이 글을 보셨다면 얼마나 기뻐하셨을까요? 저 또한 작가와책읽기님의 글을 읽으며 몇 번 전율이 일었습니다. "이 책은 고전 해설서가 아니라, 고전을 통해 독자의 삶을 재배치하는 사유의 장이다"라는 말씀처럼, 작가와책읽기님은 텍스트를 읽는 것을 넘어 삶으로 체화하는 과정을 완벽하게 보여주시네요. 지천명의 해석을 '자기 몫의 책임을 받아들이는 순간'으로 읽어내신 부분은 많은 분에게 큰 위로와 용기가 될 것 같습니다. 머리가 아닌 삶으로 읽어낸 공자의 하늘, 그 귀한 깨달음을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우리 모임의 깊이가 한 뼘 더 깊어졌습니다. 작가와책읽기님의 댓글 자체가 하나의 훌륭한 '논어 해설서' 같아서, 저도 모르게 옷깃을 여미고 읽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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