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 시리즈 함께 읽기 1. <아이리스> - 엘레나 포니아토프스카

D-29
우윳빛 새하얀 피부, 엄마의 향기, 내 찡그린 얼굴 위로 나뭇가지처럼 떨어지는 머리카락, 엄마의 목, 아, 꽃 같은 우리 엄마. 엄마는 나를 '우리 물망초'라고 부르며 재빨리 입을 맞춘다. 내가 아직까지도 손에 쥐고 있는 말이다. (...) 문 하나가 닫힌다. 하나, 둘, 하나, 둘, 작고 푸른 맥박이 뛰는, 내 손아귀에 붙들린 물망초와 함께 나는 홀로 남겨진다.
아이리스 21-22/528, 엘레나 포니아토프스카 지음, 구유 옮김
나는 전부 다 한다, 그러면 나를 사랑해주겠지 싶어서. 나는 따귀를 맞지 않지만, 동생은 늘 맞는다. 눈으로 칼을 던지는 동생의 눈은 점점 새카매지는데, 색이 없는 내 눈은 보모들의 눈처럼 창백한 파란색이다. 동생의 눈구멍에는 뜨거운 불덩이가 있다.
아이리스 23/528, 엘레나 포니아토프스카 지음, 구유 옮김
마드무아젤에게 달려가고 싶다. 나를 안아줬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해줬으면. 나더러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해 보이는 마드무아젤의 장갑이 까마귀처럼 보인다. 누누, 누누, 가야겠어요, 누누. 저 둘과 함께 가야겠어요, 누누, 나는 무섭고 이 모든 게 너무도 커요, 너무도.
아이리스 31/528, 엘레나 포니아토프스카 지음, 구유 옮김
어느 오후 피아니스트 프랑시스 풀랑크를 보러 갈 때 지났던 길. 그날 그는 피아노를 쳐주며 우리를 '나의 작은 이웃들'이라고 불러주었다.
아이리스 35/528, 엘레나 포니아토프스카 지음, 구유 옮김
이 부분은 작가의 진짜 경험일 듯 해요! 오오 정말로 뿔랑을 직접 만나서 대화도 나눴다고? 하면서 역시 작가가 귀족 신분이었음을 다시한번 실감했습니다. 생각보다 더 많은 부분들이 실제 경험에 기반하고 있는 것 같아요. 누누가 5월21일에 아기 마리아나를 받았다는데, 작가 엘레나의 생일이 5월19일이더라고요! 자서전과 자전적 소설의 경계를 넘나드는 박완서 작가님의 작품들도 떠올랐습니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박완서 소설전집 결정판' 19권. 자신의 경험을 소설 소재로 녹여내 왔던 박완서가 오롯이 본인의 경험만을 써내려간 '자전적 이야기'다. 일제강점기 국민학생으로서의 기억, 창씨개명 경험, 세계2차대전의 종결, 서울대 입학, 그리고 6.25까지의 격변기를 지낸 작가의 유년 시절 경험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그리고 지난 가을에 읽은 토베 디틀레우센의 자전적 소설 <코펜하겐 삼부작>도 많이 떠올랐어요. 거기서도 1권 <어린시절>에서 주인공(사실 작가 본인. 마치 박완서 소설처럼 주인공 이름 포함 모든것이 작가 본인 실제 이력과 거의 똑같이 서술됨) 여자아이가 엄마의 사랑을 갈구하는, 엄마를 너무도 아름다운 공주나 천사처럼 묘사하는 대목들이 많이 등장하거든요. 물론 엄마 캐릭터의 결이 조금 다르고, 토베는 찢어질 듯 가난한 집에서 자라지만, 당시 아동에 관련된 윤리의식이나 가정교육방식이 지금과 많이 달랐던 것이 결국 부자나 귀족이나 서민이나 모두 비슷한 상황일 수 밖에 없었겠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그 가운데서도 훌륭한 부모 밑에서 듬뿍 사랑받으며 자란 아이들이 많았겠지요..?
[세트] 어린 시절 + 청춘 + 의존 - 전3권 - 코펜하겐 삼부작
첫번째 챕터에서는 마드무아젤 뒤랑과의 관계가 가장 흥미로웠지 않나 싶네요. 끝까지 누누와 비교하고 경계하면서도, "그러면 나를 사랑해주겠지 싶어서" 모든 예쁜 짓을 다 하고 말을 잘 듣는 모습. 신기한 것은, 엄마를 두고는 사랑받고 싶다고 직접적으로 표현한 적은 없었던 것 같아요. 엄마는 그저 그림 속 예쁜 공주같은 존재, 모든 아름다운 묘사를 다 동원해서 찬미하는 대상이고 ("살아 있는 그림") 엄마보다 보모가 물리적으로나 내적으로나 훨씬 더 가까이에 존재하다보니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대상으로 인식하는 것 같은데, 안타깝게도 그 보모로부터도 무조건적인 사랑을 못받으니 원 ㅠㅠ 이런 경험들이 이후 마리아나가 성인이 되고 어떻게 작용할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아주 나중에도 어떤 하녀인지 보모인지 집안 하인 한명이 주요인물로 등장하는 걸로 알고 있어요. 개인적으로는 (지금 시점에서는 잠시 사라진) 뒤랑 양이 다시 등장해서 손가락의 사연도 밝혀주고, 마리아나와 좋은 관계를 이어 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ㅎㅎ
소피아와 내가 가진 분뇨에 대한 강박은 마드무아젤 뒤랑조차 어쩔 수 없다. 20년 후, 소피아는 피포 삼촌의 죽음에 관해 이야기하게 될 터였다. "괜찮은 죽음이었죠. 가여운 피포 삼촌은 똥을 싸다가 돌아가셨어요."
아이리스 27/528, 엘레나 포니아토프스카 지음, 구유 옮김
스무살이 넘어서도 이어지는 소피아의 똥사랑... ㅎㅎㅎ 소피아 진짜 어떤 어른으로 성장하게 될지 기대됩니다! ㅋㅋㅋ
분뇨 강박에 대한 내용을 보니 프로이트의 항문기가 생각나네요. 예전에는 너무 엄하거나 느슨한 양육방식이 항문기에 영향을 미친다고 했던 것 같은데 그걸 염두에 둔 건지..?
오호 일리있네요! ㅎㅎ
아침에, 할머니는 우리에게 묻는다. “큰 일 봤니?” 할머니는 우리가 뒷간에서 돌아올 때마다 ‘큰 일’, ‘작은 일’이라고 말한다. 그러니 학교에서 선생님이 엄숙한 목소리로, 나폴레옹이 ‘큰일’을 이뤄냈다고 말하는 소리를 들을 때면 할머니의 아침 질문이 떠오르고, 나는 난처해지는 것이다. 선생님은 적의를 내비치며 나를 움켜잡는다.
아이리스 37/528, 엘레나 포니아토프스카 지음, 구유 옮김
괜찮다, 전부. 나를 사랑해주기를. 나는 그의 개가 되고, 꼬리를 흔든다. 나를 사랑해주기를, 배를 까 보인 내 목을 긁어주기를, 내게 말해주기를, 털이 복슬복슬한 내 긴 귀와 촉촉한 송로버섯 같은 코와 따스한 목을 쓸어주기를, 나는 속수무책으로 더 원한다. 배를 까 보이고, 옆구리를 걷어차이는 것도 괜찮다, 다 이유가 있을 테니까. 평평한 머리에 손에는 망치를 든 나의 선조 피테칸트로푸스에렉투스가 그를 내친 무리에서 멀어지려고 사막을 내달리며 울부짖었던 것처럼 울부짖으며 떠나기 전까지는, 다 이유가 있다.
아이리스 38-39/528, 엘레나 포니아토프스카 지음, 구유 옮김
이 부분은 나중에 등장할 어떤 중요한 일들이나 경험들에 대한 암시처럼 느껴지기도 하네요...
나는 언제나 “네”라고 대답하며 긍정의 표시로 고개를 끄덕인다. 내 안에는 머리를 올리고 내리는 용수철이 들어 있다. 위, 아래, 위, 아래. 반면, 소피아에게는 머리를 좌우로 움직이는 용수철이 들어 있어서 쉬지 않고 부정한다. 혀를 내밀고, 눈을 모아 얼굴을 찡그리며 힘껏 소리 지른다. “싫어.”
아이리스 42/528, 엘레나 포니아토프스카 지음, 구유 옮김
엄마는 무얼 보고 있는 걸까? 내 기척조차 듣지 못한 엄마는, 내가 가만히 곁에 있는 것도 모른다. (…) 엄마의 옷자락을 잡아끌자 엄마가 뒤를 돌아 나를 보지만, 눈은 나를 보지 않는다. 하느님, 엄마에게 저 좀 보라고 해주세요! 엄마와 대화를 나누어본 사람들은 엄마가 그들을 보지 않는 것 같다는 사실에, 엄마가 자신과 타인 사이에 두는 거리에 절망한다. 그럴 때면 엄마를 잡고 흔들고 싶어진다. “저 여기 있어요, 저 좀 보세요.” 그건 여태 아무도, 아빠 조차도 감히 하지 못한 일이다. 다른 곳에 가 있는 엄마의 마음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던 아빠는, 부재와 결혼했다.
아이리스 45-46/528, 엘레나 포니아토프스카 지음, 구유 옮김
엄마=부재 그 자체 였군요... ㅠㅠ
두번째 챕터는 전쟁을 피해 남쪽의 조부모님 댁에서 지낸 시절과, 배를 타고 엄마의 고향 멕시코로 이주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배 위에서도 엄마는 사교생활에 집중하고 아이들은 두려움 가운데 혼자 잠드네요. ㅠㅠ 멕시코에는 과연 할머니가 내셔널지오그래픽에서 보여주셨던 식인종 여자들이 기다리고 있을지... ㅎㅎㅎ 정말 인상깊었던 장면은.. 세관에서는 설탕통에 숨겼던 돈을 다 빼앗기는 엄마... 배에서 내릴 때는 격리를 거부하면서 말빨로 경찰을 이겨버리는 엄마... 공작부인도 아줌마는 아줌마인거네요? ㅎㅎㅎ
https://maps.app.goo.gl/L3zxja9vVrjJFSjs8 사라고사가 스페인이군요 ㅎㅎ
넵 저도 지도에 이렇게 경로를 표시해 봤어요. 사라고사에서 아메리카행 배를 탄 것 같지는 않고, 거기서 또 이동했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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