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로 기후위기/인류세 읽기] 『야성의 부름』 잭 런던, 1903.

D-29
오, 벌써 많이 가셨네요! @.@ '불과 지붕의 시대'라는 구절이 정말 상징적이네요.
저도 이 대목이 인상적이라 문장을 수집해봤는데요, 그믐에서 이렇게 함께 읽으니 다른 번역본도 엿볼 수 있어 좋네요. 제 취향으로는 @드모닝 님께서 올려주신 번역이 살짝 더 맘에 듭니다.
머리 위에서는 북극광이 차갑게 빛나고 별들이 춤을 추다 얼어붙고 대지가 눈의 휘장 속에서 무감각하게 얼어 버릴 때 에스키모개들의 노래는 어쩌면 삶에 대한 유일한 도전이었는지 모른다. 아니, 길게 끄는 울음소리와 반쯤 흐느끼는 듯한 구슬픈 소리는 생존의 고뇌를 표현한 삶의 애원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오래된 노래, 개 종족만큼이나 오래된 노랫소리로, 슬픈 노래만 있었던 때 묻지 않은 세상의 태곳적 노래 가운데 하나였다. 그것에 수많은 세대의 슬픔이 담겨 있어 그 비애에 벅의 마음이 끌렸는지도 모른다. 그가 신음하며 흐느낄 때 그 속에는 오래된 삶의 고뇌, 야생의 조상들이 지녔던 고뇌가 있었고, 그들에게 공포와 신비를 던진 바로 그 추위와 어둠이 드리워 있었다. 벅이 그 소리에 그토록 끌린다는 것은 그가 문명의 상징인 불과 지붕의 세대를 거슬러 울음의 시대였던 거친 태초의 삶으로 완전히 돌아갔다는 것을 의미했다.
야성의 부름 48-49쪽, 잭 런던 지음, 권택영 옮김
다른 번역본을 비교해보니까 좋네요! 벅이 야성을 되찾아(?!)가는 과정을 차곡차곡 쌓아가는 과정인 것 같습니다. 아직 절반 밖에 못 봤지만, 해리슨 포드가 나오는 영화 <콜 오브 와일드>는 헐리우드 스타일(가족애, 동료애 등) 상당히 순화하고 단순화한 버전이던데요. 여기서는 벅의 야성 깨우침을 '검은 늑대'로 형상화하더군요. 벅이 오로라를 볼 때나 거대한 자연을 보면서 뭔가를 느낄 때마다 매서운 눈의 검은 늑대가 난데없이 나타났다 사라지곤 합니다.
그는 경험에서도 배웠지만 그보다 오랫동안 죽어 있던 본능이 되살아나서 그렇게 빨리 적응할 수 있었다. 길든 세대의 유산들이 그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야성의 부름 51p, 잭 런던 지음, 권택영 옮김
야성의 부름"전 세계의 위대한 개 이야기를 가운데 가장 인기 있는 장편"이라는 찬사를 받아온 잭 런던의 작품. 주인공 벅이 알래스카 대자연에서 사투를 벌이며 대장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개'의 시점으로 서술한 작품이다. 잭 런던은 1897년 클론다이크 골드러시에 참여해 알래스카에 갔던 경험을 토대로 이 소설을 썼다. 금광을 캐지는 못했지만, 이 작품으로 전 세계적인 유명 작가의 반열에 올랐다.
벅이 적응해나가는 속도가 너무 빨라서, 정말 이렇게 빨리 배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잭 런던이 실제로 했던 경험에 바탕해서 썼을 것 같기는 한데 말이죠. 저는 벅이 불피운 텐트 속으로 들어갔다가 혼쭐난 다음, 다른 동료 개들이 하는 것을 따라서 눈을 파고 들어가서 그 속에서 처음으로 잠을 자는 장면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쌓인 눈 속에서 벅이 솟아오르는 장면에서, 마치 야생의 개로 다시 태어나는 것 같은 묘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벅은 온몸의 근육을 본능적으로 부르르 떨며 바짝 긴장하고 목과 어깨 털을 곤두세운 채 사납게 으르렁 짖고 나서, 번쩍이는 구름 속에서 눈발이 흩날려 앞이 안 보이는 아침 속으로 높이 튀어 올랐다. 발이 땅에 채 닫기도 전에 그는 눈앞에 펼쳐진 하얀 캠프를 보았고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았다. 그는 마누엘과 함께 산책을 나왔을 때부터 전날 밤 잠자리를 파던 때까지를 기억해 냈다.
야성의 부름 p.30, 잭 런던 지음, 권택영 옮김
벅의 발전(아니 퇴보)은 빠르게 이뤄졌다. 그의 근육은 쇳덩이처럼 단단해져서 웬만한 고통에는 무뎌졌다. 그는 내적, 외적으로 경제성을 추구했다. 그는 아무리 흉하고 소화가 어려운 음식이라도 무엇이든지 먹어 치웠다. … 시각과 후각이 굉장히 예민해졌고, 잠들어서도 가장 작은 소리까지 들으며 그것이 위험의 신호인지 평화의 예고인지 분간할 정도로 청각이 발달했다.
야성의 부름 p.34, 잭 런던 지음, 권택영 옮김
벅의 내부에서 그를 압도하는 원초적 야수는 강력했고, 사나운 썰매개의 생활은 그것을 점점 더 키웠다. 그러나 성장은 은밀하게 이루어졌다. 눈치 보는 법을 새롭게 배운 그는 자제할 줄 알고 침착해졌다. 그는 새로운 생활에 적응하느라 너무나 바빠서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고, 싸움을 벌이지 않도록 또 가능하면 싸움에 말려들지 않도록 조심했다.
야성의 부름 p.38, 잭 런던 지음, 권택영 옮김
벅이 한 걸음씩 변해가는 표현들이 소설 속에 촘촘히 표현돼 있어서 눈에 띄는 대로 가져와봤습니다.
서티마일 강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물살이 광폭해서 얼 틈이 없었고 얼음이 그나마 좀 붙은 곳은 소용돌이치거나 흐름이 고요한 곳이었다. 이 끔찍한 50킬로미터를 질주하는 데 엿새 동안의 힘겨운 노동이 필요했다. … 페로는 앞장서서 길을 더듬다가 얼음이 얇게 덮인 곳을 열두 번이나 부서뜨렸고 그가 들고 다니던 장대로 겨우 목숨을 건지곤 했다. 그 장대는 그의 몸무게로 얼음이 부서져 생긴 구멍 양쪽에 걸리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한파가 닥쳐와 온도게가 영하 50도를 기록하자 그는 구덩이에 빠질 때마다 살기 위해 불을 피우고 옷을 말려야 했다.
야성의 부름 p.42, 잭 런던 지음, 권택영 옮김
서티마일 강은 유콘 강의 상류부분이고 길이는 약 50km 정도 되는 구간을 말하네요. 강의 구간 길이를 이름으로 삼은 게 재밌네요. 이 구간은 물살이 세서 얼음이 꽁꽁 얼지 못했다고 합니다. 클론다이크 골드러시 당시 수만 명의 금채굴꾼들이 이 강을 이용해 이동했는데, 소설에도 표현돼 있듯이 아주 악명이 높았고, 1991년에 캐나다 유산으로 지정됐다고 하네요. https://chrs.ca/en/rivers/thirty-mile-yukon-taga-shaw-river
서티마일 강의 얼음물에 빠져 개고생하는 벅 일행의 이야기를 오늘처럼 추운 날에 읽으니 더 실감이 나네요 ㄷㄷ (아무래도 영하 50도의 추위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요.) 근데 서티마일 강이라는 게 30마일(50km) 강이었다니 ㅎㅎ
그러니까요. 악명 높은 특정 구간을 그 길이로 지칭했다는 걸 알고 저도 살짝 허무해서 웃었습니다. >.<
<화이트 팽> 애니메이션을 아주 잘 만든 것 같더라고요! 주말에 애니메이션도 보고, 해리슨 포드 나오는 영화도 봐야겠습니다.(아직도 못 봤네요. ㅎㅎ)
클론다이크 골드러시 당시 시대 배경을 정리해보았습니다. 1890년대 후반 클론다이크 골드러시는 단순한 금광 발견 이상의 복잡한 배경이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미국 경제 공황, 제국주의 확장, 교통·통신의 발달이라는 역사적 조건 속에서 벅 같은 개들이 유콘 지역으로 끌려가게 된 것이었습니다. 1. 1893년 경제 공황과 철도 버블 1929년 대공황 이전에도 1893년에 심각한 공황이 있었습니다. 주된 원인 중 하나는 철도 과잉 건설로 인한 버블 붕괴였으며, 이는 은행과 금융 시스템 전반으로 위기를 확산시켰습니다. 2. 금본위제와 디플레이션의 악순환 또 다른 원인은 금본위제였습니다. 당시 미국과 영국을 중심으로 하는 대서양 경제권은 급속도로 성장하며 더 많은 통화량을 필요로 했지만, 금 공급이 이를 따라가지 못했습니다. 결과적으로 돈(금)의 가치가 치솟으면서 물가가 하락하는 디플레이션이 발생했고, 아래와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물가 하락에 대한 기대 심리와 소득 감소 → 소비 급감 → 기업 매출 감소 → 해고 및 임금 삭감 → 수입은 줄었으나 은행 대출(명목 가치)은 그대로 → 실질 부담 증가 → 파산 (디플레이션이 발생하면 돈이 귀해집니다. 어제 천원으로 사과 1개를 샀다면 오늘은 2개를 살 수 있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내일 더 많이 살 수 있기 때문에 소비는 급감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돈을 손에 쥐기 위해 물건값을 계속 내리게 됩니다. 돈의 가치는 더 올라갑니다.) 3. 절박함이 만들어낸 10만 명의 이동 이때 발견된 클론다이크 금광은 불황에 허덕이던 사람들에게 구원의 빛과도 같았습니다. 경제 체제 자체도 새로운 금(통화량)을 절실히 필요로 하던 시점이었기에, 발달한 전신과 증기선을 통해 소식을 접한 10만 명의 인파가 단기간에 몰려갔습니다. 이때 금광 소식을 과장해 보도한 신문도 중요한 촉매 역할을 했습니다. 4. 제국주의와 미국/캐나다 국경 분쟁 금광이 발견되면서 당시 모호하던 알래스카와 유콘 지역의 미국과 캐나다(영국령) 사이 국경 분쟁도 격화되었습니다. 캐나다 당국은 무분별한 입국과 아사 사고를 막기 위해 '1톤 규정’(One Ton Requirement)을 세워 1인당 1톤의 식량과 장비를 갖춘 사람만 입국을 허용해주기도 했습니다. 이 분쟁의 승자는 미국이었습니다. 1903년 결성된 중재위원회(미, 영, 캐나다)에서 영국이 미국의 손을 들어주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영국은 독일을 견제해야 했고, 미국이 필요했던 겁니다. 클론다이크 금광은 캐나다 땅이었지만, 캐낸 금을 실어나르기 위한 항구는 미국 땅(Skagway, Dyea)이었기 때문에 미국은 물류가 오가는 항구를 장악함으로써 막대한 통행세와 관세 등을 챙길 수 있었습니다. 5. 문명의 확장과 벅의 아이러니 금광 주변으로 관청, 법정, 경찰이 들어오며 오지는 빠르게 문명화되었습니다. 하지만 인프라가 부족한 험지에서 필수적인 운송을 담당한 것은 소외된 가난한 노동자들과 벅 같은 개들이었습니다. 문명이 전 세계로 뻗어 나가며 야생을 정복하던 바로 그 시기에, 문명 세계에 살던 벅이 오히려 야생으로 들어가 '야성의 부름'을 듣게 된다는 점은 참으로 의미심장하고 아이러니한 대목입니다.
오. 흥미롭네요.
글이 너무 길면 읽기 힘든 걸 알면서도, 정리를 하다보니 글을 나눌 수가 없어서 한꺼번에 올리게 되었습니다. ^^; 이 소설에 대한 약간의 정보만 가지고 책을 선정했는데, 찾아보면 볼수록 시대의 흐름 속에서 탄생한 소설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정보 너무 좋습니다. 고맙습니다! 문학도 그것이 탄생한 시대와 떼려야 뗄 수 없는 만큼, 우리와 다른 시대의 문학을 읽을 때 그 역사와 배경을 알면 알수록 더 많이 보이는 게 있는 듯해요.
감사합니다! 긴 글이라 부담이 될까 걱정도 되고, 배경 얘기하다가 소설 얘기는 등한시하게 될까 걱정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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