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칭) 암병원 북클럽 - 1월

D-29
“우선순위를 어디에 두느냐”는 호스피스를 가장 단순하게 잘 설명하는 말이지만 막상 환자에겐 잘 다가오지 않을 것입니다. 저 역시 환자에게 호스피스를 권하면서도 말이 쉽게 나오지 않거든요. 보통 진료실에서는 이렇거든요. “가서 뭘 하는 건데요?” “여기서 받는 치료랑 다르지 않아요 복수를 빼고 통증을 조절하고…” “그럼 그냥 여기서 치료받으면 안돼요?” 아니, 그렇지 않다고, 일반적인 급성기질환을 다루는 병원에서는 환자분에 대한 치료가 제대로 되기 어렵다고, 냉정히 말하면 급성기병원에서 당신과 같은 말기환자는 치료의 우선순위가 떨어진다고, 말기암환자의 평안과 행복을 우선순위로 두고 그 문제를 다루는 것에 더 유능한 의료진에게 가시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솔직하고 적나라하게 말하는 것에는 늘 실패하고 말죠. 결국 저의 의도와 관계없이 환자에게는 “당신을 포기했고 이제 버릴 것”이라는 말로 들릴 가능성이 큽니다. 결국 뒤돌아서서 중얼거릴 뿐입니다. ‘그거 참 호스피스 좋은데 어떻게 설명할 방법이 없네….. 이거참 호스피스가 산수유도 아니고 그거참....
문제는 현대의학시스템과 문화가 그 긴 꼬리를 위해서만 만들어졌다는 점이다...(중략) 희망은 계획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진 계획은 희망밖에 없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 - 현대 의학이 놓치고 있는 삶의 마지막 순간 p.263, 아툴 가완디 지음, 김희정 옮김
종양내과학회에 가면 이 "긴 꼬리 ( long tail)"에 열광하는 목소리로 가득합니다. 사실 그런 목소리들과 열망들이 생존률을 향상시킨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일입니다. 가끔은 저도 이 긴 꼬리에 환자를 포함시킬 수 있다는 생각에 흥분하여 지나치게 낙관적인 전망만을 이야기하며 정말로 환자가 이해해야 할 문제들을 간과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반성합니다.
처음 환자를 만나보면, 의사가 자신을 버렸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99퍼센트는 자신이 죽어가고 있다는 걸 이해합니다. 하지만 모두 다 자신은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라죠. 여전히 병을 이기고 싶어 하는 거에요. "
어떻게 죽을 것인가 - 현대 의학이 놓치고 있는 삶의 마지막 순간 p.249, 아툴 가완디 지음, 김희정 옮김
오늘도 여러 환자를 버렸군요. '버리지' 못해서 계속 진료일정을 잡고 F/U 하는게 일종의 도리, 또는 의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오늘은 문득 희망고문만 하는게 아닌가 싶었어요. 환자에게도 어느 정도 체념하고 기존 치료에 더 이상 기대를 할 수 없다는 것을 실감하게 하려면 제가 먼저 정을 떼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더 싸가지없게 굴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잘해드릴 수록 기존에 치료받던 급성기병원에서 계속 뭔가 해줄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게 되는 건가 싶어서요.
의료진의 역할은, 환자의 선택이 왜곡되지 않도록 돕고 그 선택이 실제 삶에서 이어지도록 지지하는 일인 것 같습니다. 환자의 질병 진행 상태에 대한 이해와 기대 수준을 살피고, 그분이 진정으로 바라는 바가 무엇인지 함께 찾아가면서, 지금 이 순간 꼭 알아야 할 전문적인 정보를 제공하고, 주요 이슈에 대한 대화를 이어가고 싶습니다. 그런데 정작 많은 환자분들이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모르고 계신 경우도 있습니다. 그 지점을 함께 찾아가고 싶지만, 힘들게 시간과 비용을 들여 우리 병원을 방문하는 절박함이 먼저 보일 때면, 솔직한 이야기를 꺼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저 따뜻한 관심을 잃지 않고, 일단 환자분의 편에 서는 마음을 지켜 가는 것이 제 역할이 아닐까... 늘 시간은 적고 한계만 고민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ㅠㅠ
"일단 환자분의 편에 서는 마음을 지켜가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 같습니다! 현실은 팍팍하지만요. 그러다보면 환자도 본인이 무엇을 원하는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면서 알아갈 수 있겠지요. 가끔은 시간이 해결해주는 경우도 보게 되니까요.
제가 받는 많은 질문 중 단연코 1등이 호스피스 뭐가 다른가요? 라고 하면 한 단어로 할라니 정말 막막합니다. 저 나름대로 이해 시킬 수 있게 고민한 부분은 통증은 여기서는 통증 점수 몇점이니 진통제를 올리고 올리고 한다 .하지만 호스피스에서는 통증을 조절하는 부분이 진통제만은 아니고... 머리 감고 목욕하면 환자는 훨씬 덜 아프다고 느끼는 거다. 수혈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수치가 얼마니 1팩.. 2팩... 하지만 호스피스 기준은 수치가 아니고 환자가 힘들어 하는 거다 안 힘들어 하면 수혈 안하고 힘들어 하면 수혈하는 ... 이렇게 숫자가 아니라 환자의 주관적인 부분을 중심에 두고 하는 것이 호스피스 예요 라고 말하면 100% 못 이해 시켜도 조금은 이해를 시킬 수 있습니다.
좋은 대답이군요! 점수나 수치가 아니라 환자의 느낌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면서 진료하는 곳이다. 저도 참고하겠습니다^^
이 책에는 안락사에 대한 이야기도 나옵니다. 저자는 안락사 법안 자체에는 찬성하는 것 같아요. "나는 환자에게 그런 처방을 내릴 수 있도록 허용하는 법을 지지할 것이다. 사실 처방전을 받은 사람들 중 절반 정도는 그걸 사용하지 않는다. 그 처방전이 필요해질 때 자기 뜻대로 쓸 수 있다는 걸 아는 것만으로도 안심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안락사를 선택할 여지를 마련했다고 해서 환자들의 삶을 개선하는 문제에 대해 눈을 돌려버리게 된다면 사회 전체적으로 크나큰 해를 끼치게 될 것이다’ 라고 우려합니다. '네덜란드는 완화치료 프로그램 개발에 뒤쳐져 있다'는 예시도 들죠. 그러나 이 책 (2014)보다 더 뒤(2022)에 출판된 책인 <나는 죽음을 돕는 의사입니다>에서 캐나다의 의사 스테파니 그린은 벨기에에서 조력사망이 합법화된 이후 말기치료에 대한 접근과 투자가 상당히 증가했다는 근거를 제시합니다. (J Med Ethics. 2015 Aug;41(8):657-60. https://pubmed.ncbi.nlm.nih.gov/25648645/) 논쟁적인 주제이죠. 최근 강양구기자님의 조선일보 기고(https://www.chosun.com/opinion/specialist_column/2026/01/25/5YMVDUHC7NAHPKSNTCFMDJYOWE/)에서도 "의료 조력 사망 제도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라도 돌봄을 개인이 아니라 사회가 책임지도록 복지망을 촘촘히 만들려는 노력이 선행되어야 마땅하다."라고 말하는데 그래도 사회의 관심은 완화의료보다는 조력사망/안락사에 더 많이 가 있는 것 같아서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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