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피아야자로 그을린 몸은 무시무시했고, 커다란 날에는 동그랗게 텅 빈 눈과 남자 손가락만큼이나 큰 숯으로 된 이빨을 빼곤 하얗게 색을 칠해 놓았다.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 p.110, 치누아 아체베 지음, 조규형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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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화
라피아야자로 만든 차림을 찾아보니 이런 모습인 것 같아요. 마치 우리나라 전통인 사자놀음의 탈사자랑 비슷해 보이기도 하네요. 과거에 찍은 흑백사진으로 보니 기괴함이 더 크게 다가오는데 실물로 다가오는 광경이라면 정말로 소름 끼칠 것 같습니다.
은화
책에 나오는 에구구(egwugwu)의 가면 묘사를 보다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서구권에서는 악마를 묘사하는 걸 보면 검은 피부나 검은 털에 뒤덮인 경우가 많죠. 검은색은 밤이나 어둠과 결부되어 사람에게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고, 어둠의 은밀함과 불분명함으로 인해 부정함과 타락이 결부되어 악행과 연결짓죠.
그런데 생각해보면 백인들의 피부는 하얗죠. 흰 피부의 백인들은 본인들에게 익숙한 피부색의 관념과 인종의 개념으로 인해 검은색을 악으로 연결지은 게 아닐까요?
첨부된 이미지들은 몇몇 아프리카의 마스크들인데 수집문장의 묘사와 여러모로 비슷해보입니다. 전체적으로 하얀 얼굴에 일부 까만 칠을 하여 구분한 이빨. 텅 빈 눈. 가면 자체의 모양도 상당히 섬뜩함이 느껴지는데요. 아프리카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흰 색'이 두렵거나 일반적이지 않은 색, 또는 부정한 의미로도 쓰 이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흑인들에게는 자신들의 피부색이 아닌, '흰색의 백인'이 이방인이고 오히려 낯선 존재일테니까요.
마을을 가끔 지나가는 백인 방문자를 문둥병자와 같은 말인 '흰둥이'로 비하해 부르며 서로 웃는 대목에서 이들에게 '흰 색'이 어떤 의미일지 생각해 보게 됩니다.
은화
“ "그들 중 한 사람이 자주 여기를 지나가지." 마치가 말했다. "이름이 아마디란다."
아마디를 아는 사람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문둥이로, 문둥병을 점잖게 부르는 말이 '흰둥이'였다. ”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 p.91~92, 치누아 아체베 지음, 조규형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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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팔
성서에서 한센병에 걸린 환자를 두고 ‘눈과 같았다, 눈처럼 희어졌다’고 표현한 구절들이 생각나네요. 한센병이 진행되면 실제로 피부가 탈색되고 희어져서 그런 표현을 썼다고 들었어요.
향팔
엇,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나오는 가오나시랑도 닮은 것 같습니다!
꽃의요정
가오나시가 10명...ㅎㅎ
르구인
“ 오콩코는 벌써 염소 가죽 위에 앉아 첫 부인이 마련한 저녁을 먹고 있었 다. 음식 심부름을 한 오비아겔리는 식사가 끝나길 기다리며 앉아 있었다. 에진마는 어머니가 마련한 저녁을 아버지에게 건네고 오비아겔리 옆에 앉았다.
…
그는 두 번째 부인이 보내온 음식을 열어 먹기 시작했다. 오비아겔리는 첫 번째 접시를 들고 어머니에게로 향했다. 다음으로 은케치가 세 번째 요리를 들고 들어왔다. 은케치는 오콩코의 세 번째 부인의 딸이었다.
멀리서 북 치는 소리가 계속 되었다. ”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 p.58-59, 치누아 아체베 지음, 조규형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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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구인
저는 이제 5장까지 읽었습니다. 겨우겨우 따라가고 있네요.
남편은 여러 부인들이 차려주는 밥을 순서 대로 이렇게 다 먹는군요. 찾아보니, 요즘은 도시에서는 거의 다 일부일처제이고 시골에서도 이렇게 밥을 먹지는 않는다고는 하네요. 여러 부인들의 '평화로운 공존'을 위해서 부인들이 차려주는 밥을 조금씩이라도 다 먹어야 한다는군요.
저는 오콩코가 집안에서 부리는 행패에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습니다. 축제 기간에 둘째 부인에게 총질을 하고서도, 집안에서는 물론 집밖에서도 아무 일이 없이 그냥 지나가는 것도 놀랍습니다. 작가는 오콩코에게 이보족의 시대에 뒤떨어진(?) 그리고 좋지 않는 점들을 모두 투영한 걸까요?
은화
저렇게 먹으려면, 부인이 많은 집안은 아무리 조금 먹더라도 식사시간이 고역일 것 같아요 ㅎㅎ 하긴 일부다처제인 경우, 남편과 아내와의 관계만이 아닌 아내들끼리의 가정내 권력과 위계의 문제도 있으니 공평성을 위해 저렇게 할 수밖에 없겠네요.
오콩코가 유독 두드러지는 인물일 뿐, 앞으로 책을 읽으시다 보면 우무오피아의 사회상과 관습이 중간중간 보시게 될텐데 이그보족의 전통의 집합체이자 의인화 된 인물상 같습니다.
은화
“ ‘누구를 위해 이 모든 음식을 마련하셨습니까?’
‘그대들 모두를 위해서지요.’ 주인이 대답했지.
그러자 거북 이가 새들을 향해 말했어. ‘내 이름이 그대들 모두인 것 기억하지? 여기에서의 관례는 대표자 먼저, 그 다음에 다른 이들을 대접하는 것이야. 이네들은 내가 다 먹은 다음 너희들을 대접할 거야.’ ”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 p.119~120, 치누아 아체베 지음, 조규형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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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화
보통 동화에서는 거북이를 느리지만 우직하고 꾸준하며 성실한 동물로 묘사하는데 아프리카의 우화에서는 교활하고 머리를 굴리는 존재로 묘사하는 게 신기하네요.
은화
“ 왜 본의 아니게 저지른 잘못으로 이렇게 심한 고생을 해야 하는가?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 답은 없었다. 생각이 더욱 복잡해질 뿐이었다. 그는 내다 버린 자신의 쌍둥이들이 떠올랐다. 그 아이들이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대지의 여신이 쌍둥이는 대지에 대한 모독이므로 없어져야 한다고 명했었다. 그리고 만약 자신들이 위대한 여신을 거역하는 것에 대해 엄정한 벌을 내리지 않는다면, 여신의 저주가 명을 어긴 자들에게만이 아니라 온 땅에 퍼져 나간다는 것이었다. 어르신들은 손가락 하나에 기름이 묻으면 네 손가락으로 번진다고 말 하곤 했다. ”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 p.150, 치누아 아체베 지음, 조규형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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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화
앞서 말한 '가혹함'이 오콩코만이 아니라 우무오피아라는 사회 전반에 통용되는 현상임을 보여주는 문장 같습니다. 태어났을 뿐인데 죽어가야 했던 쌍둥이들. 영문도 모른 채 끌려와 희생된 이케메푸나, 아버지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고 얻어맞는 은워예, 우발적 실수로 인해 추방을 당하는 오콩코.
하나 같이 이들은 상황과 처지는 다르더라도 본인의 '의지'나 '선택'과 상관없이 어떤 사건으로 인해 부정적인 결과를 맞이하죠. 이들 각자가 가진 독특한 사정이나 이유는 전혀 고려되지 않은 채 일률적인 가치판단과 기준으로 인해 자신의 잘못 이상의 가혹한 처벌을 받죠. (오콩코의 우발적 살인은 사람에 따라 생각이 다르겠지만요.)
작가가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지만 다양한 상황과 인물들을 통해 우무오피아와 이그보의 전통 사회가 가진 폐단 또는 관습이라는 이름으로 전해지는 악습을 지적하는 문장으로 이해했습니다.
은화
그의 삶은 하나의 큰 열정, 즉 부족의 촌장이 되는 것에 사로잡혀 왔었다. 그것이 그의 삶의 용수철이었다. 그리고 그것에 거의 다가와 있었다. 그때 모든 것이 부서져 버렸다.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 p.155, 치누아 아체베 지음, 조규형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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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화
소설에서 '치'의 개념이 자주 나오죠. 이그보 사람들은 태어나기도 전부터 신과 조상신들에 의해 운명이 이미 빚어져 있다고 생각했답니다. 다만 이그보인들은 운명이 예정되어 있더라도 바뀌고 변할 수 있다고 봅니다.
치(Chi)는 창조신 '추쿠'가 개개인이 태어날 때마다 부여하는 일종의 개인적인 수호신이자 영혼을 이끄는 동반자라고 하네요. '치'는 사람에게 각자의 운명(아칼라 아카, Akala aka)을 부여하지만, 이 운명의 안에서 어떤 선택이나 결정을 내리고 어떻게 행동하냐에 따라 삶의 방향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책의 후반부에는 이켕가(Ikenga)를 집에 걸어두고 있다는 대목이 있는데, 이켕가는 보통 뿔이 달린 조각상의 형태로 묘사됩니다. (첨부사진) 이켕가는 개인이 가진 열정과 능력, 재능, 성취력을 상징한다고 해요.
'치'는 지도의 역할을 하여 가야될 길(운명)을 알려주지만, 그 길을 있는 그대로 따라갈지 또는 힘들게 돌아서 갈지 또는 반대로 갈지의 선택은 개인(이켕가)에게 달린 것이죠.
이그보인은 자신의 노력 외에도, 가족의 지원, 부족의 관습과 법에 대한 공경과 준수, 제사, 희생, 기도, 맹세, 부적 같은 다양한 요소들을 통해 자신의 운명에 유리한 기운을 불러 모을 수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운명을 치가 부여하더라도 스스로 노력하지 않거나, 실행하지 않거나, 전통과 법을 공경하지 않고, 불화를 일으키는 사람이라면 그의 운명은 결국 뒤바뀌는 거죠. 반대로 아무리 힘든 운명을 타고 나더라도 이를 뒤집기 위해 모든 방면에서 노력하면 그 사람은 언젠가는 성공한다는 운명관이죠.
따라서 오콩코를 묘사하며 여러 번 나온 "예"라고 말하면 '치'도 "예"라고 답한다는 문장은, 개인이 얼마나 강한 의지와 노력을 갖고 이를 실행에 옮기냐에 따라 운명과 신도 그를 따라 바뀔 수 있다는 얘기죠. 우리로 치면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와 같은 말일 겁니다. 작품 내적으로는 오콩코가 그만큼 매우 강인한 의지력과 실행력을 가진 존재임을 보여주는 문장인 셈이고요.
단지 소설 속 표현이 아니라 실제로 이그보인들이 쓰는 속담이라고 해요. "Onye kwe, chi ya ekwe"(당신이 그렇다고 하면, 치 또한 그렇다고 한다.)
https://www.oriire.com/article/when-one-says-yes-destiny-as-dialogue-in-igbo-spiritual-belief
화제로 지정된 대화
은화
2부의 내용에 대해 얘기해보겠습니다. 2부에서는 오콩코가 자신의 고향을 떠나 유배해 있는 동안 서서히 유배지 온 마을에 변화가 찾아오고, 이로 인해 그의 주변환경과 고향에서의 입지도 변화가 생길 것임을 암시하는 불안정한 전환기를 담고 있죠.
1) 162쪽에서 우첸두는 돌연 자신을 찾아온 손님들에게 처음 본다는 듯 다시 환영하는 인사를 합니다. “아, 그래. 어서 오게나, 내 아들들.” 우첸두의 환영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요?
2) 마을에 들어온 선교사들의 포교와 전도에 대해 어떻게 보셨나요? 여러분이 이그보족이었다면 그들을 애초에 몰아내야 했다고 생각하시나요?
3) 교회를 세운 기독교인들은 마을에서 가장 차별받던 하층집단 '오수'를 받아들입니다. 이에 대해 이그보 출신의 개종자들은 반발하며 일부는 저항의 의미에서 교회를 떠나기도 하죠. 여러분은 오수를 받아들인 선교사들의 선택이 모두를 포용하는 바람직한 종교의 교리라고 보시나요? 아니면 이그보족의 공동체와 전통과 문화를 위협하는 침입 행위라고 보시나요?
꽃의요정
모태신앙이라 어렸을 때부터 외국에서의 선교활동이라든가, 성인이 돼서는 외국에서 살짝 산 경험이 있어 외국에 있는 한국교회의 모습들을 관찰하기도 했었는데요.
이 책에 나온 두 선교사들의 모습은 동화 '해와 바람'이 생각났습니다. ^^
제 기억이 맞다면, 예수님은 '항상 낮은 곳에서부터 임하라.'고 하셨지만, 제가 경험한 한국 교회들은 항상 높은 곳만 바라 보느라 낮은 곳에 계신 분들은 철저히 배제하고, 무시하는 태도로 일관하셨습니다. 그런 모습 때문에 염증을 많이 느꼈고요.
3)번의 모습은 제대로 하나님을 영접하는 기독교인이라면 당연한 행동입니다. 남의 문화를 침범한다거나 그런 생각은 아마 개념조차 없으실 거예요. 포교활동하시는 분들은, 본인들이 경험한 지상 최고의 '하나님의 사랑'을 만백성에게 알려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잖아요. 그놈의 선한 의도...
쌍방이 동등한 입장에서 교류가 이루어지면 좋겠지만, 이런 경우를 단순히 침입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은화
1) 이후의 책 내용을 생각해 보면 우첸두의 말의 의미는 외부인과 친척, 가족을 구분하지 않고 모두 이웃으로 받아들이는 공동체 정신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도 그렇지만 시대가 지나고 가치관이 변화하면서 과거에 비해서는 공동체나 집단 중심의 문화와 관습이 줄어들고 있죠. 서구 문명의 도래와는 별개로 이미 이그보인들의 공동체 내에서는 분열과 고립의 징후가 조금씩 싹트는 상황이었나 봅니다.
이웃들이 이전만큼 서로 교류하지 않으며, 그로 인해 마을들끼리는 고사하고 같은 마을 안의 사람들조차도 이전만큼 친밀하거나 결속력이 강하지 않은 모습을 장로들은 안타깝게 여기는 모습이 인상 깊었습니다.
2,3)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이냐의 문제로 생각되지만 우무오피아에 위기는 기독교와는 별개로 이그보인들 스스로가 초래한 상황이라는 생각도 했어요. 1장도 그렇고 2장에서도 이그보인들의 문화적인 악습이나 억압받는 계층에 대한 묘사가 지나가듯 대수롭지 않게 묘사되지만 종종 나오죠.
오콩코가 유별나기는 해도 그는 이그보의 변화를 거부하는 고집 또는 배타적이며 가혹한 면을 상징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오콩코의 권위로 인해 아들 은워예는 아버지의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더 멀어지는 역효과만 나타나죠. 오콩코는 자신의 아들과 가족을 혹독하게 대하고 그들을 채찍질하는 것이 미래를 위해 필요한 '진짜 사랑'이라고 느꼈을지 몰라도 이런 방법을 모든 구성원이 납득할 수 없죠.
오콩코만이 아니라 이그보인들의 문화와 관습도 마찬가지입니다. 쌍둥이로 태어난 것은 어머니도, 아이들도 의도한 것이 아니며 누구도 통제할 수 없는 현상임에도 한 명을 숲에 버리고 오는 희생의 문화가 당연한 듯 퍼져있죠. 오콩코의 유배도 비슷한 맥락에 있다고 봅니다. 살인은 중범죄이지만 오콩코의 우발적인 실수임에도 본인만이 아니라 가족 모두가 고향을 떠나고, 기존의 재산을 파괴당하는 연좌제를 경험하죠.
과연 이런 문화를 통해 얻고자 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누구를 위한 전통이고 관습일까요? 환경과 공동체에서 더 잘 적응하고 모두의 생존을 도모하기 위해 전통이 필요한 순간이 분명 있습니다. 하지만 시대가 변하고 더이상 과거의 전통을 일방적으로 적용할 수 없는 변화의 시기가 찾아오면 새로운 적응을 위해 전통도 변해야 합니다. 그러나 작품 속 이그보인들이 '일상'처럼 넘기는 마을의 모습에는 전통의 이름으로 만연해진 억압의 씨앗이 이곳 저곳에 깃들어 있다고 봤어요.
그 답답함과 무기력감, 고독의 씨앗은 아직 피어날 때가 아니었기에 침묵하고 있었을 뿐 기독교라는 충격이 찾아오자 순식간에 마을에 퍼져나갑니다. 은워예는 누구도 자신에게 제공해준 적 없는 포용과 자비의 가치를 기독교에서 찾은 모습이고, 쌍둥이를 연달아 낳느라 가족에게 홀대받던 여자는 기독교에서 가족을 찾았을 겁니다.
'오수'도 이런 맥락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해요. 어느 문화권에나 접촉과 교류조차 금지되는 최하층 집단이 존재해 왔죠. 불가촉천민이 그러했고 백정이나 노예도 그렇고요. 이들은 단지 사회경제적인 면에서만 하층계급인 것이 아니라 국가/공동체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경멸하고 혐오해도 된다는 허용 아래 내던져진 집단이죠. 사회와 계급제의 유지를 위해 부정적인 감정을 대신 받아내야 하는 쓰레기통 같은 신세입니다.
기독교를 받아들인 오수들의 선택이나, 그들에게 전도를 함으로써 이그보인들의 공동체를 무너뜨렸다고 기독교를 무조건 비판할 수 있을까요? 이후의 광신도와 서구세력의 침입이 부정할 수 없는 침략행위이지만 그와는 별개로 이미 이그보 사회에는 '파멸의 씨앗'이 곳곳에 뿌리 내리고 있었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구분짓고 차별하며, 가혹하게 밀어붙이는 사회에서 몇명의 '정상인'이 남아 제 구실을 할 수 있을까요.
사실 그래서 이 작품을 읽을 때 의외라고 생각하며 감상했어요. 작가 본인이 이그보인이고 또한 아프리카 출신임에도 그들이 근대에 들어서며 겪은 역사적 치욕과 고통을 서구라는 외부로만 돌리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도 이미 문제가 만연했음을 고발하는 시선이 담겨있어서요.
우무오피아의 노인과 연장자들은 마을의 분위기가 예전 같지 않다고 걱정하지만, 그들이 진짜로 걱정해야 했던 '결속력과 단합의 약화'는 본인들이 전통이라는 이유로 모른 척 하거나 눈을 감은 악습과 폐단이 아니었을까요.
꽃의요정
말씀하신 것처럼 오콩코의 '폭력적 사랑'은 우리나라의 가부장제에도 존재했던 것 같아요. 학교에서 선생님들이 학생을 체벌하는 것까지요.
저희 아들이 너무 말을 안 듣길래 남편과 '우리 때도 저렇게 말을 안 들었나? 우린 안 그랬던 거 같은데...근데 아이들이 바뀌었을 리는 없고 이유가 뭘까'를 둘이 얘기하다 떠오른 것이 더 이상 아이들을 때리지 않는다는 것이었어요.
맞을 수 있다는 두려움이 없어지면, 당당하게 본인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 어렸을 적엔 매가 두려워 하고 싶은 말도 못하고, 부모님과 선생님께 복종하는 척했지만 성인이 되어서는 그들로부터 벗어나거나 저런 인간이 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그러니 무의식적으로 어떤 '계기'만 기다렸던 거 같아요.
사실 독실한 기독교 신자분들도 많고, 그 분들은 진심으로 믿고 있다는 생각에 비판할 생각은 없습니다만, 어렸을 때부터 보고 자란 제가 경험한 교회의 폐단은 어린 저도 환멸을 느낄만큼 모순적이고 끔찍했습니다(전통 장로교란 탈을 쓴 사이비 수준). 하지만, 제 국적이 한국인인만큼 기독교인이라는 정체성을 버리기가 정말 힘듭니다.
글을 쓰거나 말을 조리 있게 할 재주가 없는 저야 그냥 교회를 떠났지만, 치누아 아체베 작가님은 그런 모습들을 우리에게 좋은 글로 알려 주신 것 같습니다.
이렇게 재독할 수 있어 정말 다행인 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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