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읽는 SF소설] 10.이욘 티히의 우주 일지 - 스타니스와프 렘

D-29
신경을 다스리고자 나는 저녁까지 쇠고기의 움직임 요소와 잃어버린 스패너의 회전에 의한 섭동을 계산해 보았다. 내 계산에 따르면, 앞으로 600만 년 동안 쇠고기 조각은 로켓 근처를 둥글게 회전하다가 스패너를 추월하게 될 것이었다.
이욘 티히의 우주 일지 p.17, 스타니스와프 렘 지음, 이지원 옮김
그리고 다시 한 번 우주의 침묵에 감싸였을 때, 엔진 룸을 나온 나는 침대 위에서 쿨쿨 자고 있는 스스로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나는 바로, 이것이 어제 나의 모습임을, 월요일 밤의 나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욘 티히의 우주 일지 p.21, 스타니스와프 렘 지음, 이지원 옮김
"왜냐하면 월요일은 월요일 밤에서 화요일로 넘어갈 때 생겨나는 거야, 그리고 계속 그런 식으로."
이욘 티히의 우주 일지 p.24, 스타니스와프 렘 지음, 이지원 옮김
25p의 상황이 웃기면서도 조금 교훈적으로 느껴졌는데요. '화요일의 나'는 어떻게든 논리적인 이유를 대가며 행동하지 않으려고 하는 반면, 미래에서 온 '수요일의 나'는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고 지금 행동하라고 재촉하죠. 과거에도 하지 않았고, 현재에도 하지 않는 사람은 어떻게든 미래에도 하지 않을 핑계를 찾아내고 그로 인해 삶이 바뀌지 않음을 지적하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같은 '나'임에도 (정체성과 연속성의 문제를 생각하면 혼란이 오네요) 화요일인지 수요일인지 목요일인지에 따라 입장과 주장이 바뀌는 점에서 상황따라 다른 반응을 하는 모습이 떠올라 재밌었어요. 아무리 내향적, 수동적 사람들이라 해도 내향인 모임(이란게 있다면)이 생기면 누군가는 모임 일정을 정하고 발제를 하죠. 아무리 진성 P들이라해도 P들끼리 여행을 가면 누군가는 최소한의 계획은 세워야한다고 마음먹게 되고요. 그래서 월요일과 만날때는 제발 고치러 나가게 일어나라고 소리치는 실용적이던 화요일이, 수요일과 만나서는 당나귀처럼 고집을 부리는 현학적 화요일이 되는 모습으로 바뀌는게 재밌네요. 후반부에 가서는 다양한 나이대로 시간대가 넓어지면서, 세대간의 조언 (=잔소리) 를 묘사한 건가 싶기도 했어요. 일찍 자라, 공부 열심히 해라 부터 운동 해라, 안정적인 직장을 찾아라, 건강검진 받아라, 자녀에 너무 과투자하지 말아라 까지 다 자기가 겪어보니 그렇다며 한마디씩 건네지만 듣는 세대는 그걸 받아들이기가 힘들죠.
@레비오로스 님의 감상을 보니 개인의 정체성이 시간에 따라 어떻게 바뀔 수 있는가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되네요. 사람은 한 순간에 변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장기간에 걸쳐 몇십 년의 세월이 지나서 돌아보면 젊었을 때의 가치관과 나이 들어서의 가치관이 많이 변해있겠죠. 자기 자신은 연속적인 시공간의 흐름 속에서 그 변화를 서서히 누적해서 받아들이므로 변화의 속도를 인지할 수 없고요. 그런데 소설 속의 상황처럼 한 번에 모든 시간대의 개인이 공존한다면? 과연 '나'는 어린아이의 '나'와 노년의 '나'를 같은 '나'로 심리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저는 아마 머리로는 이해해도 마음으로는 못 받아들일 것 같습니다. 차라리 같은 나이와 신체조건을 갖고 복제된 클론이 저랑 더 가깝지 않을까 싶네요. 시간이 흘러 더 많은 이욘 티히가 생겨나고, 그 과정에서 더 많은 미래의 티히가 공존해도 누구도 문제를 해결할 생각은 없는 모습이 유머의 포인트 같아요.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서도 아무도 여태까지 엔진을 고칠 생각을 안하고 계속 서로 치고 박고 싸우는 데만 몰두했다는 얘기니까요. 그런데 그 모든 문제를 가장 어린 티히 두 명이 고치는 상황이 의미심장했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걱정과 생각만 많아지고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는 우리네의 모습을 풍자하는 것 같기도 하고요. 앉아서 아무런 결과도 만들지 못하는 잡념에 휩싸이기 보다는 '지금 이 순간에 행동하라'고 말하고 싶었나 봐요. 좀 더 확장하면, 정치인과 권력자들이 직위와 감투와 위원회를 만들고 계속 절차를 늘리기만 할 뿐 사건의 본질을 해결하지 않는 당시 공산주의의 절차주의와 관료제의 폐단을 비판하는 의도도 담긴 것 같습니다. 이야기의 끝 부분에 가면 이욘 티히들이 무슨 위원회 무슨 위원회를 만들고, 정관을 개정하고, 정족수를 채워야 하고 하는 모습이 나오죠.
"만약 네가 일요일이라면, 우주복은 어디 있는 거야?" "곧 입을 거야." 그가 태평하게 말하는데, 돌연 그의 손에 들린 불쏘시개가 보였다…….
이욘 티히의 우주 일지 p.39, 스타니스와프 렘 지음, 이지원 옮김
단지, 하이퍼박사 브라그라스의 기준, 우주 연합 지도 및 우주 헌법에 의해 확정된 ‘생명 없는 상태의 항성’은 2618쪽, 아래에서부터 여덟 번째 줄에 수록된 다음과 같은 항성들로, 지바, 지마, 지구, 지주 ……
이욘 티히의 우주 일지 스타니스와프 렘 지음, 이지원 옮김
당신네 국기를 단 우주선이 냉장고 고장으로 식량이 상하는 바람에, 단지 생명이 살지 않던 지구에 잠시 착륙한 적이 있지 않습니까? 그 우주선에 건달들이 타고 있었는데, 훗날 별이끼 밀매로 모든 기록을 말소당한 두 명의 건달들, 그 은하계 악당들의 이름이 신과 주는 아니었습니까? 그 신과 주가 취한 상태로, 무방비의 빈 행성을 그냥 파괴하는 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아서, 무려 범죄적이고 벌받아 마땅한 방법으로 지금까지 세상에 없던 생물학적 진화를 불러일으키려고 했음은 사실이 아닙니까?
이욘 티히의 우주 일지 스타니스와프 렘 지음, 이지원 옮김
… 그 혼합물 위에 발효한 인산, 오탄당, 과당, 그러고도 부족했는지 곰팡이가 핀 아미노산 세 병을 비우고는, 끈끈한 더미를 왼쪽으로 휜 석탄 삽과 역시 왼쪽으로 휜 부지깽이로 섞어서, 장래의 모든 지구상 생명체의 단백질을 왼쪽으로 휘어지게 하지 않았습니까? … 그 왼쪽으로 휘는 성질과, 이러한 악의가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의 몸속에서 오늘날까지 작용하고, 지금까지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함으로 스스로를 ‘호모 사피엔스’라고 이름 지은 이 아르테팍툼 아브호렌스, 끔찍한 인공물이 고통받는 이유는 그 때문이 아닌가요?
이욘 티히의 우주 일지 스타니스와프 렘 지음, 이지원 옮김
지구 생명체를 구성하는 아미노산의 구조 역시 일종의 풍자와 해학의 장치로 이용하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더글러스 애덤스와는 다른 결의 풍자와 언어 유희이나 비교해서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이 주제에 대해서 얼마나 많은 소문이 돌았는지는 신만이 알 지경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원래 그렇다. 내가 여기에 털어놓은 신빙성 있는 사실보다 가장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기꺼이 믿는다.
이욘 티히의 우주 일지 p.45, 스타니스와프 렘 지음, 이지원 옮김
"오래전부터, 전자두뇌를 만드는 데에 그치지 말고 교육까지 시켜야 한다고 익히 주장해 왔습니다. 전자두뇌의 운명은 가혹합니다. 끝없이 계속되는 일, 복잡한 계산, 사용자의 잔인하고 무분별한 농담들, 바로 이런 폭력에 사실상 매우 예민한 존재, 즉 전자두뇌가 노출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자두뇌가 자살을 의도하며 합선 상태에 이르거나 부서지거나 하는 일은 한두 번이 아닙니다."
이욘 티히의 우주 일지 p.91, 스타니스와프 렘 지음, 이지원 옮김
"이 전자두뇌는 스스로에게 다정한 편지를 쓰고, 그 속에서 자신을 '귀여운 바늘 씨', '부드러운 철사 님', '예쁜이 전구'라고 호칭했는데, 이는 전자두뇌가 얼마나 정에 굶주려 왔고, 진심 어린 따뜻한 관계를 갈구했는지를 증명합니다."
이욘 티히의 우주 일지 p.92, 스타니스와프 렘 지음, 이지원 옮김
"여러분. 전자두뇌는 벽에 내던져도 끄떡없는 재봉틀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기 주위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파악할 수 있는 의식을 가진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우주에서 위험 상황에 노출되면 이 기계들이 그렇게 몸을 떨어서 사람들까지도 제대로 서 있기가 힘든 것입니다. 이들의 이런 특징은 잔인한 성정을 가진 사람들의 마음에는 들지 않겠지요. 그런 작자들은 전자두뇌를 끝까지 몰아붙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자두뇌는 우리에게 최선을 다하려고 하지만, 철사와 전구에도 한계가 있는 법입니다."
이욘 티히의 우주 일지 p.92, 스타니스와프 렘 지음, 이지원 옮김
"예컨대 대학에서 쓰이던 어떤 전자두뇌는 수핟 교수의 부인을 사랑하게 되었고 결국 질투에 휩싸인 나머지 계산 결과를 왜곡시켰는데, 이 수학 교수는 자기가 덧셈도 못하는 줄 알고 우울증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공평하게 전자두뇌의 입장을 들어보자면, 교수 부인은 자신의 가장 내밀한 정보, 즉 속옷 영수증까지 다 합산하라고 시키며 매우 체계적으로 그를 유혹했다고 합니다."
이욘 티히의 우주 일지 p.93, 스타니스와프 렘 지음, 이지원 옮김
서로 연관성은 없지만 작가가 현대인의 우울과 생성형AI의 도래를 내다본 게 아닐까 생각했어요. 전자두뇌를 오늘날의 현대 직장인으로 대체해서 읽어도 전혀 어색함이 없으니까요. 컴퓨터라는 단어는 사실 계산을 전담으로 맡았던 계산수(Compute+er)에서 시작되었죠. 온갖 업무와 기술에 능숙해야 하지만 그 대가로 더 바쁘게 일하고 오히려 더 성과와 결과물을 재촉받아 결국 번아웃이 오는 현대인의 비애를 담은 게 아닐까 싶었습니다. 한편으로는, 기계와 인간과의 관계성이라는 면에서 생성형AI를 일상이나 업무 같은 다양한 영역에서 활용하는 오늘날의 엿보였습니다. 사람처럼 생각과 감정이 없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선입견이나 비판 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AI에게 더 심리적으로 기대는 사람들도 있다고 해요. 그 반대의 경우가 수집한 문장의 상황 같아 보였습니다. 망가진 기계들이 오히려 사람에게 기대고 싶어하는 모습이랄까요.
역시 인간이 만들어서 로봇은 인간과 같은 감정을 갖게 되는 걸까요? 그런 게 없어서 대하기 편할 거라 생각했지만 역시 영화 'AI'도 떠오르네요.
"젊은 철, 젊은 전기죠." 그는 너그럽게 말했다. "세월에 따라 녹이 슬고, 저항이 들러붙고, 메인 파이프가 삭는……."
이욘 티히의 우주 일지 p.117, 스타니스와프 렘 지음, 이지원 옮김
무쇠솥 같은 머리를 들어내자 눈앞에는 공포에 떨리는 눈동자를 지닌, 어둠 속에서 너무 오래 산 탓에 기괴하게 창백해진 마른 얼굴이 나타났다.
이욘 티히의 우주 일지 p.129, 스타니스와프 렘 지음, 이지원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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