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읽는 SF소설] 10.이욘 티히의 우주 일지 - 스타니스와프 렘

D-29
점검 때가 되어서야 그들이 선을 심하게 넘었음을 깨달았다. 돈나이가 6만 톤이나 되는 보리를, 유대인들이 무슨 사막을 헤매고 다닐 때 뿌려 준 일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신중한 도움'은 실제로 엄청난 개입이었으며(돈나이는 홍해를 여닫고, 유대인의 적들에게 원격 조종할 수 있는 메뚜기 떼를 보냈다.), 이런 식으로 보호받은 이들은 스스로를 선택된 민족이라 믿게 되었다.
이욘 티히의 우주 일지 p.267~268, 스타니스와프 렘 지음, 이지원 옮김
마침내 A.돈나이는 네이팜탄을 쓰면서 기존의 모든 과오를 넘어섰다. 내가 왜 그걸 허락랬을까? 나도 스스로에게 묻고 싶다! 한마디로 나는 아무것도 몰랐다.
이욘 티히의 우주 일지 p.268, 스타니스와프 렘 지음, 이지원 옮김
미래에서 시간과 역사의 흐름을 좌우하는 이욘 티히의 위치가 마치 신적 존재와 유사해 보이는 효과 때문에 그의 심정과 행동 하나하나가 신이 느꼈을 곤혹스러움(?)을 보여주는 게 재밌네요. 과거-현재-미래 속에서 모두 존재하는 신조차 시간과 운명을 좌우하고 개입하는 것은 예상하지 못한 결과로 이어지며, 무언가에 대한 인위적 개입은 결국 오히려 현상을 더 복잡하게 만들 뿐이라는 지적 같습니다.
러시아에서야 그를 제압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바로 거기서 고난에 봉착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미 유럽의 절반은 잿더미와 폐허로 변한 뒤였다. 시간 기술 전문가들을 옆으로 물린 다음에야, 나는 워털루에서 마침내 나폴레옹을 만나서 충고할 수 있었다. 나도 잘한 일은 있었다.
이욘 티히의 우주 일지 p.272, 스타니스와프 렘 지음, 이지원 옮김
라톤은 설득하기 어려운 극단주의자였는데, 내 지시를 어기고 자기만의 정책을 실현했다. 이는 매우 비민주적인 강압에 기초하는데, 이집트 중왕국, 인도의 카스트 제도, 독일의 신성 로마 제국, 아니 1868년 이후 일본인들의 천황 숭배 역시, 전부 그가 저지른 짓이다. 하지만 그가 시클그루버라는 여자의 중매를 서서, 훗날 유럽의 절반을 불길 속에 태워 버리는 아이가 태어나도록 했는지까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이욘 티히의 우주 일지 p.274, 스타니스와프 렘 지음, 이지원 옮김
'시클그루버'는 히틀러 집안에 전해지던 성씨인데요. 히틀러의 아버지 알로이스 히틀러는 '마리아 시클그루버'(히틀러의 할머니)의 사생아였다고 합니다. 1876년, 39세에 알로이스 히틀러는 사제로부터 세례를 받고 이 때 자신의 어머니와 재혼한 새아버지 '요한 게오르그 하이들러'(히틀러의 할아버지)를 공식적인 아버지로 등록합니다. 이 이후로 알로이스 히틀러는 시클그루버 대신 '히틀러'를 성씨로 채택해요. 할아버지 하이들러의 철자는 Hiedler였으나 어떤 이유에선지 당시의 지방공기관은 이를 Hitler로 잘못 적으면서 히틀러가 문서상, 공식적인 성씨가 되버립니다. Hitler, Hiedler, Huttler 등 여러 방식으로 발음되거나 표기되는 이 단어는 오두막(Hut)에 사는 사람(-er)을 뜻하는 독일어라네요.
귀양자들은 도대체 왜 단 한 명도 자기들의 정체를 밝히지 않았는지, 나에게 묻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데 그걸 말했다간 어떻게 되었겠는가. 얘기하자 마자 바로 정신 병원에 보내졌을 텐데. 20세기 이전에 누군가가 보통의 물로 지구 전체를 날려버릴 수 있는 폭탄을 만들 수 있다고 주장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23세기 이전까지 시간 여행은 알려지지도 않았다.
이욘 티히의 우주 일지 p.277~278, 스타니스와프 렘 지음, 이지원 옮김
나는 프로젝트 이후의 역사에서 발전과 선은 오로지 내 덕이라고 선언했다. 그 말은 바로, 내가 조치한 수많은 귀양의 선한 영향력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인류는 나에게 호메로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보스코비치, 레오나르도 다빈치, 보스, 스피노자, 그리고 수 세기 동안 창조적 활동을 수행해 온 무수한 이름 없는 이들에 대해 감사해야 하리라. … 그들은 결국 역사의 발전을 도왔다.
이욘 티히의 우주 일지 p.284, 스타니스와프 렘 지음, 이지원 옮김
나는 이제 사절로서 과거의 그에게 가는 것이고, 그는 '이른 나'가 되어 마침내 프로젝트의 지휘를 맡게 된다. 한마디로 우리는 시간 속에서 서로 자리를 바꾸는 것이었다.
이욘 티히의 우주 일지 p.289, 스타니스와프 렘 지음, 이지원 옮김
나는 이 마지막 어린이의 바이올린 연주 솜씨가 마음에 들어서 그를 응원하기로 했다. 그리고 몇 년 뒤 이 선택으로 말미암아 일본에 원폭이 투하되었다.
이욘 티히의 우주 일지 p.286, 스타니스와프 렘 지음, 이지원 옮김
그리곤 하다하다 안 되니 이토록 극심한 난맥에 빠진 문제의 해결과 책임을 과거의 이욘에게 떠넘겨버리는 것이 압권이죠. ㅎㅎ
읽을 때는 몰랐는데 밥심님의 댓글을 보다 보니 인간들 본인이 세상사 문제들을 저질러 놓고는 잘된 일은 내 탓, 못한 일은 남 탓(신의 탓)으로 돌리며 변명하는 태도도 지적하는 것 같네요. 신의 이름으로, 종교적 명분으로, 더 나아가 각종 이데올로기나 이념과 온갖 대의를 수식어구로 끌고 와 세상을 어지럽히는 위정자들을 풍자한 것 같습니다 ㅎㅎ
소설이 1주차에 비하여 조금 더 난해해진 것 같기도 하고, 현실의 무언가를 비틀어서 묘사하는 것 같기도 하며, 그 '현실의 무언가'가 무엇인지를 이야기 한다면 상당히 폭 넓게 많은 것을 말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지금은 이를 콕 집어서 정리를 못하고 있습니다. '세풀카'는 같은 집단 내에서는 따로 설명이 필요없을 정도로 소속원 모두가 그 필요성과 당위성을 인식하고 동의하며 소속원의 행동기제로 역할하고 있는 사회적 규범을, 다른 집단에 소속된 외부인에게는 설명하거나 납득시킬 수 없는 경우를 묘사하고 풍자하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든다면, 최근 청소년들 사이에서 “개좋아”, “개잘해”, “개웃겨”처럼 ‘개’를 ‘매우’의 의미로 사용하는 표현이 널리 확산되었는데, 그런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 나이의 저에게 '매우'를 사용하지 않고 '개'를 사용하여야 하는 합당한 근거를 설명하거나, 부정적인 뉘앙스로 사용하는 '개'를 왜 긍정적인 뉘앙스로 사용하는지를 납득시킬 수 없는 것이 이런 경우에 해당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자는 철학적인 주제를 즐겨 다루면서 '상호 의사소통 및 이해의 불가능'을 주제로 하는 작품이 많다는 평이 있으므로, '세풀카'라는 묘사와 풍자가 서로 판이하게 다른 집단간의 소통과 공감을 위하여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는지는 불분명한 부분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온누리님 의견 감사합니다. 열네 번째 여행의 초반 서술에서 이욘 티히가 백과사전을 펼쳐봐도 서로 물고 물리는 상호참조로 인해 정보를 찾지 못하는 장면이 있죠. 정보나 문서로 담을 수 없는 불문율 또는 문화나 사회현상을 의미하는 것 같기도 하네요. 옛날 사람들의 사진이나 기록물, 비디오나 영상을 보면서 그들의 생활상과 당시의 가치관을 이해한다고 하지만 우리는 그 사회가 남긴 극히 일부분의 단편만을 접하죠. 생각해보면 우리 모두 태어나서부터 온갖 규범과 문화와 가치를 접하고 또 그것들이 담긴 유무형의 물건이나 사건을 경험하지만 다 기록으로 남기지 못하잖아요? 어렸을 때 가지고 놀았던 장난감들, 읽었던 책과 교과서들, 거리에 돌아다니던 전단지, 신문, 만화영화와 광고들.. 그나마 이런 것들은 매체를 통해 인쇄되거나 방영되기라도 했지 사람과 사람이 직접 만나야만 발생하는 의사소통과 문화현상은 기록으로 남지 못하는 것들이 많죠. 그 당시에 유행했던 아이들간의 놀이, 유행어, 핸드폰이 없던 시절 약속시간에 모이던 방법 같은 것들.. 정보통신의 시대에 '백과'사전이라며 자부하지만 결국 세상의 모든 가치와 모습을 담아내지 못하며, 불분명한 일부의 사실과 데이터만이 남아 상호참조의 오류로 남는 현상을 통해 작가는 정보사회가 가진 한계를 비꼰 것 같기도 합니다. 세풀카가 무엇인지는 결국 엔테로피아에 가보지 않고는 알 수 없는 무언가라는 점에서, 직접 경험하고 체험하는 노력이나 태도 없이 매체를 통해서 현상과 대상을 간접적으로 접한 뒤 '이해했다'고 착각하는 태도를 풍자하는 의도도 있을 것 같네요.
그는 확신을 가지고서 지구의 대부분은 차갑고, 거의 0도에 가까운 매우 깊은 물로 뒤덮여 있으며, 무려 빙하까지 떠다닌다고 했다. 남극과 북극뿐 아니라 이를 둘러싼 지역에도 역시 끔찍한 추위가 계속되며, 반년 동안 쉼 없이 밤만이 이어진다고 덧붙였다. 그래서 천문학 기구로 들여다볼 수 있듯이 육지는, 따뜻한 지방조차 1년 중 여러 달 동안 눈이라는 얼어붙은 수증기에 둘러싸이며, 이 눈은 산과 들판 위에도 두껍게 쌓인다. 지구의 커다란 달은 조석을 일으키는데, 이것은 파괴적 침식 작용을 일으킨다. 가장 성능 좋은 망원경을 통해서 본다면, 이 지구가 얼마나 자주 구름층에, 그 어둠 속에 휩싸이는지 알 수 있다. 대기층에서는 무서운 회오리바람, 태풍과 폭풍우가 휘몰아치고 있으며, 이 모든 사실을 종합해 볼 때, 지구에서는 어떠한 형태의 생명도 불가능하단다.
이욘 티히의 우주 일지 p.297~298, 스타니스와프 렘 지음, 이지원 옮김
"손님분, 죄송합니다만, 저희가 환대해 드렸는데 너무한 행동 아닙니까? 이렇게 공식적으로 환영하고 축하하며, 존경의 표시를 보였으면 됐지요. 대학 입학 시험 자리에 영예롭게 초대받으신 것도 모자라, 이제 당신을 위해서 우리가 교육 과정을 모조리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입니까?" "하지만…… 지구에는 생명들이 살고 있어요……." 나는 혼란한 상태로 내뱉었다. 시험관은 마치 내가 그 자리에 없다는 듯 말했다. "만약 그렇다면, 그건 자연의 돌연변이겠죠."
이욘 티히의 우주 일지 p.299, 스타니스와프 렘 지음, 이지원 옮김
"왜냐하면 육체적 접촉을 죄악이라고 들었기 때문이랍니다. 너무나 구원을 원해서 모두들 서원하고 정결을 유지한다는군요! 2000년 동안 교회는 일상의 삶보다 영혼의 구원이 더 중요하다고 설파해 왔지만, 지금까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이는 아무도 없었어요, 하느님 맙소사! 이 아르페투자인들은 모두들 소명을 느끼고 무더기로 수도원에 들어오고 있어요. 저마다 모범적으로 규율을 지키고 기도를 올리고 단식을 하고 육신을 괴롭히며 정죄하죠. 그러는 동안 공업은 쇠퇴하고 농업도 무너지고 굶주림이 만연해서 행성 전체가 다 죽게 생겼어요. 여기에 대해서도 바티칸에 보고했지만 언제나처럼 대답은 침묵뿐……." "다른 행성에 믿음을 전파하기란 상당히 위험한 일이 될 수도 있겠군요……."
이욘 티히의 우주 일지 p.309, 스타니스와프 렘 지음, 이지원 옮김
"죄송하지만, 무슨 방법을요?" "이를테면, 우주에서 그 부분을 종이로 가려 놓고, 그곳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죠. 그러나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어요. 요즘 바티칸에서는 신앙을 수호하고자 십자군을 조직한다는 얘기가 돌고 있습니다." "신부님은 거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데요?" "뭐, 나쁠 건 없겠죠. 만약 그들의 행성을 폭파하고, 도시를 파괴하고, 책들을 태워 버리고, 그들의 발을 묶어 버리면, 어쩌면 이웃 사랑의 가르침을 전파할 수도 있겠지만, 도대체 그 십자군을 누가 이끌고 간다는 말입니까? 멤누그족? 아르페투자족? 헛웃음이 다 나올 지경이군요, 걱정만 되고요!"
이욘 티히의 우주 일지 p.314, 스타니스와프 렘 지음, 이지원 옮김
이욘 티히가 인간에게 털이 아닌 식물의 잎을 주려고 했는데 방해에 의해 실패했다는 이야기를 읽으면서 비슷한 상상을 하는 사람들이 많구나 생각했어요. 육식에 실망한 후 광합성작용만으로 살겠다는 목표로 연구를 해서 자신의 몸을 나무로 변하게 만드는데 성공한 사람에 대한 짧은 소설을 제가 몇 년 전에 재미로 써본적이 있거든요. 읽어보진 못했지만 장강명 작가님도 비슷한 소재로 소설을 쓴 적이 있다고 하셨고요. 몰라서 그렇지 프로든 아마추어든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이런 이야기를 상상하고 글로도 쓰고 그랬을 것 같아요.
장르와 내용이 전혀 다른 작품이긴 하지만 가즈오 이시구로의 <남아 있는 나날>에도 그런 비슷한 내용이 있었던 게 기억나네요. 사람들이 모두 나무가 되어 지상에 뿌리가 박혀 움직이지 못한다면 어떤 갈등도 야기하지 못할 거라며 농담을 주고받는 대사였어요. 렘 작가는 본인이 살아가던 시대가 냉전시기다보니 평화와 갈등에 대한 고민이 더 많았을테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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