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가적으로, 저는 세풀카가 어떤 성적인 관습이나 문화 현상으로 이해됐는데요. 공적인 자리에서 다들 언급하기를 꺼려하고, 배우자를 데리고 온다는 점, 은밀한 속성을 볼 때 이쪽이 가장 가까워 보였습니다. 제 생각에는.. 세풀카와 세풀카리아는 어쩌면 아르드리트인들의 성별을 뒤바꾸는 행위 그리고 이를 도와주는 어떤 도구가 아닐까 싶어요.
초반에 이욘 티히가 행성에 도착하며 시내를 구경할 때, 지나가던 공무원처럼 보이는 아르드리트인들의 대화에서 남자를 변환시킨다는 대사가 나옵니다. 책의 묘사를 보면 아르드리트인들의 신체는 매우 자유자재로 구부리고, 투명한 젤리 같은 재질로 느껴지는데 신체 내부의 특성도 바꿀 수 있는 몸일 것 같더군요. 많지는 않지만 일부 동물들은 암수의 자웅 성별을 전환할 수 있다는데 이들도 그렇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함께 읽는 SF소설] 10.이욘 티히의 우주 일지 - 스타니스와프 렘
D-29

은화

은화
3) 비록 이욘 티히와 라즈그와즈 박사는 자신들이 세상의 현재 모습을 자초했다고 자책할지 몰라도, 그들의 실험과정에 개입한 혼돈과 불합리 또한 세상이 만들어지기 위한 필수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시간 여행의 '닫힌 고리'의 문제상 어차피 피할 수 없는 문제이기도 하지만, 티히가 꿈꾸던 완전한 세상은 이론적으로만 존재할 수 있는 개념의 영역이기에 '현실'에 구현할 수 없었을 겁니다.
악이 없으면 선이 존재할 수 없고, 카오스가 없이는 코스모스가 만들어질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겠죠. 우리가 살아가는 우주가 미시적인 세계와 거시적인 세계의 '일탈'로 만들어졌다면 그 일탈 또한 전체적인 관점에서는 필요한 '불규칙'일 겁니다.
이욘 티히와 라즈그와즈라는, 일탈로 만들어진 우주 속의 인간들이 빅뱅을 만들어낼 결심을 하지 않았다면 작품 속의 우주는 태어날 수 없었겠죠. 불완전한 이들의 실패한 실험은 비록 실패했을지라도 결과물을 남김으로써 현재의 우주를 만들어 냈고, 그 안에서 지구와 사람과 문명이 존재하게 되었으니까요. 반면, '논리적이고 완벽한 우주'는 애초에 빅뱅 실험을 시도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세상이 존재한 적이 없으니 실험을 할 이욘 티히도 없죠. 애초에 '존재할 수 없는 우주'인 무無의 공간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존재함(有) 은 존재함으로 인해 자신의 가치를 매순간 증명하고 시도할 수 있죠. 하지만 존재하지 않음(無)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무언가를 증명하고 시도할 수 없습니다.
작가가 시간 여행의 패러독스를 연결지어 빅뱅우주론과 창조론을 결합시켜 악惡과 비합리가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것도 이런 이유 같습니다. 이미 빅뱅의 순간부터 세상은 불완전함의 싹을 품고 나타났지만, 그로 인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고 존재할 수 있게 되죠. 온갖 부정한 악마 같은 존재들이 티히의 순수한 의도를 왜곡하고 무너뜨렸지만, 역설적이게도 이들의 악행이 개입되었기에 인간은 이파리만 달린 식물의 모양이 아니고 머리카락을 가진 채 살아갈 수 있게 되었죠.
선은 선대로, 악은 악대로 부정하지 않고 현재의 모습대로 살아가되 자신의 가치를 매순간 증명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렘 작가는 말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가능하지도 않은 완벽과 온전함에 전념하고 끙끙대기 보다는 비록 불완전할지라도 현재의 자신과 세계를 포용하라는 말 아닐까요.
* 티히가 실험 마지막에 집중력을 잃고 관심을 놓기 시작한 게 정작 하찮고 별 볼일 없는 모기들 때문에 일어난 일임을 생각해보면,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을 만드는데 가장 크게 기여한 건 모기 덕(?) 같네요.

은화
4) 스무 번째 여행은 지식을 가진 사람들의 편협함에 대해 풍자하는 일화로 읽혔습니다. 이야기의 끝에 라치몬 신부와 종교에 대한 얘기로 마무리되기 때문에 종교의 맹목성을 지적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일지의 앞부분에는 안드리고나인들의 과학적인 사고와 별개로 그들의 닫힌 사고관이 나오죠.
과학과 종교는 서로 대척점에 있는 것 같지만, 둘 모두 세상을 이해하는 기준을 넘어 맹신하게 되면 오히려 생각의 확장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됨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극과 극은 서로 통한다는 말처럼요.
안드리고나인들은 생명이 없다고 확신하는 행성에서 직접 찾아온 외계인이 있음에도 기존의 믿음과 과학관, 교육체계를 바꾸는 것이 두려워(또는 번거로워) 현실을 부정하죠. 또한 라치몬 신부와 교황청은 자신들의 전도와 포교활동이 더이상 통하지 못하는 외계의 우주를 설득의 대상으로 보기보다는 '존재하지 않는 우주'로 치부하고 지도에서 가려버립니다.
라치몬 신부는 우주의 여러 문명들이 '절대적 진리'인 종교와 교리를 두고도 얼마나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는지 다른 사례들을 직접 겪어봤음에도 자신의 방법을 고민하기 보다는 상대를 존재하지 않거나, 정복해야 할 이교도로 치부해버리죠.
개인적으로 이 여행이 마음에 들었던 건, 흔한 종교비판 소재의 뻔한 이야기가 될 수도 있었으나 과학적 사고가 가진 맹점과 한계도 같이 균형있게 다루었다는 점이에요. 일방적으로 과학과 기술의 입장에서 종교를 비논리적/비합리적이라고 비판만 하지 않고 거울로 비춰보듯 반대편의 문제도 조명하죠. 지식과 논리가 사고를 확장하기 보다는 오히려 호기심과 자유로운 생각을 가로막는 또 다른 장애물이 될 수 있다는 지적이 좋았습니다.
이욘 티히가 내내 찾아다니던 주머니칼은 '약간의 개방성과 열린 마음'에 대한 상징 같아요. 안드리고나에서도, 라치몬 신부에게서도 찾을 수 없던 주머니칼이 정작 그의 옷 안에 내내 들어있었던 상황은 과학이나 종교에만 의지하기 보다는 우리 각자가 가지고 있는 내면의 자질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외부의 시선과 관점이 아닌, 자신의 마음의 눈으로 세상을 보라는 말로 이해됐어요.

은화
써 놓고 보니 스무 번째가 아니라 스물 두번째 여행이었군요. 일정을 착각했네요;

은화
나중에 창조력을 십분 발휘하지 못했다고 혹시 비난할까 봐, 나는 이 홉사(호모 퍼펙투스 사피엔스) 프로젝트에 있어서만큼은 충분한 자율권을 보장했다.
『이욘 티히의 우주 일지』 p.256, 스타니스와프 렘 지음, 이지원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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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화
Homo Perfectus Sapiens의 앞글자만 따면 HOPESA가 되는데 앞의 HOPE가 '희망'의 영단어인게 아직까지는 그래도 믿음을 잃지 않은 이욘 티히의 심리를 나타내는 것 같네요.

은화
“ 아무런 질서도 논리도 없이 온갖 요소들을 결합했으므로, 하나하나가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어떤 놈들에게는 네발 위쪽에 근육을 부여하고, 어떤 놈들은 꼬리만 달아 놓고, 어떤 것들에게는 가루를 뿌리고 어떤 견본엔 두꺼운 뼈를 넣더니 다른 견본엔 되는대로 뿔이나 발톱, 호스, 파이프, 빨판을 붙여 놓았다. ”
『이욘 티히의 우주 일지』 p.257, 스타니스와프 렘 지음, 이지원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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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화
https://youtu.be/Ye2ABYCNjYs?si=W6nfZf5Xpq4c5O8B
https://youtu.be/KBzlkPS7ZUw?si=PaCMPQ6Mw9Ao22it
아마도 캄브리아기의 온갖 괴상해보이는 생물들의 등장을 말하는 것 같네요. 첫번째 사진은 할루키게니아로, 처음 화석이 나왔을 때는 마치 환각에 빠졌을 때나 볼법한 모양새로 인해 저런 이름이 붙었습니다. 당시에는 어디가 위이고 아래인지, 앞가 뒤과 어디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고 해요.
두번째 사진은 베툴리콜리아로 지금도 이 동물의 분류는 명확하지 않다고 합니다. 보는 것처럼 물고기 같으면서도 물고기는 아니고(꼬리 지느러미 외에는 아가미나 양옆에 지느러미가 없어요), 갑각류나 절지동물처럼 몸에 구분되는 갑피가 있는데, 척삭(척추와 유사한 기관)이 달려 있으며, 눈이 없습니다. 부리 같은 입이 있으나 무언가를 찌르거나, 베어물거나, 집는 용도가 아니라서 사냥을 했는지 아닌지조차도 불확실하다고 해요. 학자들은 아마도 플랑크톤 같은 걸 걸러먹거나 또는 다른 퇴적물이나 침전물을 섭취하지 않았을까 추측합니다.
책에 나오듯 인간의 기준에서는 '반미학적인 비구상 형식주의가 판을 치던' 캄브리아기는 마치 의도적으로 생물을 어디까지 뒤틀수 있을지 자연이 실험한 듯한 생물들이 가득하네요.



은화
나는 그에게 "지성을 가진 물속 생명체는 절대 안 돼!"라고 말했다. 결국 돌고래는 상당히 커다란 두뇌와 함께 그 상태 그대로 남게 되었고, 우리는 위기 상황에 빠지고 말았다.
『이욘 티히의 우주 일지』 p.262, 스타니스와프 렘 지음, 이지원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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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화
267p의 A.돈나이는 '아도나이', 히브리어로 '나의 주님'으로 과거 유대인들이 유일신 야훼의 이름을 인간 의 입으로 직접 부르지 않고자 대신 택한 단어라고 하네요.

은화
“ 돈나이의 주장에 따르면, 신은 개념으로서 전혀 해롭지 않다, 거기다 우리들에게 도움이 된다, 이를테면 프로젝트의 결정은 신의 결정이므로 아무도 눈치챌 수 없는 것이다. 즉 사람들은 신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아무것도 트집 잡지 못할 터다. 또한 누군가 시간을 조작하며 역사에 끼어들었다는 의심조차 하지 않으리라. ”
『이욘 티히의 우주 일지』 p.267, 스타니스와프 렘 지음, 이지원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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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화
“ 점검 때가 되어서야 그들이 선을 심하게 넘었음을 깨달았다. 돈나이가 6만 톤이나 되는 보리를, 유대인들이 무슨 사막을 헤매고 다닐 때 뿌려 준 일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신중한 도움'은 실제로 엄청난 개입이었으며(돈나이는 홍해를 여닫고, 유대인의 적들에게 원격 조종할 수 있는 메뚜기 떼를 보냈다.), 이런 식으로 보호받은 이들은 스스로를 선택된 민족이라 믿게 되었다. ”
『이욘 티히의 우주 일지』 p.267~268, 스타니스와프 렘 지음, 이지원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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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화
마침내 A.돈나이는 네이팜탄을 쓰면서 기존의 모든 과오를 넘어섰다. 내가 왜 그걸 허락랬을까? 나도 스스로에게 묻고 싶다! 한마디로 나는 아무것도 몰랐다.
『이욘 티히의 우주 일지』 p.268, 스타니스와프 렘 지음, 이지원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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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화
미래에서 시간과 역사의 흐름을 좌우 하는 이욘 티히의 위치가 마치 신적 존재와 유사해 보이는 효과 때문에 그의 심정과 행동 하나하나가 신이 느꼈을 곤혹스러움(?)을 보여주는 게 재밌네요. 과거-현재-미래 속에서 모두 존재하는 신조차 시간과 운명을 좌우하고 개입하는 것은 예상하지 못한 결과로 이어지며, 무언가에 대한 인위적 개입은 결국 오히려 현상을 더 복잡하게 만들 뿐이라는 지적 같습니다.

은화
“ 러시아에서야 그를 제압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바로 거기서 고난에 봉착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미 유럽의 절반은 잿더미와 폐허로 변한 뒤였다. 시간 기술 전문가들을 옆으로 물린 다음에야, 나는 워털루에서 마침내 나폴레옹을 만나서 충고할 수 있었다. 나도 잘한 일은 있었다. ”
『이욘 티히의 우주 일지』 p.272, 스타니스와프 렘 지음, 이지원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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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화
“ 라톤은 설득하기 어려운 극단주의자였는데, 내 지시를 어기고 자기만의 정책을 실현했다. 이는 매우 비민주적인 강압에 기초하는데, 이집트 중왕국, 인 도의 카스트 제도, 독일의 신성 로마 제국, 아니 1868년 이후 일본인들의 천황 숭배 역시, 전부 그가 저지른 짓이다. 하지만 그가 시클그루버라는 여자의 중매를 서서, 훗날 유럽의 절반을 불길 속에 태워 버리는 아이가 태어나도록 했는지까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
『이욘 티히의 우주 일지』 p.274, 스타니스와프 렘 지음, 이지원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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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화
'시클그루버'는 히틀러 집안에 전해지던 성씨인데요. 히틀러의 아버지 알로이스 히틀러는 '마리아 시클그루버'(히틀러의 할머니)의 사생아였다고 합니다. 1876년, 39세에 알로이스 히틀러는 사제로부터 세례를 받고 이 때 자신의 어머니와 재혼한 새아버지 '요한 게오르그 하이들러'(히틀러의 할아버지)를 공식적인 아버지로 등록합니다.
이 이후로 알로이스 히틀러는 시클그루버 대신 '히틀러'를 성씨로 채택해요. 할아버지 하이들러의 철자는 Hiedler였으나 어떤 이유에선지 당시의 지방공기관은 이를 Hitler로 잘못 적으면서 히틀러가 문서상, 공식적인 성씨가 되버립니다.
Hitler, Hiedler, Huttler 등 여러 방식으로 발음되거나 표기되는 이 단어는 오두막(Hut)에 사는 사람(-er)을 뜻하는 독일어라네요.

은화
“ 귀양자들은 도대체 왜 단 한 명도 자기들의 정체를 밝히지 않았는지, 나에게 묻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데 그걸 말했다간 어떻게 되었겠는가. 얘기하자 마자 바로 정신 병원에 보내졌을 텐데. 20세기 이전에 누군가가 보통의 물로 지구 전체를 날려버릴 수 있는 폭탄을 만들 수 있다고 주장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23세기 이전까지 시간 여행은 알려지지도 않았다. ”
『이욘 티히의 우주 일지』 p.277~278, 스타니스와프 렘 지음, 이지원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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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화
“ 나는 프로젝트 이후의 역사에서 발전과 선은 오로지 내 덕이라고 선언했다. 그 말은 바로, 내가 조치한 수많은 귀양의 선한 영향력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인류는 나에게 호메로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보스코비치, 레오나르도 다빈치, 보스, 스피노자, 그리고 수 세기 동안 창조적 활동을 수행해 온 무수한 이름 없는 이들에 대해 감사해야 하리라. … 그들은 결국 역사의 발전을 도왔다. ”
『이욘 티히의 우주 일지』 p.284, 스타니스와프 렘 지음, 이지원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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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화
나는 이제 사절로서 과거의 그에게 가는 것이고, 그는 '이른 나'가 되어 마침내 프로젝트의 지휘를 맡게 된다. 한마디로 우리는 시간 속에서 서로 자리를 바꾸는 것이었다.
『이욘 티히의 우주 일지』 p.289, 스타니스와프 렘 지음, 이지원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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