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읽는 SF소설] 10.이욘 티히의 우주 일지 - 스타니스와프 렘

D-29
일주일 내내 스스로를 때린 것 말고는 한 일이 없다는 사실이 인간으로서 자랑스러워할 점은 못 되니까.
이욘 티히의 우주 일지 41p, 스타니스와프 렘 지음, 이지원 옮김
사람들은 원래 그렇다. 내가 여기에 털어놓은 신빙성 있는 사실보다 가장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기꺼이 믿는다.
이욘 티히의 우주 일지 45p, 스타니스와프 렘 지음, 이지원 옮김
뭐랄까요.. 렘 작가의 해학과 시니컬함이 모두 녹아있는 문장 같지 않나요? 이게 무슨 황당한 이야기냐고 느낄 수도 있는 일부 독자들에게 세상에 그보다 더 말도 안되는 일들도 믿는 사람들이 있지 않냐며 돌려 까는 것 같달까요. 눈 앞의 현실에서 일어나는 부조리를 모른 척 하거나 오히려 맹신하는 현상을 지적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요.
지금 보시는 예와 같이 몸에 털이 하나도 없는 표본을 그람플루스가 우리 은하계의 가장 후미진 지역에서 관찰한 뒤 몬스트로테라툼 푸리오숨(추악한 미치광이)이라고 이름 붙였는데, 자기들끼리는 '호모 사피엔스'라고 칭한다.
이욘 티히의 우주 일지 62p, 스타니스와프 렘 지음, 이지원 옮김
갑자기 무슨 물질, 일렘인지 프라아톰인지가 폭발하여, 그로부터 물질과 에너지가 생성되고, 구름과 별이, 회오리치는 은하수가, 빛으로 가득한 흐릿한 가스 속에 흐르는 어둡고 밝은 성운들이 생겨났다는 주장이이다. 이 모든 것을 매우 정확하고 멋지게 설명 할 수 있는데, 이때 누군가의 머리 속에, ‘아니, 그럼 그 프라아톰이라는 물질은 어디서 왔는데?‘ 라는 질문이 생겼다가는 큰일이다. 왜냐하면 그 질문은 해명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어떻게 돌려서 얼버무릴 수는 있겠지만, 정직한 천문학자라면 그럴 수 없으리라.
이욘 티히의 우주 일지 열여덟 번째 여행 203쪽, 스타니스와프 렘 지음, 이지원 옮김
ㅎㅎ 빅뱅 이론의 최대 난점을 까발리고는 뒤이어 그걸 해결하는 아이디어를 제시하면서 열여덟 번째 여행 이야기가 진행되죠. 진짜 빅뱅으로 확산하기 시작하는 태초의 씨앗은 어디서 나온 걸까요, 유의 처음은 무엇일까요, 무에서 유가 탄생했을까요, 신이 만들었다면 신은 누가 만들었을까요. 인류가 아직 풀지 못한 문제죠. 이 문제에 대한 렘의 해답이 열여덟 번째 이야기인거죠. 아이디어가 대단해요. ㅎㅎ
아마 이미 눈치챈 분들도 있겠지만 215~216쪽에 나오는 '빅뱅 실험'을 망친 인물들은 모두 하나 같이 이름에 힌트가 담겨있죠. - 독일인 A. 아스트 로스 : 악마 중 하나인 아스타로트(Astaroth)의 패러디로 인간을 유혹해 게으름과 나태함에 빠지게 하며 자연과학에 대한 지식이 많아 과거와 미래를 꿰뚫어 본다고 합니다. - 보엘스 E. 버브 : 마찬가지로 고위급 유명 악마인 바알세붑 또는 벨제뷔브(Beelzebub)를 패러디한 이름 같습니다. 파리대왕으로도 유명한 이 악마는 사탄 다음으로 지옥에서 강력한 힘과 위상을 가진 악마라고 해요. - 서펜타인 :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를 타락시킨 그 뱀(Serpent)을 상징하는 역할일 겁니다. - 에바 A. : 하와의 다른 이름은 이브(Eve)죠. 사실 히브리어로는 '하와' 또는 '하바'에 가까운 발음이나 희랍어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에와' '에바'로 바뀌어가면서 이브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지게 됩니다. 종교와 과학을 오가며 창조론과 빅뱅우주론을 결합하여 소설로 풀어내는 걸 보며 역시 렘 작가의 상상력이 대단하다는 걸 또 느꼈네요. 둘 중 어느 하나만을 취하지 않고 은유와 패러디로 종교적인 역할들을 인물로 등장시켜 빅뱅에 개입하게 만들었으니까요. 이후에 계속 나오는 다른 시간여행의 작품들에서도 보면 역사적 인물들의 이름을 변형한 사람들이 종종 나오는데 정체를 유추해가는 재미도 있네요.
역시 아는 만큼 보이는것 같습니다. 은화님이 적어주신 이름 봐 가며 읽어야겠어요. ^^
한동안 일이 너무 바빠서 책만 간신히 읽고 그믐에는 자주 못 들어왔네요. 오늘부터 다시 따라잡으며 참여하겠습니다. 스물 두번째 여행까지 읽었는데 매 여행마다 인간사회나 역사를 풍자하는 게 재밌네요.
거대한 철제 체스판의 말처럼 모두가 정렬하자, 나는 성 전기님의 용량을 기념하는 의미에서 저마다 머리의 나사를 풀리고 선포했다. 11시 무렵 인간의 머리가 하나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러자 혼란과 동요가 일어났고, "배신자! 배신자!" 하는 비명이 들끓었지만, 이윽고 마지막 깡통이 큰 소리를 내며 보도 위에 떨어지자 거대한 기쁨의 함성이 한데 어우러졌다.
이욘 티히의 우주 일지 p.138, 스타니스와프 렘 지음, 이지원 옮김
진정한 나쁜 놈이 될 수 있는 존재는 인간뿐이라는 진리가 썩 마음에 든다.
이욘 티히의 우주 일지 p.139, 스타니스와프 렘 지음, 이지원 옮김
여행사 입구에서 나는 23층으로 안내받았다. 변방 부서가 위치해 있는 곳이라 했다. 서운하지만 사실이었다. 지구는 잘 알려지지 않은, 우주 맨 끝의 후미진 곳에 자리하고 있으니.
이욘 티히의 우주 일지 p.173, 스타니스와프 렘 지음, 이지원 옮김
그는 끝내 말을 마무리하지 못했다. 번쩍하고 쿵 소리가 나더니 먼지가 일었다. 곧 먼지가 가라앉자 나랑 이야기하던 아르드리트인은 온데간데없고, 바닥엔 거대한 구멍이 뚫려 있었다. 나는 돌처럼 굳어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1분이 채 지나기 전에 아르드리트인 몇 명이 작업복을 입고 들어오더니 구멍을 메우고 커다란 상자가 실린 작은 카트를 밀고 왔다. 그 상자를 풀자, 내 눈앞으로 손에 표를 든 담당자가 다시금 나타났다.
이욘 티히의 우주 일지 p.192, 스타니스와프 렘 지음, 이지원 옮김
“그럼 나는 어디 있나요?” “무슨 소리예요? 극장에 있으시잖아요. 괜찮으신가요?” “그럼 내가 스페어인가요?” “그렇죠.”
이욘 티히의 우주 일지 p.196, 스타니스와프 렘 지음, 이지원 옮김
알다시피 진화란 힘센 놈이 약한 놈을 대량으로 잡아먹는 학살, 또는 약한 놈이 센 놈 안에 숨어들어서 멸망시키는 기생, 둘 중 하나다. 도덕적으로 옳은 것은 초록빛 식물밖에 없는데, 그들은 태양의 자본을 바탕으로 자력껏 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살아 있는 모든 생명에게 광합성을 도입하고, 특히 이파리 달린 인간을 고안해 냈다.
이욘 티히의 우주 일지 p.213~214, 스타니스와프 렘 지음, 이지원 옮김
렘 작가 본인의 생각인지는 모르겠으나, 육식에 대해 지적하는 또 다른 대목이죠. 렘 작가는 어쩌면 식물들의 자연경쟁까지는 알지 못한 게 아닐까 싶습니다. 또는 인간이 가진 폭력성을 지적하려는 의도에서 쓰다 보니 나온 문장일 수도 있겠고요. 식물 중 '큰가시수련'이라는 수생식물이 있는데요. 이 식물의 잎을 들춰보면 물에 맞닿아있는 잎 아랫 부분은 사진처럼 엄청난 가시들이 가득합니다. 큰가시수련은 진흙에 있던 씨가 발아하며 성장하면서 물 위로 올라오는데 이때 원형 모양의 잎이 펼쳐지면서 아랫면의 가시가 주변의 다른 수생식물들을 관통하고 찌르며 자신의 잎의 무게로 짓눌러 버립니다. 수생식물이라 하더라도 보다 무거운 다른 식물에 깔려 물에 잠기고, 햇빛을 차단당하며, 몸이 관통되면 살아남을 수가 없죠. 큰가시수련이 왕성하게 활동하는 시기에는 세 번째 사진처럼 호수의 표면이 전부 덮여서 어떤 다른 식물들도 살아남지 못합니다. 심지어 물 아래에 있는 식물들도 햇빛이 차단되어 말라버리죠. BBC 영상 다큐의 일부가 올라와 있는데 궁금한 분들은 보시면 좋을 듯 합니다. (마치 수련을 외계에서 온 침략자나 괴물처럼 묘사하는 분위기에요.) 한 쪽에서는 조용히 소리도 없이 제거 당하는 쪽이 있고, 다른 한 쪽에서는 그 빈자리를 메워 번성하는 순환이 반복되고 있는거죠. 식물들의 생존경쟁도 절대 만만치 않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TWSF3df6jUs
<스무번 째 여행>은 짧은 에피소드에 태양계 및 인류 역사를 포괄하고 실제 인물들을 유사 이름으로 등장시켜 축약했기에 관련 자료들을 찾기 시작하면 너무 많을 듯 하여 엄두가 안 나네요. 그렇다고 그냥 가기엔 섭섭하니 그 중에서 261쪽에 나오는 보스라는 사람이 그렸다는 ‘쾌락의 정원’ 사진 올립니다. 소설에서 말한 12인승 시간 여행 버스가 그림 어디에 있는지 찾아보시죠. 히에로니무스 보스가 1500년경에 그렸다는 이 그림은 현대의 초현실주의 그림과 유사한 느낌을 주는 독특하고 유명한 그림입니다.
화제로 지정된 대화
2주차의 내용에 대해서 얘기해보겠습니다. 1) 2주차 독서 내용 중 흥미로웠던 부분이나 감상을 공유해주세요. 2) 열네 번째 여행에서 엔테로피아 행성에 대해 어떻게 느끼셨나요? 사물과 환경은 물론 생명도 온전히 복제할 수 있는 그들의 기술과 이것이 일상화 된 풍경을 어떻게 보셨나요? 여러분은 '세풀카'가 무엇일 거라고 상상하며 읽으셨나요? 3) 열여덟 번째 여행의 끝에서 이욘 티히는 자신의 부주의로 인해 세상을 더 낫게 만들지 못했다며 자책합니다. 여러분은 그의 견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의도하지 않았을지라도 이욘 티히 또한 불완전한 세계를 만든 또 다른 공범일까요? 4) 스물 두번째 여행에서 이욘 티히는 주머니칼을 찾아 헤메면서 다른 외계행성들의 상이한 가치관과 도덕관을 접하게 됩니다. 그러다 이야기의 끝자락에서 사실 내내 주머니칼은 자신의 안에 있었음을 알게 되죠. 이번 일지에서 주머니칼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2) 열네 번째 여행은 일지의 분위기가 내내 가볍고 유쾌하게 그려지기는 했지만 한편으로는 어떤 부자연스러움이 느껴졌습니다. 그 이유는 엔테로피아 주민들이 재난, 죽음을 앞두고도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는 태도 때문인 것 같고요. 물건이나 건축물 외에도 살아있는 생명체조차 정확히 동일하게, 이전의 기억과 인지력을 유지한 상태로 복제하는 장면을 일상적이고 당연한 기술로 묘사하고 있죠. 렘 작가는 기술의 혜택이나 문명의 이기가 때에 따라, 배경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다르게 받아 들여짐을 말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이전의 개체와 동일하게 분자구조만이 아니라 정신과 기억까지 유지할 수 있다고 하여 동일한 존재로 봐야 하는지는 복제/클론기술의 가장 큰 쟁점이자 담론이죠. 그 담론에 대한 사회적 합의의 단계를 이미 다 지난 문명에 산다는 건 어떤 모습일지를 상상을 통해 미리 접하는 느낌입니다. 그런데 그 '당연함'의 정도가 너무나 만연하여 작품을 읽는 독자는 오히려 그 문화에 자연스레 융화되기 보다는 이욘 티히와 똑같이 어떤 이질적인 감정을 느끼죠. 가령 연극을 감상하는 극장에서 아르드리트인들은 누군가가 운석에 맞아 죽는 사건보다, 주변 관객의 소음으로 몰입이 방해받는 것에 더 흥분하고 분노하죠. 쿠르델을 사냥하는 대목도 이런 어색함이 아주 살짝 스쳐 지나가는데요. 아르드리트인이나 방문자들은 언제든 사고가 나더라도 대체할 수 있지만, 행성의 토착생명체들은 관광을 위해 사냥 당하더라도 다시 되살리지 않는 듯 합니다. 한 쪽에서는 같은 행성의 거주자들이 일상과 업무 중에 죽어도 그러든 말든 자신들의 관심사에만 집중하고, 다른 쪽에서는 한 때 그들과 공존했던 동물들이 관광 목적으로 내장이 터져 죽어야 합니다. 이런 속성들로 볼 때, 엔테로피아는 기술은 발전했지만 생명의 가치가 그와 반비례하여 희석된 사회를 풍자하는 모습으로 보였어요. 진짜와 복제물의 물리적 속성과 정체성을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동일해지면서 오히려 원본의 가치도 그만큼 떨어진 세상으로 느껴졌어요. 가벼운 유머와 이국적인 도시의 풍경, 여행의 산뜻함으로 가리고 있지만 생명보다 유희와 즐거움이 더 중요한 사회가 섬뜩하게 다가오네요. 그 섬뜩함을 일반적인 관광객의 시선으로 다소 가볍게 풀어내는 분위기가 감상 포인트 같습니다. 관광지로서의 도시와, 관광상품에 가려진 빈부격차나 사회문제가 뒤엉켜 공존하는 현대사회를 묘사한 것 같기도 하고요.
클론과 복제기술로 인한 생명의 가치에 대한 과학소설 중 <노래하던 새들도 지금은 사라지고>가 있습니다. 과거 제 모임에서 읽어본 분들도 있을 텐데요. 가까운 근미래에 지구의 자연재해와 기후변화로 문명이 붕괴하자, 살아남은 공동체들이 인류의 명맥을 잇고자 클론 기술에 손을 대는 내용입니다. 자연적인 유성생식과 임신-출산-양육이라는 기나긴 과정이 필요한 인간과 달리, 필요에 따라 복제되는 클론들은 줄어드는 인류의 빈 자리를 점점 메워가고 그로 인해 두 세력의 갈등이 커지는데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복제 기술의 발전으로 보다 빠르고, 보다 많은 클론을 단시간에 만들어낼수록 클론들에게 부작용이 나타나게 됩니다. 책을 읽다 보면 그런 생각이 스쳐 지나가는데요. 수프나 국물 요리에 물을 부으면 빠르게 양을 늘릴 수는 있어도, 간과 농도가 희석되어 버리죠. 마찬가지로, 겉으로 보기에는 동일한 인간일지라도 인간의 생산과 성장의 방법이 간결해지고 기계화될수록 인간 개개인의 가치는 옅어지는가? 를 고민하게 만드는 책입니다. 클론 기술과 생명의 가치, 인류가 사라지고 복원되는 자연의 먹먹한 아름다움을 느끼고 싶은 분들에게 추천드립니다.
노래하던 새들도 지금은 사라지고아작 출판사 독자들의 복간 투표 1위를 차지한 작품으로, 1977년 휴고상과 로커스상, 주피터상 최우수 장편상 수상작이다. 재난 이후의 인간 생활과 심리 등에 주목하는 일종의 '포스트-홀로코스트 SF' 소설인데, 원폭과 인간복제 등의 익숙한 소재를 다루면서도 개인의 감정을 충실하게 묘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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