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체통과 비슷하게 생긴 작은 문이 달린 기계는 공원에도, 길거리에도, 어디에나 서 있어서 수시로 체험할 수 있었다. 적절한 시각에 자명종을 맞추는 일만 기억하면 되었다. 정신없는 이들은 가끔 이것을 깜빡하고, 기계 속에서 영원한 휴식을 취하게 되었다. ”
『이욘 티히의 우주 일지』 p.325, 스타니스와프 렘 지음, 이지원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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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화
“ 이마 한가운데 입이 붙어 있고, 귀는 수염 난 턱 아래 양쪽에 쌍으로 달려 있었고, 눈은 열 개인 데다 볼은 빨갰지만, 나처럼 온갖 희한한 생명체들을 다 만나 본 우주 여행자에게 이들은 인간이라고 착각할 만큼 친근하게 느껴졌다. ”
『이욘 티히의 우주 일지』 p.329, 스타니스와프 렘 지음, 이지원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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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화
“ "어떤 똑똑한 발명가가 '새로운 기계'들을 발명했는데, 너무나 완벽해서 이 기계들은 일말의 어떤 감독도 필요 없이 홀로 일할 수 있었죠. 그것이 재난의 시작이었습니다. 공장에 이 '새로운 기계'들이 등장하자마자 티라우들은 즉시 일자리를 잃었어요." ”
『이욘 티히의 우주 일지』 p.330~331, 스타니스와프 렘 지음, 이지원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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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화
1950년대 소설임에도 오늘날의 고민, 사회현상과 아주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게 눈에 들어오네요. 자동화, 분업화, 디지털화, AI의 대체가 화두가 되는 현대사회를 미리 보고 온 것만 같은..
꽃의요정
요새 나온 SF 작품들보다 훨씬 세련됩니다. 이 분이야말로 외계인 아니면 진짜 미래에서 온 거 같아요.
은화
스타니스와프 렘은 그가 살아있을 적에 어떤 사회현상을 보고 이런 생각을 품은 건지 궁금하네요. 그래서 작가의 생애와 당시의 주요 과학/기술 사건들의 연도를 찾아봤는데요.
- 1921년 : 렘 작가가 이 때 태어났습니다.
- 1929년 : 작품에서도 언급되는 대공황이 이해 10월에 시작되고요.
- 1939년~45년 : 2차 세계대전의 시작과 끝입니다.
- 1941~1944년 : 폴란드가 나치 독일에 점령 되었을 때로 렘은 당시 자동차 수리와 용접 일을 했다고 해요.
- 1945년 : 컴퓨터의 시초라고 할만한 '에니악'이 등장합니다.
- 1946년 : 렘은 이때부터 소설과 시를 비롯한 작품활동을 시작합니다.
- 1950년 : 인공지능 판별의 대표적 시험인 '튜링 테스트'가 앨런 튜링의 논문에 등장합니다.
- 1951년 : 상용 컴퓨터 '유니박-1'이 나옵니다. (PC와는 다른, 공기관/기업용 컴퓨터라네요.)
- 1957년 : <이욘 티히의 우주 일지>가 출간됩니다.
- 1961년 : 유리 가가린은 역사 이래 최초로 우주공간에 진출한 인간이 됩니다. 또한 렘 작가의 대표작 <솔라리스>가 발행됩니다.
- 1969년 : 인터넷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아르파넷(ARPANET)'이 1969년 미국 4개 대학의 서버와 컴퓨터를 연결함으로서 탄생합니다. 또한 같은 해에 인류가 아폴로 11호를 타고 달에 발을 딛습니다.
- 1977년 : 우리가 일반적으로 머리에 떠올리는 개인용 PC의 시발점인 'Apple II' 모델이 출시됩니다.
책이 나온 연도를 고려하면 당시에는 아직 인터넷의 개념이 없었을 때죠. 그럼에도 스물네 번째 여행의 이야기는 2020년대에 대입해도 전혀 어색함이 없을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렘 작가는 과연 무엇을 내다본 걸까요. 컨베이어 벨트에서 대량으로 쏟아져 나오던 공장의 기계화와 그로 인한 대공황을 겪으며 이런 상상을 한 걸까요? 점차 민간 사업으로 뻗어가는 컴퓨터의 유용성과 성능을 보며 기계의 확산과 자동화가 퍼진 미래를 추측했을까요? 그가 당시 고심하고 고뇌하던 시대의 흐름과 머리에 가득했을 상상력을 알고 싶어지네요.
꽃의요정
작가님 본인이 이욘 티히였던 거 아니었나요? ㅎㅎ
그래서 2660년에서 1950년대로 와서 책 쓰시고 미래로 돌아가셨겠죠~~
borori
스물네번째 여행은 AI와 AGI에 대한 기사들을 접하며 고민하는 것들이 담겨 있는 것 같아 더 흥미로운 것 같습니다. 이런 고민과 이야기를 그 예전부터 했다는 것도 놀랍습니다.
꽃의요정
비극적인 유전적 요인 때문에 꼭 그렇게 해야만 한다면, 피투성이 희생물을 아무도 모르게, 깊은 굴속의 가장 컴컴한 구석에서, 고뇌와 양심의 가책, 절망과 언젠가는 이 끔찍하고 끝없는 범죄로부터 벗어날 수 있기를 바라는 희망을 가지고 섭취하는 것은 당연할 일입니다. 그러나 이 추악한 미치광이는 그렇게 행동하지 않습니다! 이미 생명잃은 몸뚱어리를 찌르고 끓이며 가지고 놀다가, 망자에 대한 식욕을 더욱더 돋우기 위해, 공공의 탐식장에서 팔짝팔짝 뛰는 동종의 헐벗은 암컷들 사이에서 섭취합니다.
꽃의요정
제가 이런 존재인지 몰랐어요...ㅜ.ㅜ
은화
렘 작가님 본인은 혹시 채식주의자였는지 물어보고 싶네요 😂 고기를 좋아하는 저로서는.. 가끔 비인도적이거나 불결한 환경에서 학대당하는 동물들이 불쌍해서 마음 한구석이 불편한 자신과, 모른척하고 그냥 맛 좋은 고기를 먹고싶은 자아 사이에서 항상 후자가 이기네요.
은화
“ "이 프로젝트를 추진하고자 두리나우에 다변화된 위원회를 설치했지만, 위원회가 아무리 애원하고 부탁해도 결과는 나오지 않았어요. 도스토이니들은 새 기계들이 티라우들보다 더 싸게 먹히고 빨리 일한다며, 이런 생산 방법이야말로 자기들이 원하는 바라고 말했죠." ”
『이욘 티히의 우주 일지』 p.333~334, 스타니스와프 렘 지음, 이지원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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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화
“ "개헌 프로젝트도 있었는데, 공장 주인들의 수입 일부분을 티라우들에게 주자는 것이었지요. 하지만 이 프로젝트도 망하고 말았어요. 왜냐하면 대스피리트인 놀라브가 주장한 것처럼, 이런 식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게끔 분배하는 조치는 티라우들의 도덕심을 파괴하고 사기를 떨어뜨린다는 것이었죠." ”
『이욘 티히의 우주 일지』 p.334, 스타니스와프 렘 지음, 이지원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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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화
간간이 국내나 해외에서 언급되는 '기본소득제'가 떠오르는 부분이었습니다. 인간 역사에서 다양한 사상가와 철학자, 정치인들이 복지나 유토피아의 개념으로서 비슷한 내용들을 얘기해왔지만 지금 시대에 읽으니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네요.
꽃의요정
옷! 저도 그 부분 라벨링 했는데! 그 전에는 AI에 대한 이야기도 나와서, '작가 미래인설(꽃의요정피셜)'에 신빙성이 한층 더해집니다. ^^
은화
“ '나, 자유 질서 정립기는 당신들의 흐물흐물한, 힘없는 몸뚱어리를 튼튼하고 아름답고 지속 가능한 형태로 바꾸었다. 그러고 나서는 보기 좋게, 대칭을 맞추고 질서 정연한 패턴에 따라 구성함으로써 이 행성에 절대적 질서를 구현…….' ”
『이욘 티히의 우주 일지』 p.343, 스타니스와프 렘 지음, 이지원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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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의요정
“ 당신들 몸뚱어리가 얼마나 엉망으로 만들어졌는지, 말단은 이리저리 튀어나와 있고, 또 당신들 중 누구는 크고, 어떤 이는 작고, 어떤 이는 뚱뚱하고, 또 다른 이는 마르고...움직임도 완전히 혼돈 상태다. 가만 서 있다가, 정신을 못 차리고 무슨 꽃, 구름 따위를 쳐다 봤다가, 아무 목적도 없이 숲을 헤매고, 이 모든 것에서 수학적 조화라곤 찾아볼 수 없다! ”
『이욘 티히의 우주 일지』 343p, 스타니스와프 렘 지음, 이지원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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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의요정
제가 이런 존재인지 몰랐어요. 2 ㅜ.ㅜ
borori
저도 이부분에서 기괴하게 보일수도 있다는 생각에 놀랐습니다ㅠ_ㅜ
은화
https://www.youtube.com/watch?v=3qZoP6aPXnE&t=979s
렘 작가의 사상과 배경을 좀 더 찾아봤는데 그의 작품과 성향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아 영상 내용을 가져와 봅니다. (영상은 아쉽게도 한글 번역은 제공하지 않네요.)
렘의 작품에는 '이해할 수 없는 미지' 또는 '불가해'한 존재로서의 외계가 자주 묘사됩니다. <솔라리스>의 미지의 바다가 그렇고, <우주 순양함 무적호>의 기이했던 레기스 행성과 그곳의 기계 구름이 그랬죠. 어쩌면 렘이 자신의 작품을 통해 계속 이 화두에 매달린 이유는 그의 역사적 배경 때문일 겁니다.
렘은 본인도 모르던 혈통과 핏줄을 정작 나치를 통해 알게 되면서 자신을 '외계의 존재'로 느꼈다고 자서전에 썼는데요. 게토에 끌려가는 걸 막으려고 일부러 서류를 위조하고 다녔답니다. 스스로의 진짜 정체성을 숨기고 평범한 사람처럼 행세하는 스스로를 보며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이방인'의 감정을 느낀 거죠. 그는 유태인이라고 하기에는 유태인으로서의 정체성은커녕 유대교의 관습도 모르던 사람이었으나, 그렇다고 나치 독일이 추종하던 아리안 인종도 아니었습니다. 누구와도 공통점이 없는 철저한 이질적 존재라는 감각과 의식이 <솔라리스>의 바다 같은 외계를 창조하는 배경이 되었을 거라고 하네요.
렘은 전쟁이 끝나고 나서도 자신은 유태인이었지만 살아남았다는 것에 대해 일종의 트라우마와 죄의식이 있었던 것으로 보여요. <우주비행사 피륵스>라는 작품에는 후회와 고통에 시달리는 한 로봇이 나오는데요. 이 로봇은 우주선을 조종하고 있었는데 그만 실수로 다른 우주선과 충돌을 일으켜 인간 승객들이 전부 죽습니다. 로봇은 시간이 꽤 흘렀지만 여전히 그 날의 사고의 기억, 자신이 태웠던 인간들의 얼굴을 모두 기억하고 있고 이를 계속 반복 재생하고 있고요. 피륵스는 이 로봇의 작동을 중지시켜 고통으로부터 해방시켜줄지, 아니면 계속 자신의 존재를 이어가게 할 지를 두고 고민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2차 세계대전 중에, 게토의 근처에 살면서 유태인 탄압과 학살의 진상을 본 렘은 이로 인해 세상과 인간에 대한 믿음이 허상이라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한 쪽에서는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을 때 영미권의 SF작가들은 과학/기술을 통한 인류의 발전과 진보를 말하던 모습을 보며 현실과 동떨어진 '속 편하며 저급한' 소리라고 비판적으로 날을 세우게 됩니다.
렘은 미국 판타지/SF 작가협회(SFWA)로부터 명예회원 자격을 받지만 그는 미국 SF업계를 아주 신랄하게 독설적으로 비판합니다. 가령 대표적인 미국 SF작가 로버트 하인라인은 작가들에게 충고의 의미로 "SF작가들은 우리의 독자층이 맥주 한 캔과 책 한 권 사이에서 어느 쪽에 지갑을 열지 고민한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라고 말했는데요. 독자(소비자)가 사고 싶을 정도로 매력적인 작품을 쓰도록 노력하라는 의미죠. 그런데 렘 작가는 이를 두고 "SF문학의 독자층이 축구경기와 책 사이에서 고민하는 사람들 밖에 없다면 SF는 가망없는 장르다." 라고 비난을 합니다.
렘은 SF에 있어 우주, 외계, 기술, 로봇은 단지 '소재'일 뿐 이를 통해 인간과 세상에 대한 고민을 담는 문학으로 기능해야 한다는 입장인 반면, '요소'에 집중하는 상업성이 깃든 영미권 SF를 혐오한 것 같습니다. 렘은 또 이렇게 말합니다. "철학자 파스칼이 그토록 두려워했던 공허하고, 끝을 알 수 없는, 침묵의 우주를 다뤄야 할 SF가 맥주나 고민하는 소비자와 경쟁해서 어떻게 문학으로서 가망이 있는가?"
당시의 렘이 보기에는 유럽이 전쟁의 비참함으로 사람이 하루를 버티는 것을 고민해야 하는 상황에서 미국의 SF작가와 시장이 '소비재'로 SF를 다루는 모습을 도저히 참을 수 없었나 봐요. 렘은 이런 요소에 집중하는 글쓰기는 저급한 '키치(kitsch)'일 뿐이며 단지 문학의 탈을 쓴 조악하고 뻣뻣한 문장이자 자기만족에 불과하다고 혹평합니다.
렘은 가상의 책에 대한 비평서인 <Provocation>에서 나치 독일이 홀로코스트를 일으킨 이유를 인간의 내재된 폭력성, 인종차별, 계급투쟁으로 보는 건 인간의 과거 역사에서 변명을 찾으려는 것에 불과하다고 언급합니다. 홀로코스트는 단지 대량으로 사람을 죽이고 싶었던 이유 없는 행위로, 경제적인 이권 다툼이나 종교적인 사명 또는 이데올로기 같은 장황한 원인이 아니라는 거죠.
'이유 없는 불가해함'이 홀로코스트를 일으킨 진짜 이유이지만, 그 진실을 마주하기 두렵고 불편하기 때문에 우리는 갖은 역사적 배경과 맥락을 가져다 붙인다는 겁니다. 그 '무가치함'이 현대사회의 새로운 악惡이며, 이전에 경험해본 적이 없는 새로운 종류의 악이기 때문에 현대인은 이것을 아직 온전히 이해하지 못할 뿐이라고 지적하고요.
렘은 이 비평서에서 앞서 나온 '키치'를 다시 언급합니다. 나치 독일이 유대인과 다른 이들을 무자비하게 죽일 수 있던 이유는 '살인해도 되는 싸구려 명분'을 갖다 붙임으로서 사람들이 죄의식을 느끼지 못하게 하고, 더 나아가 오히려 그것이 대의를 위한 일이라고 착각하게 만들었다는 거죠. 게르만 민족의 신화를 부풀리고, 온갖 과거의 전설과 미신을 끌어와 웅장한 연극이나 예술활동으로 포장하여 아리안 인종의 우수성을 정당화합니다. 독수리 문양과 하켄크로이츠, 검정과 빨강이 뒤섞인 각이 진 제복과 상징들은 모두 그런 키치의 연속입니다. 그 결과 악한 짓을 하는 사람들은 키치에 둘러싸여 자신이 좋은 일, 위대한 일을 하고 있다고 믿고 누군가를 죽일 수 있게 됩니다.
즉 스타니스와프 렘은 단순히 서구의 SF가 상업적이기 때문에 혐오한 것이 아니라, SF의 요소와 장식에 더 호응하는 사람들의 행태가 결국 나치즘의 가짜 신격화에 눈이 먼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다고 본 겁니다. 본질을 보지 않고 요소에 빠져버림으로서 전쟁과 살인이라는 현실에 눈을 돌려 한 쪽에서는 잘못된 광신으로 사람이 사람을 죽이고 있고, 다른 한 쪽에서는 그런 현실에 문제의식도 공감도 느끼지 못한채 호의호식 한다고 비판한 거죠.
렘이 그의 작품 전반에 걸쳐 미지와 불가해함을 강조한 이유는 2차 세계대전과 대량학살이라는 '이해할 수 없는 현실'을 살아가며 느낀 불신에 기반한 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렘은 '이 세상은 너무나 고통스럽게 만들어졌으므로 신이 의도하여 만들었다고 볼 수 없다'며 무신론자가 된 것일 테고요.
이 영상의 제작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렘은 인간이 정말로 이해할 수 없는 미지와 맞닥뜨렸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이해할 수 있음에도 인정하고 싶지 않아 '불가해한' 것으로 돌려버리는 현실을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