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 빌리의 노래, 가난조차 잊혀지는 곳

D-29
아빠의 집은 신경에 거슬릴 정도로 평온했다. 아빠가 셰릴 아주머니와 다툴 때는 있었어도 서로 언성을 높이는 일은 거의 없었고, 엄마 집에서는 예삿일이었던 무지막지한 모욕이 오가는 일도 결코 없었다. 주변에는 술을 마시는 친구들은 물론이고 그런 분위기를 즐기는 친구들조차 없었다. 체벌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었지만, 절대 지나친 벌을 주거나 언어폭력을 행사하지 않았다. 체계적으로 체벌을 했고, 결코 개인적인 분노를 담는 법이 없었다. 남동생과 여동생은 대중가요나 R등급 영화 없이도 아주 즐겁게 살고 있었다.
힐빌리의 노래 - 위기의 가정과 문화에 대한 회고 p.161, J. D. 밴스 지음, 김보람 옮김
문화적으로 보수적인 남부 출신의 개신교도를 향한 고정관념은 사실과 다를 때가 많지만, 종교적인 면에서 아빠는 그런 고정관념대로 살았다. 개신교도들은 신앙생활에 집착하기로 유명했으나, 집에 돌아와 생활하는 모습을 보면 그들은 아빠보다는 할모와 더 비슷했다. 신앙심은 아주 깊었지만, 어떤 교회 공동체에도 속해 있지 않았다. 실제로 내가 아는 보수 개신교도 중에서 규칙적으로 교회에 나가는 사람은 우리 아빠와 아빠의 가족들뿐이었다. 바이블벨트의 중심지에서도 적극적인 교회 출석률은 사실 꽤 낮은 편이다.
힐빌리의 노래 - 위기의 가정과 문화에 대한 회고 p.162~163, J. D. 밴스 지음, 김보람 옮김
결국 아빠는 신에게 친권 포기가 나를 위한 최선의 선택이라는 세 가지 계시를 내려달라고 기도했다. 그리고 뚜렷한 계시를 받은 탓에, 나는 1년도 알고 지내지 않은 밥 아저씨의 수양아들이 됐던 것이다. 아빠가 거짓말을 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고 힘들게 내린 결정이었다는 걸 충분히 이해하지만, 그래도 자기 자식의 운명을 신의 계시에 맡긴다는 발상은 결코 이해되지 않는다.
힐빌리의 노래 - 위기의 가정과 문화에 대한 회고 p.166, J. D. 밴스 지음, 김보람 옮김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면 그 또한 사소한 문제에 지나지 않았다. 아빠가 날 걱정했었다는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도 어릴 때 겪었던 아픈 기억이 많이 지워졌다. 이렇게 저렇게 따져보더라도 나는 아빠와 아빠가 다니는 교회가 좋았다. 교회라는 조직이 좋았던 건지, 아니면 그저 아빠에게 중요한 가치를 함께 나누고 싶었던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아마 둘 다였을 것이다), 나는 헌신적인 개종자가 됐다.
힐빌리의 노래 - 위기의 가정과 문화에 대한 회고 p.166, J. D. 밴스 지음, 김보람 옮김
복음주의 신학에 깊이 빠져들수록 점점 사회의 여러 분야를 맹목적으로 불신하도록 강요받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진화론과 빅뱅이론은 이해가 아닌 맞서야 할 이론이 됐고, 내가 들었던 설교의 대부분은 다른 기독교인을 비난하는 내용이었다. 신학적으로 다투기 위한 선을 그어놓고,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 단순히 성서 해석이 틀렸다고 지적하는 게 아니라 어떻게든 그들을 기독교 정신에 어긋나는 사람들로 몰아갔다.
힐빌리의 노래 - 위기의 가정과 문화에 대한 회고 p.168, J. D. 밴스 지음, 김보람 옮김
나는 댄 이모부를 누구보다 존경했으나, 이모부가 믿는 천주교에서 진화론을 인정한다는 말을 듣자 그 존경심에 불신이 파고들었다. 내 안에 새롭게 싹튼 믿음이 이교도를 경계하게 만든 것이다. 아무리 좋은 친구라도 성경 구절을 나와 다르게 해석하면, 내게 나쁜 영향을 미치는 친구가 됐다. 할모의 종교관과 빌 클린턴을 향한 호감이 동일 선상에 있었으므로, 당시의 내게는 할모마저 타락한 사람이었다.
힐빌리의 노래 - 위기의 가정과 문화에 대한 회고 p.168, J. D. 밴스 지음, 김보람 옮김
10대의 어린 나이로 내가 무엇을 믿고 또 왜 믿는지 처음으로 진지하게 생각해보니, '진정한' 기독교인들이 궁지에 몰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크리스마스 전쟁'이라는 말이 있는데, 내가 알기로는 주로 미국시민자유연합ACLU 활동가들이 성탄 장식을 하는 작은 마을을 고소하면서 생긴 말이다. 나는 기독교인들이 여러모로 박해를 당한 내용을 묘사한 데이비드 림보의『박해』라는 책을 읽었다. 인터넷은 예수와 성모 마리아의 얼굴에 똥칠을 한 작품을 주제로 열린 뉴욕의 미술 전시회 관련 이야기로 떠들썩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내가 박해받는 소수가 된 것 같았다.
힐빌리의 노래 - 위기의 가정과 문화에 대한 회고 p.169, J. D. 밴스 지음, 김보람 옮김
진정한 기독교인이라고 할 수 없는 기독교인, 청년들을 세뇌하는 세속주의자, 우리의 믿음을 모욕하는 미술 전시회, 엘리트에 의해 이루어지는 박해에 관한 모든 논란은 세상을 무섭고 낯선 곳으로 만들었다.
힐빌리의 노래 - 위기의 가정과 문화에 대한 회고 p.169, J. D. 밴스 지음, 김보람 옮김
엄마는 자기 혼자서만 슬퍼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엄마가 봤을 때 엄마와 할모 사이에는 특별한 유대감이 형성돼 있었으므로 위 이모는 슬퍼할 자격이 없었다.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우리 아버지가 아니라 엄마의 아버지였으므로 린지 누나와 나는 그 두 사람 틈에 낄 수조차 없었다.
힐빌리의 노래 - 위기의 가정과 문화에 대한 회고 p.189, J. D. 밴스 지음, 김보람 옮김
난동을 부리기 1년 전에 엄마는 인라인스케이트를 타고 응급실을 가로질러 다니다가 미들타운 병원에서 해고당했다. 그때는 엄마가 밥 아저씨와 이혼한 충격으로 이상한 행동을 한다고 생각했다. 마찬가지로 할모가 엄마를 두고 '술에 절었다'고 표현하는 것도 아무 말이나 뱉기 좋아하는 사람의 입에서 나온 의미없는 말인 줄만 알았지, 실제로 더 나빠지는 현실을 꼬집은 말인 줄은 몰랐다.
힐빌리의 노래 - 위기의 가정과 문화에 대한 회고 p.191, J. D. 밴스 지음, 김보람 옮김
가난에 허덕이던 골창의 삶에서부터 할보의 폭력까지, 위 이모의 10대 결혼부터 엄마의 전과 기록까지, 할보는 일흔 살이 되도록 거의 일평생 위기를 해결하며 살아왔다. 그리고 비슷한 연배의 노인들이 은퇴의 단맛을 즐기고 있을 때 할모에게는 돌봐야 할 10대 손주가 둘이나 딸려 있었다.
힐빌리의 노래 - 위기의 가정과 문화에 대한 회고 p.192, J. D. 밴스 지음, 김보람 옮김
어떤 면에서는 아빠와 함께 사는 게 좋았다. 내가 항상 바랐던 삶의 모습처럼 아버지의 삶은 정상적이었다. 의붓어머니는 시간제로 일했지만, 대개 집에 있었다. 아빠는 거의 매일 비슷한 시간에 퇴근했다. 저녁식사 준비는 주로 의붓어머니가 했으나, 가끔 아빠가 할 때도 있었다. 어쨌든 둘 중에 한 명은 매일 식사 준비를 했고, 항상 가족이 한데 모여 저녁을 먹었다. 식전에는 언제나 감사기도를 했다. 주중 저녁이면 다 같이 가족 시트콤을 시청했다.
힐빌리의 노래 - 위기의 가정과 문화에 대한 회고 p.204~205, J. D. 밴스 지음, 김보람 옮김
무엇보다 아빠와 셰릴 아주머니는 서로에게 절대로 고함치지 않았다. 언젠가 둘이서 돈 문제로 목소리를 높여 다투는 소리를 들었으나, 언성을 조금 높였을 뿐 고함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힐빌리의 노래 - 위기의 가정과 문화에 대한 회고 p.205, J. D. 밴스 지음, 김보람 옮김
분노가 치밀었다. 엄마에게 깨끗한 소변이 필요하거든 신세 조지는 짓일랑 때려치우고 본인의 방광에서 받아다 써야 할 게 아니냐고 따졌다. 할모에게는 엄마를 가만히 보고만 있어서 이 지경까지 온 거라고, 30년 전에 할모가 호되게 다그쳤으면 자기 아들에게 소변을 달라고 하는 일은 없지 않았겠느냐고 따져 물었다. 엄마에게 아주 형편없는 어머니라고, 할모에게도 마찬가지로 형편없는 어머니라고 소리쳤다. 할모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더니 할모는 내 눈조차 마주하려 하지 않았다. 정곡을 찌르는 내 말에 상처를 받은 게 분명했다.
힐빌리의 노래 - 위기의 가정과 문화에 대한 회고 p.219, J. D. 밴스 지음, 김보람 옮김
할모가 하자는 대로 해놓고도, 가슴속에서 무엇인가가 무너져 내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엄마를 돕지 말았어야 했다는 후회 때문에 펑펑 울어서 벌게진 눈을 하고 학교에 갔다. 이 일이 일어나기 몇 주 전 엄마와 중식 뷔페에 갔을 때, 멍한 상태로 입안에 음식을 욱여넣는 엄마를 보고 당황했던 적이 있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피가 거꾸로 솟는다. 엄마는 숟가락이 접시 위로 떨어지면 다시 음식을 퍼서 입 안으로 집어넣기만 할 뿐, 눈을 뜨지도 입을 다물지도 못했다. 다른 테이블의 손님들이 이상한 시선으로 우리를 쳐다봤고, 당황한 켄 아저씨는 할 말을 잃었는데도 엄마는 아무것도 의식하지 못했다.
힐빌리의 노래 - 위기의 가정과 문화에 대한 회고 p.221, J. D. 밴스 지음, 김보람 옮김
그래도 참 즐거웠다. 할모는 확실히 말만 거칠게 하는 사람이었다. 적어도 내게는 그랬다. 한번은 할모가 금요일 밤에 내게 같이 텔레비전을 보자고 했다. 할모가 즐겨 보던 살인 미스터리물이었다. 시청자들이 깜짝 놀라 펄쩍 뛰게끔 연출한 정점에 다다랐을 때, 할모는 갑자기 불을 끄고 내 귀에다가 꽥 소리를 질렀다. 할모는 전에도 똑같은 편을 본 적이 있었기에 어떤 장면이 나올지 미리 알고 있었다. 무서운 장면이 나올 때 손자를 놀래주려고 45분 동안이나 가만히 앉아 있었던 것이다.
힐빌리의 노래 - 위기의 가정과 문화에 대한 회고 p.223~224, J. D. 밴스 지음, 김보람 옮김
나는 어째서 할모가 기꺼운 마음이 아니라 의무감으로 잭슨에 가는지 이해하기 시작했다. 내게 잭슨은 할아버지들을 만나고, 거북을 쫓고, 오하이오의 불안정한 생활을 잊고 평화를 찾을 수 있는 곳이었다. 잭슨에 가면 할모와 함께 지낼 수 있었고 오가는 3시간 동안 차에서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었다. 게다가 잭슨의 모든 사람은 내가 그 유명한 짐과 보니 밴스 부부의 손자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할모에게는 잭슨이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닌 곳이었다. 어릴 때 배고픔에 허덕이던 곳이고, 10대의 나이로 임신을 하는 바람에 도망쳐 나온 곳이기도 했으며, 친구 대부분이 탄광에서 평생을 바치다 세상을 떠난 곳이기도 했다.
힐빌리의 노래 - 위기의 가정과 문화에 대한 회고 p.224~225, J. D. 밴스 지음, 김보람 옮김
할모는 어쩔 수 없을 지경에 이르기 전까지는 어떤 일도 법적으로 해결하려고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힐빌리의 노래 - 위기의 가정과 문화에 대한 회고 p.228, J. D. 밴스 지음, 김보람 옮김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미국의 계층 분화를 더욱 깊이 알게 될수록 부유층과 내가 속한 빈곤층을 향한 분노도 커졌다. 딜먼의 점주는 옛날 사람이라서 신용이 좋은 고객에게는 외상 장부를 만들어줬는데, 그중에는 1000달러가 넘는 장부도 있었다. 나는 우리 점주가 내 일가친척 누구에게도 1000달러가 넘는 외상을 주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힐빌리의 노래 - 위기의 가정과 문화에 대한 회고 p.232, J. D. 밴스 지음, 김보람 옮김
정부 보조금에 기대 사는 사람들이 나도 못 사는 휴대전화를 쓰는데, 우리 같은 사람들은 왜 돈을 벌면서도 이렇게 힘들게 살아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힐빌리의 노래 - 위기의 가정과 문화에 대한 회고 p.233, J. D. 밴스 지음, 김보람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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