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 빌리의 노래, 가난조차 잊혀지는 곳

D-29
어떤 면에서는 아빠와 함께 사는 게 좋았다. 내가 항상 바랐던 삶의 모습처럼 아버지의 삶은 정상적이었다. 의붓어머니는 시간제로 일했지만, 대개 집에 있었다. 아빠는 거의 매일 비슷한 시간에 퇴근했다. 저녁식사 준비는 주로 의붓어머니가 했으나, 가끔 아빠가 할 때도 있었다. 어쨌든 둘 중에 한 명은 매일 식사 준비를 했고, 항상 가족이 한데 모여 저녁을 먹었다. 식전에는 언제나 감사기도를 했다. 주중 저녁이면 다 같이 가족 시트콤을 시청했다.
힐빌리의 노래 - 위기의 가정과 문화에 대한 회고 p.204~205, J. D. 밴스 지음, 김보람 옮김
무엇보다 아빠와 셰릴 아주머니는 서로에게 절대로 고함치지 않았다. 언젠가 둘이서 돈 문제로 목소리를 높여 다투는 소리를 들었으나, 언성을 조금 높였을 뿐 고함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힐빌리의 노래 - 위기의 가정과 문화에 대한 회고 p.205, J. D. 밴스 지음, 김보람 옮김
분노가 치밀었다. 엄마에게 깨끗한 소변이 필요하거든 신세 조지는 짓일랑 때려치우고 본인의 방광에서 받아다 써야 할 게 아니냐고 따졌다. 할모에게는 엄마를 가만히 보고만 있어서 이 지경까지 온 거라고, 30년 전에 할모가 호되게 다그쳤으면 자기 아들에게 소변을 달라고 하는 일은 없지 않았겠느냐고 따져 물었다. 엄마에게 아주 형편없는 어머니라고, 할모에게도 마찬가지로 형편없는 어머니라고 소리쳤다. 할모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더니 할모는 내 눈조차 마주하려 하지 않았다. 정곡을 찌르는 내 말에 상처를 받은 게 분명했다.
힐빌리의 노래 - 위기의 가정과 문화에 대한 회고 p.219, J. D. 밴스 지음, 김보람 옮김
할모가 하자는 대로 해놓고도, 가슴속에서 무엇인가가 무너져 내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엄마를 돕지 말았어야 했다는 후회 때문에 펑펑 울어서 벌게진 눈을 하고 학교에 갔다. 이 일이 일어나기 몇 주 전 엄마와 중식 뷔페에 갔을 때, 멍한 상태로 입안에 음식을 욱여넣는 엄마를 보고 당황했던 적이 있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피가 거꾸로 솟는다. 엄마는 숟가락이 접시 위로 떨어지면 다시 음식을 퍼서 입 안으로 집어넣기만 할 뿐, 눈을 뜨지도 입을 다물지도 못했다. 다른 테이블의 손님들이 이상한 시선으로 우리를 쳐다봤고, 당황한 켄 아저씨는 할 말을 잃었는데도 엄마는 아무것도 의식하지 못했다.
힐빌리의 노래 - 위기의 가정과 문화에 대한 회고 p.221, J. D. 밴스 지음, 김보람 옮김
그래도 참 즐거웠다. 할모는 확실히 말만 거칠게 하는 사람이었다. 적어도 내게는 그랬다. 한번은 할모가 금요일 밤에 내게 같이 텔레비전을 보자고 했다. 할모가 즐겨 보던 살인 미스터리물이었다. 시청자들이 깜짝 놀라 펄쩍 뛰게끔 연출한 정점에 다다랐을 때, 할모는 갑자기 불을 끄고 내 귀에다가 꽥 소리를 질렀다. 할모는 전에도 똑같은 편을 본 적이 있었기에 어떤 장면이 나올지 미리 알고 있었다. 무서운 장면이 나올 때 손자를 놀래주려고 45분 동안이나 가만히 앉아 있었던 것이다.
힐빌리의 노래 - 위기의 가정과 문화에 대한 회고 p.223~224, J. D. 밴스 지음, 김보람 옮김
나는 어째서 할모가 기꺼운 마음이 아니라 의무감으로 잭슨에 가는지 이해하기 시작했다. 내게 잭슨은 할아버지들을 만나고, 거북을 쫓고, 오하이오의 불안정한 생활을 잊고 평화를 찾을 수 있는 곳이었다. 잭슨에 가면 할모와 함께 지낼 수 있었고 오가는 3시간 동안 차에서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었다. 게다가 잭슨의 모든 사람은 내가 그 유명한 짐과 보니 밴스 부부의 손자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할모에게는 잭슨이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닌 곳이었다. 어릴 때 배고픔에 허덕이던 곳이고, 10대의 나이로 임신을 하는 바람에 도망쳐 나온 곳이기도 했으며, 친구 대부분이 탄광에서 평생을 바치다 세상을 떠난 곳이기도 했다.
힐빌리의 노래 - 위기의 가정과 문화에 대한 회고 p.224~225, J. D. 밴스 지음, 김보람 옮김
할모는 어쩔 수 없을 지경에 이르기 전까지는 어떤 일도 법적으로 해결하려고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힐빌리의 노래 - 위기의 가정과 문화에 대한 회고 p.228, J. D. 밴스 지음, 김보람 옮김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미국의 계층 분화를 더욱 깊이 알게 될수록 부유층과 내가 속한 빈곤층을 향한 분노도 커졌다. 딜먼의 점주는 옛날 사람이라서 신용이 좋은 고객에게는 외상 장부를 만들어줬는데, 그중에는 1000달러가 넘는 장부도 있었다. 나는 우리 점주가 내 일가친척 누구에게도 1000달러가 넘는 외상을 주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힐빌리의 노래 - 위기의 가정과 문화에 대한 회고 p.232, J. D. 밴스 지음, 김보람 옮김
정부 보조금에 기대 사는 사람들이 나도 못 사는 휴대전화를 쓰는데, 우리 같은 사람들은 왜 돈을 벌면서도 이렇게 힘들게 살아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힐빌리의 노래 - 위기의 가정과 문화에 대한 회고 p.233, J. D. 밴스 지음, 김보람 옮김
한때 민주당의 견고한 지지층이었던 애팔래치아 산맥과 남부 지역 사람들이 어째서 한 세대가 지나기도 전에 충실한 공화당 지지자가 되었는지 설명하려고 많은 정치학자가 무던히 애를 썼다. … 그러나 주를 이루는 견해는 수많은 백인 노동자가 내가 딜먼에서 본 것과 똑같은 광경을 목격하고 분노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과거 1970년대 누구의 말마따나 복지 제도에 기대 놀고먹는 사람들이 “정부에서 돈을 받으며 사회를 비웃는다! 우리 같이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은 매일 일터에 나간다는 이유로 조롱받고 있다!”라는 인식이 백인 노동 계층 사이에 팽배해지면서 공화당의 대선 후보 리처드 닉슨을 지지하기 시작했다.
힐빌리의 노래 - 위기의 가정과 문화에 대한 회고 p.234~235, J. D. 밴스 지음, 김보람 옮김
절약은 우리의 존재에 반하는 행동이다. 우리는 상류층인 척하려고 돈을 쓰는 사람들이다.
힐빌리의 노래 - 위기의 가정과 문화에 대한 회고 p.244, J. D. 밴스 지음, 김보람 옮김
10학년이 끝나갈 무렵 나는 할모 집에서 ‘다른 사람 없이’ 할모와 함께 살고 있었다. 11학년이 끝나갈 무렵 나는 할모 집에서 ‘다른 사람 없이’ 할모와 함께 살고 있었다. 12학년이 끝나갈 무렵 나는 할모 집에서 ‘다른 사람 없이’ 할모와 함께 살고 있었다. 할모와 함께 사는 집이 안겨준 평화로움 덕분에 나는 스스로 안전하다고 느끼는 공간에서 숙제를 할 수 있었다. 싸움이나 불안정함이 사라진 덕분에 학교 공부와 아르바이트에 집중할 수 있었다. 온전하게 같은 집에서 같은 사람과 지낸 덕분에 학교 친구들과 오랜 우정을 쌓을 수 있었다. 일을 하며 세상을 조금씩 배운 덕분에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힐빌리의 노래 - 위기의 가정과 문화에 대한 회고 p.252, J. D. 밴스 지음, 김보람 옮김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건 기억 속의 내가 행복했다는 사실이다. 수업을 마치는 종소리가 더 이상 두렵지 않았고, 다음 달에 지낼 곳이 어딘지도 알고 있었으며, 누구의 낭만적인 결정도 내 삶에 영향을 주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행복 덕분에 지난 12년 동안 정말 많은 기회가 찾아왔다.
힐빌리의 노래 - 위기의 가정과 문화에 대한 회고 p.253, J. D. 밴스 지음, 김보람 옮김
전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새로운 관점도 생겼다. 내가 한때 즐겨 먹었던 음식 대부분이 해병대 식단에서 금지하는 식품이었다. 할모네 집에서는 닭고기나 채소절임, 토마토까지 모든 걸 다 튀겨 먹었다. 구운 빵으로 만든 볼로냐 샌드위치에 부순 감자칩을 얹어 먹는 음식이 이제 더는 건강해 보이지 않았다. 과일(블랙베리)과 곡물(밀가루)이 들어간 건강한 음식이라고 생각했던 블랙베리 코블러도 이제 건강식이라는 영예를 잃었다.
힐빌리의 노래 - 위기의 가정과 문화에 대한 회고 p.272~273, J. D. 밴스 지음, 김보람 옮김
한낱 음식에 불과했으나, 거기서 나는 이제 이전과 동일한 눈으로 미들타운을 바라보지 못하게 될 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겨우 몇 달 만에 해병대가 내 관점을 바꿔놓았던 것이다.
힐빌리의 노래 - 위기의 가정과 문화에 대한 회고 p.273, J. D. 밴스 지음, 김보람 옮김
한번은 할모와 내가 린지 누나의 첫째와 둘째 아이를 데리고 위 이모와 댄 이모부를 만나기 위해 아름다운 호킹 힐스 주립공원에 간 적이 있다. 나는 출발할 때부터 도착할 때까지 운전대를 손에서 놓지 않았고, 주유비를 지불했으며, 모두에게 저녁을 샀다. 진짜 어른, 멋진 남자가 된 기분이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이 내가 사는 밥을 먹으며 나와 함께 웃고 떠드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기쁘고 보람찼다.
힐빌리의 노래 - 위기의 가정과 문화에 대한 회고 p.276~277, J. D. 밴스 지음, 김보람 옮김
그때 나는 누군가 지우개를 건넬 때 미소 짓는 사람이 되기로 마음먹었다.
힐빌리의 노래 - 위기의 가정과 문화에 대한 회고 p.287, J. D. 밴스 지음, 김보람 옮김
내게 해병대는 통솔력이란 부하들을 쥐잡듯 잡음으로써가 아니라 그들의 존경을 받음으로써 생긴다는 사실과, 내가 어떻게 해야 그런 존경을 받을 수 있는지를 가르쳐 준 곳이다.
힐빌리의 노래 - 위기의 가정과 문화에 대한 회고 p.289, J. D. 밴스 지음, 김보람 옮김
내가 의사당을 그만두기 직전에 오하이오 상원 의원들은 고리대금업계의 관행을 제한할 정책에 관해 논의하고 있었다. 다수의 의원과 달리 내가 모시던 의원은 그 법안에 반대했다. 그 이유를 직접 들은 적은 없지만, 나는 슐러 의원과 나 사이에 어떤 공통점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싶었다. 법안을 논의하는 상원들과 정책 참모들은, 나 같은 사람들로 가득한 지하 경제에서 대부업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않았다. 대부업자들을 그저 과도한 이자를 붙여 돈을 빌려주고, 터무니없는 수수료를 받고 수표를 현금으로 바꿔주는 등 약탈을 일삼는 사기꾼으로 여겼다. 의원들에게 대부업자란 그저 하루라도 빨리 사라져야 할 암적인 존재였다.
힐빌리의 노래 - 위기의 가정과 문화에 대한 회고 p.303~304, J. D. 밴스 지음, 김보람 옮김
하지만 내게 대부업체는 중대한 재정난을 해결해주는 고마운 존재였다. 과거에 내가 재무 의사 결정을 어리석게 내렸던 탓에 신용 등급이 형편없어서 신용카드를 발급받을 자격이 안 됐기 때문이었다. 데이트를 하고 싶거나 교재가 필요한데 통장에 돈이 없다면, 달리 선택할 여지가 없었다.
힐빌리의 노래 - 위기의 가정과 문화에 대한 회고 p.304~305, J. D. 밴스 지음, 김보람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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