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 빌리의 노래, 가난조차 잊혀지는 곳

D-29
부자와 권력자들은 그저 돈만 많거나 권력만 거머쥔 사람들이 아니다. 이들은 우리와는 다른 규범과 관습을 따르는 사람들이다. 노동 계층이었던 사람이 전문 직종을 가진 중상류층이 되면, 이전 생활방식의 거의 대부분이 좋게 말하자면 한물간 게 되고, 나쁘게 말하자면 건강에 해로운 게 된다. 내가 예일대 친구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크래커배럴에 데려갔을 때 아주 분명히 깨달았다. 내가 어렸을 때 크래커배럴은 고급 식당의 최고봉이었으며 우리 할모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식당이었다. 그러나 예일대 친구들에게는 그저 공중위생을 위협하는 지저분한 식당에 불과했다.
힐빌리의 노래 - 위기의 가정과 문화에 대한 회고 p.335, J. D. 밴스 지음, 김보람 옮김
하지만 바보스러운 내 행동은 이후로도 몇 분간 이어졌다. 자리에 앉으니 웨이트리스가 다가와 내게 무료로 제공되는 정수와 '반짝거리는 물Sparkling water' 중에 무엇을 마시겠느냐고 물었다. '반짝거리는' 수정이나 '반짝거리는' 다이아몬드도 아니고 물을 '반짝거리다'라고 표현하다니 아무리 고급 식당이라고 해도 허세가 지나치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나는 반짝거리는 물을 주문했다. 건강에 더 좋을 것 같았고 오염도 덜 됐겠지 싶었다. 그런데 물을 한 모금 들이켜다가 문자 그대로 내뿜어버렸다. 여태껏 먹어본 음식 중에 가장 역겨웠다. 언젠가 샌드위치 전문점인 서브웨이에서 음료수 기계에 시럽이 떨어진 걸 모르고 다이어트 콜라를 뽑아서 마셨던 적이 있다. 그때 그 맛과 이 고급 식당의 '반짝거리는' 물의 맛이 완벽하게 일치했다. 웨이트리스를 불렀다. "물이 좀 이상하네요."
힐빌리의 노래 - 위기의 가정과 문화에 대한 회고 p.341~342, J. D. 밴스 지음, 김보람 옮김
교내 취업상담과에서는 우리에게 자연스럽게 말해야 하며 면접관이 비행기에 탔을 때 옆자리에 앉고 싶은 사람으로 보여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하긴, 머저리와 함께 일하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분명 이치에 맞는 소리이긴 했으나, 면접장에서 이제 막 커리어를 쌓아가려는 풋내기가 따르기에는 쉽지 않은 조언이었다. 그러나 예일 법대라는 간판 덕분에 우리는 이미 한쪽 발을 업계에 들여놓은 거나 다름없다는 주변 사람들의 말대로 우리가 치른 면접은 성적이나 이력서 위주로 진행되지 않았다. 면접은 소속감과 자기주장, 잠재 고객과의 인맥 형성 능력 따위의 사회성을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힐빌리의 노래 - 위기의 가정과 문화에 대한 회고 p.343, J. D. 밴스 지음, 김보람 옮김
2년 전만 해도 나는 학부를 마치고 보수가 좋은 일자리를 찾아서 열 군데도 넘는 곳에 지원서를 보냈다가 번번이 퇴짜를 맞았다. 그런데 예일 법대를 겨우 1년 다녔다는 이유로 동기들과 나는 연방 대법원에서 변론을 하던 사람들에게서 여섯 자리 숫자에 달하는 금액의 연봉을 제안받고 있었다.
힐빌리의 노래 - 위기의 가정과 문화에 대한 회고 p.344, J. D. 밴스 지음, 김보람 옮김
그 무렵 면접관들은 고장 난 음반처럼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내 관심사가 무엇인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과목은 무엇인지, 어떤 세부전공을 택할 것인지 물은 뒤 내게 궁금한 게 있느냐고 질문했다. 여러 번의 면접 경험으로 나는 빈틈없이 대답했고 로펌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사람처럼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그러나 실상은 전혀 달랐다. 나는 내가 뭘 좋아하는지, 어떤 세부 전공을 택하고 싶은지 전혀 몰랐다. 심지어 '기업 문화'와 '일과 삶의 조화'에 관한 내 질문이 무슨 의미인지도 정확히 몰랐다. 전체적인 면접 과정이 그저 상투적인 쇼에 지나지 않았다. 어쨌든 나는 머저리 같아 보이지 않았고 덕분에 면접을 수월하게 통과해나갔다.
힐빌리의 노래 - 위기의 가정과 문화에 대한 회고 p.345~346, J. D. 밴스 지음, 김보람 옮김
가끔 내게 우리 지역 사회의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있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그들이 마법처럼 문제를 해결할 공공정책이나 획기적인 정부 프로그램을 바란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가족과 신념, 문화와 관련된 문제들은 루빅큐브 같은 게 아니므로 그런 해결책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힐빌리의 노래 - 위기의 가정과 문화에 대한 회고 p.381, J. D. 밴스 지음, 김보람 옮김
정부의 정책만으로 우리 지역 사회의 다른 문제들까지 해결할 순 없을 것이다. 어렸을 때 나는 공부를 여성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남자다운 사람이란 강하고, 용기 있고, 싸움을 잘하고, 커서는 연애를 잘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좋은 성적을 받는 남자애들은 '계집애 같은 놈'이나 '호모 새끼'가 됐다. 무엇 때문에 그런 편견을 갖게 됐는지는 모르겠다. 할모는 내게 늘 좋은 점수를 받아오라고 했으니 확실히 할모 때문은 아니었고, 할보 때문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내게 그런 생각이 박혀 있었다. 최근에 한 논문에서 보니, 나와 같은 노동 계층의 소년들은 공부를 여성스러운 활동으로 보기 때문에 학교 성적이 여학생에 비해 훨씬 저조하다고 한다. 이런 문제를 새로운 법이나 정책 프로그램으로 개선할 수 있을까?
힐빌리의 노래 - 위기의 가정과 문화에 대한 회고 p.392, J. D. 밴스 지음, 김보람 옮김
공공 정책은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될 수는 있다. 그러나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줄 정부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힐빌리의 노래 - 위기의 가정과 문화에 대한 회고 p.405, J. D. 밴스 지음, 김보람 옮김
작년 여름에 이 책의 검토서를 작성하다가 ‘제8조 프로그램’이 퍼뜩 이해되지 않아 웨스트버지니아 출신의 친구에게 물었던 적이 있다. 설명을 마친 친구는 복지 여왕들을 향해 욕을 한바탕 퍼부었다. 밤낮없이 일해도 먹고 싶은 음식, 사고 싶은 물건을 마음껏 사지 못하는데 복지 여왕들은 자기가 낸 세금 덕분에 손 하나 까딱 안 하고 편하게 산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힐빌리의 노래 - 위기의 가정과 문화에 대한 회고 p.416, J. D. 밴스 지음, 김보람 옮김
미국 내 다른 지역에 살거나 여행하며 만난 사람 대부분은 내가 웨스트버지니아에서 1년을 살았다고 하면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그들에게 웨스트버지니아란 아주 가난하고, 교육 수준이 낮고, 비만한 사람들이 많고, 우스운 억양의 사투리를 쓰는 촌스러운 동네였다. 어떤 배경 때문에 촌사람들이 이토록 비참하게 살고 있는지, 이들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궁금해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참담한 현실을 숨기려는 힐빌리의 특성 탓에 이들의 목소리를 들을 기회가 없었는지도 모르고, 촌구석에서 답답하게 사는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하든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어차피 세상을 바꾸는 건 권력이나 지식, 돈을 많이 가진 자들의 목소리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힐빌리의 노래 - 위기의 가정과 문화에 대한 회고 p.416~417, J. D. 밴스 지음, 김보람 옮김
돌아보면 우리 주변에도 여전히 자신의 목소리를 어떻게 내는지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이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고 귀를 닫을 것인가? 무지한 사람들이라고 비난을 퍼부을 것인가? 정신 똑바로 차리라며 이들에게 돌을 던지기 전에, 이들이 처한 실상을 이해하고 이들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려는 노력이 선행돼야 할 것이다. 역사가 말해 주듯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상위 2퍼센트의 지도층이 아니기 때문이다.
힐빌리의 노래 - 위기의 가정과 문화에 대한 회고 p.417, J. D. 밴스 지음, 김보람 옮김
어느 사회에나 변두리 인생이 있다.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중심과 주변을 만든다. 변두리에서 어찌어찌 기어 나왔지만 끝내 주변부를 맴돌 수밖에 없는 인생이 있다. 자본주의에 가까스로 적응한 듯 보이지만 내면은 흉터투성이인 사람들이다. 『힐빌리의 노래』는 세상 모든 변두리 인생들의 이야기다. 그랬다. 어쩌면 나도 한국 사회의 힐빌리였다. ― 신기주, 에스콰이어 편집장
힐빌리의 노래 - 위기의 가정과 문화에 대한 회고 p.6, J. D. 밴스 지음, 김보람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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