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 빌리의 노래, 가난조차 잊혀지는 곳

D-29
지금도 그럴지 모르겠지만, 당시 힐빌리 문화는 난폭한 명예의식과 가족을 향한 헌신, 별난 성차별주의가 한데 엉키면서 종종 일촉즉발의 상황을 일으켰다.
힐빌리의 노래 - 위기의 가정과 문화에 대한 회고 p.82, J. D. 밴스 지음, 김보람 옮김
어느 크리스마스 이브에, 거나하게 취해 집에 들어온 할보가 갓 차린 뜨끈한 저녁식사를 내오라고 할모에게 말했다. 뜻대로 되지 않자 할보는 크리스마스 트리를 집어서 뒷문 밖으로 냅다 던져버렸다. 이듬해에는 딸의 생일파티에 초대된 아이들을 맞이하자마자 모두의 발에 튈 만큼 거대한 가래를 뱉었다. 할보는 아이들을 향해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맥주를 꺼내러 냉장고로 가버렸다.
힐빌리의 노래 - 위기의 가정과 문화에 대한 회고 p.85, J. D. 밴스 지음, 김보람 옮김
그래도 두 분은 멈추지 않았다. 할모는 꽃병을 잡더니 살벌하게 팔을 휘두르며 꽃병을 던져버렸고, 그 꽃병은 정확히 할보의 미간을 강타했다. "아버지가 꽃병에 맞아서 이마가 잔뜩 찢어졌는데, 피를 철철 흘리면서 집을 나가더니 그대로 차를 몰고 가버리셨어. 다음날 등교할 때까지도 그 장면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더구나."
힐빌리의 노래 - 위기의 가정과 문화에 대한 회고 p.86, J. D. 밴스 지음, 김보람 옮김
유독 과격했던 밤이 지나고 나서 할모는 할보에게 한 번만 더 술에 취해서 집에 들어오면 죽여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일주일 후 할보는 또다시 술을 마신 채로 귀가해 소파에서 잠이 들었다. 빈말이라고는 해본 적이 없는 할모는 차분히 차고로 가서 휘발유 통을 가져오더니 휘발유를 남편의 온몸에 붓고 불붙은 성냥을 그의 가슴팍에 떨어뜨렸다. 할보의 몸에서 불길이 치솟자 열한 살짜리 딸이 재빨리 나서서 불을 꺼 아버지의 목숨을 구했다. 기적적으로 할보는 가벼운 화상만 입은 채 그날의 위기를 넘겼다.
힐빌리의 노래 - 위기의 가정과 문화에 대한 회고 p.86, J. D. 밴스 지음, 김보람 옮김
할보는 암코(Armco)가 아들에게 그저 돈만 쥐어주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몰랐다. 암코에 취직하면 삼촌은 어머니가 아버지의 이마에 꽃병을 내던지는 집구석에서 독립할 수 있었다.
힐빌리의 노래 - 위기의 가정과 문화에 대한 회고 p.88, J. D. 밴스 지음, 김보람 옮김
안타깝게도 통계는 밴스 가족을 비껴가지 않았고 우리 엄마인 베브는 번듯하게 살지 못했다. 엄마도 다른 형제들처럼 일찍 집을 떠났다. 고등학교를 다닐 때만 해도 전도유망한 학생이었으나, 열여덟 살에 임신을 하는 바람에 대학 진학을 미뤄야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남자 친구와 결혼했고, 새로운 생활에 정착하려 했지만 정착은 엄마에게 어울리는 단어가 아니었다. 어릴 때 너무도 잘 보고 배운 탓이었다. 결혼생활을 하는 동안 어릴 때 집에서 봤던 것과 똑같은 다툼과 사건이 반복되자 엄마는 이혼 소송을 제기했고 홀로서기를 시작했다. 학위도 남편도 없는 열아홉 살의 엄마 곁에는 어린 딸, 린지 누나뿐이었다.
힐빌리의 노래 - 위기의 가정과 문화에 대한 회고 p.90, J. D. 밴스 지음, 김보람 옮김
나는 1984년 늦여름에 태어났다. 할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공화당의 로널드 레이건 후보에게 표를 던지기 몇 달 전이었다. 당시 레이건 후보는 할보처럼 러스트벨트에 거주했던 기존의 민주당 지지자들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근대사에 남을 정도의 압도적 승리를 거뒀다.
힐빌리의 노래 - 위기의 가정과 문화에 대한 회고 p.92, J. D. 밴스 지음, 김보람 옮김
나중에 할보에게 들은 말은 뜻밖이었다. "사실 레이건을 그렇게 좋아한 적은 없단다. 단지 먼데일 그 개자식이 너무 싫었어." 레이건의 상대였던 민주당 후보는 북부 출신의 고학력 진보주의자로, 우리 힐빌리 할보와 정반대의 문화적 배경을 지닌 사람이었다.
힐빌리의 노래 - 위기의 가정과 문화에 대한 회고 p.92, J. D. 밴스 지음, 김보람 옮김
지미 카터 정부 시절의 '지역재투자법'에서 조지 W.부시 정부의 '오너십 소사이어티'에 이르기까지 정부의 연방 주택 정책은 꾸준히 '내 집 마련'을 부추겼다. 그러나 정부의 말을 믿고 내 집을 마련한 미들타운 사람들은 터무니없는 사회적 비용을 치러야 했다.
힐빌리의 노래 - 위기의 가정과 문화에 대한 회고 p.100, J. D. 밴스 지음, 김보람 옮김
동네에서 일자리가 대거 사라졌지만, 집값이 떨어지는 바람에 발목이 잡힌 것이다. 이사를 하고 싶어도 집을 사겠다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는 탓에 옴짝달싹 못하게 된 것이다. 이제는 집을 팔아봤자 대출금을 갚지 못한다. 이사 비용이 지나치게 많이 들어서 떠나지 못하는 사람도 많다.
힐빌리의 노래 - 위기의 가정과 문화에 대한 회고 p.100, J. D. 밴스 지음, 김보람 옮김
미들타운의 번화가를 개혁하겠다는 노력을 볼 때마다 또다시 쓸모없는 짓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유행하는 편의 시설이 없다는 이유로 사람들이 미들타운을 떠난 것은 아니다. 그런 시설을 이용해줄 손님이 사라졌기에 편의 시설이 문을 닫고 떠난 것이다.
힐빌리의 노래 - 위기의 가정과 문화에 대한 회고 p.101, J. D. 밴스 지음, 김보람 옮김
암코는 꼼꼼한 설계로 명성을 얻었다. 채드 베리는 저서『남부 이주자, 북부 망명자』에서 "1950년대까지 마이애미밸리 지역의 '4대' 고용주는 신시내티의 프록터앤드겜블, 해밀턴의 챔피언페이퍼앤드파이버, 미들타운의 암코스틸, 데이턴의 내셔널캐시레지스터였으며, 이 기업들이 평화로운 노사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이주자로 출발한 직원들의 가족과 친구들을 '고용한' 덕분이었다. 일례로 미들타운의 인랜드컨테이너의 급여 대상자 명단을 보면 켄터키 출신 직원이 220명 있었는데, 그중 117명이 울프 카운티 출신이었다"고 밝혔다. 1980년대 노사 관계가 악화했을 때도 암코와 그 유사한 기업들의 노사 관계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힐빌리의 노래 - 위기의 가정과 문화에 대한 회고 p.102, J. D. 밴스 지음, 김보람 옮김
가와사키스틸과의 합병은 불편한 진실을 담고 있었다. 세계화 된 시대에서 미국의 제조업은 살아남기 어려워졌다.
힐빌리의 노래 - 위기의 가정과 문화에 대한 회고 p.103, J. D. 밴스 지음, 김보람 옮김
그러나 제철소 노동자를 꿈꾸는 애들은 없었다. 미들타운의 지리적 위치 때문에 대학 교육을 받은 학부모가 거의 없었던 루스벨트초등학교에도 생산직과 그 일자리가 가져다줄 모양새 좋은 중산층의 삶을 꿈꾸는 학생은 없었다. 우리는 암코에 취직하면 다행일 거라고 생각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암코의 존재를 그저 당연하게 여겼을 뿐이다.
힐빌리의 노래 - 위기의 가정과 문화에 대한 회고 p.104, J. D. 밴스 지음, 김보람 옮김
미들타운 같은 곳에 사는 사람들은 열심히 일해야 한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그러나 미들타운을 돌아다녀보면, 젊은이의 30퍼센트가 주당 20시간 미만으로 일하는 동네인데도 자신이 게으르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사람을 단 한 명도 만나지 못할 것이다.
힐빌리의 노래 - 위기의 가정과 문화에 대한 회고 p.108, J. D. 밴스 지음, 김보람 옮김
집 밖에는 총을 든 채 담배를 피우는 할모가 있었고 집 안에는 새로 생긴 법적 아버지가 있는 희한한 가정이었지만, 그래도 우리는 행복했다.
힐빌리의 노래 - 위기의 가정과 문화에 대한 회고 p.117, J. D. 밴스 지음, 김보람 옮김
할모와 할보는 내게 싸움의 기본 규칙을 확실히 일러줬다. "절대 먼저 싸움을 걸어서는 안 돼. 하지만 누가 싸움을 걸어온다면 반드시 끝장을 내야 한다. 원래는 절대 안 되지만 상대방이 가족을 모욕한다면 싸움을 시작해도 괜찮을 거야."
힐빌리의 노래 - 위기의 가정과 문화에 대한 회고 p.120~121, J. D. 밴스 지음, 김보람 옮김
언제나 그랬듯 할모는 싸움도 경험을 통해 배우도록 했다. 할모는 한 번도 내게 손찌검을 한 적이 없었지만(아마도 본인이 겪었던 끔찍한 과거 때문이었으리라), 내가 주먹으로 얼굴 부위를 맞으면 어떤 느낌이 드는지를 물었을 때는 망설임 없이 직접 시범을 보여줬다. 할모의 손이 재빠르게 날아와 내 뺨을 정통으로 가격했다. "어떠냐? 그렇게 아프지는 않지?"
힐빌리의 노래 - 위기의 가정과 문화에 대한 회고 p.121, J. D. 밴스 지음, 김보람 옮김
정말 그랬다. 얼굴을 맞았는데도 내가 상상했던 것만큼 끔찍하게 아프지는 않았다. 이것이 할모가 가르쳐준 가장 중요한 싸움의 기술이었다. '제대로 때릴 줄 아는 사람이 휘두르는 주먹이 아니라면 얼굴도 맞을 만하다. 피하다가 때릴 기회를 놓치는 것보다는 얼굴을 한 대 맞는 게 낫다.'
힐빌리의 노래 - 위기의 가정과 문화에 대한 회고 p.122, J. D. 밴스 지음, 김보람 옮김
할모는 소파로 향했다. 할모가 평소에 앉아서 범죄 수사 드라마 <범죄전담반>을 시청하고 성경을 읽고 잠을 자기도 하는 소파였다. 주방과 거실을 나누는 좁은 통로에 서 있던 나는, 차에서 할모가 엄마에게 안전하게 운전하라고 명령할 때부터 계속 궁금했던 질문을 했다. "할모, 신이 정말 우리를 사랑해요?" 할모는 고개를 떨구고 나를 껴안더니 꺽꺽 울기 시작했다.
힐빌리의 노래 - 위기의 가정과 문화에 대한 회고 p.151, J. D. 밴스 지음, 김보람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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