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 빌리의 노래, 가난조차 잊혀지는 곳

D-29
어느 금요일 오전이었다. 월세를 하루만 더 미뤘다가는 50달러의 연체료가 붙겠기에, 우선 수표를 써서 월세를 지불했다. 수표를 처리할 만한 돈이 계좌에 없었지만, 그날이 월급날이어서 퇴근하는 길에 월급을 입금할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온종일 정신없이 일하는 바람에 퇴근하기 전에 급여 수표를 챙기는 걸 깜빡하고 말았다. 실수를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집이었고, 의사당 직원들도 퇴근하고 난 후였다. 그날 몇 달러의 이지만 붙는 대부업체의 3일자리 대출 덕에, 나는 어마어마한 초과 인출 수수료를 면할 수 있었다. 대부업이 장점을 논하는 의원들 중에도 그런 상황을 언급하는 사람은 없었다. 여기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이 무엇일까? 힘 있는 사람들은 나 같은 사람의 처지를 제대로 알지도 못한 채 우리를 도우려고 할 때가 있다는 것이다.
힐빌리의 노래 - 위기의 가정과 문화에 대한 회고 p.304~305, J. D. 밴스 지음, 김보람 옮김
2008년에 조지 W. 부시를 좋아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당시 여전히 많은 사람이 빌 클린턴을 좋아했으나,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이 클린턴을 미국의 도덕적 타락의 상징으로 여겼고, 로널드 레이건은 이미 오래전에 세상을 떠난 사람이었다. 우리는 군대를 사랑했지만, 우리가 생각하기에 현대 군대에는 조지 S. 패튼 같은 장군이 없었다. 이웃들 중에 고위급 군 장교 이름을 하나라도 댈 수 있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오랫동안 자존심이 근간이 됐던 우주 프로그램은 도도새처럼 완전히 사라져버렸고, 자연스럽게 유명 우주 비행사도 도도새와 운명을 함께했다. 결론적으로 미국 사회의 핵심 조직과 우리를 하나로 엮을 만한 고리가 아무것도 없었다.
힐빌리의 노래 - 위기의 가정과 문화에 대한 회고 p.309~310, J. D. 밴스 지음, 김보람 옮김
우리는 우리가 안녕하지 못하다는 현실을 잘 알고 있다. 그건 하루도 빠짐없이 우리의 일상에서 드러난다. 신문의 부고란에는 유독 10대 청소년의 사망 원인만 비어 있으며(약물 과다 복용이라는 속뜻이 담겨 있다), 딸들은 순 게으름뱅이 같은 놈들과 어울리며 시간을 축낸다. 그런데 버락 오바마라는 사람이 나타나더니 우리의 불안정한 삶이 가진 문제의 정곡을 찌른 것이다.
힐빌리의 노래 - 위기의 가정과 문화에 대한 회고 p.314, J. D. 밴스 지음, 김보람 옮김
미들타운의 수많은 아버지들과 다르게 오바마는 훌륭한 아버지다. 미들타운에서는 출근할 직장이라도 있는 운 좋은 사람들이라야 멜빵바지를 입고 일터에 나가는 반면, 오바마는 정장을 입고 출근한다. 대통령 영부인은 우리더러 자녀들에게 특정 음식을 먹이면 안 된다고 말하고, 우리는 그런 영부인을 미워한다. 틀린 말을 했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우리도 영부인의 말이 옳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힐빌리의 노래 - 위기의 가정과 문화에 대한 회고 p.314, J. D. 밴스 지음, 김보람 옮김
이런 목록은 끝이 없다. 수많은 음모설 중에 하나 이상의 설을 사실이라고 믿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가늠하기도 불가능하다. … 이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바람직하다고 평가받는 행동인, 정부의 정책을 자유지상주의적으로 불신하는 행위가 아니다. 오히려 민주주의라는 제도를 뿌리 깊게 의심하는 행위다. 그리고 이런 분위기는 점점 더 주류를 이루는 추세다.
힐빌리의 노래 - 위기의 가정과 문화에 대한 회고 p.316, J. D. 밴스 지음, 김보람 옮김
현대 보수파의 미사여구가 그들의 최대 유권자가 겪고 있는 실질적 문제들을 파고들지 못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보수파 세력은 내 또래 청년층에게 취업을 독려하는 대신 사회적 고립을 점진적으로 조장함으로써 그들의 포부를 짓밟았다.
힐빌리의 노래 - 위기의 가정과 문화에 대한 회고 p.318, J. D. 밴스 지음, 김보람 옮김
나는 총 20만 달러 가량의 빚이 쌓일 것을 알면서도 예일 로스쿨에 가겠다고 마음먹었으나, 학교에서 예상치 못한 액수의 학자금을 지원해준 덕분에 못해 학비의 거의 전액을 면제받았다.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던 건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학교에서 가장 가난한 학생층에 속해서였다.
힐빌리의 노래 - 위기의 가정과 문화에 대한 회고 p.322~323, J. D. 밴스 지음, 김보람 옮김
그래서인지 예일의 사교 사이에는 어딘가 묘한 구석이 있었다. 칵테일파티나 연회에 모인 사람들은 업무에 필요한 인맥을 구축하는 한편, 개인적으로는 결혼할 상대를 찾았다.
힐빌리의 노래 - 위기의 가정과 문화에 대한 회고 p.328, J. D. 밴스 지음, 김보람 옮김
그러나 예일 로스쿨에 있을 때는 마치 내 우주선이 오즈에 불시착한 느낌이었다.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의사 어머니와 기술자 아버지를 둔 가정을 중산층이라고 일컬었다. 연봉 16만 달러면 미들타운에서는 어마어마한 연봉이었으나, 예일 로스쿨에서는 학생들이 졸업 직후 첫 연봉으로 기대하는 액수였다. 그것도 부족할 것 같다고 걱정하는 학생들이 벌써부터 많았다.
힐빌리의 노래 - 위기의 가정과 문화에 대한 회고 p.330, J. D. 밴스 지음, 김보람 옮김
부자와 권력자들은 그저 돈만 많거나 권력만 거머쥔 사람들이 아니다. 이들은 우리와는 다른 규범과 관습을 따르는 사람들이다. 노동 계층이었던 사람이 전문 직종을 가진 중상류층이 되면, 이전 생활방식의 거의 대부분이 좋게 말하자면 한물간 게 되고, 나쁘게 말하자면 건강에 해로운 게 된다. 내가 예일대 친구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크래커배럴에 데려갔을 때 아주 분명히 깨달았다. 내가 어렸을 때 크래커배럴은 고급 식당의 최고봉이었으며 우리 할모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식당이었다. 그러나 예일대 친구들에게는 그저 공중위생을 위협하는 지저분한 식당에 불과했다.
힐빌리의 노래 - 위기의 가정과 문화에 대한 회고 p.335, J. D. 밴스 지음, 김보람 옮김
하지만 바보스러운 내 행동은 이후로도 몇 분간 이어졌다. 자리에 앉으니 웨이트리스가 다가와 내게 무료로 제공되는 정수와 '반짝거리는 물Sparkling water' 중에 무엇을 마시겠느냐고 물었다. '반짝거리는' 수정이나 '반짝거리는' 다이아몬드도 아니고 물을 '반짝거리다'라고 표현하다니 아무리 고급 식당이라고 해도 허세가 지나치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나는 반짝거리는 물을 주문했다. 건강에 더 좋을 것 같았고 오염도 덜 됐겠지 싶었다. 그런데 물을 한 모금 들이켜다가 문자 그대로 내뿜어버렸다. 여태껏 먹어본 음식 중에 가장 역겨웠다. 언젠가 샌드위치 전문점인 서브웨이에서 음료수 기계에 시럽이 떨어진 걸 모르고 다이어트 콜라를 뽑아서 마셨던 적이 있다. 그때 그 맛과 이 고급 식당의 '반짝거리는' 물의 맛이 완벽하게 일치했다. 웨이트리스를 불렀다. "물이 좀 이상하네요."
힐빌리의 노래 - 위기의 가정과 문화에 대한 회고 p.341~342, J. D. 밴스 지음, 김보람 옮김
교내 취업상담과에서는 우리에게 자연스럽게 말해야 하며 면접관이 비행기에 탔을 때 옆자리에 앉고 싶은 사람으로 보여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하긴, 머저리와 함께 일하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분명 이치에 맞는 소리이긴 했으나, 면접장에서 이제 막 커리어를 쌓아가려는 풋내기가 따르기에는 쉽지 않은 조언이었다. 그러나 예일 법대라는 간판 덕분에 우리는 이미 한쪽 발을 업계에 들여놓은 거나 다름없다는 주변 사람들의 말대로 우리가 치른 면접은 성적이나 이력서 위주로 진행되지 않았다. 면접은 소속감과 자기주장, 잠재 고객과의 인맥 형성 능력 따위의 사회성을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힐빌리의 노래 - 위기의 가정과 문화에 대한 회고 p.343, J. D. 밴스 지음, 김보람 옮김
2년 전만 해도 나는 학부를 마치고 보수가 좋은 일자리를 찾아서 열 군데도 넘는 곳에 지원서를 보냈다가 번번이 퇴짜를 맞았다. 그런데 예일 법대를 겨우 1년 다녔다는 이유로 동기들과 나는 연방 대법원에서 변론을 하던 사람들에게서 여섯 자리 숫자에 달하는 금액의 연봉을 제안받고 있었다.
힐빌리의 노래 - 위기의 가정과 문화에 대한 회고 p.344, J. D. 밴스 지음, 김보람 옮김
그 무렵 면접관들은 고장 난 음반처럼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내 관심사가 무엇인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과목은 무엇인지, 어떤 세부전공을 택할 것인지 물은 뒤 내게 궁금한 게 있느냐고 질문했다. 여러 번의 면접 경험으로 나는 빈틈없이 대답했고 로펌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사람처럼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그러나 실상은 전혀 달랐다. 나는 내가 뭘 좋아하는지, 어떤 세부 전공을 택하고 싶은지 전혀 몰랐다. 심지어 '기업 문화'와 '일과 삶의 조화'에 관한 내 질문이 무슨 의미인지도 정확히 몰랐다. 전체적인 면접 과정이 그저 상투적인 쇼에 지나지 않았다. 어쨌든 나는 머저리 같아 보이지 않았고 덕분에 면접을 수월하게 통과해나갔다.
힐빌리의 노래 - 위기의 가정과 문화에 대한 회고 p.345~346, J. D. 밴스 지음, 김보람 옮김
가끔 내게 우리 지역 사회의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있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그들이 마법처럼 문제를 해결할 공공정책이나 획기적인 정부 프로그램을 바란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가족과 신념, 문화와 관련된 문제들은 루빅큐브 같은 게 아니므로 그런 해결책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힐빌리의 노래 - 위기의 가정과 문화에 대한 회고 p.381, J. D. 밴스 지음, 김보람 옮김
정부의 정책만으로 우리 지역 사회의 다른 문제들까지 해결할 순 없을 것이다. 어렸을 때 나는 공부를 여성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남자다운 사람이란 강하고, 용기 있고, 싸움을 잘하고, 커서는 연애를 잘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좋은 성적을 받는 남자애들은 '계집애 같은 놈'이나 '호모 새끼'가 됐다. 무엇 때문에 그런 편견을 갖게 됐는지는 모르겠다. 할모는 내게 늘 좋은 점수를 받아오라고 했으니 확실히 할모 때문은 아니었고, 할보 때문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내게 그런 생각이 박혀 있었다. 최근에 한 논문에서 보니, 나와 같은 노동 계층의 소년들은 공부를 여성스러운 활동으로 보기 때문에 학교 성적이 여학생에 비해 훨씬 저조하다고 한다. 이런 문제를 새로운 법이나 정책 프로그램으로 개선할 수 있을까?
힐빌리의 노래 - 위기의 가정과 문화에 대한 회고 p.392, J. D. 밴스 지음, 김보람 옮김
공공 정책은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될 수는 있다. 그러나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줄 정부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힐빌리의 노래 - 위기의 가정과 문화에 대한 회고 p.405, J. D. 밴스 지음, 김보람 옮김
작년 여름에 이 책의 검토서를 작성하다가 ‘제8조 프로그램’이 퍼뜩 이해되지 않아 웨스트버지니아 출신의 친구에게 물었던 적이 있다. 설명을 마친 친구는 복지 여왕들을 향해 욕을 한바탕 퍼부었다. 밤낮없이 일해도 먹고 싶은 음식, 사고 싶은 물건을 마음껏 사지 못하는데 복지 여왕들은 자기가 낸 세금 덕분에 손 하나 까딱 안 하고 편하게 산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힐빌리의 노래 - 위기의 가정과 문화에 대한 회고 p.416, J. D. 밴스 지음, 김보람 옮김
미국 내 다른 지역에 살거나 여행하며 만난 사람 대부분은 내가 웨스트버지니아에서 1년을 살았다고 하면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그들에게 웨스트버지니아란 아주 가난하고, 교육 수준이 낮고, 비만한 사람들이 많고, 우스운 억양의 사투리를 쓰는 촌스러운 동네였다. 어떤 배경 때문에 촌사람들이 이토록 비참하게 살고 있는지, 이들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궁금해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참담한 현실을 숨기려는 힐빌리의 특성 탓에 이들의 목소리를 들을 기회가 없었는지도 모르고, 촌구석에서 답답하게 사는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하든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어차피 세상을 바꾸는 건 권력이나 지식, 돈을 많이 가진 자들의 목소리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힐빌리의 노래 - 위기의 가정과 문화에 대한 회고 p.416~417, J. D. 밴스 지음, 김보람 옮김
돌아보면 우리 주변에도 여전히 자신의 목소리를 어떻게 내는지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이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고 귀를 닫을 것인가? 무지한 사람들이라고 비난을 퍼부을 것인가? 정신 똑바로 차리라며 이들에게 돌을 던지기 전에, 이들이 처한 실상을 이해하고 이들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려는 노력이 선행돼야 할 것이다. 역사가 말해 주듯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상위 2퍼센트의 지도층이 아니기 때문이다.
힐빌리의 노래 - 위기의 가정과 문화에 대한 회고 p.417, J. D. 밴스 지음, 김보람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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