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설적으로 김규식은 1913년 중국으로 망명한 이후에야 정치적 행동의 자유를 얻게 되었다고도 볼수 있겠다. 또한 중국 망명은 개인적으로는 근대세계시민이 되었지만 여전히 그를 얽매던 전통적 가족관계, 사회질서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을 것이다, 297
1916년 미국에 돌아간 언더우드가 병환으로 사망하자, 김규식으로 한편으로 자신의 생명의 은인이자 양부가 돌아간 것에 비애감을 느꼈으며, 다른 한편으로 이제 언더우드의 그늘에서 벗어난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을 것이다 297
김규식이 국내에 있던 1904-1913년간은 정치적으로는 러일전쟁-을사조약-정미조약-군대해산-합방조약으로 국운이 급전직하하던 시기였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독립운동의 2가지 노선은 애국계몽운동으로 대표되는 경제, 교육 실력 양성노선과 의병투쟁으로 대표되는 무장투쟁노선이었다. 이 가운데 김규식은 교육, 문화운동에 동참했다. 299
신해혁명 발발 소식을 들은 김필순과 이태준이 중국으로 망명했고, 1913년 김규식도 중국으로 향했다. 다음 해 그의 평생 동지가 된 여운형도 중국으로 향했다. 306
김규식은 김필순의 셋째 여동생 김순애와 결혼했고, 김규식과 함께 언더우드 목사에게 유아세례를 받은 서병호는 김필순의 첫째 여동생 김구례와 결혼했다. 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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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김규식과 그의 시대 1~3 세트 - 전3권』 정병준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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