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23일 월요일부터 곧바로 2권을 함께 읽기 시작합니다.
2월 23일 월요일은 2권 프롤로그와 1장 여운형, 크레인 면담의 연쇄를 읽습니다. 27쪽부터 67쪽까지입니다. 2권은 1권과 비교할 때 훨씬 읽기에 속도가 나는 편입니다. 그래서 2월 마지막 주와 3월 첫째 주 2주 동안 조금 밭게 읽습니다.
2권은 여운형(1886~1947)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는 모습으로 시작합니다. 1918년 11월 27일 만 32세의 여운형은 당시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의 최측근이었던 찰스 크레인을 상하이에서 만나고 나서, 파리 강화 회의를 적극적으로 활용할 결심을 하게 됩니다. 정병준 선생님께서 그 과정을 자세하게 추적하고 있습니다.
[책걸상 '벽돌 책' 함께 읽기] #31. <김규식과 그의 시대> (1)
D-29
화제로 지정된 대화

YG

적륜재
지난 주 한 주 동안 개인적인 일로 모임에 참석을 못했습니다. 책은 진도대로 읽고 있고 가끔 대화들도 읽었지만 주말이 되어서야 뒤늦게 들어왔습니다.
몇가지 1권 뒷부분에 언급된 흥미로운 내용들 덧붙이자면, 우선 김규흥(또는 김복)이라고 등장하는 인물은 여기 짧게 언급된 것보다 좀더 흥미로운 활동을 보였지만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인물입니다. 뒤늦게 1998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지만 그 활동이 알려진 것도 아주 최근에 들어와서 입니다. 1차 대전이 발발하면서 1916년까지도 미국이 아직 참전을 결정하지 않고 중립국으로 양측을 저울질 할 때 유럽전선에서는 독일-오스트리아가 더 승세를 잡고 있었습니다. 조선인들에게는 19세기 후반부터 일본을 견제할 가장 든든한 대안이었던 러시아가 일본과 같은 연합국이 되어버리자 독일을 독립운동의 베스트 대안으로 보고 여러가지 시도를 했습니다. 책에서 설명한 성낙형의 신한혁명당 사건 불발 이후에도 상하이 독일 공사관 직원까지 연루 공모하여 러시아령 방면의 조병창과 철도를 폭파하고, 폭약을 시베리아, 만주로 밀반입하며, 독일포로의 탈출을 주선하여 일본의 배후를 치기로 했다는 1916년 "조선인과 독일인의 내통음모 사건"이 있었는데, 이 사건의 핵심인물로도 김규흥이 등장합니다.
김규흥은 원래 일본측 정보자료에는 구한국 시절 참봉 벼슬을 한 적이 있다고 하는데, 일찍 일본을 다녀온 개화파였던 김규흥은 대한자강회에 가입하여 활동하면서 중앙에 이름을 내기 시작합니다. 벼슬은 참봉이지만 황현, 이건창과 함께 문명을 같이 날리던 신진 한문학자로 혹은 개화주의자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어떠한 인연에서이든지 국권회복 운동에 아마도 처음에 보황주의자로 가담하여 중국으로 건너갑니다. 중국에 건너간 후 상하이의 무관학교를 추진하였지만 뜻대로 이루어지지않아 실패로 돌아가자 김규흥은 다른 대부분의 의병계 국권회복 운동가들이 간도를 방향으로 잡을때 특이하게 남쪽 광동으로 발길을 돌립니다. 이때 중국 남부에는 신해혁명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상황들이 광둥지역을 주무대로 전개되기 시작합니다. 현재 알려진 바에 의하면 1차 신해혁명에 직접 참가한 조선인은 바로 "김규흥"뿐입니다. 다른 신해혁명에 참가하였다는 조선인들은 1권에서 설명된 것처럼 그후 1차 신해혁명 이후 전개된 과정에 참가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습니다. 예전에 유일한 신해혁명 참가자로 알려졌던 신규식 역시 중국에 와서 1차 혁명을 소식을 듣고 이에 참가한 것으로 최근의 연구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조선인과 독일인 공모사건이 일단락된 1916년 12월 중국 특명전권공사 林權助가 외부대신 本野一郞에게 보고한 베이징 한인 동정에 상세하게 나온 김규흥에 대한 정보에 따르면, 그가 1차 혁명에 참가하였다며 그의 클로즈 서클 내에 있는 당시 혁명정부 인물로 궈중슈(谷鐘秀), 쑨훙이(孫洪伊) 같은 혁명정부 핵심 인싸들의 이름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김규흥은 1911년 1차 혁명 당시 이미 쑨원의 수뇌부에 가담하여 혁명정부 도독부 참의 및 고문원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아마도 신해혁명에 가담하면서 보황주의자에서 민주공화정주의자로 바뀌었다고 평가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후 중국 내 독립운동가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실질적인 여러가지 지원을 한 인물로 재평가되기도 하고 있습니다.
참고로 그런데 옥천에서 그 지방 출신 독립운동가 중에서도 상당한 비중의 독립운동가가 재발견되자 연구를 지원하고 2016년 크게 학술대회를 열었었는데, 그만 그 학술대회에서 그가 일본의 "밀정"이었을 수 있다는 폭탄 연구가 발표되어버리고 맙니다. 정황상 무리가 좀 있기는 해서 학계에서의 논란 정도였는데, 3년 뒤 KBS에서 시사기획 창이라는 프로그램에서 밀정이라고 거의 단정적인 역사 다큐 프로그램을 내보내고 나서 약간 건드리기 어려운 폭탄이 되어버린 느낌입니다. 현재는 약간 조심스럽게 아직 결론 없이 아무도 본격적으로 다루려고 하지않는 인물이 된 것처럼 보입니다.
후손들이 자료를 수집해서 출간한 책 "범재 김규흥과 3.1혁명"은 나와 있습니다만, 입장은 아무래도 후손이니 이런 논란에 대해 언급은 없습니다. 다만 동제사라든가 1910-20년대의 중국 내 독립운동, 특히 김규식의 파리행에 대한 부분은 '김규식과 그의 시대'에 관련이 있는 내용이 있습니다. 아무튼 뒤늦게 지난 주 분량에 대해 몇가지 얘기 얹어보았습니다. 2권은 본격적으로 3.1 운동으로 접어드네요.

범재 김규흥과 3.1혁명범재 김규흥의 증손자인 김상철 저자가 수집한 자료를 바탕으로 엮어은 책. 범재 김규흥은 대한자강회의 활동에 참가함으로써 국민계몽활동에 눈을 뜨기 시작했고 고향 옥천에 학교를 세웠으며, 고종의 비자금으로 무관학교를 세우고자 했다. 또한 동제사를 통하여 박달학원을 설립하고 향강, 진단, 천고 등의 잡지, 신문 등을 발간했다. 필자는 범재가 독립투사들을 물밑에서 지원하고 독립 운동에 기여한 바가 큰 데 대한 역사적 업적을 인정받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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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심
이럴 경우 참 난감하겠습니다. 이제 와서 밀정인지 아닌지 정확하게 밝히는 것도 어려울텐데요.

적륜재
더 연구가 이어졌으면 좋을 텐데, 저도 아직 이후 논란의 결론을 확인하지는 못했습니다. 제 개인적인 의견은 밀정이 아닐거라는 쪽으로 기울고 있습니다. 이번주 진도가 나가면 김규식의 파리 회담 참가 부분에 제가 김규흥에 대한 흥미로운 다른 학설을 다시 조금 더 더하겠습니다.

향팔
흥미롭네요. 1권을 다 읽었지만 김규흥에 관한 내용은 이미 아지랑이처럼 가물대는지라(흑흑), 1권에서 김규흥이 언급된 대목을 쭈욱 다시 찾아봤습니다. @적륜재 님의 설명과 함께 읽으니 머리속에 자리를 잡아 이젠 잊어버릴 일이 없을 것 같아요. 올려주실 다른 학설도 기대됩니다.

향팔
“ 신해혁명 이후 한국 측에서는 신규식과 조성환이 1912년 초 남경에서 손문 일행과 면담했으며, 여기에는 일찍 중국에 망명해 중국혁명에 참가한 김규흥의 역할이 있었다. 김규흥은 1906~1907년경 황실 비자금 처리와 한인 군관 양성이라는 고종의 밀명을 받고 중국으로 망명한 후 중국 혁명파와 교류했다. 1911년 신해혁명을 전후한 시기 광동에서 혁명활동에 참여했으며, 신해혁명의 좌절 이후에는 1913년 홍콩에서 제2차 혁명으로 불리는 토원운동(討袁運動), 즉 반(反)원세개운동에 동참했다. 이 과정에서 김규흥은 박은식을 홍콩으로 초빙해 1913년 12월 『향강잡지』(香江雜誌)를 간행했는데, 이 잡지는 중국 혁명운동에 대한 지지를 표방했다. (1권 347쪽)
이 잡지의 간행은 김규흥의 주선과 경영에 의한 것이었으며, 창간호 기사는 박은식, 조소앙, 신채호가 담당했다. 『항강잡지』는 1914년 초반까지 3~4호를 간행하다가 원세개를 비판한 이유로 정간되었는데, 홍명희가 1914년 초반 제2호 편집을 담당했다. 현재 『항강잡지』는 창간호만 확인되었으므로, 홍명희가 제2호 편집에 참여했다는 정보의 사실 여부는 확인이 불가능하다. (1권 397쪽)
몽고 혹은 만몽지역에 사관학교 설립 혹은 황무지 개간에 기초한 둔전병 양성이라는 방안은 한인 독립운동가들에게 낯선 제안은 아니었다. 신해혁명에 가담한 것으로 알려진 김규흥(김복)은 1911년 미주 대한인국민회에 보낸 편지(1911. 3. 7)에서 한국 독립을 위한 언론사 창설과 만몽 지역 개간회사 설립을 주장한 바 있다. 김규흥은 만주 거류 한인들을 통해 만몽의 황무지를 개간하여 정착시키고, 이를 통해 둔전병을 양성하려 한다는 계획을 밝혔다. 이를 위해 중국인 동지 오한지(吳漢持)가 동북에 가서 그곳 한인들의 상황을 조사했다고 주장한 바 있다. 김규흥은 중국 동지들과 상의한 일이라며 발기인 명단을 밝혔는데, 여기에는 유명한 광동지역 혁명운동가인 구봉갑(丘逢甲), 진형명(陳炯明), 추로(鄒魯)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때 만몽의 몽고는 외몽고라기보다는 만주와 접경한 내몽고였을 가능성이 높다. 김규흥의 만몽지역 황무지 개간과 둔전병 양성 계획은 1920년대에도 지속되었는데, 이번에는 여운형과 관련이 있었다. 1920년 4~5월 여운형은 김규흥, 김규흥의 조카, 러시아 특사 포타포프 등과 함께 복건성 장주를 방문해 진형명과 회담했는데, 이때 레닌 정부의 지원으로 시베리아 지역에 토지를 빌려 한인 군영을 만들고 6개 사단의 한인 부대를 양성해 중국군(남방군)과 합동으로 베이징 정부를 타도한 후 이어 한국 독립을 추진한다는 계획을 수립했고, 이를 안창호에게 전달했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만몽지역, 그중에서도 몽고의 황무지를 개척해 둔전병을 만들자는 구상은 김규흥의 제안이 가장 빠른 것이었는데, 김규식의 몽고행이 김규흥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는 미상이다. 그렇지만 김규식의 몽고행과 사관학교 설립 계획도 큰 틀에서는 황무지 개간과 사관학교 설립 구상이었다고 볼 수 있으며, 그 성패는 자금 조달의 성공과 뜻있는 한인들의 이주 정착에 달려 있었다. (1권 385-386쪽)
신한혁명당의 고종 망명정부 수립 계획이 실패한 후 유동열은 만주와 북경을 오가며 활동했다. 유동열은 1915년 이래 만주 방면으로부터 북경을 자주 왕래했으며, 1916년 11월에도 북경에 온 사실이 일제 당국에 포착되었다. 북경 주재 일본공사의 보고서에는 유동열과 함께 김규흥(일명 김복)이 등장한다. 김규흥은 독일인과 관련 있는 인물인데 7월 중 아편밀매상인 어떤 그리스인을 동반해 상해에서 북경에 왔으며, 신해혁명에 생사를 함께한 중국정부 인사들과 만나는 한편, 아편 밀매를 통해 독립자금을 마련하려고 한다는 의심을 받았다. 또한 조성환도 9월 하순경 상해에서 북경에 왔는데 일제 측은 아편 밀수입 혐의가 있는지 감시 중이었다. (1권 418-419쪽) ”
『[세트] 김규식과 그의 시대 1~3 세트 - 전3권』 정병준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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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15
저도 신해혁명이 눈에 띄여 인터넷 서점도 기웃거려 보고 네이버도 찾아보고 그랬네요. 근데 영화도 있더군요. 평소같으면 그냥 있는가 보다 했을텐데 영화 의외로 괜찮은 것 같더라구요. 저는 그냥 쉬엄쉬엄 보고 있는데 우아하다고 할까? 성룡하고 장리 감독이 만들었다는데 우리가 아는 그 성룡이 맞나 싶더라구요. 기회되면 함 보세요.
참, 332p의 신채호가 이웃을 뜻하는 neighour을 네이버가 아닌 '네이 그후 바우어'라고 읽었다는 부분이 좀 웃겼어요. 해석은 '근처의'라고 하는데 이 단어 자주 쓰는 단어인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영어와는 별로 친하지 않아서. ㅋ 근데 이 단어만으로도 김규식과 신채호가 얼마나 다른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어 흥미롭네요.

신해혁명1911년 쑨원과 동맹회의 혁명 동지들은 말레이시아에서 광저우 봉기를 계획한 뒤 헤어진다. 그러나 봉기 당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한 사교클럽에서 초조하게 결과를 기다리던 쑨원에게 날아온 봉기 실패의 전보. 봉기는 실패하고 수많은 동맹회 회원이 목숨을 잃는다. 하지만 쑨원은 본토 쓰촨성을 중심으로 일어나고 있는 민중의 철도보호운동에서 혁명의 불빛을 다시 느끼고, 마침내, 1911년 10월 10일, 한 병사의 총성으로 시작된 우창 봉기로 대륙의 역사를 바꾼 거대한 전쟁의 서막이 열리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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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팔
ㅎㅎㅎ 영어에는 대체 왜 그따위로(?) 발음된다는 것인지 당최 이해가 안되는 단어들이 많아서 신채호 선생의 마음도 이해가 됩니다. 러시아어 배울 때는 그냥 글자 그대로 읽으면 되니까(예외는 있지만요.) 그런 건 편했어요.
그런데 성룡 아저씨가 이런 장르도 찍었다니 놀랍습니다. 책에도 나왔던 황흥(황싱) 역을 맡았네요.
밥심
찾아보려했는데 이리 찾아주셔서 감사해요.

꽃의요정
“ 윤치호는 시세에 적응해서 현실을 강하게 인정하는 쪽으로 입장을 굳힌 지 오래였다.(중략)윤치호는 역사의 분수령이 되는 3.1운동의 거대한 조류가 밀려 오고 있었지만, 극히 '이성적 판단'으로 독립운동 지도자와 한국인들의 우매함을 꾸짖는 역할을 자임했다. 그는 스스로 자신의 역사적 평판을 결정지었으며, 거기에는 어떠한 반성이나 후회가 없었다. ”
『[세트] 김규식과 그의 시대 1~3 세트 - 전3권』 2권 91p, 정병준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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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팔
“ 그는 자신의 생계와 삶을 스스로 책임지는 독립적 생계인이었고 생활인이었다. 치열했던 독립운동으로부터 생계로의 자연스런 전환은 김규식의 생애에서 여러 차례 목격되는 현상이다. 현실적으로는 세계정세에 따라 독립운동이 고조기에서 퇴조기로 전환되었기 때문이지만, 개인적으로는 성장 과정에서 체득한 생존 경험과 미국 유학 경험이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
『[세트] 김규식과 그의 시대 1~3 세트 - 전3권』 정병준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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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da
필자는 여운형이 크레인에게 보낸 편지 및 윌슨 대통령에게 보내는 청원서의 원본을 2017년 컬럼비아 대학 도서관에서 발견했다.
『[세트] 김규식과 그의 시대 1~3 세트 - 전3권』 정병준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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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팔
“ 이때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이라는 역사적 대사변과 기회가 다가오고 있었다. 누군가에게는 역사의 대전환기가 선연하게 빛나고 있었지만, 누군가에게는 그냥 평범한 식민지의 일상이었다. 현실을 어떻게 인식하는가, 상황을 어떻게 파악하고 있는가에 따라서 개인의 행동과 삶이 규정되었다. 김규식은 정의 인도, 세계대개조, 영구평화, 민족자결주의 등의 복음이 울려 퍼지는 이때에 역사의 순간이 찾아오고 있다고 판단했다. 세계는 제정에서 공화정으로, 식민지 약소민족의 독립과 해방으로, 폭정에서 혁명으로 급변하고 있었다. 변화하는 속도를 따라잡기 어려울 정도의 시대가 펼쳐지고 있었다. 김규식은 무언가 행동함으로써 자신과 한국의 운명을 바꿀 수 있다는 판단과 결심을 가졌다. ”
『[세트] 김규식과 그의 시대 1~3 세트 - 전3권』 정병준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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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팔
“ 세계정세의 대변동에 두근거리고 흥분된 마음을 가지고 있던 것은 김규식만이 아니었다. 기회 포착적 정세관과 신속 정확한 상황 대응력을 가지고 있던 여운형과 신한청년당 동지들이 존재했다. 김규식과 여운형, 신한청년당의 젊은 투사들이 결합해서 역사의 순간으로 뛰어 들어갔다. 이들은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파리강화회의 한국특사 파견을 실현했고, 여운형과 신한청년당의 동지들은 한국, 일본, 만주, 연해주 등으로 파견되어 이를 지원했다. 상해에 있던 무명의, 보통의 청년들이 3·1운동의 대문을 활짝 여는 역사적 임무를 부여받게 된 것이다. ”
『[세트] 김규식과 그의 시대 1~3 세트 - 전3권』 정병준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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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팔
“ 하나의 물방울에도 온 우주가 비치는 법이다. 수많은 작은 물방울들의 상호 작용을 통해 3·1운동의 마중물이 마련되었다. 여기에 2백만 한국인의 눈물과 독립열이 결합해 성난 물길의 대분류(大奔流)가 되었고, 이는 3·1운동이라는 한국인들의 역사적 공간을 창출했다.
한국인들의 독립정신, 독립염원, 독립열을 담은 3·1운동이 시작되었다. 이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고, 누구도 막을 수 없는 민족주의 에너지의 폭발이었다. 김규식과 여운형, 신한청년당의 동지들은 역사의 주인공이 되었고, 3·1운동은 한국근현대사의 분기점이 되었다. 역사는 자기 소명에 최선을 다한 이들에게 그에 걸맞은 역사적 이름과 의미를 부여했다. ”
『[세트] 김규식과 그의 시대 1~3 세트 - 전3권』 정병준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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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veJ
“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파리강화회의 국면에서 먼저 움직인 쪽은 탁월한 정세 판단과 신속한 실행력•돌파력을 가진 여운형이었다.
그는 1918년 11월 27일 상해를 방문한 윌슨(woodrow Wilson) 대통령의 특사 크레인(Charles Crane)을 만났고, 이틀 뒤인 11월 29일 윌슨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를 전달했다.
이를 위해 신한청년당을 조직했고, 청원서가 윌슨 대통령에게 전달되지 않을 상황을 고려해 예비 계획으로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할 예정이던 미국인 신문기자 밀러드(Thomas Millard)에게 따로 청원서 전달을 부탁했다.
나아가 신한청년당 대표를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해 직접 한국 독립의 의지를 표명하기로 했다. 김규식이 파리강화회의 대 표로 선정되었다.
여운형과 신한청년당의 동지들도 밀사가 되어 만주, 연해주, 국내, 일본에 잠입했다. 김규식은 파리에서, 여운형과 동지들은 국내 외에서 활약했다.
국내외에 잠입한 신한청년당의 밀사들은 파리강화회의 대표 파견을 선전하며 응원과 지지를 호소했다.
시대의 변화를 감지한 두근거리는 마음들이 만나 일을 도모했고, 세상을 바꾸는 힘이 되 었다. ”
『[세트] 김규식과 그의 시대 1~3 세트 - 전3권』 2권 29, 정병준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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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veJ
“ 김규식은 1919년 2월 1일 상해에서 파리로 향하는 프랑스 우편선 포르토스호(S.S. Porthos)에 올랐다. 혼자의 몸이었다.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가 된지 9년이 지났으며, 세계는 한국 문제를 일본의 내정 문제로 간주하고 있었다.
어떻게 일본 통치의 불법성과 야만성을 폭로하고 한국 독립의 정 당성을 주장할지, 그 수단과 방법이 무엇인지에 대해 의지하고 의논 할 상대가 없는 혈혈단신이었다.
...신한청년당이 파리 강화회의 대표를 파견하고 김규식이 실제로 파리에 도착해 맹렬한 활동을 벌이게 된 것은 단순히 의지와 시도의 문제, 혹은 기회포착적이고 즉흥적인 대처의 산물이 아니었다.
상해는 대표를 파리까지 보낼 수 있는 실행력, 공작력, 자금력, 정보력을 가지고 있었고, 김규식은 그러한 외교•선전의 임무를 혼자서 수행할 수 있는 능력과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즉, 탁월한 정세 파악과 명민한 판 단력• 실행력을 갖춘 여운형과 파리강화회의에서 외교•선전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언어적•문화적 소양과 실력을 갖춘 집념의 김규식이 만나서야 파 리강화회의 대표 파견이 성사될 수 있었던 것이다 ”
『[세트] 김규식과 그의 시대 1~3 세트 - 전3권』 30, 정병준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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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veJ
“ 이상과 같이 청원서를 종합하면, (1) 정의, 인도, 자유 등으로 대표되는 1차 대전 승리의 정신과 그에 끼친 미국과 윌슨 대통령을 향한 찬사와 기대, (2) 일본이 전제주의, 군벌주의, 관료주의, 제국주의에 기초해 한반도를 발판으로 한 대륙 확장 정책을 펴는 데 대한 경고, (3) 일본 점령하의 한국 상황을 정신적, 정치적, 경제적 측면에서 설명, (4) 한국인의 독립투쟁 의지와 이에 대한 미국의 지원 요청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한국이 독립할 필요성을 세계의 대세, 인도•정의, 한국인의 자유의지 등 보편성에서 구하면서, 한편으로 일본의 대륙 침략 정책에 기초한 아시아의 갈등 가능성과 일본 통치하 한국의 참혹한 현실을 부각시킴으로써 한국 독립에 대한 미국의 동정과 후원을 요청한 것이다.
”
『[세트] 김규식과 그의 시대 1~3 세트 - 전3권』 66, 정병준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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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륜재
책에서는 찰스 크레인이 윌슨 대통령의 비공식 외교사절 정도로 묘사가 되어있지만, 실은 조금 다른 배경이 있습니다.
조선을 거쳐 베이징으로 가서 주중 미국 대사를 만나 중국에서의 일정들을 마친 크레인은 그 다음 선양(당시 묵덴)을 거쳐 하얼빈으로 가서 그곳의 미국 기술자들을 만납니다. 이곳에 왠 미국 기술자들?인가 싶지만, 크레인은 러시아의 웨스팅하우스 대리인이었습니다. 이 웨스팅하우스는 전기 회사 웨스팅하우스의 자회사로 실은 유명한 "모신 나강" 소총을 만드는 회사였습니다. 레밍턴과 함께 제정 러시아의 소총 공급원 회사였었습니다. 한해전인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구 러시아 제국의 수주가 중지되고 이후 웨스팅하우스는 거의 파산까지 몰리다가 미국 정부가 손을 써서 이 소총들을 활용하게 되는데, 이 문제와 관련된 일을 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얼빈에서 그에게 또 중요한 정보 시찰 업무는 체코군단과의 연결이었습니다. 바로 그해 여름 체코 독립의 중심 인물인 마사릭을 미국으로 초청하여 체코슬로바키아라는 국가를 인정받을 수 있도록 힘을 쓴 사람이 바로 크레인이었는데, 당시 시베리아에서 귀국을 하기위해 러시아 백군편에 가담하여 고군분투 중이던 체코군과 연락하고 협의를 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제가 읽은 그의 비망록에는 이 체코군의 자초지종이 길게 나와있습니다. 그렇게 북방에서의 일을 모두 마친 다음 쑤저우를 거쳐 1918년 11월 하순 추수감사절 즈음에 상하이에 도착합니다. 그리고는 여운형과 만남이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크레인의 비망록을 읽을 때 그의 알려지지 않은 여행 목적을 추정하다보면 여운형과의 만남에 대한 언급이 없는게 좀 이해가 갔었습니다.

YG
@적륜재 그러네요. 후대의 시선으로 역사를 살피다 보면, 정작 당사자는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 혹은 우발적인 우연이 역사의 전환점이 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 경우도 그런 흥미로운 사례로도 보여지네요. 좋은 자료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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