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한청년당 대표로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된 김규식이 동제사의 긴규식과 함께 샐운 조직명으로 파리강화회의에 청원서를 제출한 사실은 충격적이다. 153
이 시도가 좌절된 이후 김규식은 본격적으로 신한청년당 대표로 활동하기 시작했고, 3.1운동이 본격화된 후 대한인국민회,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대표 자격이 덧붙여졌다. 160
1917년 대동단결선언은 근왕주의적 고종 망명노선에서 공화주의적 임시정부 수립 노선으로의 전환을 알린 것이었다. 162
결국 이 취지서는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 한국대표로 파견하게 된 것을 계기로 상해에서 전한족대표위원회를 개최해 의회를 구성한 후, 독립을 선언하고, 최고위원회 (국무회의(를 조직함으로써 “정부의 최초 대표 형태”, 즉 임시정부를 수립 하자고 제안한 것이다. 상해에서 임시정부를 수립하자는 제안이었던 것이다. 165
신규식의 최초 구상과는 차이가 있지만, 결국 대한민국임시정부가 1919년 4월 상해에서 수립되었다. 국내, 만주, 노령, 일본에서 상해에 도착한 독립운동가들이 임시의정원을 결성하고, 임시의정원의 헌법을 공포하고 내각을 구성함으로써 임시정부가 성립하게 된 것이다. 166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하고 3.1운동이라는 대폭발을 일으킨 기폭제는 여운형과 신한청년당의 발 빠른 대처였지만, 이를 가능케 한 구조적 힘은 기성의 재중국 한국 독립운동 진영에서 나온 측면이 있다. 167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안창호 일행이 상해에 도착 (1919.5.25)했고, 상해 임시정부는 분명한 활력과 활기를 얻었다. 안창호가 상해에 도착함으로써 상해 임시정부는 임시 ‘정부’로서의 기능과 체제를 갖추고 본격적인 역할을 개시하게 되는 것이다. 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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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김규식과 그의 시대 1~3 세트 - 전3권』 정병준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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