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육수"에 대해 조금 이야기를 덧붙이겠습니다. (제가 원래 리서치를 하고 써뒀던 글 중에서 부분 인용합니다)
1914년 11월 칭다오 독일조차지를 점령한 일본군은 청도수비사령부를 만든 다음 산둥반도 전역으로 점령지를 확대한 후에 이듬해 1915년 1월 중화민국 북양정권의 위안스카이 총통에게 "21개조 요구"라고 불리는 특혜조건을 들이밉니다. 이 21개조 요구는 모두 5호로 나눠져 있는데, 제1호는 산둥반도에 대한 권익으로 독일의 권리를 그대로 일본이 점유하는 것이고, 제2호 조건은 남만주 및 동부 내몽고에 대한 일본의 우선권, 특히 뤼순, 다롄을 기점으로 남만주 철도에 대한 권리와 내몽고의 광공업의 이익을 보장하는 것, 제3호는 한야평공사(漢冶萍公司)라고 하는 중국의 철강회사에 대한 합작 및 우선권, 제4호는 영토불할양 요구로 다른 서양 열강에 아예 중국 항구 및 도시의 토지를 조차하거나 대여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이었는데, 마지막 제5호는 중국 정부에 정치, 재정, 군사 고문으로 일본인을 초빙하고 경찰인력에 일본인을 초빙, 병기를 일본에서 공급받고 병기창을 일본의 지도로 만들고, 철도 부설권, 타이완 관련 등등 외교문제에 일본의 자문을 받고, 뭐 그러니까 조선에서 먹혀들어갔던 모든 식민지화 장치에 대한 요구였습니다.
2월부터 시작된 교섭과정에서 중국은 당연히 반발하면서 해결을 위해 서양 세력을 끌어들입니다. 영국과 미국이 이에 중국측 입장을 지지하면서 특히 제5호 조항에 대해 대단히 반대하게 되자 협상은 결렬되고 일본은 한발 물러서서 제5호 조항들을 빼고 나머지를 대신 수락하라 안그러면 쳐들어간다 하고 5월 4일 최후통첩을 합니다. 그런데 시대가 중국편이 아니었습니다. 유럽은 이미 1차 대전이 본격 진행 중이어서 중국과 일본에까지 더이상 신경쓸 겨를도 없었고 북양정부 역시 아직 남중국에 근거한 혁명정부 세력과 혼란이 마무리되지 않은 상태에 전력마저 기세등등한 일본에 밀리는 상황이었습니다. 위안스카이는 불과 5일만인 5월 9일 전격적으로 요구를 수용하고 말아버립니다. 친일적인 경향을 보이던 혁명정부에 실망하여 차라리 실질적 권력을 지고 있고 조선에 대해 (좋든 나쁘든) 더 많은 인연이 있었던 위안스카이가 그래도 배일적 경향이라 믿고 일을 도모하려든 조선인 국권회복 운동가들에게 날아온 위안스카이의 뒤통수치기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할까요. 이 문제는 이후 "산동문제"라고 하는 국제적 에이젠다가 되어 1919년 파리 평화회담으로 이어집니다.
1917년 8월 14일 독일제국에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일단 '승전국' 버스에 올라탄 중화민국은 1차 대전 뒤처리를 하는 파리 평화회담에 참가하여 위안스카이가 덜컥 수락해버린 21개조 요구의 철회와 함께 일본이 점유한 독일의 산둥 조차지 전역을 중화민국에 반환할 것을 요구합니다. 하지만 유럽의 전후 뒷수습에 바빴던 유럽 승전국들은 다들 일본과 그럭저럭 이러저러한 밀약들을 맺었던 상태여서 결국 1919년 4월 21일 평화회의에서 장래 '중국으로 반환하는 것'을 전제로 일본의 산둥 이권을 확약해버리는 결정을 합니다. 이 결정이 중국에 전해지자 잘알려진 5.4 운동을 촉발하고, 국내의 거센 반발에 직면한 중국 정부는 6월에 이어진 베르사이유 조약 체결에서 '승전국' 중에 유일하게 서명을 거부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사건들이 전개되던 동안에 전설같은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1919년 중화민국의 파리 대표단에는 프랑스어가 유창한 28세의 프랑스 근공검학 유학생 출신의 수행원이 있었습니다. 이 대표 수행원은 중국 대표단이 베르사이유 조약에서 국내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서명을 할거라는 정보를 듣고 6월 27일 당시 파리의 중국인 유학생과 노동자들을 조직하여 대표단장인 뤼정샹(陸徵祥)을 포위하여 몰아부칩니다. 그리고는 결과적으로 일본에 산둥을 넘기게 되는 조약 서명을 거부할 것을 요구합니다. 그 과정에서 이 수행원은 장미가지를 꺾어 자신의 옷안에 감춰 뒤에서 뤼정샹 대표에게 들이대며 만약 서명을 할거라면 이 자리에 내 총알을 받아라 라고 협박을 합니다. 물론 이 협박으로 인해 뤼정샹이 서명을 안한 것은 아니지만 아무튼 중국은 서명을 거부합니다. 그리고, 대신 1921년 독일과 별도의 평화조약을 맺으면서 베르사이유 조약에서 일본의 산둥반도 점유에 대한 부분을 제외하고 그외의 조건을 수락하여 마침내 종전을 합니다. 그뿐 아니라 이제 독일 제국이 아니라 바이마르 공화국과 무역 등의 관계를 회복하고 더 나이가 군사적 지원을 받는 관계로 나아갑니다. 그런 다음 산동문제는 1922년 워싱턴 해군국축회담으로 넘어갑니다. 미국과 영국의 입장에서 그동안 오랜 사이드킥 동맹으로 나름 쏠쏠찮이 쓸모가 있었는데, 이제 너무 커버렸어 판단이 내려져 일본을 본격 견제대상으로 지목해버립니다. '독일은 산둥 반도에서 갖고 있던 권익을 중국에 반환하고, 일본은 시베리아로부터 철군한다'는 결론을 내리면서 산둥 문제는 해결됩니다. (예, 해결이 당연히 아니라 이제 본격 중일전쟁, 만주국 그리고 태평양전쟁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그런데 이 장미가지 수행원은 그 사이 이 일이 전설처럼 알려지게 되며 인구에 회자됩니다. 도대체 누구이길래 이렇게 대담한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일까요? 실은 이 대표원은 불과 16세에 일본으로 유학을 가서 쑨원의 중국동맹회에 가담하였고 21살이던 1912년 동맹회의 북경 천진 지부였던 경진동맹회(京津同盟会)에서 계획한 무려 위안스카이 암살을 주도하였다 수배되었던 철혈여인이었습니다. 이 사람의 이름은 정위슈(鄭毓秀, 1891 - 1959)로 혹은 정소메이(鄭蘇梅)라고 불리던 사람입니다. 위안스카이는 아직 때가 안되었는지 이때 암살을 모면했는데 바로 이어진 청나라 조정의 수구세력 량비(覺羅良弼)의 암살은 이 사람이 기획한 자살폭탄으로 성공합니다. 이 일련의 암살사건으로 인해 지명수배된 정위슈는 프랑스로 건너갔고 1914년 파리에서 법률 공부를 하기 시작하여 1917년 파리대학에서 법학석사 학위를 받은 후 프랑스 법률협회에 가입, 그리고, 1919년 위에서 말한 파리 평화회담의 중화민국 수행원으로 활동한 후 1925년 법학박사가 되어 중국의 첫번째 여성 박사 및 변호사가 됩니다.
정위슈는 훗날 자신의 일생을 영어로 쓴 "My revolutionary years: the autobiography of Madame Wei Tao-ming (나의 혁명시기: 웨이 타오밍 부인의 자서전)" (C. Scribner's sons, 1943)을 썼습니다. 여기 이 때의 이야기가 언급되어있습니다.
PEACE CONFERENCE
I prepared therefore to leave for Europe. At first I planned to go by way of the Mediterranean, and had actually bought my ticket when a conference with Party members made me change to another route. I was informed that a representative from Korea, Mr. King, wished to go to the Peace Conference, and that he had obtained reservations by way of America, but that he was now afraid that he might be arrested by the Japanese when the boat stopped in Japan. I was not in any such danger at that time; so I exchanged tickets with Mr. King and he went via the Mediterranean.
"평화회담(대표단에 선발되어서) 나는 그래서 유럽으로 떠날 준비를 하였다. 처음에는 지중해를 거쳐 가기로 계획했었고, 당의 멤버들과 회의를 하여 다른 노선으로 변경하기로 했을 때 실제로 내 선표는 이미 사두었었다. 나는 한국 대표단 미스터 킹이 파리 평화회담에 가려고 하는데 미국을 경유하는 선편 예약을 하였고, 이 배가 일본을 경유하다가 체포될지도 모른다는 염려를 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나는 그때는 아직 그런 위험에 빠지지 않았다, 그래서 표를 미스터 킹과 교환하였고 그는 지중해 경유 노선으로 갔다."
여기 코리언 대표 미스터킹은 우사 김규식입니다. 예, 이 자서전의 내용을 보면 정위슈가 직접 여운형이나 김규식으로부터 부탁을 받거나 우연히 만난 것이 아니라 중화혁명당(1919년 10월에 국민당으로 개칭합니다)의 권유를 받아들인 것으로 나옵니다. 그래서, 여운형이 정위슈(소메이)를 잘 알았을 가능성도 있지만 제가 현재 내린 결론은 우연히 만나서 바꿔주고 한 것이 아니라고 잠정적인 결론을 내렸습니다. 누군가 그 사이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그런데, 최근의 조선인 대표를 파견한 신한혁명당과 선표를 바꿔준 중화혁명당 간의 연결고리에 대한 주장이 나오고 있습니다. 1922년 10월 19일자 조선총독부 경무국의 비밀문건 "平和會義에 대한 不逞鮮人의 狀況"(평화회의에 대한 불령선인의 상황)"의 첫부분에 보면 김규식이 파리 평화회의에 가서 '이권용, 김복, 황기환' 등의 구미지역에 있던 '일당'(輩라고 표기하고 있습니다)이 파리에 와서 김규식을 지원하고 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김복은 김규흥의 다른 이름입니다. 김규흥이 아마도 정위슈의 배편을 김규식과 바꿔주도록 주선한 연결고리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저 역시 김규식이 파리에 가서 임시정부 구주위원회를 구성하였을때 실제 중국대표단의 도움을 계속 받은 배후에는 역시 김규흥이 중간 연결고리였을 거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선표 교환 에피소드 역시 김규흥의 역할이 있었을 거라 충분히 가능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정병준 선생이 이런 내용을 모르지 않았을거라 짐작하는데 김규흥에 대한 언급이 아예 없기도 하고 '김탕'에 대한 얘기로 넘어가버려서 상당히 의아했습니다. 언젠가 만약 기회가 되면 물어보고 싶은 부분입니다.
첨부한 이미지는 빨간 색 박스에 하나는 김규식이고 다른 하나는 이권용, 김복, 황기환의 이름이 적힌 일본 경무국 문건입니다. (제가 너무 길게 중언부언 하는가 싶어 좀 자제하여야 할까 고민 중입니다. 양해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