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 뿌듯하시겠어요. 축하합니다!^^
[책걸상 '벽돌 책' 함께 읽기] #31. <김규식과 그의 시대> (1)
D-29

stella15

향팔
우와! 올림픽 스노보드 빅에어 메달리스트가 @YG 님 조카분이라니!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이 종목에서 메달 획득이 한국 최초인 거죠? 너무 너무 기쁘고 자랑스러우시겠어요. @거북별85 님께서 올려주신 영상 봤는데 경기 장면이 너무 멋있어요. 인터뷰도 감동적이네요. 조카분 말씀하시는 게 참 당차고 귀엽고 감격에 겨운 모습을 보니 제 맘이 다 찡해옵니다. 운동하는 과정에서 다치는 일이 많고 수술도 받아가며 본인도 가족분들도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요. 그렇게 열심히 준비하신 결과로 오늘의 이런 기쁨이 있나 봅니다. 유승은 선수의 앞으로 남은 올림픽 일정과 미래 행보도 응원할게요!

연해
꺄악! 세상에, 너무 너무 축하드려요:)
영상보는데 제가 다 아찔하고 전율이 돋았어요. 한국 여자 설상 종목 최초로 메달을 딴 선수라고 하던데, YG님 조카분이셨다니!! 얼마나 자랑스럽고 뿌듯하실까요(제가 다 뭉클).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속담이 꼭 들어맞네요. 어렸을 때부터 못하는 운동이 없으셨다니, 앞으로가 더더 기대되고, 촉망받는 선수네요. 다시 한번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스노보드에 크게 관심이 있지는 않았는데, 갑자기 관심이 확 생겨버렸습니다(김연아 선수 덕분에 피겨 스케이팅에 관심이 생겼던 때처럼요). 앞으로도 열렬히 응원할게요:)

오구오구
저는 운동을 잘 몰라서 몰랐는데 남편은 아는거 같더라구요
아침에
이야기하니 금메달 유망주였는데 동메달이라 안타깝지만 정말 잘
했다고 그러더라구요. 멋지네요. 진심 축하드려요!!!

적륜재
@YG 님, 조카분 축하드립니다! 뭔가를 이룬다는건 본인과 뒷바라지를 한 가족들 모두에게 수많은 과정을 거쳐야 하는 건데 정말 축하드립니다.

YG
@적륜재 님, 감사합니다. 처음부터 자기가 좋아서 시작했던 거라서 좀 더 할 수 있는 계기가 생겼다는 게 제일 좋은 일이라 생각해요.

거북별85
지금의 로녹대학은 학생 수 2050명 정년교수 129명으로 10배 구모가 되었지만 아직도 교내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이 모두 인사를 나눌 정도의 유대감을 유지하고 있다. 전형적인 남부의 인문학 중심 대하ㅑㄱ이다. 그러니 김규식이 다니던 19세기 말 20세기 초 로녹대학은 1학년부터 4학년까지 총 200여명에 불과한 가족적 분위기가 물씬 나는 학업과 생활의 공동체였다. 김규식은 졸업한 이후에도 로녹대학 시절을 늘 기억했는데 그가 대학 동창과 대학측에 보낸 편지에 그런 그리움과 애정이 잘 드러나 있다.

거북별85
“ 역사에 운명이나 교지가 있다고 생각할 수는 없지만 이러한 로녹대학 수학은 결과적으로 외교관 김규식을 만들기 위한 과정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된 김규식은 혈혈단신이었지만 로녹에서 배우고 익힌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라틴어에 대해 자유로운 언어 구사력을 지녔고 서양고전과 역사, 문화에 대한 통찰력을 지닌 지성인이었다. 파리강화회의 각국 외교관과 언론을 상대할 수 있는 지성과 언어 구사력, 품위를 지녔던 것이다. 김규식은 이러한 필수 과목 외에 정치경제, 철학, 영어성경, 웅변, 독해, 예술, 천문학, 식물학, 동물학, 생리학, 상업수학, 부기, 맞춤법 등을 추가로 수강했다. ”
『[세트] 김규식과 그의 시대 1~3 세트 - 전3권』 정병준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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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별85
“ 이정식에 따르면 당시 학비는 책값과 의복값을 제외하고 1년에 200달러 정도였다고 하는데 고학생이던 김규식에게는 큰 부담이 되었을 것이다. 김규식은 1898년 여름과 1899년 여름에 워싱턴에서 일자리를 얻어 고학했다. 김규식의 <자필이력서>에 따르면 미국에서 공부하는 동안 여름방학 및 틈날 때마 다 학비와 생활비를 벌기 위해서 신문배달원, 하우스보이, 웨이터, 집사, 요리사, 백만작자 요트의 집사, 연극작가의 개인 비서 등으로 일했다. ”
『[세트] 김규식과 그의 시대 1~3 세트 - 전3권』 정병준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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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별85
김규식의 로녹대학 입학사진의 깔끔한 사진을 보면 사고무친의 그가 부담이 되는 학비를 벌기 위해 이렇게 많은 일을 했다는 사실이 잘 믿기지 않네요. 원래 성정이 자존심이 강하고 고집이 있어 자신의 상황이나 감정을 잘 표현하지 않는 사람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 니다.

stella15
아, 정말 가족적인 학교겠네요. 그럼 잊지 못하죠. 요즘엔 서울 살다 지방으로 이사를 가면서 폐교 위기의 학교가 구제를 받는 경우가 있다고 하더군요. 그래봐야 몇명 되지도 않지만 정말 아기자기하게 잘 가르치나 보더군요. 저 같이 학교 부적응자가 차라리 그런데서 공부했으면 좋았을텐데. 역시 애교심은 학교가 큰데선 별로 없고 작아야 생기는 것 같아요.

거북별85
@stella15 님 의견에 동감합니다
요즘 저출산에 지방 폐교들도 늘어나는데 로녹대학처럼 해외든 우리나라든 우수한 인재들을 유치해서 같이 공부할 방법들도 같이 고민해보면 좋겠어요~^^

YG
읽다 보면, 이런 게 필요하실 것 같아서 제미나이랑 같이 만들어 봤어요. 참고하세요.
김규식을 중심으로 해방 전후기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이승만, 김구, 여운형, 조소앙, 송병준 그리고 김일성 등의 1910년 강제 병합 당시, 삼일운동 당시, 해방 당시의 나이와 생몰 연도를 정리했습니다.

YG


거북별85
오!! 연도별 정리 넘 감사합니다!!
그런데 1919년 김일성 7세는 재미있네요~~~ ^^ 김일성은 20세기 후반까지 살아있었는데도 다른 분들에 비해 너무 어려서 깜짝 놀랐네요~
조카분의 시원하게 활강하는 모습이 너무 멋집니다!!👏👏👏 정말 노력한다고 다 이루어지지는 않는데 너무 축하드려요~ 아직 어린 학생인데 인터뷰 보면 어떤 시간들을 버텨내고 보냈을까 가슴이 먹먹해지네요~~환하게 웃는 모습도 너무 예뻐요 ~^^

stella15
오, 흥미롭네요!

향팔
오, 감사합니다. 방금 책을 읽다가 “이승만이 청년 외교관으로 이름을 얻게 된 1905년…”이라는 대목(181쪽)에서 이승만의 당시 나이가 감이 안 와 YG님 표를 바로 열어보았어요. 30세였군요 ㅎㅎ 이렇게 보니까 너무 편하네요. 킵해두고 요긴하게 잘 보겠습니다.

향팔
“ 또한 박장현은 이승만이 청년 외교관으로 이름을 얻게 된 1905년 시오도어 루스벨트 대통령 면담외교를 국내에 대대적으로 홍보한 주역이기도 했다. 박장현은 이승만이 윤병구와 함께 시오도어 루스벨트 대통령과 면담하고 루스벨트의 호의로 포츠머스강화회담 ‘방청권’을 얻었지만 주미대리공사 김윤정이 국가를 배신·매국함으로써 기회가 무산되었다는 기사를 『황성신문』에 투고했다. 이를 통해 고종이나 대신들은 물론 외교관들도 한국 독립 유지를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이지 못했는데, 의기남아(義氣男兒) 이승만이 청년 외교관으로 한국을 지키려 노력했다는 신화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
『[세트] 김규식과 그의 시대 1~3 세트 - 전3권』 정병준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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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팔
“ 1896년 11월에는 박희병이 로녹대학에 신입생으로 입학했다. 박희병은 일명 박장현으로 미주 독립운 동 지도자 박용만의 숙부이다. 그를 통해 박용만이 미주로 유학길에 올랐고, 박장현이 네브래스카에서 운영하던 한인노동주선소를 기반으로 박용만이 소년병학교를 설립했다. 박용만은 이승만·정순만과 함께 한성감옥에서 이름이 ‘만’자로 끝나는 삼만결의형제가 된 것으로 유명했다.
[…]
김규식과 박용만은 1917년 대동단결선언 당시 함께 서명자로 이름을 올렸으며, 1919년 김규식이 파리강화회의 대표로 파견되는 시점에 접촉하려고 노력했던 미주의 유일한 인물이었다. ”
『[세트] 김규식과 그의 시대 1~3 세트 - 전3권』 정병준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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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G
모두 감사합니다. 사실, 조카 뒷바라지 하느라 그 집 식구도 모두 고생이 많았는데 이렇게 성과가 있어서 다행이다, 이런 마음도 있어요. 능력 있고, 노력해도 잘 안 되는 일도 많지 않습니까; 웃픈 사연이 많은데, 그건 나~중에 우리 정말 오프 호프라도 하게 되면 그때 썰 풀게요. 하하하! ( @stella15 님, 예전에 궁금해하셨던 영풍문고 뒷담화까지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