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G 님, 조카분 축하드립니다! 뭔가를 이룬다는건 본인과 뒷바라지를 한 가족들 모두에게 수많은 과정을 거쳐야 하는 건데 정말 축하드립니다.
[책걸상 '벽돌 책' 함께 읽기] #31. <김규식과 그의 시대> (1)
D-29

적륜재

YG
@적륜재 님, 감사합니다. 처음부터 자기가 좋아서 시작했던 거라서 좀 더 할 수 있는 계기가 생겼다는 게 제일 좋은 일이라 생각해요.

거북별85
지금의 로녹대학은 학생 수 2050명 정년교수 129명으로 10배 구모가 되었지만 아직도 교내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이 모두 인사를 나눌 정도의 유대감을 유지하고 있다. 전형적인 남부의 인문학 중심 대하ㅑㄱ이다. 그러니 김규식이 다니던 19세기 말 20세기 초 로녹대학은 1학년부터 4학년까지 총 200여명에 불과한 가족적 분위기가 물씬 나는 학업과 생활의 공동체였다. 김규식은 졸업한 이후에도 로녹대학 시절을 늘 기억했는데 그가 대학 동창과 대학측에 보낸 편지에 그런 그리움과 애정이 잘 드러나 있다.

거북별85
“ 역사에 운명이나 교지가 있다고 생각할 수는 없지만 이러한 로녹대학 수학은 결과적으로 외교관 김규식을 만들기 위한 과정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된 김규식은 혈혈단신이었지만 로녹에서 배우고 익힌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라틴어에 대해 자유로운 언어 구사력을 지녔고 서양고전과 역사, 문화에 대한 통찰력을 지닌 지성인이었다. 파리강화회의 각국 외교관과 언론을 상대할 수 있는 지성과 언어 구사력, 품위를 지녔던 것이다. 김규식은 이러한 필수 과목 외에 정치경제, 철학, 영어성경, 웅변, 독해, 예술, 천문학, 식물학, 동물학, 생리학, 상업수학, 부기, 맞춤법 등을 추가로 수강했다. ”
『[세트] 김규식과 그의 시대 1~3 세트 - 전3권』 정병준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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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별85
“ 이정식에 따르면 당시 학비는 책값과 의복값을 제외하고 1년에 200달러 정도였다고 하는데 고학생이던 김규식에게는 큰 부담이 되었을 것이다. 김규식은 1898년 여름과 1899년 여름에 워싱턴에서 일자리를 얻어 고학했다. 김규식의 <자필이력서>에 따르면 미국에서 공부하는 동안 여름방학 및 틈날 때마다 학비와 생활비를 벌기 위해서 신문배달원, 하우스보이, 웨이터, 집사, 요리사, 백만작자 요트의 집사, 연극작가의 개인 비서 등으로 일했다. ”
『[세트] 김규식과 그의 시대 1~3 세트 - 전3권』 정병준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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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별85
김규식의 로녹대학 입학사진의 깔끔한 사진을 보면 사고무친의 그가 부담이 되는 학비를 벌기 위해 이렇게 많은 일을 했다는 사실이 잘 믿기지 않네요. 원래 성정이 자존심이 강하고 고집이 있어 자신의 상황이나 감정을 잘 표현하지 않는 사람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stella15
아, 정말 가족적인 학교겠네요. 그럼 잊지 못하죠. 요즘엔 서울 살다 지방으로 이사를 가면서 폐교 위기의 학교가 구제를 받는 경우가 있다고 하더군요. 그래봐야 몇명 되지도 않지만 정말 아기자기하게 잘 가르치나 보더군요. 저 같이 학교 부적응자가 차라리 그런데서 공부했으면 좋았을텐데. 역시 애교심은 학교가 큰데선 별로 없고 작아야 생기는 것 같아요.

거북별85
@stella15 님 의견에 동감합니다
요즘 저출산에 지방 폐교들도 늘어나는데 로녹대학처럼 해외든 우리나라든 우수한 인재들을 유치해서 같이 공부할 방법들도 같이 고민해보면 좋겠어요~^^

YG
읽다 보면, 이런 게 필요하실 것 같아서 제미나이랑 같이 만들어 봤어요. 참고하세요.
김규식을 중심으로 해방 전후기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이승만, 김구, 여운형, 조소앙, 송병준 그리고 김일성 등의 1910년 강제 병합 당시, 삼일운동 당시, 해방 당시의 나이와 생몰 연도를 정리했습니다.

YG


거북별85
오!! 연도별 정리 넘 감사합니다!!
그런데 1919년 김일성 7세는 재미있네요~~~ ^^ 김일성은 20세기 후반까지 살아있었는데도 다른 분들에 비해 너무 어려서 깜짝 놀랐네요~
조카분의 시원하게 활강하는 모습이 너무 멋집니다!!👏👏👏 정말 노력한다고 다 이루어지지는 않는데 너무 축하드려요~ 아직 어린 학생인데 인터뷰 보면 어떤 시간들을 버텨내고 보냈을까 가슴이 먹먹해지네요~~환하게 웃는 모습도 너무 예뻐요 ~^^

stella15
오, 흥미롭네요!

향팔
오, 감사합니다. 방금 책을 읽다가 “이승만이 청년 외교관으로 이름을 얻게 된 1905년…”이라는 대목(181쪽)에서 이승만의 당시 나이가 감이 안 와 YG님 표를 바로 열어보았어요. 30세였군요 ㅎㅎ 이렇게 보니까 너무 편하네요. 킵해두고 요긴하게 잘 보겠습니다.

향팔
“ 또한 박장현은 이승만이 청년 외교관으로 이름을 얻게 된 1905년 시오도어 루스벨트 대통령 면담외교를 국내에 대대적으로 홍보한 주역이기도 했다. 박장현은 이승만이 윤병구와 함께 시오도어 루스벨트 대통령과 면담하고 루스벨트의 호의로 포츠머스강화회담 ‘방청권’을 얻었지만 주미대리공사 김윤정이 국가를 배신·매국함으로써 기회가 무산되었다는 기사를 『황성신문』에 투고했다. 이를 통해 고종이나 대신들은 물론 외교관들도 한국 독립 유지를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이지 못했는데, 의기남아(義氣男兒) 이승만이 청년 외교관으로 한국을 지키려 노력했다는 신화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
『[ 세트] 김규식과 그의 시대 1~3 세트 - 전3권』 정병준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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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팔
“ 1896년 11월에는 박희병이 로녹대학에 신입생으로 입학했다. 박희병은 일명 박장현으로 미주 독립운동 지도자 박용만의 숙부이다. 그를 통해 박용만이 미주로 유학길에 올랐고, 박장현이 네브래스카에서 운영하던 한인노동주선소를 기반으로 박용만이 소년병학교를 설립했다. 박용만은 이승만·정순만과 함께 한성감옥에서 이름이 ‘만’자로 끝 나는 삼만결의형제가 된 것으로 유명했다.
[…]
김규식과 박용만은 1917년 대동단결선언 당시 함께 서명자로 이름을 올렸으며, 1919년 김규식이 파리강화회의 대표로 파견되는 시점에 접촉하려고 노력했던 미주의 유일한 인물이었다. ”
『[세트] 김규식과 그의 시대 1~3 세트 - 전3권』 정병준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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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G
모두 감사합니다. 사실, 조카 뒷바라지 하느라 그 집 식구도 모두 고생이 많았는데 이렇게 성과가 있어서 다행이다, 이런 마음도 있어요. 능력 있고, 노력해도 잘 안 되는 일도 많지 않습니까; 웃픈 사연이 많은데, 그건 나~중에 우리 정말 오프 호프라도 하게 되면 그때 썰 풀게요. 하하하! ( @stella15 님, 예전에 궁금해하셨던 영풍문고 뒷담화까지 함께!)

stella15
ㅎㅎㅎ 이거 언젠가 될지 모르지만 오프 모임하시면 꼭 나가야겠군요! 알겠습니다.ㅋㅋ
화제로 지정된 대화

YG
1권, 2권, 3권을 3월 30일까지 읽는 읽기표를 업데이트합니다.



YG
2권은 2월 23일 시작해서 3월 7일 마무리하니 2주 만에 독파하는 일정이네요! 다들 힘내서 세 권 완독해 봅시다.
밥심
‘한국은 다른 나라들과 매우 다르다. 유럽에서 왕들은 모두 행복하게 지낸다. 우리나라에서 왕은 절대군주로서 업무가 매우 많으며 너무 행사가 많아서 즐거움이 거의 없다(209쪽)’
윗 부분은 의화군이 미국 언론과 인터뷰한 내용인데 <몽유병자들>을 읽어보면 유럽의 황제들이 권력을 향유하기도 했지만 왕 노릇이 너무 힘들어서 괴로워하는 모습도 많이 나옵니다. ㅎㅎ 의화군이 실정을 잘 몰라 오해했던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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