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걸상 '벽돌 책' 함께 읽기] #31. <김규식과 그의 시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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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3년의 헤멧 사건 이후 대한인국민회 북미 총회는 한인사회 문제에서 자율적 결정권을 지녔고, 이는 이민 당국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미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는 1918년 이전에는 여행권 없이도 미국 여행이 가능했으며,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는 이를 알선할 수 있었다. 중국에서 건너오는 한인 유학생들은 첫째로 자신들이 1910년 한일합방 이전에 중국에 거주한 망명한인들로 일본의 통치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둘째로 중국에 입적해서 중국여권을 획득하고, 셋째로 샌프란시스코 대한인국민회와 협의해 이민 당국으로부터 상륙허가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세트] 김규식과 그의 시대 1~3 세트 - 전3권 373, 정병준 지음
@오구오구 님, 먼저 완독하셨군요! 저는 @FiveJ 님 말씀처럼 살짝 느슨해졌던 진도를 연휴 기간동안 차분히 따라갔습니다:) 독립운동가분들의 수많은 이름과 연보들에 어질어질하기도 했지만, 그게 또 역사책의 묘미려니 생각하며 읽고 있어요.
오...저도 400쪽 넘어가면서 독립운동가분들 이름(심지어 외자로 바꿔서 사용하던 가명까지) 때문에 서당에서 공부하듯이 소리내어 읽었습니다. 소리내서 읽으면 아득해지던 정신이 돌아오더라고요. 위에서 여러 분들이 말씀하셨듯이, '3월 1일의 밤'을 재독하고 싶어졌지만, 욕심을 버리기로 했어요~
입으로 소리내어 읽으셨다는 말씀에 웃음 지었습니다. 저는 손으로 짚어가면서 읽었거든요(펜으로 치자면 형광펜으로 밑줄을 긋듯이 말이죠). 약간의 고비가 있었지만 그래도 나름, 1년 넘게 벽돌 책 멤버로 함께 했던 짬(?)이 있어 그런가, 꿀렁꿀렁 읽어갔습니다. 그래도 한국 사람들이라 얼마나 다행인지(외국 이름은 입에 잘 붙지 않아서...).
@연해 저도 사실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 이미 1권 프롤로그를 읽으셨고, 2권 에필로그까지 읽으시면 짐작하시겠지만, 정병준 선생님께서 에세이스트로서도 대단한 솜씨가 있으시거든요. 하지만 역사학자라는 업의 특성상 본문에서는 사료를 제시하고 해석하고 그 한계를 넘어서지 않으려고 참으려는 모습이 보여요. 독자로서는 서사를 집어 넣으면 훨씬 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지만. 그건 역사학자의 업의 정체성을 포기하라는 얘기일 수도 있으니. :) 제가 고등학교 때 잠시 이공계가 제 적성인가, 하는 고민을 하면서 방황했던 적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한때 역사학과를 가보려는 꿈을 꿔본 적이 있었습니다. (역사를 좋아했었거든요. 고등학교 때도 무려 '역사 토론반' 활동을 했었고요.) 그런데! 그런 비슷한 업을 걷고 계시는 아버지께서 단칼에 "네 적성이 아니다" 하시더라고요. (아들의 진로에 대한 불안도 있으셨겠죠.) 요즘 철들고 나서 역사학자의 작업이 갈무리된 이런 책을 볼 때마다, 그래, 난 역사학이랑은 안 맞다, 이런 생각을 해본답니다. :)
공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서사를 집어넣으면 훨씬 나을 텐데'라는 생각을 종종 했더랬습니다. 김규식의 어린 시절을 안타깝게 여기는 작가님의 마음이 녹아든 대목이 그나마 온기라면 온기랄까요. 그 외에는 YG님 말씀처럼, 역사학자의 정체성을 꾹꾹 담은 밀도 있는 기록들을 남겨주셨고요. 벽돌 책 모임에서 이렇게 진귀한 책들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건요. 이토록 오랜 기간 연구하면서 혼신을 담아 집필한 책들은 왜 사람들에게 읽히지 않는가... (흑흑) 저는 앞으로도 이 모임에서 부지런히 읽을 테지만요. 고등학생 때 적성을 고민하실 정도로 역사를 좋아하셨군요. 지금 걷고 계신 길(과학 전문 지식 큐레이터)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라 더 흥미롭게(?) 다가옵니다. 적성과 좋아하는 것의 차이는 확실히 있나봅니다(하하하). 저도 제 업이 어릴 때 그려왔던 제 모습이랑은 좀 다른데요. 닮은 점도 있고, 아닌 점도 있고. 순수하게(저의 외모와 재능, 경제관념 다 무시하고) 무엇을 하고 싶냐고 누군가 물어본다면 저는 외람된 말씀이지만 '배우'를 하고 싶었답니다.
화제로 지정된 대화
다들 설 연휴 잘 보내셨나요? 다들 다시 한 번 새해 좋은 일 많기를 기원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를 연초에 두 번씩 하는 나라!) 저는 이번 연휴에는 부모님께서 동생네랑 같이 올라오셔서 가족 모임을 하는 바람에 조금 분주하게 설 연휴를 보냈네요. 연휴 간에 @오구오구 님 1권 완독하시고, @FiveJ 님 뒤따라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이번 주에는 다 함께 1권을 마무리합니다. 오늘 2월 19일 목요일은 6장 1절 '제1차 세계 대전 발발과 북경, 의주, 고륜으로의 여정'을 읽습니다. 375쪽부터 405쪽까지입니다. 여기서 의주는 오늘날의 압록강 하류 신의주 북쪽에 있었던 옛 의주를 말하고, 고륜은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를 말합니다.
기억을 상기해 보자면, 『3월 1일의 밤』에서도 오늘 읽을 부분에 나오는 김규식과 울란바토르에서 같이 독립 운동을 도모했던 세브란스병원 의학교 출신의 김필순, 이태준이 상당히 비중 있게 등장합니다. 혹시 기억 나시나요? 제가 아래 올리는 이런 기사도 올렸었죠. :)
2010년 6월 12일에 제가 써서 발행했던 기사입니다. * 몽골 초원에 묻힌 청년 의사…무슨 일이 있었나? [이태준의 흔적을 찾아서] 울란바토르의 태극기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 몽골 인구 270만 명의 약 40퍼센트인 약 110만 명의 몽골 사람이 부대끼며 살아가는 곳이다. 울란바토르에서 가장 먼저 가야할 곳은 도심에서 3킬로미터 남쪽에 위치한 자이산 언덕이다. 이곳 꼭대기에 자리를 잡은 승전기념탑은 관광 명소일 뿐만 아니라 전망이 좋기로 유명하다. 승전기념탑에 오르면 몽골 고원의 고도 1350미터에 자리를 잡은 '붉은 영웅'(울란바토르)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런데 이곳에서 바로 아래를 내려다보면 몽골기와 함께 태극기가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도대체 울란바토르 한복판, 관광 명소에서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자리에 태극기가 왜 나부끼는 것일까? 몽골기와 태극기가 서 있는 곳은 바로 2001년 7월에 만들어진 '이태준 기념 공원'이다. 이태준? 그는 누구인가? 의사 이태준, 독립운동의 꿈을 품다 지난 6월 3일 울란바토르 이태준 기념 공원에서 뜻 깊은 행사가 열렸다. 국가보훈처, 연세대학교의료원, 주몽골 한국대사관 등이 주도해 공원 내에 통나무집 형태로 이태준 기념관을 지었고, 이날 정식으로 문을 열었다. 이곳에는 울란바토르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이태준(1883~1921)의 삶이 고스란히 기록돼 몽골인과 이곳을 방문한 한국인을 포함한 외국인을 만날 예정이다. 국내에서 생소한 이태준은 몽골에서는 정부 차원에서 나서서 예우를 할 정도로 각별하다. 몽골 정부는 이미 공원 조성을 위한 땅 약 6600제곱미터(약 2000평)를 내놓았다. 이렇게 마련한 땅에 연세의료원, 연세대학교의과대학 총동창회 등이 기금을 마련하고 울란바토르의 몽골연세친선병원, 주몽골 한국대사관 등이 중심이 돼 지난 2001년 공원을 조성했다. 궁금증이 더해진다. 이태준을 기념하고자 몽골 정부가 나서고, 또 연세의료원이 적극적인 역할을 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런 의문을 해결하려면 이태준의 삶부터 살펴야 한다. 이태준의 삶은 한 세기 전 독립의 꿈을 안고 한반도, 중국, 러시아, 몽골을 누볐던 피 끓는 청년들의 삶과 겹친다. 1883년 경상남도 함안에서 태어난 이태준은 연세의료원의 전신인 세브란스병원의학교(연세대학교 의과대학)를 1911년(제2회) 졸업했다. 의사 면허 제92호. 세브란스병원의학교 입학 전부터 안창호 등의 영향을 받았던 이태준은 졸업하자마자 독립운동에 뜻을 품고 중국으로 건너간다. 그의 짧지만 파란만장한 삶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몽골의 항일 독립운동가, 이태준 중국 난징에서 병원(기독회의원)을 개업하면서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을 모색하던 이태준은 지인(김규식)의 권유로 몽골의 울란바토르(당시 지명은 후레)로 근거지를 옮긴다. 울란바토르는 중국, 몽골, 러시아를 가로지르는 독립운동 거점이었을 뿐만 아니라, 의사로서 인술을 펼칠 공간이었다. 이태준은 울란바토르에 병원 '동의의국(同義醫局)'을 개원한다. '같은 뜻을 가진 동지들의 병원'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이곳은 단순한 병원이 아니라 중국과 러시아 각지의 독립지사 간의 연락을 하는 곳이자, 중국과 러시아를 오가는 이들의 머물러 가는 일종의 중간 기지였다. 울란바토르에서 이태준이 독립운동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한국외국어대학교 반병률 교수의 연구를 통해서 그 전모가 상당히 밝혀졌다. 반 교수의 연구를 보면, 1920년 러시아의 레닌 정부는 상하이 임시정부에 200만 루블에 해당하는 독립 자금을 지원하기로 하고, 이 중 1차로 40만 루블의 금괴를 나눠서 운반한다. 여러 가지 경로를 통해서 상하이로 운반되는 40만 루블 중에서 이태준은 12만 루블의 금괴 운반을 책임졌다. 그는 8만 불의 금괴를 상하이로 운반하도록 지원하는 한편, 자신이 직접 나머지 4만 루블을 상하이로 운반하기로 했다. (앞으로 살피겠지만, 이 4만 루블의 금괴는 이태준이 목숨을 잃는 계기가 된다.) 이뿐만이 아니다. 이태준은 의열단의 적극적인 후원자 중 한 사람이었다. 이런 사실은 해방 직후인 1947년 소설가 박태원이 펴낸 <약산과 의열단>(백양당 펴냄)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태준은 의열단 단장 김원봉을 직접 만나 의열단에 가입했을 뿐만 아니라, 당시 울란바토르에 머물던 헝가리 출신의 폭탄 제조 기술을 가진 청년을 소개했다. 몽골의 신의, 이태준 그렇다면, 몽골 정부는 왜 이태준을 기념할까? 이태준이 병원을 개원할 당시의 몽골은 19세기 후반의 한국과 마찬가지로 근대 의학의 수용이 전무했다. 특히 유목 생활에서 정주 생활로의 급속한 변화로 성병(性病)과 같은 전염병이 널리 퍼졌다. 전 국민의 70~80퍼센트가 '화류병'이라고 불리는 성병 환자였을 정도다. 이런 상황에서 이태준의 의술은 돋보일 수밖에 없었다. 특히 그는 당시 몽골에 유행하던 성병의 절멸에 큰 공헌을 해 널리 이름을 떨쳤다. 몽골인이 그를 "신인", "극락세계에서 강림한 여래불"을 대하듯 했다는 기록이 전해지는 것을 보면, 그가 얼마나 몽골인에게 도움을 줬는지 알 수 있다. 의술을 인정받은 덕분에 이태준은 몽골의 마지막 왕인 보그드 칸의 주치의로 활동한다. 보그다 칸은 1919년 7월 그의 공을 기려서 국가 훈장을 수여한다. 아직 걸음마 단계였던 20세기 초 한국의 근대 의학 수용의 수준을 염두에 두면, 일찌감치 몽골에 근대 의학을 전파하는데 기여한 그의 행보는 한국 의학사에서도 독보적이다. 미국인 의사든, 일본인 의사든 한국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 동양의 근대 의학 수용은 제국주의라는 어두운 얼굴을 가진다. 이런 상황에서 이태준의 예는 제국주의와 관계 없는 방식으로 근대 의학을 전파한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제3의 길을 선취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더구나 이렇게 몽골에서 의사로서 얻은 명성은 앞에서 언급한 이태준의 독립운동을 가능케 하는 중요한 조건이었다. 그러나 결국 이런 명성("항일 운동에 힘쓴 유명한 의사") 탓에 그는 수많은 가능성을 남긴 채 비극적 최후를 맞는다. 그는 1921년 불과 서른여덟 살의 나이에 러시아의 사회주의 혁명에 저항하며 몽골까지 쫓겨 온 백군 잔당에게 살해당했다. 독립운동 임무 수행하다 살해당해 러시아의 사회주의 혁명(1917년)에 반대하며 내전을 치르던 백군 중 일부가 1921년 2월 울란바토르를 점령한다. 이들은 울란바토르에 거주하는 유태인을 학살하고, 중국인이 경영하던 은행을 약탈하는 등 살육, 약탈을 자행했다. 이 과정에서 이태준의 병원 역시 큰 피해를 입었다. 백군이 울란바토르를 점령하기 전, 이태준은 주치의로 보살피던 몽골 주재 중국군 사령관 가오시린으로부터 몸을 피하라는 권유를 받는다. 그러나 그는 백군이 울란바토르를 점령하고 살육, 약탈을 할 때까지 피신하지 않았다. 그가 자신의 목숨을 걸고 울란바토르에 남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반병률 교수는 한 논문에서 "이태준은 자기에게 부과된 임무, 즉 모스크바에서 온 자금 중 일부(4만 루블)의 운송 책임과 의열단 단장 김원봉에게 (폭탄 제조 기술을 가진) 헝가리 사람을 소개하기로 한 약속을 완수하고자 가오시린의 동행 요구를 거부하면서까지 울란바토르에 남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많은 기록은 이런 설명을 뒷받침한다. 박태원은 <약산과 의열단>에서 백군이 이미 울란바토르를 점령하고 나서야, 이태준이 헝가리인과 함께 베이징으로 향한 사실을 언급한다. 또 러시아에서 찾아낸 문서도, 그가 백군으로부터 금괴를 숨기는데 성공해 베이징으로 향한 사실을 언급한다. 그러나 이태준은 끝내 임무를 완수하지 못했다. 베이징으로 향하던 그는 백군에게 잡혀 결국 살해당했다. 그가 살해당한 데는 백군에게 부역하던 일본인이 중요한 역할을 한 것 같다. 그가 죽기 직전 면담했던 러시아인, 박태원 등은 일관되게 그의 죽음에 "항일 활동을 하는 유명한 조선인 의사"의 존재를 아는 일본인이 관여한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이태준의 부활을 꿈꾸며 한국 정부는 뒤늦게 독립운동의 공을 인정해 이태준에게 1990년 건국훈장을 추서했다(1980년 대통령 표창). 그러나 1990년대 후반 반병률 교수의 연구가 있기 전까지 그의 삶의 전모는 베일에 싸여 있었다. 뒤늦게 연세의료원 등의 노력으로 2000년 기념비, 가묘가 세워지고, 2001년 공원도 개장했으나 여전히 한국에서 이태준은 생경하다. 울란바토르를 방문한 한국인이 자이산 승전기념탑에서 태극기를 보고 공원을 방문하고 나서야 이태준의 존재를 처음 아는 경우가 태반이다. 몽골인 역시 그에 대한 정보를 제대로 접하지 못해서 어리둥절해 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번에 국가보훈처, 연세의료원, 주몽골 한국대사관 등이 나서서 기념관의 건립을 추진한 것도 이 때문이다. 기념관 준공에 앞서 마지막 점검을 하고자 지난 5월 몽골을 방문한 박창일 연세의료원장은 "이태준은 국적과 인종을 뛰어넘는 인간 사랑을 실천한 대의(大醫)였다"며 "한국인, 몽골인 모두 다 이 기념관을 계기로 그의 숭고한 삶을 배우고 또 따르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지적했다. 이태준 묘지에 얽힌 뒷얘기 이태준 기념 공원은 울란바토르의 자이산 바로 밑에 조성됐다. 이를 두고 반병률 교수는 "몽골 정부의 누가 부지를 선정했는지 참으로 기막히게 잘 선정했다"고 찬탄했다. 왜냐 하면, 이 공원이 조성된 자이산 근처가 이태준이 실제로 매장된 곳의 근처라고 추정할 만한 정황이 있기 때문이다. 여운형의 일기가 바로 열쇠다. 1921년 가을 러시아의 이르쿠츠크에서 열리는 회의에 참석하던 길에 울란바토르를 들른 그는 이태준의 묘를 직접 찾는다. 그는 당시의 경험을 1936년 <중앙> 5월호에 발표한 '몽고 사막 여행기'에 이렇게 썼다. "하루는 이곳(울란바토르)에 있다는 조선 사람의 무덤을 찾았다. 이 땅에 있는 오직 하나인 이 조선 사람의 무덤은 이 땅의 민중을 위하여 일생을 바친 한 조선 청년의 거룩한 헌신과 희생의 기념비였다. 그는 이태준이라는 청년 의사로 몽골에서 보낸 5, 6년간의 생활을 (…) 가지가지의 질병의 박멸에 바치고, 마침내 (…) 그 짧은 일생의 최후를 마친 청년이었다. (…) 나는 멀리 보이는 나지막한 구릉의 비탈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 벌거벗은 산비탈을 빈약한 왜림이 이곳저곳을 덮고 있는 경사지의 한복판에서 나는 찾아간 묘지를 발견하였다. 간소한 분묘였다. 이곳에서 건너에 보이는 이 근처의 오직 하나의 울창한 숲속을 가리키면서 안내해 준 몽골 동무(그 숲을 남산, 성산이라고 일컫는다)는…." 이태준의 묘지를 찾아서 함께 자이산에 오른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박형우 교수는 "울란바토르에서 얕은 구릉이라고 칭할 만한 곳은 울란바토르 도심에서 남쪽에 위치한 승전기념탑이 세워진 자이산뿐이고, 자이산에 오르면 남쪽으로 몽골에서 성산(聖山)이라고 부르는 산도 보이니, 이태준의 묘지는 자이산 구릉에 있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박형우 교수는 "비록 자이산의 구릉은 승전기념탑 건립 과정에서 오래 전에 파괴되었지만 이태준 기념 공원은 바로 그곳에서 내려다보이는 곳이니 실로 절묘한 위치"라고 덧붙였다. 몽골의 대초원에 잠든 조선의 청년, 이태준. 나란히 선 태극기와 몽골기를 보면서 웃는 그의 얼굴이 눈에 선하다. 참고 문헌 반병률, '의사 이태준의 독립운동과 몽골', <한국근현대사연구>, 제13집(2000년 여름). 반병률, '의사 이태준의 항일민족운동과 몽골', <건축역사연구> 특별호(2005년 2월).
김규식의 처남이 되는 김필순은 이태준의 선배로 세브란스병원 의학교를 1회 졸업한 일곱 명 가운데 한 명입니다. 마침 사진 한 장이 얼른 보여서 올립니다. 뒷줄 왼쪽이 김필순입니다. (사진: 동은의학박물관)
@오구오구 님께서 기억 안 나신다고 하니, 좀 더 기억을 소환해 볼게요. 중국에서 활동한 영화배우 김염 얘기가 있었던 것 혹시 기억 나시나요? :) 김염이 바로 김필순의 셋째 아들이에요. 그의 셋째 누이 김순애가 김규식과 결혼했고, 넷째 누이 김필례는 (그 유명한) 김활란과 함께 YWCA를 설입한 한국 여성 운동 1세대가 되었고요. 첫째 누이 김구례는 지금 읽는 책에도 등장하는 서병호의 부인입니다. :) 아, 1세대 여성 독립운동가로 유명한 김마리아가 김필순의 조카고요. 방금 정확하게 인용하려고 찾아보다 발견하고 웃었는데 김필순의 고향이 황해도 장연군 송천리(현재 룡연군 구미리)라는 곳이래요. 그곳에서 태어난 김필순과 동생(김규식의 부인) 김순애, 처남 서병호, 조카 김마리아를 포함해서 김낙영, 김순길, 서재현, 윤익선 등 8명이 공식 독립 유공자랍니다. :)
중국 영화사에서 중요한 배우로 꼽히는 김염(1910~1983). 이 양반은 문화 혁명기에 자본주의 예술가로 중국에서 고생하다가 세상을 떴네요.
김염 선생님은 어마어마한 스타였는데도 일본 선전영화 출연 강요를 거부하고 항일 영화를 고집했던 배우라고 기억해요. 역시 송천리 김필순 가문의 후예답네요.
와, 이 김 씨 가문도 대단했네요. 김활란 박사는 이화여대 1대 총장이지 않나요? 김염님은 우리나라 최초의 장편 영화 '아리랑'에 나왔다고 했던...
이태준. 우리가 알고 있는 <문장강화>를 쓴 소설가 이태준과 동명이인인요? 책도 언젠가 검색해 본 적이 있는데 이렇게 YG님 기사를 읽으니 갑자기 읽고 싶다는 생각이 확 드네요. 근데 유목 생활에서 정주 생활로의 급속한 변화로 성병이 퍼졌다니 흥미네요. 국민의 70~80퍼센트가 '화류병'에 걸렸다니! 잘 읽었습니다. 명절 잘 지내셨죠?^^
약산과 의열단 - 김원봉의 항일 투쟁 암살 보고서<천변풍경>과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을 쓴 당대 최고의 작가이던 박태원이 쓴 책으로, 의열단 단원 유자명의 '의열단간사(義烈團簡史)'와 근근이 보존되어있던 의열단 단원들의 편지 및 당시의 신문기사를 참조하였고 약산 김원봉의 생생한 구술을 받아 완성한 책이다.
@stella15 동명이인입니다. 소설가 이태준은 1904년생으로 이태준이 활약할 당시에는 열 살 정도였어요.
아, 그렇군요! 그렇다면 정말 의사 이태준은 국내에는 거의 안 알려진 분으로 YG님이 거의 독점으로 알리신 거나 다름없겠네요. 그것도 2010년에. 저 같은 사람은 이제야 겨우. 엉엉~
<문장강화>의 상허 이태준, 하면 제 최애 찻집 ‘수연산방’이 먼저 떠오르네요. 멀지 않은 동네라 이따금 들른답니다. 봄이나 초여름날 야외 탁자에 기대앉아 차가운 오미자차 한잔 마시면 그렇게 좋더라고요. (단 평일 한낮에 가야함. 주말에는 너무 북적거려요.) 재작년 성북동에서 열린 이태준 달밤 강좌를 계기로 <까마귀>와 <무서록>을 읽어봤는데, 정말 감탄했습니다. 수연산방 서울 성북구 성북로26길 8 상허 이태준 가옥 https://naver.me/xC6i1GDp
까마귀 - 이태준 단편선소설가 이태준의 대표작 10편이 수록된 단편소설집. 문학의 자율성과 예술성을 상실하지 않으면서도 현실 문제에 각별한 관심을 보여주는 작품들이 실려 있다. '한국 근대소설의 완성자', '단편문학의 명수'라 불리는 이태준은 우리 근대 문학의 전개과정에서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역할을 담당했던 작가 가운데 한 사람이다.
무서록`시에는 지용, 소설에는 상허`라는 수식어가 붙어 다닐 만큼 1930, 40년대를 풍미했던 작가의 대표적 산문집이다.
수연산방 지금도 하는 가봐요. 방금 보고 왔는데 근사하네요. 대를 이어서 하는 찻집인가 봅니다. 가격이 싼 건 아닌 것 같지만 그래도 정말 손님없을 때 한나절 왔다가면 힐링도되고 좋을 것 같아요. 부럽습니다! 하하. 이런 사진도 있었군요. 고맙습니다. 근데 사진과 찻집 보니까 문득 박인환이 생각나는 건 왜일까요? ㅎㅎ
네, 이태준 선생의 조카손녀?분이 운영하고 있다고 들었어요. 박인환 시인도 미남이라 그런지 어딘가 닮으신 것 같습니다. 예전에 ‘세상의 모든 음악’에서 박인희 낭송 ‘목마와 숙녀’를 자주 틀어주던 기억이 나네요. https://youtu.be/15q2fmLDtQc?si=wwxRheSUZMSFDcb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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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비북클럽]가녀장의 시대 같이 읽어보아요[라비북클럽](한강작가 노벨문학상 수상기념 1탄) 작별하지 않는다 같이 읽어요[라비북클럽] 김초엽작가의 최신 소설집 양면의 조개껍데기 같이 한번 읽어보아요[라비 북클럽] 어둠의 심장 같이 읽어보아요(완료)
📝 느리게 천천히 책을 읽는 방법, 필사
[ 자유 필사 ], 함께해요혹시 필사 좋아하세요?필사와 함께 하는 조지 오웰 읽기[책증정]《내 삶에 찾아온 역사 속 한 문장 필사노트 독립운동가편》저자, 편집자와 合讀하기
쏭이버섯의 읽기, 보기
모순피수꾼이름없는 여자의 여덟가지 인생왕과 사는 남자
🎁 여러분의 활발한 독서 생활을 응원하며 그믐이 선물을 드려요.
[인생책 5문 5답] , [싱글 챌린지] 완수자에게 선물을 드립니다
나의 인생책을 소개합니다
[인생책 5문5답] 42. 힐링구 북클럽[인생책 5문5답] 43. 노동이 달리 보인 순간[인생책 5문5답] 44. Why I write
우리 입말에 딱 붙는 한국 희곡 낭독해요!
<플.플.땡> 2. 당신이 잃어버린 것플레이플레이땡땡땡
편견을 넘어 진실로: 흑인문화 깊이 읽기
노예제, 아프리카, 흑인문화를 따라 - 06.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 치누아 아체베노예제, 아프리카, 흑인문화를 따라 - 05.대항해시대의 일본인 노예, 루시우 데 소우사노예제, 아프리카, 흑인문화를 따라 - 04.아이티 혁명사, 로런트 듀보이스노예제, 아프리카, 흑인문화를 따라 - 03.니그로, W. E. B. 듀보이스
The Joy of Story, 다산북스
필연적 혼자의 시대를 살아가며 같이 읽고 생각 나누기[다산북스/책 증정] 박주희 아트 디렉터의 <뉴욕의 감각>을 저자&편집자와 같이 읽어요![다산북스/책 증정] 『공부라는 세계』를 편집자와 함께 읽어요![다산북스/책 증정] 『악은 성실하다』를 저자 & 편집자와 함께 읽어요!
도리의 "혼자 읽어볼게요"
김홍의 <말뚝들> 혼자 읽어볼게요.박완서 작가님의 <그 많던 싱아~>, <그 산이 정말~> 혼자 읽어볼게요.마거릿 애트우드의 <고양이 눈1> 혼자 읽어볼게요.마거릿 애트우드의 <고양이 눈2>도 혼자 읽어볼게요.
유쾌한 낙천주의, 앤디 위어
[소설로 읽는 기후위기・인류세 - 우리는 왜·어떤 다른 세상을 꿈꾸는가?] 1회차-마션[밀리의 서재로 📙 읽기] 9. 프로젝트 헤일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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