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분을 검색하게 되더라구요. "정위슈". 최초 최초 최초라는 수식어가 여러번 붙는 선구자였지만 말년을 고통스럽게 보내셨다고 하네요
[책걸상 '벽돌 책' 함께 읽기] #31. <김규식과 그의 시대> (1)
D-29
aida
aida
“ 오래된 대표성.정체성이 신규식 중심의 비밀결사인 동제사의 회원이라는 관성이었다면, 새로운 대표성.정체성은 신한청년당으로 표현되는 여운형.장덕수.조동호 중심의 새로운 동력이었다. 파리로 떠나는 김규식은 두 개의 조화되지 않은 정체성 사이에서 부동하고 있었다. (…)
신한청년당은 3.1운동과 그 이후 과정에서 상해 독립 운동의 중심으로 부각하였으며, 임시정부의 견인차이자 중추를 형성했다. 확실한 세대교체이자 세력교체였다. 그 속에서 김규식의 위상과 입장도 전환되어 가고 있었다. ”
『[세트] 김규식과 그의 시대 1~3 세트 - 전3권』 정병준 지음
문장모음 보기
aida
오늘 분량은 좀 짧고 복습하는 내용도 많아서 술술 읽혔습니다.
1차대전 종전후 3개월이 결정적 시기네요. 여운형이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윌슨에게 청원서를 쓰고 김규식을 대표로 보내는 추진성과 김규식은 주어진 짧은 기간에 할 수 있는 모든 준비를 하였다는 점이 이 3개월간을 세밀하게 들여다보면서 경의를 품게 됩니다. 이 짧은 기간의 결정적 활동들이 3.1운동과 임시정부까지 이어지는 토대가 된다는 점에서 불을 지피는 시기였네요.
그 와중에 결혼도 했는데.. 바로 김순애는 국내 잠입을, 김규식은 파리로 향하면서 헤어지고 배에서 쓴 편지에 부인을 그리워 하는 내용은 없는 건가요? 부록을 봐도 없어서 개인사는 없었던 건지 줄임처리 된 건지 궁금해지더라구요... ㅎㅎ
위에 적륜재님이 공유해주신 윌슨의 '민족자결호' 그림에 탑승 여권 확인은 커녕 존재조차 않은데 편지는 다 검열하고 영국 외무성에 보관까지 되어 있다니요. 강대국 끼리의 정치적 수단으로 쓰였으리라 생각하니 씁쓸하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YG
@aida 아, 저도 그 생각했어요. 이 와중에 웬 결혼? 위장 결혼인가? 하하하!

향팔
사진 한 장으로 결혼식을 갈음한 모양이에요. 번갯불에 콩 궈먹듯이…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독립운동가들의 결합이라 그런 것인갑네요


향팔
“ 1918년 11월 강화가 성립되었을 때, 파리에 가기로 결정했으며 평화회의에서 세계 앞에서 한국의 실정을 최소한 호소하거나 폭로하기로 결정했다. (중략) 천진에서 출발해 남경으로 가서 [1919년] 1월 19일 [김순애와] 결혼했으며 (중략) 즉시 상해로 가서 파리행 여행을 준비했다. (중략) 1919년 2월 1일 프랑스 우편선 포르토스(Porthos)호를 타고 파리를 향해 상해를 떠났으며 3월 13일에 도착했다. 한국에서 3·1운동이 실행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전쟁 직후 통신 및 연락 두절로 인해 그동안 4월 2일까지 파리에 어떤 뉴스도 알려지지 않았다. ”
『[세트] 김규식과 그의 시대 1~3 세트 - 전3권』 정병준 지음
문장모음 보기
aida
우어 사진이 있었군요! 이 시대의 사진이 주는 여운이 참 좋습니다. 결혼사진 같지 않고 기념사진 같다는 느낌도 들고,, 화려하지 않는 복식에서도 품격도 묻어나네요.

stella15
@aida 김규식 멋있네요. 김순애도 미인은 아니지만 빠지는 인물은 아닌데 서로 바빠서 부부의 정 같은 게 없을 수도 있죠. 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서로 사진으로 보고 결혼들을 했다잖아요.

적륜재
"정육수"에 대해 조금 이야기를 덧붙이겠습니다. (제가 원래 리서치를 하고 써뒀던 글 중에서 부분 인용합니다)
1914년 11월 칭다오 독일조차지를 점령한 일본군은 청도수비사령부를 만든 다음 산둥반도 전역으로 점령지를 확대한 후에 이듬해 1915년 1월 중화민국 북양정권의 위안스카이 총통에게 "21개조 요구"라고 불리는 특혜조건을 들이밉니다. 이 21개조 요구는 모두 5호로 나눠져 있는데, 제1호는 산둥반도에 대한 권익으로 독일의 권리를 그대로 일본이 점유하는 것이고, 제2호 조건은 남만주 및 동부 내몽고에 대한 일본의 우선권, 특히 뤼순, 다롄을 기점으로 남만주 철도에 대한 권리와 내몽고의 광공업의 이익을 보장하는 것, 제3호는 한야평공사(漢冶萍公司)라고 하는 중국의 철강회사에 대한 합작 및 우선권, 제4호는 영토불할양 요구로 다른 서양 열강에 아예 중국 항구 및 도시의 토지를 조차하거나 대여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이었는데, 마지막 제5호는 중국 정부에 정치, 재정, 군사 고문으로 일본인을 초빙하고 경찰인력에 일본인을 초빙, 병기를 일본에서 공급받고 병기창을 일본의 지도로 만들고, 철도 부설권, 타이완 관련 등등 외교문제에 일본의 자문을 받고, 뭐 그러니까 조선에서 먹혀들어갔던 모든 식민지화 장치에 대한 요구였습니다.
2월부터 시작된 교섭과정에서 중국은 당연히 반발하면서 해결을 위해 서양 세력을 끌어들입니다. 영국과 미국이 이에 중국측 입장을 지지하면서 특히 제5호 조항에 대해 대단히 반대하게 되자 협상은 결렬되고 일본은 한발 물러서서 제5호 조항들을 빼고 나머지를 대신 수락하라 안그러면 쳐들어간다 하고 5월 4일 최후통첩을 합니다. 그런데 시대가 중국편이 아니었습니다. 유럽은 이미 1차 대전이 본격 진행 중이어서 중국과 일본에까지 더이상 신경쓸 겨를도 없었고 북양정부 역시 아직 남중국에 근거한 혁명정부 세력과 혼란이 마무리되지 않은 상태에 전력마저 기세등등한 일본에 밀리는 상황이었습니다. 위안스카이는 불과 5일만인 5월 9일 전격적으로 요구를 수용하고 말아버립니다. 친일적인 경향을 보이던 혁명정부에 실망하여 차라리 실질적 권력을 지고 있고 조선에 대해 (좋든 나쁘든) 더 많은 인연이 있었던 위안스카이가 그래도 배일적 경향이라 믿고 일을 도모하려든 조선인 국권회복 운동가들에게 날아온 위안스카이의 뒤통수치기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할까요. 이 문제는 이후 "산동문제"라고 하는 국제적 에이젠다가 되어 1919년 파리 평화회담으로 이어집니다.
1917년 8월 14일 독일제국에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일단 '승전국' 버스에 올라탄 중화민국은 1차 대전 뒤처리를 하는 파리 평화회담에 참가하여 위안스카이가 덜컥 수락해버린 21개조 요구의 철회와 함께 일본이 점유한 독일의 산둥 조차지 전역을 중화민국에 반환할 것을 요구합니다. 하지만 유럽의 전후 뒷수습에 바빴던 유럽 승전국들은 다들 일본과 그럭저럭 이러저러한 밀약들을 맺었던 상태여서 결국 1919년 4월 21일 평화회의에서 장래 '중국으로 반환하는 것'을 전제로 일본의 산둥 이권을 확약해버리는 결정을 합니다. 이 결정이 중국에 전해지자 잘알려진 5.4 운동을 촉발하고, 국내의 거센 반발에 직면한 중국 정부는 6월에 이어진 베르사이유 조약 체결에서 '승전국' 중에 유일하게 서명을 거부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사건들이 전개되던 동안에 전설같은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1919년 중화민국의 파리 대표단에는 프랑스어가 유창한 28세의 프랑스 근공검학 유학생 출신의 수행원이 있었습니다. 이 대표 수행원은 중국 대표단이 베르사이유 조약에서 국내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서명을 할거라는 정보를 듣고 6월 27일 당시 파리의 중국인 유학생과 노동자들을 조직하여 대표단장인 뤼정샹(陸徵祥)을 포위하여 몰아부칩니다. 그리고는 결과적으로 일본에 산둥을 넘기게 되는 조약 서명을 거부할 것을 요구합니다. 그 과정에서 이 수행원은 장미가지를 꺾어 자신의 옷안에 감춰 뒤에서 뤼정샹 대표에게 들이대며 만약 서명을 할거라면 이 자리에 내 총알을 받아라 라고 협박을 합니다. 물론 이 협박으로 인해 뤼정샹이 서명을 안한 것은 아니지만 아무튼 중국은 서명을 거부합니다. 그리고, 대신 1921년 독일과 별도의 평화조약을 맺으면서 베르사이유 조약에서 일본의 산둥반도 점유에 대한 부분을 제외하고 그외의 조건을 수락하여 마침내 종전을 합니다. 그뿐 아니라 이제 독일 제국이 아니라 바이마르 공화국과 무역 등의 관계를 회복하고 더 나이가 군사적 지원을 받는 관계로 나아갑니다. 그런 다음 산동문제는 1922년 워싱턴 해군국축회담으로 넘어갑니다. 미국과 영국의 입장에서 그동안 오랜 사이드킥 동맹으로 나름 쏠쏠찮이 쓸모가 있었는데, 이제 너무 커버렸어 판단이 내려져 일본을 본격 견제대상으로 지목해버립니다. '독일은 산둥 반도에서 갖고 있던 권익을 중국에 반환하고, 일본은 시베리아로부터 철군한다'는 결론을 내리면서 산둥 문제는 해결됩니다. (예, 해결이 당연히 아니라 이제 본격 중일전쟁, 만주국 그리고 태평양전쟁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그런데 이 장미가지 수행원은 그 사이 이 일이 전설처럼 알려지게 되며 인구에 회자됩니다. 도대체 누구이길래 이렇게 대담한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일까요? 실은 이 대표원은 불과 16세에 일본으로 유학을 가서 쑨원의 중국동맹회에 가담하였고 21살이던 1912년 동맹회의 북경 천진 지부였던 경진동맹회(京津同盟会)에서 계획한 무려 위안스카이 암살을 주도하였다 수배되었던 철혈여인이었습니다. 이 사람의 이름은 정위슈(鄭毓秀, 1891 - 1959)로 혹은 정소메이(鄭蘇梅)라고 불리던 사람입니다. 위안스카이는 아직 때가 안되었는지 이때 암살을 모면했는데 바로 이어진 청나라 조정의 수구세력 량비(覺羅良弼)의 암살은 이 사람이 기획한 자살폭탄으로 성공합니다. 이 일련의 암살사건으로 인해 지명수배된 정위슈는 프랑스로 건너갔고 1914년 파리에서 법률 공부를 하기 시작하여 1917년 파리대학에서 법학석사 학위를 받은 후 프랑스 법률협회에 가입, 그리고, 1919년 위에서 말한 파리 평화회담의 중화민국 수행원으로 활동한 후 1925년 법학박사가 되어 중국의 첫번째 여성 박사 및 변호사가 됩니다.
정위슈는 훗날 자신의 일생을 영어로 쓴 "My revolutionary years: the autobiography of Madame Wei Tao-ming (나의 혁명시기: 웨이 타오밍 부인의 자서전)" (C. Scribner's sons, 1943)을 썼습니다. 여기 이 때의 이야기가 언급되어있습니다.
PEACE CONFERENCE
I prepared therefore to leave for Europe. At first I planned to go by way of the Mediterranean, and had actually bought my ticket when a conference with Party members made me change to another route. I was informed that a representative from Korea, Mr. King, wished to go to the Peace Conference, and that he had obtained reservations by way of America, but that he was now afraid that he might be arrested by the Japanese when the boat stopped in Japan. I was not in any such danger at that time; so I exchanged tickets with Mr. King and he went via the Mediterranean.
"평화회담(대표단에 선발되어서) 나는 그래서 유럽으로 떠날 준비를 하였다. 처음에는 지중해를 거쳐 가기로 계획했었고, 당의 멤버들과 회의를 하여 다른 노선으로 변경하기로 했을 때 실제로 내 선표는 이미 사두었었다. 나는 한국 대표단 미스터 킹이 파리 평화회담에 가려고 하는데 미국을 경유하는 선편 예약을 하였고, 이 배가 일본을 경유하다가 체포될지도 모른다는 염려를 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나는 그때는 아직 그런 위험에 빠지지 않았다, 그래서 표를 미스터 킹과 교환하였고 그는 지중해 경유 노선으로 갔다."
여기 코리언 대표 미스터킹은 우사 김규식입니다. 예, 이 자서전의 내용을 보면 정위슈가 직접 여운형이나 김규식으로부터 부탁을 받거나 우연히 만난 것이 아니라 중화혁명당(1919년 10월에 국민당으로 개칭합니다)의 권유를 받아들인 것으로 나옵니다. 그래서, 여운형이 정위슈(소메이)를 잘 알았을 가능성도 있지만 제가 현재 내린 결론은 우연히 만나서 바꿔주고 한 것이 아니라고 잠정적인 결론을 내렸습니다. 누군가 그 사이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그런데, 최근의 조선인 대표를 파견한 신한혁명당과 선표를 바꿔준 중화혁명당 간의 연결고리에 대한 주장이 나오고 있습니다. 1922년 10월 19일자 조선총독부 경무국의 비밀문건 "平和會義에 대한 不逞鮮人의 狀況"(평화회의에 대한 불령선인의 상황)"의 첫부분에 보면 김규식이 파리 평화회의에 가서 '이권용, 김복, 황기환' 등의 구미지역에 있던 '일당'(輩라고 표기하고 있습니다)이 파리에 와서 김규식을 지원하고 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김복은 김규흥의 다른 이름입니다. 김규흥이 아마도 정위슈의 배편을 김규식과 바꿔주도록 주선한 연결고리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저 역시 김규식이 파리에 가서 임시정부 구주위원회를 구성하였을때 실제 중국대표단의 도움을 계속 받은 배후에는 역시 김규흥이 중간 연결고리였을 거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선표 교환 에피소드 역시 김규흥의 역할이 있었을 거라 충분히 가능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정병준 선생이 이런 내용을 모르지 않았을거라 짐작하는데 김규흥에 대한 언급이 아예 없기도 하고 '김탕'에 대한 얘기로 넘어가버려서 상당히 의아했습니다. 언젠가 만약 기회가 되면 물어보고 싶은 부분입니다.
첨부한 이미지는 빨간 색 박스에 하나는 김규식이고 다른 하나는 이권용, 김복, 황기환의 이름이 적힌 일본 경무국 문건입니다. (제가 너무 길게 중언부언 하는가 싶어 좀 자제하여야 할까 고민 중입니다. 양해바랍니다)


오구오구
와 엄청나네요...
여성 혁명가 정위슈를 처음 접해서, 이런 여성이??? 놀라워 하던 중이었는데 장미가시 가지 이야기는 영화같네요. 영화나 소설도 있을거 같아요. 이번 책을 읽으며 중국도 새롭게 보이구요.. 전설 적인 중국 여성 혁명가가 한국의 독립운동가 김규식을 돕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배표를 바꿔주었다는것, 그 뒤에는 두 사람을 연결한 숨은 조력자 김규흥이 있었다는 것... 아. 감동입니다.

향팔
와, 이야기가 너무 흥미진진해 정신없이 읽었습니다. 김규흥이 이렇게 등장할 줄이야!

YG
@적륜재 정말 정병준 선생님께 한번 물어보고 싶은 대목이네요. 흥미로운 자료 감사합니다.
aida
저도 논쟁이슈를 알려주셔서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대충 검색으로 찾아보며 알게된 정위슈가 그의 자서전에서 미스터 킹으로 지칭하며 이 에피소드를 언급했다는 것. 김규흥(김복)의 역할에 대한 주장도 상당히 현실성 있다고 이해하게 되었구요.. 자제하지 마십시요!!!

오구오구
“ 정육수는 신해혁명 이후 1912년 원세개 암살을 시도한 바 있으며, 1914-1917년간 근공검학으로 프랑스 파리에 유악해 법학석사 학위를 받은 최초의 여성 변호사였다. 180
김규식이 타고 간 포르토스호는 중국 상해, 인도차이나 사이공, 인도양 스리랑카의 콜롬보를 경유한 후 수에즈 운하를 통과해 프랑스로 향하는 우편선이었다. 183
김규식이 파리로 떠나기 전 중국 내 활동을 되짚어 본다면 김규식이 여운형과 신한청년당보다는 신규식과 동제사 측을 더 크게 신뢰하고 의지하고 있음을 분명히 알수 있다. 193
3.1운동으로 한국 독립운동의 새로운 공간과 장이 펴쳐지자, 이들의 성과와 활약상은 배증되었다. 결국 신규식 중심의 비밀그룹과 여운형 중심의 신한 청년당 그룹은 상해 임시정부의 중요한 동력으로 결합하게 되었다. 신규식, 김규식의 비밀활동과 여운형, 신한청년당의 활동은 임시정부 수립으로 수렴되면서 3.1운동의 거대한 용광로 속에서 용해되었다. 195
이상설은 근왕주의의 댚적 인물이지만, 신규식은 근왕주의와공화주의의 중간 위치에 있었고, 유동열은 신민회 출신으로 공화주의에 속하는 인물이었다. 196
‘신한혁명당’이라는 당명 역시 <신한민보> 등 재미 한인의 공화주의적 노선을 떠올리게 하는 동시에 ‘신민설’ 등 양계초류의 보황주의적 노선 혹은 ‘새로운 대한, 대한의 복국’등을 연상케 한다. 196
그다음 찾아온 것이 바로 1917년 대동단결선언이었다. 만주, 노령, 중국, 미주의 지도자들이 ‘대동단결’해서 일종의 임시정부를 수립하자는 이 선언은 한국독립운동사에서 중대한 전환이었다. 197
”
『[세트] 김규식과 그의 시대 1~3 세트 - 전3권』 정병준 지음
문장모음 보기

오구오구
<구주의 우리 사업>이라는 표현이 극적이고 마음 아프게 다가옵니다.
또 중국도 근 현대사에 많은 아픔도 있었고 많은 혁명전사들이 있었고 또 1,2차세계대전 거치면서 한국과 비슷한 아픔을 거쳤다는 것을 생각하니 동지적 감정이 생기네요 ㅎ 중국동지들의 도움이 많았다는 것도 새롭게 알게 되었어요

stella15
“ 의화군의 웨슬리언대학 생활은 1년 정도에 불과했다. 의화군은웨슬언대학에서 횡액을 당했다. 1903년 6월 11일 저녁 델라웨어 남쪽으로 떨어진 스트라트퍼드공원(Stratford Park)에서 조셉 스타우트put)라는 농부이자 웨슬리언대학 학생이 술에 취한 채 의화군을 무차별한 주먹질·발길질로 폭행했고, 말리던 시종 한응이도 스타우트 일행에게 몰매를 맞았다. 스타우트는 "중국인을 때리고 싶었다." "왕자가 여성들 사이에 인기가 많은데 시기심을 느꼈다"라고 주장했다. 의화군은 의식을 잃었다가 다음 날에야 기억을 되찾았고, 이후 꼬박 사흘을 침대에 누워 있어야 했다. 사건은 곧 국제적인 외교 문제가 되었다. 일부 신문은 외화군이 농부의 여자친구에게 눈길을 건넨 결과 농부가 왕자를 폭행한 것이라고 했다. 6월 18일 주미공사관 변호사 찰스 베드림Bedham)이 델라웨어에 와서 사건을 조사한 후 시청 관리와 검사엄정한 처리를 요구했다. 미 국무부는 7월 28일 자로 주미한국공사에게 사건의 경과를 설명했다. 의화군은 워싱턴으로 돌아가 몇 개월을 보낸 후 10월 말 다시 델라웨어 웨슬리언대학으로 돌아왔다. ”
『김규식과 그의 시대 1 - 고아 소년 “존”의 근대로의 여정 (1881~1918)』 210~1, 정병준 지음

김규식과 그의 시대 1 - 고아 소년 “존”의 근대로의 여정 (1881~1918)한국출판문화상 학술 저술 부문을 두 차례 수상한(2006년 <한국전쟁>, 2015년 <현앨리스와 그의 시대>) 정병준 교수가 해방 80주년을 맞아 <김규식과 그의 시대>(전 3권)을 출간한다.
책장 바로가기
문장모음 보기

stella15
“ 1907년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고종이 강제 퇴위를 당하고 순종이 왕위를 계승하자. 미국 언론에서는 다시 의화군을 주목했는데, 이 기사들은 의화군이 버지니아 로녹대학 시절 뉴욕을 자주 방문했는데, 잘 차려입었고, "펑펑 돈을 잘 쓰는 사람"으로 불야성의 브로드웨이에 돈을수많은 여성들을 매혹시켰다고 썼다. ”
『[세트] 김규식과 그의 시대 1~3 세트 - 전3권』 212, 정병준 지음
문장모음 보기

향팔
“ 지금까지 학계에서는 파리로 떠나기 전 김규식이 특별한 활동을 기획하거나 시도할 여력이 없었던 것으로 생각해 왔다. 급변하는 긴박한 상황 속에서 김규식도 간신히 파리행 배편에 오른 정도로 생각했다. 또한 김규식은 영어 등 어학적 재능이 있는 연고로 파리강화회의 대표로 선출되었으리라는 정도의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
그렇지만 새로 발견된 자료들은 김규식이 파리강화회의로 출발하기 전 중국 내에서 맹렬한 외교·선전 활동을 벌였으며, 나아가 파리에서 수행할 선전 활동을 철저하게 준비했음을 보여 준다. 이는 지금까지 전혀 알려지거나 주목받지 않은 점이다.
나아가 신한청년당 대표로 선발된 김규식이 이러한 외교, 선전, 준비 활동을 함께한 사람은 여운형이 아닌 신규식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기성의 인식이나 통설과는 다르게 김규식은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되기 전에 자신이 가지고 있던 동제사 계열 조직망, 연락망, 혹은 인간관계에 기초해 파리강화회의행이 성사되도록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다. ”
『[세트] 김규식과 그의 시대 1~3 세트 - 전3권』 정병준 지음
문장모음 보기

향팔
“ 그러나 이제 평화회의가 크고 작은 나라의 안전을 위협할 수 있는 분쟁의 원인을 찾으려 하고 있기 때문에, 이제 인종을 모두 조화롭게 하며 자신들의 법률과 관습에 따라 각자 살도록 허용하려고 하고 있기 때문에, 한국민족은 대통령 각하께 나아가 그들의 불행한 운명을 고려해 주길 요청드립니다. 부디 평화회의가 우리 대표를 만나 자유의지에 반해 일본의 속국이 된 한국 상황을 명확히 청취해 주길 바랍니다.
부디 한국에서 분쟁의 원인들이 사라지고 극동은 물론 모든 곳에서 영구적 평화가 확보되길 바랍니다. 한국인들은 자신들을 다시 한번 자유롭고 독립된 민족으로 만들어 줄 국가 권리(Right of Nations)에 내재하는 정의를 확신합니다.
한국인들에게 이 자유를 회복케 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동시에 미래의 분쟁 원인을 억제하게 될 것입니다.
이리하여 영구적 세계평화의 설립이라는 목적이 획득될 것입니다.
- 김규식·신규식이 윌슨 대통령에게 보낸 청원서(1919.1.25) 중에서 ”
『[세트] 김규식과 그의 시대 1~3 세트 - 전3권』 정병준 지음
문장모음 보기

향팔
“ 1918년 11월 여운형의 크레인 면담 및 청원서 전달, 김규식의 파리강화회의 파견 이후 숨 가쁘게 벌어진 상해, 북경에서의 대응은 새롭게 운동 선상에 등장한 여운형·신한청년당의 인적·조직적 연계망뿐 아니라 김규식·신규식이 이미 가지고 있던 기성 인적·조직적 연계망과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이다.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하고 3·1운동이라는 대폭발을 일으킨 기폭제는 여운형과 신한청년당의 발 빠른 대처였지만, 이를 가능케 한 구조적 힘은 기성의 재중국 한국 독립운동 진영에서 나온 측면이 있다.
때문에 우리는 1918년 김규식이 박용만에게 편지를 보낸 이래, 1919년 1월 북경 미국공사에게 보낸 청원, 1919년 2월 신규식·김규식의 윌슨 앞 청원, 1919년 2월 신규식의 전한족대표위원회 소집 선언서 등으로 이어지는 맹렬한 활동에서 가깝게는 1917년 대동단결선언, 멀리는 1912년 이래 동제사·신한혁명당으로 이어지는 중국 내 한국 독립운동의 역사적 관성과 기맥을 발견할 수 있다. ”
『[세트] 김규식과 그의 시대 1~3 세트 - 전3권』 정병준 지음
문장모음 보기
작성
게시판
글타래
화제 모음
지정된 화제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