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18년 11월 여운형의 크레인 면담 및 청원서 전달, 김규식의 파리강화회의 파견 이후 숨 가쁘게 벌어진 상해, 북경에서의 대응은 새롭게 운동 선상에 등장한 여운형·신한청년당의 인적·조직적 연계망뿐 아니라 김규식·신규식이 이미 가지고 있던 기성 인적·조직적 연계망과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이다.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하고 3·1운동이라는 대폭발을 일으킨 기폭제는 여운형과 신한청년당의 발 빠른 대처였지만, 이를 가능케 한 구조적 힘은 기성의 재중국 한국 독립운동 진영에서 나온 측면이 있다.
때문에 우리는 1918년 김규식이 박용만에게 편지를 보낸 이래, 1919년 1월 북경 미국공사에게 보낸 청원, 1919년 2월 신규식·김규식의 윌슨 앞 청원, 1919년 2월 신규식의 전한족대표위원회 소집 선언서 등으로 이어지는 맹렬한 활동에서 가깝게는 1917년 대동단결선언, 멀리는 1912년 이래 동제사·신한혁명당으로 이어지는 중국 내 한국 독립운동의 역사적 관성과 기맥을 발견할 수 있다. ”
『[세트] 김규식과 그의 시대 1~3 세트 - 전3권』 정병준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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