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가의 인생책> 임정균 평론가와 [주저하는 근본주의자] 함께 읽기

D-29
안녕하세요. 한주가 시작되고 목요일에 이르니 조금 지치기도 하네요. 그래도 월요일엔 굉장히 쌀쌀했던 날씨가 다시 따뜻해지고, 곳곳에서 꽃향기가 퍼지는 듯해서 기분이 좋습니다. 오늘 살펴볼 부분은 9~10장입니다. 여기에는 이 소설의 가장 중심적인 주제가 집중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듯해요. 에리카와의 관계에 관해서도 매우 중요한 장면들이 있지만, 저는 근본주의에 관한 내용을 주로 말해보려 합니다. 임박한 전쟁 때문인지 언더우드샘슨과 같은 직종의 회사가 하향세를 띠기 시작합니다. 마닐라에서 돌아온 찬게즈는 회사의 업무량이 줄기도 했고, 고향이 걱정되어서 라호르에 오게 되죠. 찬게즈는 자신의 집 분위기가 낯설게 느껴지고, 그것이 실은 자신이 미국인의 눈으로 보고 있기 때문임을 깨닫습니다. 라호르를 떠나 뉴욕으로 돌아가기 전 어머니는 아들에게 수염을 깎으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뉴욕에 와서도 동료가 찬게즈의 수염을 지적하지요. 테러 이후 수염이 무슬림의 상징이 되어 혐오의 대상이 되어 버린 까닭입니다. 하지만 찬게즈는 자신의 수염이 자신의 본질이 아니라 스타일일 뿐이라고 생각하며 수염을 자르지 않습니다. “나 같은 혈색의 남자가 기른 수염이 당신네 나라 사람들에게 미친 영향은 대단해요. 육체적으로 별로 중요하지 않은 건데 말이죠. 결국 스타일일 뿐이잖아요.”(117쪽) 이 소설의 화자 찬게즈는 본질에 관한 여러 에피소드를 더 이야기해 줍니다. 이를테면 “전쟁이 임박하면 아이들과 노인들을 피신시켜야 하잖아요. 그런데 우리 경우에 떠나는 건 가장 튼튼하고 영리한 사람들이었어요.”(116쪽) 라고 하는 대목입니다. 저는 이 부분을 보며 요즘 ‘탈출은 지능순’이라는 말이 유행하는 게 떠올랐어요. ‘헬조선’이라는 말처럼 전반적으로 살기 어려워지고, 또 계층 이동의 가능성조차 요원해지면서 더 유행한 듯한데요. 말하자면 나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는 공동체의 정의, 도덕, 법과 규율을 지키는 게 도리어 영리하지 못한 일이 되어버린 것이지요. 여기에서 바로 전 시간에 말했던 근본주의와는 다른 또 다른 본질의 차이가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철학적으로 본질이란 선험적이고 항구불변하는 무엇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가 무엇이 본질적인지 아닌지에 대해 판단할 때, 기하학과 같이 수학적이고 추상적인 개념들이 아니고서는 대체로 우리 인간의 경험, 인식능력이 한계와 기준이 됩니다. 그런 점에서 본질 자체는 시대에 따라, 그리고 그 시대가 대상을 바라보는 어떤 관점들의 차이에 따라 가변성을 띠기 마련이지요. 물질을 구성하는 최소단위, 즉 사물의 본질이 무엇이냐에 대한 관점이 수천년 전 그리스의 자연철학자들이 내세웠던 삼원소설에서 현재의 양자역학으로 바뀌어 가는 과정이나 빛의 본질이 파동인가 입자인가, 라는 물음에 대한 근대과학의 대답이 이 문제의 대표적인 사례이지요. 이 소설이 예로 든 전쟁과 같은 재난 상황에서 아이들과 노인을 먼저 피신시켜야 한다는 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선험적’인 마음이겠지요. 그 선험성을 인간의 본질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전 세계 사람들 중 저 말에 공감하지 않는 사람들은 없을 겁니다. 동양의 성리학에서도 사단칠정이라 하여 인간의 본성에 관해 유사한 말을 합니다. 그건 반드시 따라야 한다고 우리가 따로 법으로 정해놓지 않아도 응당 그리하는 일종의 ‘자연법’입니다. 여기서 문제는 영리한 사람들이 대체로 모든 사람들이 공감하는 선험적인 본성을 어긴다는 데에 있는 것 같아요. 그건 그들에게는 공동체 모두에게 이로운 것보다는 자기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걸 우선으로 하는 어떤 행동 양식이나, 신념 같은 것을 지적하는 듯합니다. 그리고 이 소설은 10장에 이르러 이러한 일부의 ‘영리한’ 사람들의 행동 양식이 금융자본주의와 무관하지 않다는 에피소드를 이야기합니다. 찬게즈는 에리카와 고향 생각으로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 상황입니다. 그런 와중에 칠레의 한 출판사를 평가하는 프로젝트를 맡게 되어 출장을 가게 됩니다. 출판사 대표인 후안바우티스타라는 노인은 짐과 찬게즈에게 “당신들이 책에 대해 뭘 알죠?”라고 묻고, 짐은 자신이 미디어 산업 전공자이며 지금껏 열 개가 넘는 출판사를 평가했다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노인은 “그건 재정 문제요. 나는 책에 대해 뭘 아느냐고 물은 거요.”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찬게즈가 “제 아버지의 숙부는 시인이셨습니다”(126쪽)라며 책을 사랑한다고 말하죠. 이후 짐은 그 출판사에 관해 이렇게 설명합니다. 후안바우티스타라는 노인은 오랫동안 회사의 경영을 맡아 왔으나 실소유주는 아니라고 말이지요. 그리고 본인들이 칠레에 온 이유는 소유주가 회사를 좋은 가격에 팔고 싶어하며, 의뢰인들은 그걸 사고자 하는 사람이라고요. 노인은 오랫동안 교육 전문 출판 분야의 이익을 발전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 작가들에게 투자를 해왔습니다. 소유주와 의뢰인의 입장에선 걸림돌이지요. 그리고 짐과 찬게즈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재정 상황에만 집중하는 언더우드샘슨의 근본주의는 그 회사가 어떤 분야인지, 그 분야가 미래의 발전을 위해 당장 손해를 보더라도 어떤 투자를 해야하는지 따위는 전혀 관심이 없을 겁니다. 중요한 것은 재정 상황, 다시 말해 그 자본의 주인의 이익이지요. 그리고 이것은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자본가가 자신의 자본을 증식하는 과정과도 정확히 일치합니다. 말하자면 언더우드샘슨이 표방하는 금융자본주의는 역사, 시대 상황, 환경, 어떤 가치관, 혹은 미래 가치 같은 여타의 조건들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오로지 자본가의 이익, 즉 금융자본의 증대만을 본질로 삼는 냉혹한 근본주의라는 것이지요. 이제 이야기는 찬게즈라는 인물과 금융자본의 증대를 유일한 본질로 삼는 또 다른 근본주의자인 짐의 갈등으로 이어집니다. 찬게즈는 칠레의 다른 것들을 보려 하고 짐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하죠. 찬게즈는 짐에 대해 “나는 자신의 직업이라는 작은 세계의 구조에 그렇게 완전히 빠져 있는 그를 존경할 수 없었어요”(129쪽)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자신 역시 “금융 거래를 실현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현재 감정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개인적, 정치적 문제를 전혀 생각하지 않”(129쪽)았다는 걸 깨닫습니다. 이와 관련해 흥미로운 대목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건 후안바우티스타와 우연찮게 만나 함께 식사를 하러 가서 나누는 다음과 같은 대화입니다. “내가 젊은이를 유심히 살펴보았는데, 혼란스러워하는 것 같았어요. 개인적인 질문을 해도 될까요?” “그럼요.” “다른 사람들의 삶을 망치는 일을 하면서 생계를 꾸리는 것이 혼란스러운가요?” “우리는 평가를 합니다. 뭘 사고 뭘 팔지, 혹은 우리가 평가를 한 후 회사에 무슨 일이 생길지를 결정하는 게 아닙니다.”(133쪽) 그리고 노인은 ‘예니체리’라는 어린 나이에 오스만 제국의 포로가 되어 자신들의 문명을 없애기 위해 싸웠던 기독교 소년들에 관한 이야기를 해줍니다. 그 이야기는 찬게즈에게 마치 자기 자신의 이야기처럼 느껴지지요. 이후 찬게즈는 “근본적인 것에 집중하는 나날들이 끝났다”(135쪽)고 생각하며 언더우드샘슨을 그만 두게 됩니다. 이쯤에서 제목이 말하는 주저하는 근본주의자가 누구를 가리키며 무엇을 가리키는지 명확해지는 것 같네요.
평론가님이 제 머릿속에서 비빔밥처럼 섞여 정리되어 나오지 않는 개념들을 문장으로 잘 풀어 주시네요~감사합니다. ^^ 9장 111p ‘내가 라호르로 돌아왔을 때 어떻게 이곳을 미국식으로 보았던지 기억나요......수치스러웠어요. 여기가 내 고향, 내가 살던 곳이구나 싶엇어요. 저급한 냄새도 났어요.’ -> 귀국자녀나 킴투이 작가의 ‘루’에서처럼 어렸을 때 외국으로 건너가 그 나라 사람인지 부모의 나라 사람인지 모를 정체성을 가진 것이 아닌데도, 찬게즈의 자아가 이미 미국에 많이 물들어 버린 것을 상징하는 것이겠죠. 저 또한 20여년 전 소위 우리나라보다 잘사는 나라에서 겨우 1년여를 보내고 와서 -똑같지는 않지만- 우리 나라를 약간 깔보는 정체모를 우월의식에 사로잡혔었던 생각이 납니다. 그때의 제가 부끄럽네요. ㅎㅎ 그리고 115p에서 자기 나라를 버리고 봉급을 많이 주는 직장과 본인을 만나 주지도 않는 여자를 위해 괴로워하면서도 미국으로 떠나려고 합니다. 10장에선 후안바우티스타라는 노인을 만나면서 본질에 대해 이야기하는 부분이 나왔습니다. 126p : “당신들이 책에 대해 뭘 알죠?” “제 전공은 미디어 산업입니다. 이십여 년이 넘게 열 개가 넘는 출판사들을 평가했고요.” “그건 재정 문제요. 나는 책에 대해 뭘 아느냐고 물은 거요.” “제 아버지의 숙부는 시인이셨습니다. 펀자브 지방에서 유명한 분이었습니다. 우리 집안은 책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예니체리에 대한 이야기... 135p ‘내가 아는 건, 근본적인 것에 집중하는 나날들이 끝났다는 것뿐이었어요.’ 첫 장면에서 미국에서 승승장구하던 찬게즈가 어떻게 다시 파키스탄으로 돌아왔을까도 궁금했고, 현재의 직업도 궁금했습니다. 여기까지 읽었을 때는 테러리스트가 되는 것인가?하고 걱정도 했고요. 이미 읽었지만, 마지막 부분을 읽을 생각을 하니 가슴이 뜁니다. 그리고 에리카에 대한 부분은 저도 잘 풀리지 않는 부분이 많아 이야기 나눴으면 좋겠습니다~
7장 초반에 이런 이야기가 나와요. "그런 일들은 나른 나라에서와 마찬가지로 미국에서도 변함없이 불운한 가난뱅이들한테 일어나지, 일년에 8만 달러를 버는 프린스턴 졸업생들한테는 일어날 수가 없다고 생각했던 거죠." 바로 위에 임정균님이 써주신 수염이야기에서, 찬게즈의 수염이 어떤 백인이 스타일리시하게 기른 수염과 사실은 다를바가 없다고 해도, 찬게즈가 과연 거기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찬게즈가 근무하는 회사인 언더우드샘슨은 감정 평가를 전문으로 하는 회사입니다. 자산과 부채를 놓고 사업체가 안고 있는 걸림돌이 미치는 영향과 이를 제거할 시 갖는 사업체의 가치를 평가해주죠. 소설 속에서 찬게즈의 직업이 꽤 유의미한 설정이라고 생각해요. 찬게즈 본인 역시 파키스탄에서 미국으로 유학을 오고, 언더우스샘슨에 입사하기까지 그가 갖는 가치를 평가받았고, 앞으로도 마찬가지일테니까요. 대다수 사람들의 인생이 이와 유사한 과정을 거치는데, 이민자의 경우는 그 정도가 더 클 것입니다. 또한 이러한 시각은 국가간의 관계에서도 충분히 볼 수 있는데요, 분쟁이 발생하면 강대국의 지원은 금전적이든 정치적이든 투자 가치 계산기를 먼저 돌리고 있는 것에서도 알 수 있잖아요(2차 세계대전 직후 미국과 일본의 관계에서도 볼 수 있죠). 평론가님 말씀처럼 같은 선상에서 후안바우티스타는 찬게즈, 즉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그곳에서 터전을 잡은 젊은이들을 오스만 제국 당시 기독교 소년들이었지만 인질로 잡혀 이슬람 군대에서 훈련을 받은 예니체리에 에둘러 비유하는 장면이 기억에 남습니다.
언더우드샘슨이 상징하는 가치 평가가 국가 간의 관계에서도 드러난다는 지적에 동의합니다. 가치의 평가는 물론 등가교환이라는 경제적 원리 때문인데요. 일상 생활이나 개인 간의 관계에서 가치의 평가와 교환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행하는 경제 활동에서 충분히 발견됩니다. 그런데 이런 미시경제의 경우에는 보통 경제 주체가 '나'라는 개인이고, 한 인간의 경제적 판단에는 여러 편견, 지식 수준, 경제 수준, 삶의 내력, 취미, 감정 등의 영향을 보다 쉽게 받습니다. 그러니까 이 등가에서 가치의 의미는 단순히 경제적인 것만을 가리키지는 않지요. 여러 가지 기회비용들이 등가교환에 영향을 미치는 거죠. 그런데 지적해주신 국가 간의 관계처럼 거시적인 측면에서 그런 여러 조건들은 보다 쉽게 무시되는 것 같습니다. 조국이나 애국과 같은 문제가 힘이 약한 다른 국가의 평범한 민간인이 학살되는 것을 전혀 보지 못할게 만들기도 하니까요. 자본이 보다 근본적인 영향력을 행하는 것은 거시 경제의 차원이고, 그런 차원에서의 경제적 등가 교환은 종종 인간 개인을 한낱 소모품으로 취급하는 듯해요. 노동시장에서 노동자가 취급되는 방식도 같은 문제이지요.
@진공상태5 님처럼 저도 자주 사전을 찾아본답니다. 가끔은 제가 아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단어도 사전을 찾아보면 뜻밖의 의미를 알게 될 때가 있어 '앎'이란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곤 해요. 말씀하신 것처럼 근본과 본질은 한자의 축자적 의미에서는 그리 다른 의미가 아닙니다. 본질은 '본디부터 가지고 있는 사물이나 현상 자체의 성질이나 모습'의 의미이고, 근본은 '사물의 본질이나 본바탕'이라고 사전은 설명하고 있어요. 근본은 대체로 fundament로 번역되고, 본질은 essence로 번역되는데요. 영어도 마찬가지로 유사한 의미입니다. 제가 앞서 본질을 substance로 병기한 것은 서양 철학의 전통에서 존재의 본질을 실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fundament는 기초, 토대의 의미에 가깝고, essence는 어떤 것의 정수의 의미이죠. substance의 축자적 의미는 말 그대로 '아래쪽이 있는 것' 정도로 오히려 fundament 더 유사한 뜻입니다. 그러니까 일상에서 세 단어를 정교하게 구분할 필요는 없는 듯해요. 문제는 이것이 어떤 신념이나 주의가 될 때 어의의 차이가 발생합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모던과 모더니즘입니다. 근대로 번역하는 모던(modern)은 본래 '지금 이 시기'를 의미하는 당대(contemporary)에 가까운 말이었지만, 그것이 자주 쓰였던 20세기 초반을 가리키는 말라 거의 굳어져 버렸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현대라는 의미로 쓰이기도 합니다. 아울러 철학이나 예술, 역사 등 여러 분야에서 이 모던(근대)에 대한 기준이 제각기 다릅니다. 그리고 모던이 모더니즘(modernism)이 될 때 그것은 시기와는 또 무관해지죠. 모더니즘은 주로 20세기 초반의 특정한 예술적 경향, 혹은 이를 추종하는 일 따위를 가리키니까요. 이와 마찬가지로 근본이나 본질 따위의 어의가 철학적으로 세밀하게 구분된다 하더라도 대체로 비슷한 의미이지만, 근본주의와 본질주의는 전혀 다른 의미입니다. 근본주의 혹은 원리주의가 보통 종교적 교리를 극단적으로 따르는 것을 가리킨다면, 본질주의는 어떤 사물이나 현상에서 본질이 되는 것을 찾으려는 철학적, 인식론적 경향을 가리키는 듯해요. 이러한 내용과 이 소설의 주제와 관련해서는 후에 따로 이야기를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늦었지만 5, 6장에서는 평론가님이 지적한 두 부분에 저도 방점을 찍었는데요. 1) 저도 찬게즈가 필리핀에서 느꼈던 감정을 우리들도 느끼지 않나 싶습니다. (TMI지만, 저도 2년 정도 필리핀에서 살았던 경험이 있는데,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 부끄럽게도 찬게즈와 비슷한 감정을 사는 내내 가지고 있었습니다.) 피부색이 조금 옅다는? 그리고 ‘우린’ 동남아가 아닌 동북아 사람이란(심지어 이것조차 누군가의 기준으로 정해진 것이지만) 희한한 자만심이 있죠. 그래서 영어권이나 영어가 유창한 유럽 사람들 앞에서는 버벅거리면서 동남아시아에서는 단어 단위로 말하는 영어로 큰 소리를 치며 “쟤네들은 발음을 못 알아 듣겠어.”라며 본인의 발음이 어떤지는 신경도 쓰지 않는 모습이 겹쳐졌습니다. 그래서 찬게즈도 장면마다 본인의 영어에 신경쓰는 장면이 나오는 것 같습니다. 아무리 부정하려 해도 영어를 잘 한다는 건 지금 사회에서 권력이 맞는 듯하고요. 물론 작가는 그런 부분을 저와 다르게 매우 우아하게 묘사합니다. 2) 9.11테러가 났을 때 찬게즈가 희생자들의 고통이 아닌 미국에 대해 통쾌하게 생각했던 점은 제 극히 개인적인 경험에서 유추해 보자면 그가 바로 그 나라에 살고 있어서라고 생각합니다. 저 또한 예전에 (필리핀이 아닌 다른) 외국에 살았던 경험이 있는데, 그 나라의 한 개인이 주는 고통이나 차별, 멸시를 그 나라의 모든 사람이 그런다는 것으로 간주해 버리는 감정적 오류가 발생하는 거죠. 그런 의미로, 미국인들도 뉴욕에서 발생한 피해가 아닌 미국 국기를 달고 다니는 이상한 애국심이 발동하는 것일 테고요. 물론 테러범들은 미국을 공격한 것이 맞지만요. 테러와 전쟁 관련해 민족주의는 빠질 수 없는 부분이지만, 영화 ‘프란츠’에서의 한 대목을 생각하면 과연 ‘대의 명분을 가진’ 전쟁/테러와 보복이 의미있는 행동인지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프랑스인들은 우리 병사들을 죽이고 와인으로 축배를 들고, 우린 프랑스 병사들을 죽이고 맥주로 축배를 들지요. 우리는 서로의 아들들을 죽이고 축배를 드는 아비들이오.” 참고로, 저는 TV를 잘 보지 않는데다 뉴스에서의 공격적이고 선정적인 보도가 싫어서 엄청나게 큰 사건이었던 9.11도 세월호, 이태원 사건도 모두 안 보려고 노력했던 기억 뿐이네요.
말씀해주신 것에 정말 공감하는 순간이 많은 것 같아요. 해외에서 뿐만이 아니더라도 한국 내에서도 외국인 이민자나 여행자, 노동자들에 대해서도 그들이 서구의 선진국 출신인지 혹은 상대적으로 우리보다 저개발 국가 출신인지에 따라 저도 태도가 무의식적으로 달라지거든요. 그리고 지난 이태원 참사는 비극의 스펙터클 차원에서 사실 세월호보다 더 비참했던 것이 아닌가 싶어요. 모자이크가 되어 있었다곤 해도 충분히 그 상황을 짐작할 수 있는 장면들이 여과없이 매스컴을 통해 비춰졌는데요. 그로인해 전국민이 또다시 큰 충격과 우울 속에 빠져들었습니다. 그럼에도 이후 벌어진 일련의 과정들은 이 소설이 말하는 것처럼 일상을 초과하는 그런 리얼리티들이 오히려 너무나 손쉽게 상징적 차원에서 정치적 자원이 되어버리는 걸 우리는 또 목격한 게 아닌가 싶네요.
안녕하세요. 오늘로써 드디어 소설이 결말에 이르렀네요. 제목에 대한 수수께끼는 이전 시간에 어느 정도 해소가 되었지만, 아직 우리에게는 소설의 형식이 던지는 의문이 남았지요. 바로 ‘당신’은 누구인가, 그리고 찬게즈는 이 의문의 미국인에게 어째서 이런 이야기들을 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11~12장에서 찬게즈는 “파키스탄인으로서의 경험을 통해 미 제국이 힘을 행사하는 주된 수단이 재정이라는 걸” 깨닫게 해준 후안바우티스타에게 고마움을 느끼며 언더우드샘슨을 그만둡니다. 그리고 에리카가 행방불명이 되었으며, 허드슨강에 몸을 던졌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찬게즈는 깊은 상실감을 안고 라호르로 돌아갑니다. 그러면서 미국이 인류를 위해서는 물론이고, 미국인들을 위해서도 누군가에 의해 제지당해야만 한다고 생각하지요. 고국에 돌아온 찬게즈는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칩니다. 자신의 전공인 재정 관련 과목을 가르치지만, 한편으로는 학생들과 함께 반미 시위를 주도하기도 하죠. 이런 일련의 일들이 그가 미국을 멈추기 위해 하려는 일일까요. 찬게즈는 실제로 자신이 공식적인 경고를 받은 바 있으며, 동료들 중 하나가 미국의 관료를 암살하려는 음모로 체포되었다는 소식에 놀라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비폭력 신봉자”라고 주장합니다. 이런 대목들은 앞서 ‘당신’의 다소 비밀스런 행동이나, 위성통신 기기를 사용하는 듯한 모습,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재킷 안주머니에 손을 넣으며 총(혹은 명함케이스)을 꺼내 드는 듯한 모습과 함께 ‘당신’의 정체가 찬게즈를 암살하려고 온 미국 정보기관의 요원일지도 모르겠다는 암시를 주는 듯해요. 물론 소설에서 그의 정체는 끝까지 드러나지 않으면서 그저 흥미 요소로 남고 말기는 합니다. 여기서 보다 주목해볼 것은 소설 말미에 찬게즈가 하는 다음과 같은 말입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저들은 당신에게 해를 끼치려는 게 아니에요. 얘기할 필요도 없지만, 당신네들은 파키스탄인 모두를 잠재적인 테러리스트라고 상상하면 안 돼요. 우리가 당신네 미국인들 모두를 변장한 암살자라고 상상하면 안 되는 것처럼 말이죠.”(160쪽) 이 말 속에 이 소설의 형식적 의문의 답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독자가 이 미국인을 비밀스러운 임무를 띤 미국의 요원으로 볼 구체적이고 명확한 증거는 사실 하나도 없지만, 찬게즈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우리는 ‘당신’에 대한 의심을 갖게 되지요. 실제로 ‘당신’은 요원일 수도 있지만, 평범한 관광객일 가능성이 더 크죠. 그런 점에서 이 이야기가 교묘하게 꾸며놓은 의혹들이 ‘당신’의 정체를 암살자로 몰아간다면, 그 의도는 미국인들이, 서방 세계가 이슬람 국가를 바라보는 관점을 비틀어 꼬집고 있는 게 아닐까요. ‘너희들이 평범한 파키스탄인들을 모두 테러리스트로 보는 것처럼 우리도 너희 미국인들 모두를 변장한 암살자로 볼 수 밖에 있다’고 말이죠. 이렇게 볼 때 이 소설의 형식은 이렇게 이해해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먼저 찬게즈가 미국을 저지하기 위해 하려는 일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단순히 반미 시위에 목소리를 더하는 것일까요. 우선 그 시위의 목적이 불특정 다수의 미국인을 향한 폭력이 아니라는 점에서 테러리즘과는 아주 다르다는 점을 분명히 해야겠습니다. 우선 시위라는 것이 ‘위력을 보여준다’는 의미라는 데 주목해야겠습니다. 앞서 찬게즈는 9·11 테러의 폭력성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미국에 반대하는 세력의 위력을 가시화한 상징적 사건이라고 언급한 바 있지요. 그와 비교해 이 찬게즈가 생각하는 시위는 비폭력적인 위력의 가시화인듯합니다. 여기서 찬게즈의 시위는 파키스탄 내 자국민들을 대상으로 반미의식을 선전·선동하거나 의식화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미국인을 대상으로 말은 건다는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찬게즈가 낯선 미국인인 ‘당신’에게 말을 걸고, 자신의 이야기를 통해 미국인들의 민낯을 폭로하는 이 소설의 형식은 그가 행하는 반미 시위와 닮아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소설 자체가 찬게즈가 미국을 제지하기 위해 행하는 일의 일환인 것이지요. 다시 말해 이 소설의 일차적 독자는 미국인인 셈이고, 이것이 이 소설의 형식을 통해 잘 형상화되어 있는 듯합니다. 여러분들은 이 소설을 어떻게 읽으셨나요. 소설 전체에 대한 짧은 감상도 좋고, 이 대목에서 눈에 띠는 장면들을 더 언급해주셔도 좋을 것 같아요. 흑은 후반부에 나눠봤으면 하는 주제들을 던져주셔도 좋습니다. 아울러 후반부 계획을 말씀드릴게요. 당초 6회에 걸쳐 주제별로 이야길 나눠볼까 했는데요. 3/21(화) 하루는 쉬고, 목요일부터 5회에 걸쳐 이야길 나눠볼까 합니다.(물론 언제든 글을 올려주셔도 좋습니다!) 3/23(목)과 3/25(토)에는 그동안 미뤄두었던 에리카를 중심으로 이 소설을 다시 살펴볼까 합니다. 찬게즈와의 관계(사랑), 그리고 크리스와 에리카라는 인물의 상징성 등 다양한 이야기를 나눠볼 수 있겠네요. 3/28(화)과 3/30(목)에는 이 소설의 제목인 <주저하는 근본주의자>와 관련하여 이 소설의 주제에 관해 좀 더 깊은 이야기를 나눠 보겠습니다. 그리고 4/1(토)에는 그 밖에 못다한 이야기와 함께 마무리하면 될 듯하네요. 그럼 주말 잘보내시고요. 일교차가 심한데 건강도 조심하셔요!
오늘 완독하고 주말동안 못 읽은 게시판의 글들을 꼼꼼히 읽어보았습니다. 확실히 혼자 읽을때보다 훨씬 깊이있게 문장, 표현들을 짚어보게 하네요. 한가지 질문은 p.148 찬게즈가 JFK 공항으로 가는 중에 자켓을 벗어 보도위에 두고 간것이 경보발령을 일으켰다는 내용이 나오잖아요? 이게 유색인이 버린 위험물로 의심받아 그랬다는 뜻인거죠??
네, 게다가 제가 보기엔 그걸 얌전히 둔 것도 아니고 옷을 막 돌렸다고 했던 거 같은데, 그걸 보고 오버액션한 거겠죠....정말 그 장면 보고 슬펐어요.
바나나님 언급하신 대목에서 찬게즈가 백인이었다면 오히려 자살을 시도하려는 사람이나, 추모하는 사람으로 보였을 수도 있겠네요. 저는 이런 생각도 들어요. 요즘 우리나라의 큰 교각 일부에는 CCTV와 전화기가 설치되어 있다고 해요. 24시간 자살예방상담 서비스도 있고요. 워낙 인력이 부족하다보니 그리고 그런 전화가 주로 심야에 많이 오다보니 상담전화를 받는 분들도 많이 힘들다더군요. 아무래도 제대로 된 상담이 힘들 거에요. 김금희 소설가의 <체스의 모든 것>에는 자살 충동을 느낀 인물이 상담전화를 걸었다가 주민등록번호를 물어오는 것에서 오히려 사회적 시스템의 비정함을 느끼는 대목이 나옵니다. 제도가 충분히 인간적이지 않다는 것이죠. 저는 찬게즈의 행동에 경보발령이 내려진 것도 제도의 비정함 때문인 것 같아요. 재정상태에만 집중하는 자본주의의 근본주의와 개개인의 마음을 어루만지지 못하는 국가 제도의 비정함에는 어느 정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11-12장 138p 나는 파키스탄인으로서의 경험을 통해 미 제국이 힘을 행사하는 주된 수단이 재정이라는 걸 깨달았어요. 원조와 제재를 번갈아 하면서 말이죠. 그런 지배의 과업을 돕는 일을 하지 않겠다고 한 건 옳은 일이었어요. 139p 그때서야 나는 내가 포기하려고 하는 것이 얼마나 큰 것인지 실감했어요. 내가 어디에서 그렇게 굉장한 수입을 벌어들일 수 있을까 싶더군요. -> 138p과 139p에서 찬게즈는 깨달음은 얻지만 현실적인 문제에 봉착해 고뇌하는 모습을 보여 줘서 ‘선택’이란 항상 복잡하게 얽혀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55p 바로 이것이 미국이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의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또 파키스탄에 압력을 가하기 위해 전략적으로 인도를 이용해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죽을 위험을 감수하는 걸 정당화하는 이유라고 생각했어요. 138p/155p : 지금 같이 읽고 있는 ‘좋은 불평등’이란 책에서 미국이 중국이 다른 나라의 회사를 합병하지 못하게 방해공작을 일삼고 있다는 내용이 있는데, 그것과 겹쳐져서 헛웃음이 나오더군요. 그리고 교묘하게 본인 손 더럽히지 않고, 자신들의 이익에 반하는 세력을 공격하는 것도.... 143~146p에 걸쳐 나오는 에리카에 대한 이야기는, 에리카가 허드슨 강에 몸을 던지는 모습을 상상할 수 없었다는 장면에서 찬게즈에게 아직 에리카는 죽은 것이 아닌 어떻게서든지 ‘살아남게 하고 싶고 잡고 싶은 연인(혹은 미국)’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하여 150p에서는 나는 그녀의 일부를 나와 함께 라호르로 데려왔어요. 혹은 그녀로 인해 잃어버린 나 자신의 일부를 내가 태어난 도시로 다시 옮겨올 수 없었다고 말하는 게 더 정확하겠네요. 그런데도 내 감정은 그것에 휘둘렸어요. 애도의 물결이 나를 덮쳤어요. ->작품해설에도 나와 있지만, 에리카는 그야말로 찬게즈에게는 미국 그 자체인 것 같습니다. 159p 나는 나 나름의 방식으로, 대륙과 문명 테두리를 넘어설 정도로 밝은 개똥벌레의 불빛을 냈던 거죠. -> 여기서 거대한 빌딩 벽을 오르던 개똥벌레가 찬게즈라는 것이 밝혀지네요...ㅜ.ㅜ 147p 미국은 다른 인류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당신들을 위해서도 제지당해야 했어요. -> 전 세계를 대상으로 가스라이팅하며 폭주하는 현재의 미국, 전쟁의 상처를 주고 사과하지 않는 과거의 일본이 꼭 알아야 할 내용 같네요. 처음 읽었었을 때는 대단한 작품이란 생각에 한번에 흡입하듯 읽었다면, 두 번째는 찬찬히 평론가님과 여러분의 글과 함께 깊이 생각하며 읽었습니다. 처음에 제가 생각했던 것과 많이 달랐고, 그믐에서 만든 모임이 좋은 게 저처럼 급하게 많이 읽고 싶어하는 욕심많은 독자를 천천히 음미하며 읽게 해 준다는 강제성?에 있지 않을까요? 목요일부터 평론가님이 어떤 발제를 던져 주실지 기대됩니다. ^^
현재 미국이 반도체 산업 패권을 장악하고 중국과의 전략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대만과 한국에 압력을 행사하는 것도 @siouxsie 님 지적과 비슷한 경우인 것 같네요.
<주저하는 근본주의자>는 크게 두 가지 이야기로 나눠볼 수 있어요. 하나는 찬게즈가 언더우드샘슨에 입사하여 겪게 되는 사건, 다른 하나는 에리카와의 관계죠. 오늘과 토요일에는 에리카를 중심으로 이 소설을 다시 읽어볼까 합니다. 에리카를 대하는 찬게즈의 감정은 단순히 이성 관계로만 보기에는 힘든 부분들이 보입니다. 그런 까닭에 에리카를 향한 찬게즈의 마음은 사랑보다는 동경에 가까워 보여요. 에리카의 외모(옷차림), 성격, 가정환경, 경제적 계급 등은 여러모로 미국 상류층의 전형이기도 하거니와 찬게즈가 미국을 동경하는 까닭에 에리카는 찬게즈가 동경하는 미국적인 것들을 상징하는 인물로 읽히기도 하는 듯합니다. 이 책 말미 옮긴이의 말에서 역자는 Erika라는 이름을 America의 알레고리로 보기도 하고요. 분명 에리카는 미국의 상징이기는 합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더 말할 필요가 없을 듯해요. 하지만 이 인물을 이렇게만 볼 경우 이 여성 인물이 가진 독특한 개성은 다소 밋밋해져버리는 듯해요. 에리카가 가진 복잡성에 관해서는 좀더 많은 이야기가 필요할 듯합니다. 가령 에리카는 자신의 아버지와 다르게 찬게즈를 편견 없이 대하고, 어릴 적 사랑이었던 크리스를 오래도록 잊지 못하고 있는가 하면, 허구의 이야기인 소설을 쓰고자 하죠. 이런 모습들은 그녀를 미국 동부지방 상류층의 전형으로만 보기에는 어려운 부분이기도 하고 한 인간의 복잡한 내면을 잘 형상화하고 있는 것 같아요. 어쩌면 ‘악의 축’에 대항해 전쟁을 벌이는 국가 혹은 대중으로서 미국(인들)과 미국인들 개개인의 여러 다른 입장과 생각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상황을 상징할 수도 있겠네요. 오늘은 에리카의 성격을 보여주는 몇가지 장면들에 관해 각자의 생각을 나눠보면 좋을 것 같아요. 저는 이런 대목들이 눈에 띄었어요. 1) 그녀는 왜 크리스를 잊지 못하는가. 에리카는 찬게즈에게 끌리지만, 첫사랑인 크리스를 잊지 못해 결국 찬게즈와의 관계는 사랑으로 발전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이 책의 역자처럼 에리카를 미국의 상징으로만 볼 때, 에리카의 이런 면모는 단순히 과거 미국의 영광에 대한 향수 정도로 축소되는 듯해요. 대체 그 향수는 무엇을 향한 것일까요. 오히려 저는 9·11 테러로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미국인들이 느낀 상실감을 에리카의 이야기를 통해 전달하는 게 아닌가 싶어요. 그 상실감은 결코 치유될 수도 없고, 다른 무엇(여기서는 찬게즈)으로 대체될 수도 없지요. 여러분들은 에리카가 크리스를 잊지 못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2) 소설을 쓰는 에리카. 에리카는 크리스에 대한 상실감을 소설을 쓰는 일로 채워보려는 듯합니다. 찬게즈의 (당신을 향한) 말하기가 일종의 시위이자, 미국에 대한 제3세계인의 항변이라면, 에리카의 말하기(소설 쓰기)는 일종의 애도의 과정입니다. 에리카가 소설에 대해 찬게즈에게 거의 처음으로 말하는 장면을 보죠. “내가 꼭 조개 같아요. 날카로운 작은 조각을 오랫동안 내 안에 간직하고 있다가, 더 편안하게 만들려고 노력했죠. 그래서 천천히 그 조각을 진주로 만들었어요. 이제, 그것이 나오려고 해요. 그런데 나는 그게 나오면, 뒤에 틈이 남을 거라는 걸 알아요. 그것이 있던 자리에 틈이 남겠죠. 그래서 나는 그 조각을 좀 더 붙들고 있고 싶어요.”(49쪽) 사실 에리카 역시도 크리스를 그만 보내고 싶지만, 이후에 남을 텅빈 마음이 두려워서 그러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어요. 어쩌면 찬게즈가 그 빈 곳을 채워줄 수도 있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에리카가 입원해 있을 때 간호사를 통해 이런 말을 전해 들어요. “에리카에게 그 사람(크리스)은 충분히 살아 있었어요.”(119) 그리고 지금 에리카가 가장 만나기 어려운 사람이 찬게즈라는 말도 하죠. 그 이유는 이래요. “당신이 가장 현실적인 사람이라서 그래요. 당신은 그녀의 균형을 깨트려요.”(119) 찬게즈는 누구보다 미국적인 사고, 미국적인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에리카는 오히려 그와 다른 지점에 있는 인물은 아닌가 생각하게 돼요. 분명히 9·11 테러로 이후 많은 미국인들은 이슬람 국가들을 향한 분노보다 애도를 더 중요시하기도 했어요. 하지만 미국이라는 국가는 슬픔을 제대로 슬퍼하기보다는 곧장 어떤 대상을 지정해 분노를 표출했지요. 복수로 사랑하는 이를 잃은 상실감을 채울 수는 없지 않을까요. 이 과정이 올바른 애도의 과정이었는지 의문이 남아요. 이 밖에도 에리카의 첫 사랑인 크리스가 의미하는 바도 거시적인 차원에서 혹은 개인적인 차원에서 다양할 것 같아요. 에리카에 관해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것들을 함께 공유해 주셔요. 여러분들의 다양한 의견들이 궁금하네요! 우선 여러 이야기를 두서없이 나눠보고 토요일에는 찬게즈와 에리카의 관계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정리해보면 어떨까요.
저는 1)과 2)가 겹쳐지는 부분이 있어 함께 썼습니다. 작가님이 말씀하셨듯이, 에리카는 이국적이고 독특한 매력을 가지고 있어요. 그야말로 딱 미국 같은 느낌이죠. 하지만 크리스를 잃은 슬픔으로 인해 영혼의 대부분이 부서진 사람인 것 같고요. 저는 찬게즈뿐만 아니라 그 어느 누구도 크리스의 부재를 채우지도 치유할 수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비슷한 비극을 겪고도 각자가 극복해내는 과정은 천차만별이잖아요. 크리스가 떠난 이유가 아니라, 떠나고 싶어 크리스를 이용했다고 생각하는 제가 너무 속물적인가요? 조개 이야기에서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두려움을 표현한 것이겠죠. 하지만, 나중에 찬게즈가 소설을 읽었을 때, 그 내용은 본인이 생각하는 에리카의 모습과 너무 달라 충격에 빠집니다. 그런 것 같아요. 인간은 말로 표현하는 본인의 모습과 글로 표현하는 본인이 모습이 너무 다른 것처럼, 생각과 행동도 모순적이라고요. 그래서 에리카도 완전한 죽음이 아닌, 이도 저도 아닌 실종으로 작가가 처리?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제 결론은, 에리카는 찬게즈를 그만큼 사랑하지도 ‘필요로 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떠났다고 봅니다 . 모든 것이 은유는 아니지만, 둘의 관계는 미국을 동경하고 사랑하고, 어느 정도 (불평등하고 눈치만 보는) 관계를 갖고, 그녀(미국)가 떠났을 때 ‘죽어도 못 보내’라며 그리워하는 약소국(찬게즈) 같다고요.(확대해석이라면 죄송합니다. ㅎㅎ)
에리카가 찬게즈를 사랑하지 않았다, 라고 단정하기보다는 사랑의 양태, 질감 같은 것이 크리스를 향한 것과는 다르다고 보는 게 좋지 않을까요. 실상 크리스를 향한 에리카의 마음은 '노스텔지어'에 가깝죠. 그건 상실한 것에 대한 동경이라는 점에서 '현실'이라기보다는 '허구적 사실' 즉 그녀가 소설을 쓰는 일과 오히려 가깝습니다. 그리고 에리카 스스로도 인정하듯 찬게즈에 대한 마음은 현실적인 것이고요. 그녀가 두려워하는 것은 현실을 마주하는 것, 그로 인해 자신이 만들고 유지해온 환상(크리스)이 찬게즈로 인해 깨어지는 것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이 환상의 깨어짐, 즉 환멸의 순간은 그대로 911테러로 겪은 미국인들이 가진 환멸과도 이어지는 듯하네요. 크리스와 찬게즈를 각각 사랑의 이상적 대상과 현실적 대상이라고 본다면 에리카의 상징성도 좀 더 깊어지는 것 같아요. 이를테면 911테러 이후 무수하게 걸린 성조기, 그것들이 상징하는 조국에 대한 애국심 같은 것들을 다시 생각해볼 수 있는데요. 복수심에 눈이 멀어 자국의 모순을 보지 않으려는 맹목적인 애국심이 아니라, 제3세계를 향한 미국의 오리엔탈리즘적 행동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문제를 제기하는 것들도 자신의 국가를 사랑하는 일이 되지요. 그리고 에리카의 상실감을 표현하는 조개가 품은 진주에 대한 이미지는 말씀처럼 에리카의 불명확한 죽음 혹은 실종으로 인해 자연스레 찬게즈의 상실감으로 전이되는 듯해요. 이러한 상징성의 전이는 한편으로는 찬게즈가 미국인들의 상실감을 공감할 수 있는 접점이기도 한 것 같아요.
이야기를 하다보니 다소 모호해 보였던 에리카의 상징성이 더 뚜렷해지는 듯하네요. 조금 정리해보자면 단순히 에리카를 미국적 상징으로만 볼 때 제3세계 출신의 찬게즈에게 에리카는 아메리칸드림의 상징적 존재이지요. 에리카와의 사랑은 현재 살아있는 미국적인 것,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중심국가, 부와 계급에 대한 찬게즈의 욕망이며, 에리카와의 결혼을 꿈꾸는 것은 그 욕망의 실현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에리카는 이미 죽어버린 크리스로 상징되는 죽어버린 미국적인 것, 동물화되기 이전의 인간적인 것, 미국적인 것의 ‘노스탤지어’를 잊지 못하고 결국에는 자살을 선택하지요. 그런데 찬게즈가 겪는 정체성 혼란의 과정에 개입하는 에리카의 기시감에 주목해보면 작가가 에리카를 통해 이야기하려던 것의 의미를 좀 더 깊게 이해해볼 수 있을 거 같아요. 저는 이 인물을 둘러싼 찬게즈와 크리스의 관계에서 1989년 한국에 소개된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이 떠올랐어요. 우리에겐 '상실의 시대'로 더 유명하죠. 기즈키의 죽음으로 상처를 입은 나오코라는 인물의 상황은 에리카와 거의 유사한 상황에 있는 듯 보이며, 나오코를 향한 와타나베의 사랑과 에리카를 향한 찬게즈의 사랑도 거의 유사한 정념이 흐릅니다. 특히 에리카의 실종 이후 “그녀에게서 아무 연락이 없자, 나는 상실이라는 잔잔한 흐름에 휩쓸려 버렸어요.”(159쪽)라는 찬게즈의 고백은 다음과 같은 와타나베의 고백과 대응하는 듯해요. “기즈키가 죽었을 때, 나는 그 죽음에서 한 가지를 배웠다. 그리고 그것을 체념으로 받아들였다. 아니면 받아들였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이런 것이었다. ‘죽음은 삶의 반대편 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 내재해 있는 것이다.’ 분명히 그것은 진리였다. 우리는 살아가는 동시에 죽음을 키워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배워야 할 진리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나오코의 죽음이 내게 가르쳐준 것은 이런 것이었다. 그 어떤 진리도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을 치유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 어떤 진리도, 그 어떤 성실함도, 그 어떤 강인함도, 그 어떤 부드러움도 그 슬픔을 치유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그 슬픔을 실컷 슬퍼한 끝에 그것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배우는 길밖에 없으며, 그리고 그렇게 배운 무엇인가도 다음에 닥쳐오는 예기치 않은 슬픔에 대해서는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무라카미 하루키, 『상실의 시대』, 유유정 옮김, 문학사상, 386~387쪽.) 죽음의 상실감은 우리 인간의 삶에 늘 내재한 것이며, 그 상실감은 결코 치유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로부터 배우는 모든 것들이 앞으로 닥쳐올 또 다른 예기치 못한 상실에 무력하다는 것입니다. 그건 아마도 ‘상실감’이라는 추상적인 단어로 퉁쳐버릴 수 없는, 특수한 한 개인의 상실이기 때문이지요. 말하자면 크리스의 죽음, 기즈키의 죽음, 나오코와 에리카의 죽음은 단순히 죽음과 상실, 그로 인한 슬픔으로 환원되지 않는 각각의 고유한 슬픔으로 존재하고, 또 그 슬픔은 그러한 대상을 상실한 남은 사람 고유의 슬픔으로 존재하기 때문이겠지요. 우리는 살면서 필연적으로 여러 죽음을 목격하게 되지만, 그건 결코 단련되지 않는 슬픔입니다. 앞서 경험한 상실을 통해 무언가를 배운다 하더라도 그것이 이후 또 다른 누군가의 죽음을 경험할 때의 슬픔을 반감시켜 주지는 않으니까요. 그리고 우리는 전쟁, 재난, 그리고 테러로 누군가를 잃은 사건에 대해서도 같은 생각을 할 수 있겠지요. 그러므로 무수한 피해자를 낸 여러 사건들은 실제로 피해자의 수만큼의 상실로 결코 환원될 수 없으며, 오히려 측량이 불가능한 슬픔과 상실의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볼 때 모임 초반 제가 이 소설이 형식적 측면에서 테러 피해자의 슬픔과는 다른 관점에서 쓰였다고 언급하기는 했지만, 실은 911테러를 다룬 어느 소설보다도 그 같은 사건의 상실감과 슬픔에 대해 매우 깊이 있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네요.
평론가님이 노르웨이의 숲 얘기를 하시니 딱 그 느낌으로 다가오네요. ^^ 그리고 9.11 테러에 대한 상실감과 슬픔을 에리카를 통해 표현했다는 글을 읽으면서 9.11 테러의 상징성까지 접근하지 못한 저의 해석 능력 부족을 느꼈습니다. 사실 소설을 읽을 때 너무 제 기준에서 읽는 버릇을 버리고 싶고, 자꾸 제 감정선에 치우쳐져 전체적인 것을 보지 못하는 버릇을 고치고도 싶은데, 이번에도 평론가님 글을 보면서 많은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에리카가 찬게즈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의미는 아니었고요. ‘그렇게/충분히/모든 것을 극복할 만큼’ 사랑하지 않았다는 의미였어요. ^^ 제 설명이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오늘은 이 소설의 주제인 근본주의와 관련해서 소설의 범위를 조금 초과하여 이야길 나눠볼까합니다. 지난번에도 조금 이야길 했듯 본질은 철학의 오랜 주제이기도 합니다. 우선 본질 혹은 실체(substance)에 관한 가장 오래된 논의는 플라톤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헬라스어로 본질(ousia)은 일차적으로 어떤 사람에게 ‘있는 것’, 즉 ‘자산(property)’을 뜻합니다.(플라톤, 『에우티프론, 소크라테스의 변론, 크리톤, 파이돈』, 박종현 역주, 서광사, 295쪽 81번 각주 참고.) 그것이 어떤 존재가 그 존재이게끔 하는 가장 중요한 ‘자산’으로서 ‘본질’이라는 의미를 갖게 된 것인데, 이런 점에서 본질과 근본은 그 의미상 그리 동떨어진 개념은 아닙니다. 그리고 이 소설이 자본주의를 비판하기 위해 근본, 본질 같은 개념을 끌어오는 것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되고요. 플라톤에게 본질은 형상(eidos)과 이데아(idea)라는 개념으로 발전해요. 이를 위해 플라톤은 『국가』에서 유명한 동굴의 비유를 들고 있는데, 이데아란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는 사물 또는 존재의 ‘본모습’ 혹은 ‘참모습’으로 지성에 의해서나 보게 되는 것을 뜻합니다.(같은 책, 294쪽 80번 각주 참고.) 이후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체를 형상(eidos)과 질료(hylē)로 구분하였고, 이로써 철학적 의미의 존재 혹은 실체라는 것의 개념은 관념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의 종합이라는 이원론의 토대가 마련되죠. 철학의 테마가 인간 존재로 넘어온 근대철학에서도 이러한 이원론은 계속되는데, 인간 존재란 육체와 정신을 동시에 이르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이원론의 기저에는 데카르트의 코기토로부터 칸트의 오성과 이성의 발견, 헤겔의 절대정신에 이르기까지 물질적인 것(육체)에 대한 평가절하와 관념적인 것(정신)에 대한 평가절상이 항상 뒤따릅니다. 이 같은 관념론(idealism)의 오랜 전통이 의문시된 것은 19세기 말에 이르러서였고, 주지하다시피 칼 마르크스의 유물론적 역사관에 의해서였죠. 마르크스 역시 존재 혹은 실체라는 것을 이원적으로 본 것은 다르지 않으나 그 토대를 물질적인 것으로 보았어요. 요컨대 마르크스의 하부구조 결정론은 한 사회의 법제적, 정치적, 문화적 의식 형태라고 하는 것은 물질적인 것의 기반 위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나는데 이를 상부구조라고 보고, 물질적인 것, 다시 말해 경제적인 생산관계의 총체를 하부구조라고 본 것입니다. 이러한 유물론적 관점은 인간 존재를 보는 방식에도 영향을 미쳤어요. 20세기 초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실존주의(사르트르)의 유명한 명제도 이러한 흐름에 있다고 볼 수 있겠네요. 그러나 유물론의 대두가 관념적인 것의 구축(驅逐)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마르크스의 유물론적 변증법은 사회적 증상을 해석하기 위한 철학적 방법론을 뜻하지, 관념적인 것에 대한 평가 절하는 아닙니다. 오히려 이데올로기는 여전히 인간에게 중요하게 작용하고 있으며, 이 같은 관념적인 것이 인간의 구체적 삶을 구속하고 있음을 비판하기 위해서 물질적인 것의 상대적인 평가절상이 필요했던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는 명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엔 자연과학의 비약적인 발전도 기여했을 겁니다. 인간이 어떤 형상이나 관념적인 것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은 각 개인의 정체성이 선험적으로 주어지지 않는다는 의미이지, 인간에게 어떤 형상이나 관념적인 것, 다시 말해 정체성을 가질 수 없다는 뜻은 아니죠. 다만, 정체성은 선험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후천적으로 획득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을 인간이게끔 하는 것, 그리고 ‘나’를 ‘나’이게끔 하는 특성 혹은 본질은 물질적인 것, 다시 말해 우리의 육체에 존재하는 걸까요. 곧장 이런 의문들이 들고, 이 의문에 대한 답이 이 소설이 보다 본질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철학적인 질문인 듯해요. 이와 관련해 역사상 가장 악명 높은 수수께끼의 해답이 인간이었다는 것은 익히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수수께끼는 인간의 육체가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변화하는 것을 묘사하죠. 인간의 본질은 육체에 있는가. 수수께끼의 정답을 알아맞힌 건 다름 아닌 인간 오이디푸스입니다. 소포클레스의 희곡 <오이디푸스 왕>이 호메로스의 서사시와 다른 점은 그가 영웅이 아닌 인간이라는 점입니다. 서사시가 영웅들의 모험담이라면, 희곡, 특히 그리스 비극의 주인공은 반은 신인 영웅이 아니라, 고귀한 인간들의 이야기이죠. 오이디푸스는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맞힌 명석한 인간이었으나, 그로부터 시작된 비극적 사건들은 그를 인간적 고뇌의 순간으로 몰아붙입니다. 문학이야말로 인문학(the humanities) 그 자체임을 상기할 때, 문학의 본령은 인간의 본질에 대한 탐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이디푸스의 고뇌는 다름 아닌 ‘인간다움’에 대한 본질적 탐구인 셈이죠. 요컨대 인간다움은 사건(혹은 사태)의 ‘진실’을 알고자 하는 인간적 욕망과 은폐되었던 ‘진실’이 드러날 때 겪게 되는 인간의 필연적 고통과 관련된 것입니다. 이 소설에서도 찬게즈가 비로소 어떤 진실에 도달하게 되는 순간이 있죠. 그리고 그 순간 ‘주저하는’ 찬게즈는 미국식 자본주의의 근본주의에 대한 민낯과 이를 욕망하는 자기 자신의 모습에서 동요합니다. 말하자면 이 소설은 오래된 서구 인간관에 대한 현대적 이야기로도 읽어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다움’이란 무엇일까요. 프랑스에서 헤겔을 전공한 알렉상드르 코제브는 전후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중심국가인 미국과 일본을 둘러본 이후 ‘근대’라고 하는 역사적 시대의 종언을 고하며, 그 시대상을 스노비즘으로 요약한 바 있습니다.(아즈마 히로키,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 이은미 옮김, 문학동네, 148~151쪽 참고.) 요컨대 헤겔적 역사(여기서 역사적 의미의 근대 개념이 나옵니다) 이후의 인간은 동물화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 따르면 인간과 동물의 차이는 욕망과 욕구의 차이에서 비롯합니다. 다시 말해 인간은 욕망을 가지지만, 동물은 욕구만을 가진다는 것인데, 라캉은 욕망은 욕구(need)가 요구(demand)가 될 때의 틈에서 생겨난다고 해요. 즉, 욕구로서 필요로 하는 것을 언어화할 때에 잉여로서 생성되는 것이 욕망인데, 이 과정은 반드시 타자를 필요로 합니다. 가령 아기가 배가 고파 젖을 필요로 할 때에 울게 되는데 이것이 일종의 언어이자 요구인 셈이죠. 아기가 말을 배우면 보다 정확히 자신의 필요를 타자인 어머니에게 요구하게 되죠. 그런데 코제브가 본 미국과 일본의 소비사회는 그러한 욕망이 사라진 사회, 소비자의 욕구(need)를 사회적 소통 없이 즉각적으로 충족시켜주는 사회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물질적 교환은 자본주의의 화폐 물신에 의해 매우 추상화된 차원에서 이루어지죠. 사회적 소통이 어떤 식으로든 불가능해진 이 사회에서 이러한 현실은 노골적인 상태로 은폐되어 있습니다. 즉, 그것은 은폐되지 않은 상태로 은폐되어 있죠. 이 방식은 지젝이 지적했듯 냉소적 주체들에 의해 가능한 것인데, 그들은 그것이 이데올로기라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며, 역설적이게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이데올로기로서 그 효과를 다하죠.(슬라보예 지젝,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 이수련 옮김, 새물결, 61~65쪽 참고.) 이 냉소적 주체야말로, “재정(fund)에 관한 사항에만 신경을 쓰고 자산 가치를 결정하는 요인들의 진짜 본질(substance)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말라”고 하는 언더우드샘슨의 기본 원칙과 닮아있는 것 같습니다. 진짜 본질과 근본적인 것에서 그 어떤 의미론적 차이를 우리는 결코 찾아낼 수 없습니다. 그것이 다르다고 주장하는 것, 바로 저 문장에 그 어떤 역설적 함의를 인지하지 못하고 따르는 것, 그것이 바로 이 소설이 제기하는 진짜 근본주의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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