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웰다잉 오디세이 2026] 3. 이반 일리치의 죽음

D-29
“이보게 게라심, 얼마나 마음이 아픈가?” 표트르 이바노비치는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아 이렇게 말했다. “다 하나님의 뜻인걸요. 우리 모두 언젠가는 가야 할 길이지요.” 게라심이 농부답게 희고 고른 치아를 드러내며 대답했다. 그러더니 한창 기운 좋게 일하는 사람처럼 현관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마부를 불러 표트르 이바노비치를 마차에 태우고는, 남은 일을 마저 해야 한다는 듯 다시 현관으로 뛰어갔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 레프 톨스토이 지음, 이순영 옮김
사람들이 저녁 식사를 하고 돌아간 뒤 이반 일리치는 혼자 남아 이런저런 생각에 잠겼다. 그의 인생에 독이 스며들었고 이 독은 다른 이들의 삶에까지 번져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 독은 약해지기는커녕 점점 더 강해져 그의 몸 전체에 깊숙이 파고드는 것 같았다. ……… 이반 일리치는 파멸의 끝자락에 매달려 자신을 이해하고 가엾게 여겨주는 사람 하나 없이 외롭게 살아갔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 레프 톨스토이 지음, 이순영 옮김
아내와 함께 있는 초상화를 가져다가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과 비교해보았다. 그 차이는 어마어마했다. 이번에는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 올리고 두 팔을 살펴본 다음 다시 소매를 내리고는 소파에 앉았다. 그의 얼굴이 밤보다 더 까매졌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 레프 톨스토이 지음, 이순영 옮김
‘죽음이라. 그래 죽음이란 말이지. 그런데도 저들은 모르고 누구 하나 알려고 하지도 않고 나를 딱하게 여기지도 않는구나. 그저 노는 데만 정신이 팔려 있어. (문 저쪽 멀리에서 사람들의 노랫소리와 반주 소리가 간간이 들려왔다.) 저들도 다를 게 없지. 언젠간 죽을 거야! 바보들 같으니! 내가 먼저 가고 저들은 나중에 가는 것일 뿐, 누구도 그 길을 피할 수 없는 거야! 그런데도 마냥 즐거워하는구나. 저 짐승들!’ 밖에 있는 사람들을 향한 미움 때문에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견딜 수 없이 고통스럽고 비참했다. 모든 사람이 이처럼 끔찍한 공포를 겪어야 하는 운명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카이사르는 인간, 보통의 인간이므로 이 논법이 정확하게 들어맞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카이사르도 아니고 보통의 인간도 아니었다. 그는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다른 사람들과는 완전히, 완전히 다른 존재였다 ……. 카이사르는 죽을 운명을 타고난 인간이었고, 그러니 죽는 게 마땅했다. 하지만 나만의 생각과 감정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나, 바냐, 이반 일리치는 전혀 그렇지 않다. 내가 죽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건 너무도 끔찍한 일이다. 이반 일리치는 생각했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 레프 톨스토이 지음, 이순영 옮김
이반 일리치의 외로움이 억울함이 안타깝습니다.결국은 혼자서 통과해야하는 것이라고 하는걸까요.
우리는 모든 순간에 모두가 다른 곳에 서있습니다. 처음에는 죽은 이반 일리치와, '여전히 카드게임이 재미있는 죽지 않은,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지 않는' 동료들의 입장 차이에 대해서, 후반부에는 자신이 죽어간다는 걸 알기에 죽음과 고통 외 다른 생각을 할 수 없던 이반 일리치와, 의사를 통해 이반의 고통과 죽음을 지연시킬 수 있다고 노력하는 표도르브나, 그리고 '죽어가지 않는' 표도르브나에 대한 이반의 짜증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죽어가지 않는 가까운 사람을 보는 게 자신의 죽음에 대한 생각을 증폭하기 때문인걸까요. 죽어가는 이반은 죽음을 어떤 사건이 아닌 당연히 거기 있는 어떤 것으로 받아들이는 게라심과 있을 때에만 조금 더 편했어요. 죽어가고 있다거나, 죽음을 거부할 수 있다는 생각 자체를 희석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었던 거 같습니다. 죽음에 사로잡힐 수 밖에 없었던 당사자 이반, 그리고 다양한 욕망과 재미로 살아가는 주변 관찰자 가족과 동료들. 누구의 잘잘못에 대한 생각보다는 '그래, 각자의 위치에서 인생을 사는 것 뿐'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화제로 지정된 대화
막간 상식 : 5장에서 이반의 아내는 이반을 '장'이라고 부릅니다. 발음도 비슷하지 않은데 왜 '장'이라고 부르는지 궁금해서 찾아보았는데 이반과 장은 이름의 뿌리가 같다고 나오네요. 이 이름의 시초는 히브리어인 '요하난(Yohanan)'입니다. "여호와(하나님)는 자비로우시다"라는 뜻으로 성경 속 '세례 요한'이나 '사도 요한'의 이름이 기독교 전파와 함께 유럽 전역으로 퍼지면서 각 나라의 언어에 맞게 변형되었다고 합니다. 언어마다 형태는 다르지만, 모두 같은 뿌리에서 나온 형제 이름들입니다. 러시아어의 이반 (Ivan), 프랑스어의 장 (Jean), 영어의 존 (John), 독일어의 한스 (Hans) / 요하네스 (Johannes) 스페인어의 후안 (Juan), 이탈리아어의 조반니 (Giovanni)가 모두 같은 이름들이라고 나옵니다.
저혼자 눈치를 못챈겁니까..'장'이라니..허허..그래서 다시 확인했는데..진짜 '장'!! 짱, 고맙습니다.
'좋아요' 버튼이 있다면 백만개 누르고 싶네요. 러시아가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올 때 모델로 삼았던 나라가 프랑스라고 들은 적이 있어요. 러시아 귀족사회에서는 프랑스풍이 유행이었다고도요. 그래서 '장'이군요. 이반(일리치)과 장(자크 루소), 한스(안데르센)와 후안(후안 미로,)이 같은 이름이라니... (첫 번째로 생각나는 성들을 붙여보았어요)
이반의 아내가 이반을 장이라고 부르는 것이 속물근성과 허영심을 나타내는 호칭으로 느껴졌습니다. 남편이 죽을듯한 고통에 시달리는데, 공연을 우아하게 보러가며 '장'이라고 부르는 것이 공감이 안되는 부분이기도 하거니와 이 역시 사회적으로 인정받았지만,결국 죽음앞에 평범하고 주변인들에게 조차 인정받지 못하는 삶의 허상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오 저도 비슷하게 생각했어요. 지금 체홉 작들도 같이 읽는 중인데, 그 시절 프랑스는 부와 교양의 상징?같은 역할을 했던 거 같더라고요. 가장 고통스럽고 외로운 그 순간에 장이라고 부르다니, 잔인한 묘사라고 생각했어요. 이반과 아내의 허영 가득한, 서로에 대한 사랑보다 그 구조를 더 중요하게 생각한 그 삶이라면 반대로 아내가 아팠더라도 이반 역시 외부로 보여지는 활동을 했을거란 생각이 들어요. 허상이지만 그게 ‘가족‘의 수준을 유지하기 위한 거 였을지도요..
맞아요. '3장'에 나오는 것처럼, 아내와의 결혼이 자신의 만족감을 채우면서, 동시에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옳다고 여기는 일이라고 여기는 생각에서부터 이반일리치의 죽음에 대한 가족의 의미는 이미 이렇게 끝나리라 결론지어진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괜히 미안할때 다정해지는 그런 느낌인거군요!! 우와 몰랐습니다 ㅎㅎ
저도 이반 일리치의 병명이 궁금해 검색을 해 보았습니다. 이반 일리치의 통증이 왼쪽 복부인 점으로 보아 맹장염은 아닌 것 같습니다. 발병 후 '입에서 악취가 나는'것 같은 증상은 췌장이 제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해 소화불량이나 구강 건조로 인함이 아닐까 싶습니다. 무엇보다 앉은 자세에서 다리를 높이 들면 통증이 완화되는 것 같다는 것으로 짐작해 보면 췌장에 문제가 생겼다는 건 알 수 있겠습니다. 발병이 시작되고 사망까지의 기간이 육개월을 조금 넘긴 것으로 보아 발병 당시 이미 말기 췌장암이 아니었을까 추측합니다. 1880년대에는 췌장암에 대한 진단도 치료도 불가능하던 시기라고 합니다. 증상 완화를 위한 처방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고 봅니다.
오호 췌장암이라면 현대에도 치료가 힘든 암중의 하나 아닙니까. 저자가 신장과 맹장 이야기만 하고 췌장 이야기를 하지 않은 걸 보면 말씀하신 것처럼 당시엔 이 질환의 존재 자체를 몰랐던 것 같습니다.
이건 맹장이나 신장의 문제가 아니라 삶 그리고… 죽음의 문제야. 그래, 삶은 여기에 있다가 이제 서서히 떠나가고 있어. 그리고 난 그걸 막을 수 없는 거야. 그래, 이렇게 나 자신을 속여봐야 뭐하겠어? 내가 죽어가고 있다는 걸 나만 빼고 다들 분명히 알고 있잖아.
이반 일리치의 죽음 5장, 레프 톨스토이 지음, 이순영 옮김
나도 죽고, 너도 죽고, 모두가 죽는다는 이 절대불변의 진리가 나에게 적용될 때는 왜이렇게 인정하는 것이 어려운가 생각이 들었어요. 몸이 이 정도로 아파도 질병과 죽음을 이제야 연관지을 수 있다는 것이 인간의 모습 같기도 하고요.. 저 역시도 이반과 같은 상황이 되었다한들 뭐가 다를까.. 하는 맘이 듭니다.
맞아요. ! 저는 죽음에 관한 책은 처음 읽어보는데, 죽음에 관한 책이든 사람이든, 무엇을 통해서든 많이 접하게 될 수록 익숙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전엔, 죽음이 익숙해져도 되나 하는 괜한 죄책감이 생길 때도 있었는데, 농부 게라심의 생각처럼, 모두가 언젠가 죽을텐데 당연한 수순이라 생각하면 계속해서 익숙해지는 것도 좋은 것 같습니다. 항상 죽음을 곁에 둬야 우리 삶도 그만큼 빛나지 않을까요
그녀는 남편에게 아무런 반박도 하지 않고 서둘러 식사를 끝냈다. 프라스코비야 표도로브나는 자신이 잘 참아낸 것에 대해 대단한 자부심을 느꼈다. 그리고 남편이 포악한 성격을 지녔고 남편 때문에 자신의 인생이 불행해졌다고 결론을 내린 그녀는, 이제 자기 자신이 불쌍해지기 시작했다. 그녀가 자신을 불쌍하게 여기면 여길수록 그녀는 남편이 미워졌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 p76,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박은정 옮김, 앤서니 브릭스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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