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웰다잉 오디세이 2026] 3. 이반 일리치의 죽음

D-29
엉엉 울고 싶고, 사람들이 자기를 위해 울어 주고 어루만져 주길 바랐던 이반 일리치는 법원 동료인 셰베크가 찾아오자 울음을 터뜨리고 다독임을 받기는커녕 곧장 진지하고 엄격하고 고뇌에 잠긴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관성에 따라 상소심 결의에 대한 견해를 밝히고, 그것을 집요하게 고수했다. 이 거짓, 주변 사람들과 자신의 거짓이야말로 이반 일리치의 마지막 나날을 독살하는 가장 무서운 독이었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 레프 톨스토이 지음, 이순영 옮김
산을 오른다고 상상하지만 사실은 꾸준히 산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그랬다. 사회 통념으로 보기에 산을 오르고 있었지만 정확히 그만큼 삶은 내 밑으로 떠내려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 레프 톨스토이 지음, 이순영 옮김
의사는 자신의 그런 표정이 이 집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한 번 얼굴에 밴 그 표정은 이미 영원히 떼어낼 수 없는 그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 p117,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박은정 옮김, 앤서니 브릭스 서문
<이건 맹장 문제도 아니고 신장 문제도 아니야. 이건 삶, 그리고…… 죽음의 문제야. 그래, 삶이 바로 여기에 있었는데 자꾸만 도망가고 있어. 나는 그걸 붙잡아 둘 수가 없어. 그래. 뭣 하러 나를 속여? 나만 빼고 모두들 내가 죽어 가고 있다는 걸 알고 있어. 남은 시간이 몇 주냐, 며칠이냐, 그것만이 문제야. 어쩌면 지금 당장일 수도 있어. 빛이 있었지만 이제 캄캄한 어둠뿐이야. 나도 여기 있었지만, 곧 그리로 가겠지! 그런데 그게 어디지?> 온몸에 소름이 쫙 끼치고 숨이 멎었다. 심장이 벌렁벌렁 뛰는 소리만 들렸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광인의 수기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석영중.정지원 옮김
<내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뜻이지? 아무것도 없다는 건가? 내가 없어진다면 나는 어디에 있게 되는 거지? 정말 죽는 걸까? 안 돼, 싫어.> 그는 벌떡 일어나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여기저기 더듬으며 초를 찾다가 초와 촛대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는 다시 베개 위로 벌렁 드러누웠다. <불은 켜면 뭐해? 다 마찬가진걸.> 두 눈을 부릅뜨고 어둠을 응시하면서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죽음, 그래, 죽음, 저들은 아무도 몰라. 알고 싶어 하지도 않아. 날 불쌍하게 여기지도 않아. 그냥 놀 따름이야(깔깔거리는 소리와 음악 소리가 문 너머에서 어렴풋이 들려왔다). 저들도 똑같아, 똑같이 죽게 될 거라고. 멍청이들. 내가 조금 먼저 가고, 저들은 조금 늦게 갈 뿐, 결국엔 다 마찬가지야. 그런데도 저렇게 좋을까, 짐승 같은 것들!> 울화가 치밀어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참을 수 없이 힘들고 고통스러웠다. 세상 모든 인간이 이토록 끔찍한 공포를 겪어야 하는 운명을 타고났을 턱이 없다. 그는 벌떡 일어났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광인의 수기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석영중.정지원 옮김
그렇다, 카이사르는 분명히 필멸의 인간이니 그가 죽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지만 나, 바냐, 수많은 감정과 생각을 가진 이반 일리치에게 그건 전혀 다른 문제다. 내가 죽어야 한다는 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건 너무 끔찍한 일이다. 그는 그렇게 느꼈다. <내가 만약 카이사르처럼 죽어야 한다면 나도 알고 있었을 거야. 내 안의 어떤 목소리가 말해 주었을 테니까. 하지만 그런 목소리 따위는 없었어. 나도, 내 친구들도 모두 우리가 카이사르와는 다르다고 알고 있었어. 그런데 이제서 이게 뭐냔 말이야!> 그는 계속 혼자서 중얼거렸다. <이럴 수는 없어. 이럴 수는 없다고. 그런데 이럴 수가 있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이걸 어떻게 이해하란 말이냐고?>
이반 일리치의 죽음.광인의 수기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석영중.정지원 옮김
근래 들어 이반 일리치는 자신이 직접 꾸민 응접실에 부쩍 자주 나오고는 했다. 이 응접실은 그가 사다리에서 떨어졌던 곳이다. 그때 다친 옆구리에서 병이 시작되었으니까 그는 결국 목숨을 바쳐 응접실을 꾸며 놓은 꼴이었다. 그 생각을 하면 쓴웃음이 절로 나왔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광인의 수기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석영중.정지원 옮김
생생하고 활기차며 살집이 좋은 의사는 쾌활한 표정으로 뭐, 별로 겁내실 거 없습니다, 이제 우리가 다 잘 처리해드리지요, 하고 말하는 것 같았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 레프 톨스토이 지음, 이순영 옮김
통증으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은 타인의 눈길과 표정에도 극도로 예민하게 반응하는 걸 자주 보았습니다. 이반도 아픈 상황에서 끊임없이 자신과 남을 비교하는 모습을 보이는데요. 의사가 오기 직전에 옷을 갈아입으면서 자신의 몸이 얼며나 형편없는지 한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고 의사가 들어올 때 자연스럽게 자신의 모습과 비교합니다. 의사는 그냥 가만히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아프면 모든 이들이 ‘생생하고 활기차다’고 생각할 수도 있어요. 저도 몸이 아파 누워있을 때 집안 식구들이 웃고 떠드는 게 그렇게 거슬리더라구요. 나는 아파죽겠는데 뭐가 좋다고 웃는거지? 나 이렇게 힘들어하는 거 안 보여? 라고 외치고 싶어지구요. 이반도 그런 심정이지 않았을까 상상해봅니다.
3월 17일(화) 오늘은 9장을 읽어보았습니다. 참. 똘스토이는 이반 일리치를 죽이지도 않고 이렇게 다 죽어가는 상태로 살려두고 참 많은 말을 하는 구나. 싶었습니다. 지루했던 것은 전혀 아니고 흥미로웠습니다. 특히 [ 다리를 내려놓고 팔을 베고 옆으로 누웠다 ], 에서 [ 어린애처럼 엉엉 울기 시작했다 ], 로 이어지는 부분에서 너무나 그의 모습이 잘 그려져서 하마터면 같이 엉엉 울 뻔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장에, [ 대답은 없을 것이고 있을 수도 없다는 것에 더욱 눈물이 났다. ](하느님에게 하소연을 하던 끝에) 부분을 보았는데, 저는 여기서 신을 믿는다는 건 어쩌면 인간이 느끼는 이 (지금 이반 일리치가 느끼고 있을) 외로움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일종의 대책, 전략, 심하게는 몸부림이라고도 볼 수 있겠구나 싶었습니다. 그리고 아래로 조금 내려가면 '네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 하고 영혼의 목소리가 이반 일리치에게 묻는데, 이 부분에서 '아. 스토너 하고는 다른 영혼이 이반 일리치한테는 살고 있었구나. 이거. 혹시 러시아 스타일인가.' 싶었는데요. <스토너>의 마지막 부분 - 스토너가 죽음으로 들어가는 장면 - 에서 스토너의 영혼은 스토너에게 '넌 무엇을 기대했나?' 이렇게 묻거든요. [ 넌 무엇을 기대했냐 ], 랑 [ 너한테 필요한 건 뭐냐 ], 랑 저는 좀 다르다고 생각했습니다. 인생을 필요에 의해서 정의 내리려고 한다면 조금 어렵겠다 싶었거든요. 꼭 필요해서 무언가를 좇는 게 아닐 때가 있잖아요. 조금 추상적이긴 하지만. 그리고 몇 장 뒤로 가면, '난 정해진 대로 그대로 다 했는데 어떻게 잘못될 수가 있단 말인가?' 하고 이반 일리치가 스스로한테 말하는 것처럼 썽을 내는 장면이 나오는데 저는 여기서 조금 조소하였습니다. 이유인즉슨, '정해진 대로' 했으니 그렇지. '정해진' 대로. 바보 같은 늠. 그래서 이반 일리치가 조금 멍청해 보이기도 했습니다. 아무튼 이반 일리치는 9장에서 혼자 좀 혼란스러워하네요. 이쯤에서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를 한번 읽어보는 게 어떻겠니, 하고 말을 걸어보고 싶은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럼 다음에 또 보아요. 모두 수고하세요 :)
저도 읽으면서 <스토너> 생각이 났어요. 전에 남겨주셨던 것처럼 주인공이 아내와의 관계에서 겪는 혼돈이 비슷해보였답니다 하하. 마지막 죽음에 다다른 장면은 생각하지 못했는데 [ 넌 무엇을 기대했냐 ], 랑 [ 너한테 필요한 건 뭐냐 ] 이 부분 흥미롭네요. 비슷한 듯 다른 듯 하구요.
스토너내셔널 북 어워드 수상작가 존 윌리엄스의 장편소설. 2013년 영국 최대의 체인 서점인 '워터스톤' 올해의 책으로 선정된 도서이다. 1965년 미국에서 발표된 후, 오랜 시간 동안 독자들에게 잊힌 <스토너>는 유럽 출판계와 평론가, 독자들의 열렬한 반응을 이끌어내며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맞습니다! 도리님도 저의 아이디어에 공감해주셔서 기쁘네요. ^^
그때부터 이반 일리치는 종종 게라심을 불러 그의 어깨에 자신의 두 발을 올려놓게 하고는 얘기 나누는 걸 좋아했다. 게라심은 꺼리거나 힘들어하는 기색이 전혀 없이 늘 선량한 표정으로 선선히 이 일을 해서 이반 일리치를 감동시켰다. 이반 일리치는 다른 사람들의 건강과 힘, 삶의 활력을 볼 때면 마음이 상했다. 그런데 게라심의 힘과 활력을 보면서는 괴롭다는 생각이 들지 않고 오히려 위로가 되었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 레프 톨스토이 지음, 이순영 옮김
우리 모두 언젠가는 죽습니다. 그러니 이런 수고 좀 하는 게 무슨 대수겠습니까?” 그러니까, 자신은 죽어가는 사람을 위해 수고하는 것이므로 전혀 힘들지 않으며 언젠가 자기가 떠날 때가 되면 다른 누군가가 자기를 위해 그런 수고를 해주길 바란다고 얘기하는 것 같았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 레프 톨스토이 지음, 이순영 옮김
<너한테 필요한 게 무엇이냐?> 그가 맨 처음 들은 가장 확실하고 분명한 소리를 인간의 언어로 표현하자면 이랬다. <필요한 게 뭐냐고? 무엇이 필요하지?> 그는 스스로에게 되물었다. <무엇이냐고? 더 이상 고통받지 않는 것. 사는 것.>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리고 그는 통증조차 못 느낄 정도로 온 정신을 집중하여 귀를 기울였다. <사는 것이라고? 어떻게 사는 걸 말하는 거지?> 영혼의 목소리가 물었다. <그래, 사는 것. 예전처럼 편안하고 행복하게.> <예전엔 그렇게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았어?> 목소리가 물었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광인의 수기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석영중.정지원 옮김
이 생명력 없는 업무, 그리고 돈 걱정, 그렇게 보낸 1년, 2년, 그리고 10년, 20년. 언제나 똑같은 삶. 살면 살수록 생명은 사라져 가는 삶.
이반 일리치의 죽음.광인의 수기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석영중.정지원 옮김
죽은 것만 같은 공직 생활과 돈 걱정들, 그렇게 일년이 가고 이년이 가고 이십년이 갔다. 언제나 똑같은 생활이었다. 하루를 살면 하루 더 죽어가는 그런 삶이었다. 한 걸음씩 산을 오른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한 걸음씩 산을 내려가고 있었던 거야. 그래, 맞다. 세상 사람들은 내가 산을 오른다고 보았지만 내 발밑에서는 서서히 생명이 빠져나가고 있었던 거야..... 그래, 결국 이렇게 됐지. 죽는 일만 남은 것이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 p.103,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이강은 옮김
도대체 왜 이렇게 된 거지? 무엇 때문이지? 이럴 수는 없어. 삶이 이렇게 무의미하고 추악할 수는 없는 것 아닐까? 삶이 이처럼 추악하고 무의미한 것이라면, 왜 죽어야 하며 그것도 이처럼 고통스럽게 죽어야 하는 걸까? 분명 뭔가 잘못된 거야.
그래, 모든 것이 잘못되었던 거야. 하지만 상관없어. 올바른 것을 하면 되는 거니까. 그런데 ‘올바른 것’이 대체 뭐지?” 그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묻고 나서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 레프 톨스토이 지음, 이순영 옮김
비록 자신의 삶이 완전하지 못했다 해도 아직은 바로잡을 수 있다는 걸 알았다. 그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올바른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침묵하며 귀를 기울였다. 바로 그때 누군가 그의 손에 입을 맞추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눈을 뜨고 아들을 바라보았다. 아들의 모습이 안쓰러웠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 레프 톨스토이 지음, 이순영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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