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완서 작가님의 <그 많던 싱아~>, <그 산이 정말~> 혼자 읽어볼게요.

D-29
개성으로 수학여행 떠나는 날 엄마는 경성역까지 배웅을 나와서 혹시 개성역에 누가 마중을 안 나오더라도 너무 섭섭해하지 말고 잘 놀다 오라고 타이르고 들어갔다. 제발 아무도 안 나왔으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꼭 나올 것 같아 마음이 영 개운치 않은 채 기차가 개성역에 도착했다. 육학년은 총 다섯 반이었다. 개성역 앞 광장에 반끼리 줄을 서서 인원을 점검할 때였다. “완서야, 완서야.” 하고 내 이름을 크게 부르는 소리가 났다. 저만치서 할머니가 무법자처럼 아이들 사이를 마구 헤집고 다니면서 목청을 높이고 있었다. 숙모도 아니고 할머니였다. 어찌나 창피한지 잠시 꺼질 수 있는 거라면 꺼지고 싶었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박완서 X 이옥토 리커버 특별판) - 유년의 기억 박완서 지음
주인공 이름 처음 등장! 작가님 이름!
그 후에도 엄마는 두고두고 오빠 몰래 그 일을 심란해했다. 오빠가 하는 일을 그만두게 하려고 집요하게 극성을 떨 때하고는 딴판으로 문득문득 후회하는 기색이랄까 미련 같은 눈치까지 보인 적도 있었다. 자식의 안전을 위해 법에서 금하는 불온한 사상을 두려워하면서도, 자식이 위험을 무릅쓰고 하는 일이니만치 뭔가 위대한 일이라고 믿고 싶은, 가장 우리 엄마다운 이중성이었을까?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박완서 X 이옥토 리커버 특별판) - 유년의 기억 박완서 지음
그러나 엄마는 의외로 안색에 단박 불쾌한 빛을 드러내면서 나를 꾸짖으셨다. 자기가 삼십에 과부가 됐을망정 누구한테도 장차 일부종사를 어찌할까 싶은 걱정이나 의심은 물론 동정도 받아 본 적이 없거늘 딸자식한테 별 해괴망측한 소리를 다 듣는다는 진노였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박완서 X 이옥토 리커버 특별판) - 유년의 기억 박완서 지음
일부종사 一夫從事 한 남편만을 섬김. 또는 그 도리.
그러고 나서 다시는 엄마의 개종을 권할 엄두를 낸 적이 없건만 엄마 또한 그 후 다시는 내 앞에서 기독교 계통의 책을 보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불교를 믿으면서 예수교 책에 흥미를 갖는 게 자식한테 처신을 잃는 짓이라고 생각하시는 게 뻔했다. 참으로 지겨운 엄마였다. 그러나 육친이란 싫어하는 면을 더 닮게 마련인가. 엄마가 자식한테일수록 처신을 잃는 짓을 극도로 경계했듯이 나 또한 엄마에게 처신을 잃지 않으려고 얼마나 안간힘을 썼던가.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박완서 X 이옥토 리커버 특별판) - 유년의 기억 박완서 지음
나만 보았다는 데 무슨 뜻이 있을 것 같았다. 우리만 여기 남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약한 우연이 엎치고 덮쳤던가. 그래, 나 홀로 보았다면 반드시 그걸 증언할 책무가 있을 것이다. 그거야말로 고약한 우연에 대한 정당한 복수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박완서 X 이옥토 리커버 특별판) - 유년의 기억 박완서 지음
삶에는 종종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고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에야 우리는 그 일이 생애 전체에 미친 영향에 대해 겨우 짐작해 볼 수 있을 따름이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박완서 X 이옥토 리커버 특별판) - 유년의 기억 지금 박완서를 읽으며, 정이현 소설가, 박완서 지음
일단 문장 수집부터 정리하자.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시작!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박완서 X 이옥토 리커버 특별판) - 성년의 나날들한국 문학의 거목, 박완서 작가의 대표작인 ‘소설로 그린 자화상’ 연작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와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가 리커버 특별판으로 독자들을 찾아왔다. ‘2025서울국제도서전’을 뜨겁게 달군 사진작가 이옥토의 작품으로 표지를 갈아입고 장정을 새롭게 꾸며, 그 치열하고도 아름다운 기억의 공간을 지금 이곳으로 되살린다.
거기 그 동산 말예요. 그 예쁜 동산을 꼭 그렇게 만들어야 했을까요? 운동할 데가 그렇게 없나요? 라고. 그러나 아무도 호응을 안 한다. 거기가 동산이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도 있다. 그 예쁜 동산을 어쩌면 그렇게 감쪽같이 잊어버릴 수가 있을까? 아니면 일부러 시침을 떼는 걸까. 그 동산이 없어져서 잘된 사람도 없지만 아쉬운 사람도 없는데 웬 걱정이냐는 투다. 불도저의 힘보다 망각의 힘이 더 무섭다. 그렇게 세상은 변해 간다. 나도 요샌 거기 정말 그런 동산이 있었을까, 내 기억을 믿을 수 없어질 때가 있다. 그 산이 사라진 지 불과 반년밖에 안 됐는데 말이다. 시멘트로 허리를 두른 괴물은 천년만년 누릴 듯이 완강하게 버티고 서 있고, 그 밑에 묻힌 풀뿌리와 들꽃 씨는 다시는 싹트지 못할 것이다. 내년 봄에도 후년 봄에도, 영원히.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박완서 X 이옥토 리커버 특별판) - 성년의 나날들 박완서 지음
내가 살아 낸 세월은 물론 흔하디흔한 개인사에 속할 터이나 펼쳐 보면 무지막지하게 직조되어 들어온 시대의 씨줄 때문에 내가 원하는 무늬를 짤 수가 없었다. 그 부분은 개인사인 동시에 동시대를 산 누구나가 공유할 수 있는 부분이고, 현재의 잘사는 세상의 기초가 묻힌 부분이기도 하여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펼쳐 보인다.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박완서 X 이옥토 리커버 특별판) - 성년의 나날들 박완서 지음
‘우리가 그렇게 살았다우.’ 이 태평성세를 향하여 안타깝게 환기시키려다가도 변화의 속도가 하도 눈부시고 망각의 힘은 막강하여, 정말로 그런 모진 세월이 있었을까, 문득문득 내 기억력이 의심스러워지면서, 이런 일의 부질없음에 마음이 저려 오곤 했던 것도 쓰는 동안에 힘들었던 일 중의 하나다.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박완서 X 이옥토 리커버 특별판) - 성년의 나날들 박완서 지음
우리 식구는 다 한방에서 잤다. 군불을 따로 때기도 번거로웠지만 무슨 일을 당해도 같이 당해야 한다는 결속감 때문이기도 했다. 오빠가 맨 아랫목, 다음에 엄마, 다음엔 어린것을 양쪽에 눕힌 올케, 그리고 맨 윗목에서 내가 잤다. 윗목에 불만이 있는 건 아니었다. 석탄을 실컷 땐 안방은 고루 잘 더워서 되레 답답할 지경이었다. 더 숨이 막히는 것은 우리 식구의 끈끈한 결속력이었다. 나는 몰래몰래 모반을 꿈꾸었지만 돌파구는 없었다.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박완서 X 이옥토 리커버 특별판) - 성년의 나날들 박완서 지음
모반 3 謀反 1. 배반을 꾀함.
나도 매번 모반을 꿈꿨다. 계속 벗어나려고만 했다. 보호막이라고는 생각도 못하고 억압이라고만 느꼈다. 이런 내가 가정을 꾸릴 수 있을지!
여염집이었지만 동 인민위원회 간판도 그럴싸하게 붙였고, 마루에는 책상 걸상도 마련하고 난로도 놓고 기름종이를 긁어서 잉크로 미는 등사판까지 어디서 한 대 갖다 놓아 그런대로 인민위원회다운 구색을 갖춰 갔지만 그중 가장 안 어울리는 게 위원장이었다.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박완서 X 이옥토 리커버 특별판) - 성년의 나날들 박완서 지음
여염집 閭閻- 보통 백성의 살림집. 또는 보통 사람들이 살림하며 사는 집. (=민가, 민호, 여가2, 여염가, 여각2)
먹을 것에 대한 나의 이런 지칠 줄 모르는 츱츱함이 비단 이불을 욕심내는 것보다 얼마나 더 고상한 건지는 몰라도 빨리, 그리고 무사히 이 지경을 벗어나고 싶었다.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박완서 X 이옥토 리커버 특별판) - 성년의 나날들 박완서 지음
츱츱하다 너절하고 염치가 없다.
나는 강씨가 그 정도로 자기의 속내를 드러내 보인 게 얼마나 기쁘고 반가운지 몰랐다. 전혀 예상을 못했던 일이었다. 오랜만에 사람 같은 사람을 만난 기분까지 들었다. 잘났다는 뜻이 아니라 적당히 못나서 좋았다. 사람의 생각 속에는 좌우의 이념보다는 거기 속할 수 없는 생각들이 훨씬 더 많은데, 누굴 만나면 우선 저 사람 속이 흴까 붉을까부터 분간해야 하는 관습화된 심보가 부드럽게 누그러지는 것 같았다. 그와 같은 사람이 살아 내기에는 그래도 남쪽이 나을 거라는 걸 어떻게 알아듣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박완서 X 이옥토 리커버 특별판) - 성년의 나날들 박완서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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