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완서 작가님의 <그 많던 싱아~>, <그 산이 정말~> 혼자 읽어볼게요.

D-29
‘우리가 그렇게 살았다우.’ 이 태평성세를 향하여 안타깝게 환기시키려다가도 변화의 속도가 하도 눈부시고 망각의 힘은 막강하여, 정말로 그런 모진 세월이 있었을까, 문득문득 내 기억력이 의심스러워지면서, 이런 일의 부질없음에 마음이 저려 오곤 했던 것도 쓰는 동안에 힘들었던 일 중의 하나다.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박완서 X 이옥토 리커버 특별판) - 성년의 나날들 박완서 지음
우리 식구는 다 한방에서 잤다. 군불을 따로 때기도 번거로웠지만 무슨 일을 당해도 같이 당해야 한다는 결속감 때문이기도 했다. 오빠가 맨 아랫목, 다음에 엄마, 다음엔 어린것을 양쪽에 눕힌 올케, 그리고 맨 윗목에서 내가 잤다. 윗목에 불만이 있는 건 아니었다. 석탄을 실컷 땐 안방은 고루 잘 더워서 되레 답답할 지경이었다. 더 숨이 막히는 것은 우리 식구의 끈끈한 결속력이었다. 나는 몰래몰래 모반을 꿈꾸었지만 돌파구는 없었다.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박완서 X 이옥토 리커버 특별판) - 성년의 나날들 박완서 지음
모반 3 謀反 1. 배반을 꾀함.
나도 매번 모반을 꿈꿨다. 계속 벗어나려고만 했다. 보호막이라고는 생각도 못하고 억압이라고만 느꼈다. 이런 내가 가정을 꾸릴 수 있을지!
여염집이었지만 동 인민위원회 간판도 그럴싸하게 붙였고, 마루에는 책상 걸상도 마련하고 난로도 놓고 기름종이를 긁어서 잉크로 미는 등사판까지 어디서 한 대 갖다 놓아 그런대로 인민위원회다운 구색을 갖춰 갔지만 그중 가장 안 어울리는 게 위원장이었다.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박완서 X 이옥토 리커버 특별판) - 성년의 나날들 박완서 지음
여염집 閭閻- 보통 백성의 살림집. 또는 보통 사람들이 살림하며 사는 집. (=민가, 민호, 여가2, 여염가, 여각2)
먹을 것에 대한 나의 이런 지칠 줄 모르는 츱츱함이 비단 이불을 욕심내는 것보다 얼마나 더 고상한 건지는 몰라도 빨리, 그리고 무사히 이 지경을 벗어나고 싶었다.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박완서 X 이옥토 리커버 특별판) - 성년의 나날들 박완서 지음
츱츱하다 너절하고 염치가 없다.
나는 강씨가 그 정도로 자기의 속내를 드러내 보인 게 얼마나 기쁘고 반가운지 몰랐다. 전혀 예상을 못했던 일이었다. 오랜만에 사람 같은 사람을 만난 기분까지 들었다. 잘났다는 뜻이 아니라 적당히 못나서 좋았다. 사람의 생각 속에는 좌우의 이념보다는 거기 속할 수 없는 생각들이 훨씬 더 많은데, 누굴 만나면 우선 저 사람 속이 흴까 붉을까부터 분간해야 하는 관습화된 심보가 부드럽게 누그러지는 것 같았다. 그와 같은 사람이 살아 내기에는 그래도 남쪽이 나을 거라는 걸 어떻게 알아듣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박완서 X 이옥토 리커버 특별판) - 성년의 나날들 박완서 지음
그러나 사람이 그립기도 하고 사람이 가장 무섭기도 한 것 또한 우리의 어쩔 수 없는 사정이었다. 사람과 섞이기 전에 우선 오른쪽처럼 굴어야 하나 왼쪽처럼 굴어야 하나부터 정해 놓지 않으면 불안했다.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박완서 X 이옥토 리커버 특별판) - 성년의 나날들 박완서 지음
6.25 전쟁이 개인한테 어떤 식으로 다가왔을지 생생히 느껴졌다. 미숙한 신념이었을 텐데 그런 걸로 이렇게까지 위험해질 수 있다니.. 얼마나 불안하고 공포스러웠을까.
우리가 대학에 들어간 지 일 년도 채 안 됐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어떻게 일 년도 안 되는 동안에 그런 일들이 다 일어날 수가 있단 말인가. 또 아무리 한동안 소식이 끊겼었다 해도 여고 동창생에 대해 궁금한 게 얼마나 예뻐졌을까, 연애는 해 봤을까 따위가 아니라 죽었을까, 살았을까라는 것은 환갑이나 지나고 나서야 할 짓이 아닌가. 나는 나를 스쳐 간 세월의 부피와 경험의 부피가 맞지를 않아 용궁에서 대접받고 나온 어부와는 완전히 역으로 혼란스러워졌다.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박완서 X 이옥토 리커버 특별판) - 성년의 나날들 박완서 지음
돈암동 성북경찰서가 보이는 천변가에는 수양버들이 벌써 삼단 같은 머리를 늘어트리고 살랑대고 있었다. 마침내 우리 동네였다. 거기서 오늘 걸은 거리를 계산해 보니, 그렇게 먼 길을 하루에 걷기는 내 생전에 처음이었다. 그러나 피곤하다는 생각은 거의 안 들었다. 먹은 거라곤 교하에서 개성 피난민이 길 떠나면서 나누어 준 백설기 말린 게 전부였다. 그들은 며칠 전에 백설기를 한 시루 찌더니 밤톨만한 크기로 뚝뚝 뜯어서 멍석에다 말렸다. 봄볕에 그건 며칠 안 가 차돌처럼 단단하게 굳었고, 그걸 자루에다 한 자루씩 넣어 가지고 떠나면서 군것질이나 하라고 우리한테 한 움큼 준 거였다. 그게 배 속에서 아무리 엄청나게 불어나는 비상식량이라 해도 고작 한 움큼이었는데 올케하고 주머니에다 나누어 가진 게 아직도 몇 개 남아 있었다. 그러니 그것보다는 근심이 식량도 되고 기운도 됐다는 게 더 적절했다.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박완서 X 이옥토 리커버 특별판) - 성년의 나날들 박완서 지음
근심이 식량도 되고 기운도 됐다는 게 좋았다. 양귀자의 <모순>에서 이모와 다른 엄마의 불행이 삶의 질감을 확 늘려준 것처럼 근심도 원동력이 되기도 하지.
모순 - 개정판작가 양귀자가 1998년 펴낸 세 번째 장편소설로, 책이 나온 지 한 달 만에 무서운 속도로 베스트셀러 1위에 진입, 출판계를 놀라게 하고 그해 최고의 베스트셀러로 자리 잡으면서 ‘양귀자 소설의 힘’을 다시 한 번 유감없이 보여준 소설이다.
늘 짓무른 것처럼 깨끗지 못한 할머니의 눈가가 더욱 진물진물해졌다. 삼남 일녀를 둔 할머니였다. 하나도 험한 꼴 안 보고 다 잘 기르셨건만 입버릇처럼 손이 귀하다는 걸 한탄하셨다. 딸은 손으로 치지를 않으셨으니까, 당신의 세 아드님한테서 난 아들 손자가 둘밖에 안 되니 한 아드님은 절손을 면치 못할 것을 생각하여 허전도 하셨으리라. 그러나 손을 보지 못한 막내아들은 옥중에서 죽었단 소리만 듣고 시신도 거두지 못했고, 고명딸네 네 식구하고는 소식이 두절됐고, 한 번도 슬하를 떠나 본 적이 없는 손녀가 죽는 꼴까지 보신 게 불과 반년도 안 되는 사이에 연달아 일어났으니, 노인네가 저만큼 잡숫고 기력을 부지하시는 것도 응석이 통할 리 없는 난리 통이니까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누울 자리 보고 다리 뻗는다는 말이 응석의 경우처럼 적절히 들어맞기도 어려울 것이다.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박완서 X 이옥토 리커버 특별판) - 성년의 나날들 박완서 지음
책 속에서 이런 부분들이 참 좋았다. 가족 관계로 얽혀 있음에도 객관적으로 거리 두기 하면서 상황을 단호하게 통찰하는 모습. 나도 그러고 싶은 거 같다. 가족 관계로 상황을 다 퉁치지 않고 사회적인 상황을 통해서 바라볼 줄 아는 시선이. 혈연이란 도대체 뭘까? 이 책을 읽으면서 혈연의 끈끈함에 대해서 생각했던 거 같다. 자유로운 개인주의자로 살았던 나는 가족들의 일로 휩쓸리는 상황이 싫었고 그런 가족들의 모습이 한심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숙부와 올케처럼 원가족도 아닌 사람들도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끝까지 책임지려는 모습이 대단하고 신기했다. 어떻게 이럴 수 있는 걸까.
그는 꿈꾸고 있었다. 자신의 몸에 대해서도 ‘거기’에 대해서도. 그가 여자의 얼굴에 피어난 복사꽃 같은 요요함만 보고 그 안에 번창하는 고약한 병균에는 눈멀어 열병처럼 사랑하고, 그녀의 청대 같고 관옥 같은 새신랑이 되어 ‘거기’로 신행을 갔을 때, ‘거기’서 대대로 행세깨나 하고 살던 처가 친족들과 늙은 장인 장모가 그를 얼마나 환대하고 예뻐했을까는 보지 않아도 본 듯했다. 그도 설마 ‘거기’가 그때와 같은 은銀 소반이 되어 그를 떠받들어주기까지는 바라지 않는다고 해도, 이 피도 눈물도 없는 지독스레 모진 난리 통에 또 한 번 휩쓸리게 된 공포감으로부터 출구가 돼 주고 있다는 것만은 부정할 수가 없었다. 그걸 일찌거니 인정하고 체념한 올케가 존경스러웠다.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박완서 X 이옥토 리커버 특별판) - 성년의 나날들 박완서 지음
요요하다 2 夭夭하다 1.나이가 젊고 아름답다. 2. 생기가 있고 얼굴빛이 환하고 부드럽다. 3.어떤 물건이 가냘프고 아름답다.
오빠의 이런 현실감각 떨어지는 어리석음이 좀 한심했다... 대체로 내가 가족 및 친인척 남자들을 볼 때 답답, 한심하게 여겼던 부분이 이런 것. 자기가 가진 기회에 대해서 단순하게 생각하는...? 그 기회도 주어지지 않는 사람들이 고군분투하고 있을 세계를 아예 모르고 하는 선택들에 가족들 모두가 좌지우지 되는 게 참 싫었다.
한방을 쓰기 전에는 식구들에게 더는 애정은커녕 관심도 가질 것 같지 않은 게 홀가분하면 했지, 미워한다고까지는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한시도 혼자 있지 못하고 주야로 같이 지내게 되니 눈길 한 번 마주치는 것도 괴로웠고, 견딜 수 없는 혐오감으로 문득 토악질이 치밀 적도 있었다. 엄마도 올케도 오빠의 죽음을 감쪽같이 집어삼키고 속에서 썩이고 있지 싶어 밉다기보다는 징그러웠다. 엄마나 올케 보기에 나 또한 그래 보였을 것이다. 제대로 예를 안 갖춘 장례의 후유증은 이렇듯 우리 식구 안에서 부란의 부란을 거듭했다. 만약 어린 두 조카가 우리 세 사람 사이에 없었다면 우리는 결코 가족으로서의 외형도 유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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