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러나 사람이 그립기도 하고 사람이 가장 무섭기도 한 것 또한 우리의 어쩔 수 없는 사정이었다. 사람과 섞이기 전에 우선 오른쪽처럼 굴어야 하나 왼쪽처럼 굴어야 하나부터 정해 놓지 않으면 불안했다. ”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박완서 X 이옥토 리커버 특별판) - 성년의 나날들』 박완서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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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
6.25 전쟁이 개인한테 어떤 식으로 다가왔을지 생생히 느껴졌다. 미숙한 신념이었을 텐데 그런 걸로 이렇게까지 위험해질 수 있다니.. 얼마나 불안하고 공포스러웠을까.
도리
“ 우리가 대학에 들어간 지 일 년도 채 안 됐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어떻게 일 년도 안 되는 동안에 그런 일들이 다 일어날 수가 있단 말인가. 또 아무리 한동안 소식이 끊겼었다 해도 여고 동창생에 대해 궁금한 게 얼마나 예뻐졌을까, 연애 는 해 봤을까 따위가 아니라 죽었을까, 살았을까라는 것은 환갑이나 지나고 나서야 할 짓이 아닌가. 나는 나를 스쳐 간 세월의 부피와 경험의 부피가 맞지를 않아 용궁에서 대접받고 나온 어부와는 완전히 역으로 혼란스러워졌다. ”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박완서 X 이옥토 리커버 특별판) - 성년의 나날들』 박완서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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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
“ 돈암동 성북경찰서가 보이는 천변가에는 수양버들이 벌써 삼단 같은 머리를 늘어트리고 살랑대고 있었다. 마침내 우리 동네였다. 거기서 오늘 걸은 거리를 계산해 보니, 그렇게 먼 길을 하루에 걷기는 내 생전에 처음이었다. 그러나 피곤하다는 생각은 거의 안 들었다. 먹은 거라곤 교하에서 개성 피난민이 길 떠나면서 나누어 준 백설기 말린 게 전부였다. 그들은 며칠 전에 백설기를 한 시루 찌더니 밤톨만한 크기로 뚝뚝 뜯어서 멍석에다 말렸다. 봄볕에 그건 며칠 안 가 차돌처럼 단단하게 굳었고, 그걸 자루에다 한 자루씩 넣어 가지고 떠나면서 군것질이나 하라고 우리한테 한 움큼 준 거였다. 그게 배 속에서 아무리 엄청나게 불어나는 비상식량이라 해도 고작 한 움큼이었는데 올케하고 주머니에다 나누어 가진 게 아직도 몇 개 남아 있었다. 그러니 그것보다는 근심이 식량도 되고 기운도 됐다는 게 더 적절했다. ”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박완서 X 이옥토 리커버 특별판) - 성년의 나날들』 박완서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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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
근심이 식량도 되고 기운도 됐다는 게 좋았다. 양귀자의 <모순>에서 이모와 다른 엄마의 불행이 삶의 질감을 확 늘려준 것처럼 근심도 원동력이 되기도 하지.
모순 - 개정판작가 양귀자가 1998년 펴낸 세 번째 장편소설로, 책이 나온 지 한 달 만에 무서운 속도로 베스트셀러 1위에 진입, 출판계를 놀라게 하고 그해 최고의 베스트셀러로 자리 잡으면서 ‘양귀자 소설의 힘’을 다시 한 번 유감없이 보여준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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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
“ 늘 짓무른 것처럼 깨끗지 못한 할머니의 눈가가 더욱 진물진물해졌다. 삼남 일녀를 둔 할머니였다. 하나도 험한 꼴 안 보고 다 잘 기르셨건만 입버릇처럼 손이 귀하다는 걸 한탄하셨다. 딸은 손으로 치지를 않으셨으니까, 당신의 세 아드님한테서 난 아들 손자가 둘밖에 안 되니 한 아드님은 절손을 면치 못할 것을 생각하여 허전도 하셨으리라. 그러나 손을 보지 못한 막내아들은 옥중에서 죽었단 소리만 듣고 시신도 거두지 못했고, 고명딸네 네 식구하고는 소식이 두절됐고, 한 번도 슬하를 떠나 본 적이 없는 손녀가 죽는 꼴까지 보신 게 불과 반년도 안 되는 사이에 연달아 일어났으니, 노인네가 저만큼 잡숫고 기력을 부지하시는 것도 응석이 통할 리 없는 난리 통이니까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누울 자리 보고 다리 뻗는다는 말이 응석의 경우처럼 적절히 들어맞기도 어려울 것이다. ”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박완서 X 이옥토 리커버 특별판) - 성년의 나날들』 박완서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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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
책 속에서 이런 부분들이 참 좋았다. 가족 관계로 얽혀 있음에도 객관적으로 거리 두기 하면서 상황을 단호하게 통찰하는 모습. 나도 그러고 싶은 거 같다. 가족 관계로 상황을 다 퉁치지 않고 사회적인 상황을 통해서 바라볼 줄 아는 시선이. 혈연이란 도대체 뭘까? 이 책을 읽으면서 혈연의 끈끈함에 대해서 생각했던 거 같다. 자유로운 개인주의자로 살았던 나는 가족들의 일로 휩쓸리는 상황이 싫었고 그런 가족들의 모습이 한심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숙부와 올케처럼 원가족도 아닌 사람들도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끝까지 책임지려는 모습 이 대단하고 신기했다. 어떻게 이럴 수 있는 걸까.
도리
“ 그는 꿈꾸고 있었다. 자신의 몸에 대해서도 ‘거기’에 대해서도. 그가 여자의 얼굴에 피어난 복사꽃 같은 요요함만 보고 그 안에 번창하는 고약한 병균에는 눈멀어 열병처럼 사랑하고, 그녀의 청대 같고 관옥 같은 새신랑이 되어 ‘거기’로 신행을 갔을 때, ‘거기’서 대대로 행세깨나 하고 살던 처가 친족들과 늙은 장인 장모가 그를 얼마나 환대하고 예뻐했을까는 보지 않아도 본 듯했다. 그도 설마 ‘거기’가 그때와 같은 은銀 소반이 되어 그를 떠받들어주기까지는 바라지 않는다고 해도, 이 피 도 눈물도 없는 지독스레 모진 난리 통에 또 한 번 휩쓸리게 된 공포감으로부터 출구가 돼 주고 있다는 것만은 부정할 수가 없었다. 그걸 일찌거니 인정하고 체념한 올케가 존경스러웠다. ”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박완서 X 이옥토 리커버 특별판) - 성년의 나날들』 박완서 지음
오빠의 이런 현실감각 떨어지는 어리석음이 좀 한심했다... 대체로 내가 가족 및 친인척 남자들을 볼 때 답답, 한심하게 여겼던 부분이 이런 것. 자기가 가진 기회에 대해서 단순하게 생각하는...? 그 기회도 주어지지 않는 사람들이 고군분투하고 있을 세계를 아예 모르고 하는 선택들에 가족들 모두가 좌지우지 되는 게 참 싫었다.
도리
“ 한방을 쓰기 전에는 식구들에게 더는 애정은커녕 관심도 가질 것 같지 않은 게 홀가분하면 했지, 미워한다고까지는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한시도 혼자 있지 못하고 주야로 같이 지내게 되니 눈길 한 번 마주치는 것도 괴로웠고, 견딜 수 없는 혐오감으로 문득 토악질이 치밀 적도 있었다. 엄마도 올케도 오빠의 죽음을 감쪽같이 집어삼키고 속에서 썩이고 있지 싶어 밉다기보다는 징그러웠다. 엄마나 올케 보기에 나 또한 그래 보였을 것이다. 제대로 예를 안 갖춘 장례의 후유증은 이렇듯 우리 식구 안에서 부란의 부란을 거듭했다. 만약 어린 두 조카가 우리 세 사람 사이에 없었다면 우리는 결코 가족으로서의 외형도 유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박완서 X 이옥토 리커버 특별판) - 성년의 나날들』 박완서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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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
부란 2 腐爛
1.썩어 문드러짐.
도리
“ 여북해야 점잖은 척하는 신사도 어쩌다 럭키 스트라이크를 한 갑 사서 피우고 나서는, 그 맛보다는 그것으로 인하여 과시할 수 있는 품위를 잊지 못하여 그 갑에다 국산 담배를 넣어 가지고 다니겠는가. ”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박완서 X 이옥토 리커버 특별판) - 성년의 나날들』 박완서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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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
여북하다
정도가 매우 심하거나 상황이 좋지 않다.
도리
“ 퇴근해서 집에 갈 때는 대개 화가들이 먼저 가고 나는 돈도 입금시키고 청소도 하느라 맨 나중까지 처지곤 했다. 언제부터인가 사무실에서 돈 계산을 하고 내려오면, 그가 작업방 정돈을 해 놓고 기다리곤 했다. 뒷정리를 하는 동안이 그만큼 걸렸다 뿐 기다린 건 아닌지도 몰랐다. 안 기다릴 적도 많았으니까. 우송해 줘야 할 초상화가 몇 건 있을 때는 포장부와 우체 국까지 거쳐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꽤 걸렸다. 그럴 때 그는 먼저 가고 없었지만 매장과 작업장이 말끔히 정돈돼 있었다. 기다려 주지 않는 건 잘한 일이었다. 꼬박꼬박 기다려 준다고 생각하면 차근차근 볼일을 다 볼 수 없었을 것이다. 텅 빈 매장에서 잠시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럴 때는 밑도 끝도 없이 불쑥 자애慈愛라는 게 이런 게 아닐까, 생각하곤 했다. 사는 일의 악착같음 때문에 거의 잊고 지낸 자애라는 게 따뜻한 물에 언 몸을 담갔을 때처럼 쾌적하게 스미는 것 같은 시간이었다. ”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박완서 X 이옥토 리커버 특별판) - 성년의 나날들』 박완서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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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
마지막 문장이 무척 좋았다.
도리
“ 내가 할아버지 돌아가셔도 안 운 년이라는 건 어려서부터 별호가 나 있었다. 할아버지 사랑을 유난히 많이 받았기 때문에 내 성질이 고약한 걸 말하려고 할 때나, 손녀딸 귀애해 봤댔자 소용없다는 일반론을 펼 때마다 들먹이는 만만한 예였다. 오빠 때도 그랬던가? 얼마 오래 전도 아닌데 잘 생각이 안 나면서, 그런 일로 죄의식은 이제 그만 느끼고 싶었다. 정말 비통할 때는 눈물이 잘 안 나오다가 도 슬픔에 적당한 감미로움이 섞이면 울음이 잘 나오는 특이체질도 있다는 걸 이해받고 싶었다. 지섭이를 보낸 허전함에도 눈물을 자극하기 알맞은 달착지근한 맛이 섞여 있었던 것이다. 그보다는 겨우 이런 꼴을 보려고 너를 길렀느냐는 엄마의 절규가 더 가슴을 쳤다. 엄마가 보고자 한 꼴은 무엇일까. 아직도 엄마는 나에게 보통 딸 이상의 기대를 걸고 있단 말인가. 아아, 지겨운 엄마, 영원한 악몽. ”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박완서 X 이옥토 리커버 특별판) - 성년의 나날들』 박완서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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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
엄마와 딸의 관계는 참 어렵고 징글징글하다고 다시금 생각했다. 하루님과 함께 했던 영미권 여성 작가 모임 때도 보면 다른 나라 다른 문화권도 다 똑같았다. 서로 가스라이팅하고 지겨워하고 사랑하고 질투하는... 지긋지긋하고 따뜻하게 서로의 가장 여린 부분을 할퀴는 이 관계를 어찌할까.
도리
눈물도 참 어렵다. 이럴 때가 있겠지. 내가 우는 게 슬픔인지 어떤 억울함인지 아니면 여기서 울어야 할 거 같기 때문에 우는 사회적인 현상인지 그런 게 고민될 때가 있달까. 정말 비통할 때는 눈물이 나오지 않지만 슬픔에 적당한 감미로움이 섞이면 울음이 잘 나온다는 것도 납득했다. 이런 걸 캐치하다니... 역시...!!
도리
“ 보셔요, 엄마. 두고 보셔요. 엄마가 그렇게 억울해하는 건 당신의 생살을 찢어서 남의 가문에 준다는 생각 때문인데 두고 보셔요. 나는 어떤 가문에도 안 속할 테니. 당신이 나를 찢어 내듯이 그이도 그의 어머니로부터 찢어 낼 거예요. 우린 서로 찢겨져 나온 싱싱한 생살로 접붙을 거예요. 접붙어서, 양쪽 집안의 잘나고 미천한 족속들이 온통 달려들어 눈을 부릅뜨고 살펴봐도 그들과 닮은 유전자를 발견할 수 없는 전혀 새로운 돌연변이의 종種이 될 테니 두고 보셔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