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완서 작가님의 <그 많던 싱아~>, <그 산이 정말~> 혼자 읽어볼게요.

D-29
부란 2 腐爛 1.썩어 문드러짐.
여북해야 점잖은 척하는 신사도 어쩌다 럭키 스트라이크를 한 갑 사서 피우고 나서는, 그 맛보다는 그것으로 인하여 과시할 수 있는 품위를 잊지 못하여 그 갑에다 국산 담배를 넣어 가지고 다니겠는가.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박완서 X 이옥토 리커버 특별판) - 성년의 나날들 박완서 지음
여북하다 정도가 매우 심하거나 상황이 좋지 않다.
퇴근해서 집에 갈 때는 대개 화가들이 먼저 가고 나는 돈도 입금시키고 청소도 하느라 맨 나중까지 처지곤 했다. 언제부터인가 사무실에서 돈 계산을 하고 내려오면, 그가 작업방 정돈을 해 놓고 기다리곤 했다. 뒷정리를 하는 동안이 그만큼 걸렸다 뿐 기다린 건 아닌지도 몰랐다. 안 기다릴 적도 많았으니까. 우송해 줘야 할 초상화가 몇 건 있을 때는 포장부와 우체국까지 거쳐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꽤 걸렸다. 그럴 때 그는 먼저 가고 없었지만 매장과 작업장이 말끔히 정돈돼 있었다. 기다려 주지 않는 건 잘한 일이었다. 꼬박꼬박 기다려 준다고 생각하면 차근차근 볼일을 다 볼 수 없었을 것이다. 텅 빈 매장에서 잠시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럴 때는 밑도 끝도 없이 불쑥 자애慈愛라는 게 이런 게 아닐까, 생각하곤 했다. 사는 일의 악착같음 때문에 거의 잊고 지낸 자애라는 게 따뜻한 물에 언 몸을 담갔을 때처럼 쾌적하게 스미는 것 같은 시간이었다.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박완서 X 이옥토 리커버 특별판) - 성년의 나날들 박완서 지음
마지막 문장이 무척 좋았다.
내가 할아버지 돌아가셔도 안 운 년이라는 건 어려서부터 별호가 나 있었다. 할아버지 사랑을 유난히 많이 받았기 때문에 내 성질이 고약한 걸 말하려고 할 때나, 손녀딸 귀애해 봤댔자 소용없다는 일반론을 펼 때마다 들먹이는 만만한 예였다. 오빠 때도 그랬던가? 얼마 오래 전도 아닌데 잘 생각이 안 나면서, 그런 일로 죄의식은 이제 그만 느끼고 싶었다. 정말 비통할 때는 눈물이 잘 안 나오다가도 슬픔에 적당한 감미로움이 섞이면 울음이 잘 나오는 특이체질도 있다는 걸 이해받고 싶었다. 지섭이를 보낸 허전함에도 눈물을 자극하기 알맞은 달착지근한 맛이 섞여 있었던 것이다. 그보다는 겨우 이런 꼴을 보려고 너를 길렀느냐는 엄마의 절규가 더 가슴을 쳤다. 엄마가 보고자 한 꼴은 무엇일까. 아직도 엄마는 나에게 보통 딸 이상의 기대를 걸고 있단 말인가. 아아, 지겨운 엄마, 영원한 악몽.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박완서 X 이옥토 리커버 특별판) - 성년의 나날들 박완서 지음
엄마와 딸의 관계는 참 어렵고 징글징글하다고 다시금 생각했다. 하루님과 함께 했던 영미권 여성 작가 모임 때도 보면 다른 나라 다른 문화권도 다 똑같았다. 서로 가스라이팅하고 지겨워하고 사랑하고 질투하는... 지긋지긋하고 따뜻하게 서로의 가장 여린 부분을 할퀴는 이 관계를 어찌할까.
눈물도 참 어렵다. 이럴 때가 있겠지. 내가 우는 게 슬픔인지 어떤 억울함인지 아니면 여기서 울어야 할 거 같기 때문에 우는 사회적인 현상인지 그런 게 고민될 때가 있달까. 정말 비통할 때는 눈물이 나오지 않지만 슬픔에 적당한 감미로움이 섞이면 울음이 잘 나온다는 것도 납득했다. 이런 걸 캐치하다니... 역시...!!
보셔요, 엄마. 두고 보셔요. 엄마가 그렇게 억울해하는 건 당신의 생살을 찢어서 남의 가문에 준다는 생각 때문인데 두고 보셔요. 나는 어떤 가문에도 안 속할 테니. 당신이 나를 찢어 내듯이 그이도 그의 어머니로부터 찢어 낼 거예요. 우린 서로 찢겨져 나온 싱싱한 생살로 접붙을 거예요. 접붙어서, 양쪽 집안의 잘나고 미천한 족속들이 온통 달려들어 눈을 부릅뜨고 살펴봐도 그들과 닮은 유전자를 발견할 수 없는 전혀 새로운 돌연변이의 종種이 될 테니 두고 보셔요.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박완서 X 이옥토 리커버 특별판) - 성년의 나날들 박완서 지음
너무 와닿았다.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는 완서의 생각에 공감되는 부분이 참 많았다. 그럼에도 완서의 이 생각은 아직 뭘 몰라서 그렇게 생각하는 거라고 느꼈다. 그 욕망을 너무 공감하면서도 결혼을 통해 그렇게 새로운 돌연변이의 종이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원가족과의 독립을 위해 결혼을 선택하는 여성들이 많지만 그게 돌파구는 아니고... 그럼에도 그거말고 다른 돌파구를 생각할 수 없는 상황도 맞고... 난 완서 어머니께서 여성에 대한 인식이 깨어있고 완고해서 부럽고 좋았는데 오히려 그래서 더더욱 완서는 결혼으로 어머니한테서 벗어나고 싶었던 거 같다. 하지만... 과연... 아니 왜 다음에 이어지는 내용이 없는 건가. 너무 아쉽다. 더 읽고 싶다. 이어지는 완서의 결혼 이후의 삶에 대해서.
독서모임에서 인걸님이 단어에 대한 경험적 정의가 사람마다 다르다고 했다. 엄마한테의 '결혼'은 예속되는 일이라 완서는 결혼하지 말고 자유롭게 살길 바랐고, 완서는 이미 엄마한테 예속되어 있는 삶이어서 '결혼'을 통해서 예속에서 벗어나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거 같다고 했다. 경험적 정의가 다르다는 부분이 좋았다. 그치. 우리는 각자만의 언어를 가지고 있지. 평소에 나는 이 오해와 이해의 과정이 무척 답답했다. 누군가 내 말을 자꾸 오해하고 있다고 생각이 들어서 답답했는데 오해는 이해를 위한 필수불가결한 과정이라고 생각하고 내가 더 잘 설명해야지 마음을 다잡으려는 중이다. 이 경험적 정의의 차이를 우짜야하나 싶긴 하다만.
PX 관련 일화로 들어와서 초반에는 좀 재미 없었다... 자연과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가족과 상황의 설명은 내가 잘 몰랐던 인생사라 흥미로웠는데, PX에서 일하면서 오는 고통은 너무 현대랑 다를 게 없달까. 사실 그냥 자연적인 이야기를 내가 더 좋아하는 거 같기도 하다. 작가의 감각적인 표현이 더 많이 드러나서 좋았는데 아쉬웠다. 이후에는 또 재밌게 읽기는 했다만.
엄마가 나에게 표시하고 싶은, 자신도 임의로 안 되는 절절한 애증을 주는 대로 당하고 싶었다. 내 마음대로 바꿔치기하거나 희석시키기 싫었다. 그이 집은 웬만큼 사는 집이어서 고루 갖춘 패물도 받고 예단도 받았지만, 우리는 그이 와이셔츠 한 장을 안 샀다. 나에겐 그런 것을 못 갖춰서 봐야 하는 눈치,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죽지 않으려는 노력, 그런 게 엄마의 신성한 선물이었다.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박완서 X 이옥토 리커버 특별판) - 성년의 나날들 박완서 지음
이럴 수 있다니 박완서 선생님도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나라면 그냥 징징대서 엄마 탓, 형편 탓을 하고 내 나름대로 무시 당하지 않게 챙기려고 했을 텐데... 완서가 일을 했기 때문에 충분히 하려면 했을텐데 일부러 하지 않고 시댁 눈치 보며 노력하는 걸 엄마의 선물로 생각했다니 대단하다... 나같은 애송이는 할 수 없는 생각....
특히, 일반적으로 이런 어려운 시대의 개인적 기록들은 자신의 고통을 과시하고 또 투정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 경우가 만은데 반하여,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는 그런 느낌이 전혀 없다.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박완서 X 이옥토 리커버 특별판) - 성년의 나날들 작품해설, 이남호, 박완서 지음
그래서 대단하고 그래서 좋았다.
올케의 발목은 삐지도 부러지지도 않았나 보다. 곧 부스스 일어나 말없이 양식이 있을 만한 데를 뒤지고 다녔다. 나도 곧 올케가 하는 대로 충실한 공범자 노릇을 했지만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했다. 완전히 공친 날이었다. 그러나 재수 나쁘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그날 올케하고 나 사이엔 육친애나 우정보다 훨씬 더 속 깊은 운명적인 연민 같은 게 심금에 와 닿았기 때문에 그 밖의 것은 그닥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박완서 X 이옥토 리커버 특별판) - 성년의 나날들 박완서 지음
모임에서 올케의 이야기를 많이 했다. 어떤 분께서 올케 주인공 같다고 이야기했는데 인걸님도 공감했다. 난 그저 완서와 올케의 깊은 관계가 신기하기만 했다. 겪어보지 못해서 그런가. 인걸님은 둘의 나이에 대해서 생각해보셨다고 한다. 아마 둘 다 큰 나이 차이가 안 나고 둘다 대학생 20대 초반일텐데 올케는 시부모와 자식들을 케어하면서 이렇게 하는 모습을 생각했다고. 나는 바로 공감되는 완서에만 이입했는데 생각해보니 참 그렇다. 어떻게 그게 가능했을까. 나는 모르는 그 책임감의 힘이 대단하고 두렵고 그렇다.
아 그리고 독서모임에서 완서가 PX에서 첫 월급으로 40만원이라는 큰 돈을 벌어왔다. 가족들은 그 돈을 세면서 무척 좋아하는데 완서는 그만 좋아하길 바란다. 이건 왜 그랬을까? 라는 인걸님의 질문이 있었는데 다들 생각하는 게 무척 다양했다. ㅌㅅ님은 이제야 벌이를 하게 된 건데 이렇게 좋아하는 가족들에 대한 미안함, ㅅㅇ님은 돈에 이렇게 좋아하는 게 속물적으로 보여서, 나는 전쟁통에서 가족 내에 '이상'의 상징이었던 오빠가 죽은 후 양반이라는 근지가 떨어진 스스로와 가족들의 모습에 대해서 구역질이 난 거 아닐까 싶었다. 완서가 자존심을 내려놓고 번 돈이기 때문에 더더욱. 그 외에도 조금씩 다른 의견이 있었는데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다니 신기했다.
독서모임에 ㅇㅈ님이 싱아~ 책을 3권인가 가지고 있다고 하셨다. 초판본이었나? 고등학생 때의 본인이 이 책을 잘 읽고 엄마한테 선물해줘서 앞장에 편지를 남겨뒀다는데 고등학생 때 본인이 도대체 어떤 이유로 이 책을 좋아했는지 아무런 메모도 없어서 알 수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책 읽고 한 두 줄이라도 메모하는 게 좋은 거 같다고 그랬는데... 그치. 과연 그렇지. 전의 나와 지금의 내가 달라져서 그 당시에 나에게 필요했던 문장들, 감명 받았던 문장들도 달라진다. 지금은 26.02.27. 9.57am. 내가 선택하고 닥친 상황들로 앞으로의 내 삶이 많이 바뀔 거 같은 예감이 든다. 그런 순간에 읽게 돼서 그런지 더 공감돼고 재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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