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믐밤] 45. 달밤에 낭독, 체호프 3탄 <바냐 아저씨>

D-29
(바냐) 오, 그래요! 저는 계몽 정신의 소유자였지요. 그걸로 누군가를 계몽시키는데 성공한 적은 없지만요. (사이) 계몽 정신의 소유자! 이보다 더 신랄한 말이 어디 있을까요. 내 나이 마흔일곱이에요. 작년까지 나는 어머니처럼 스콜라 철학으로 내 눈을 흐리게 하려고 애썼지요. 참된 현실을 보지 않으려고 말입니다. 그러면서도 난 좋은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어떤지 아세요? 어머니가 제 심정을 알아주신다면! 모든 걸 가질 수 있었던 시기를 너무 어리석게 허송해 버린 것을 생각하면, 울분과 증오로 밤잠을 이룰 수가 없어요. 이젠 다 늙어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고요. p.170 (바냐) 그런 충실함이라는 건 전부 가짜고 부자연스러운 것이기 때문이지. 그럴 듯하게 들리지만 파보면 아무 근거도 없는 이야기야. 끔찍하게 싫은 남편을 속이는 건 부도덕하고 가슴에서 솟아오르는 자연스러운 젊음의 욕망을 억누르는 건 도덕적이라는 그런 생각 말이야. p.168 (엘레나) 자기 아내도 아닌데 어째서 당신들은 여자를 무심하게 바라볼 수 없는 건가요? 그 의사가 말했듯이 당신들 속에는 파괴의 악령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에요. 당신들은 숲도, 새도, 여자도, 다른 그 무엇에 대해서도 동정심이라고는 없어요. p.174 (세레브랴코프) 나는 평생을 학문 연구에 바쳤고, 서재와 대학 강의실에서 존경할 만한 동료들과 함께 지냈어. 그런데 느닷없이 이렇다 할 이유도 없이 이런 무덤 속에 갇혀서 날마다 속된 인간들을 보고, 하잘것 없는 얘기나 들어야 하나... 살맛 나게 살고 싶어. 내가 원하는 건 성공과 명성, 시끌벅적한 세상이야. 그런데 난 이곳에 유배된 신세지. 매순간 지난날을 그리워하고, 다른 사람들의 출세를 부러워하며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다니... p.178 (아스트로프) 여자가 남자의 친구가 되려면 순서가 있어. 처음에는 아는 사람, 그 다음엔 애인, 그러고 난 다음에 친구. p.184 (아스트로프) 인간은 모든 면에서 아름다워야 해. 얼굴, 옷차림, 마음, 생각까지. 물론 네 새어머니는 미인이지, 하지만... 그녀는 먹고 자고 산책하고 그 미모로 우리를 매혹시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 그게 전부라고. 하는 일이 아무것도 없어. 모든 게 그녀를 위한 것이지. 내 말이 틀렸나? 게으른 인생은 결코 순수할 수 없어. p.186 (아스트로프) 농부들은 하나같이 똑같아, 어리석고 더럽고. 교양 있는 인간들은 함께 어울리기가 어려워, 금세 싫증이 나고 말거든. 하나같이 옹졸하고 편협하지. 한마디로, 따분한 인간들이야. 좀 똑똑하다는 인간들은 신경질적이고, 자기 분석에 열을 올리지. 불평하고, 증오하고, 어디서든 문제점을 찾아내야만 직성이 풀리는 병적으로 예민한 인간들이야. p.187 (엘레나) 지루해서 죽을 지경인데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소냐) 일은 얼마든지 있어요. 하시려고 한다면야... (중략) 집안일을 해도 되고, 아이들을 가르치거나 환자들을 보살피거나 얼마든지 있잖아요. (엘레나) 나에게는 무리야... 흥미도 없고. 여자가 밖에 나가 농민들을 가르치고 환자를 보살핀다는 건 소설 속에서나 가능한 얘기야. 나 같은 사람이 갑자기 그런 일을 어떻게 하겠어? (소냐) 하지만 어떻게 아무 일도 않고 살아요? 두고 보세요. 금세 익숙해지실 거예요. p.193 (아스트로프) 여전한 늪지와 모기, 보기 흉한 도로, 가난과 티푸스, 디프테리아, 화재... 우리 고장은 격렬한 생존경쟁으로 인해 날로 퇴락해 가고 있습니다. 이는 굶주림, 추위와 질병에 시달리는 주민들의 무지와 무관심에서 비롯된 결과입니다. 제 자식을 살리기 위해, 몸을 따뜻하게 덥히고 배를 채우기 위해,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써버린 탓이지요. 미래에 대한 생각 없이 무분별하게 모든 걸 파괴해버렸기 때문입니다. 거의 모든 게 파괴된 반면, 새롭게 창조된 건 아무것도 없지요. p.198 (아스트로프) 당신은 교활한 사람이에요. 당신 말대로 소냐가 실제로 괴로워하고 있다고 칩시다. 하지만 당신의 그 심문이 뜻하는 바는 뭡니까? 아니, 놀란 얼굴 하지 마세요. 내가 어째서 매일 여기 오는지 당신은 잘 알고 있습니다... 왜, 누구 때문에 여기 오는지 당신은 잘 알고 있어요. 사랑스러운 암호랑이여, 날 그런 눈으로 보지 말아요. 늙어빠진 참새니까... p.200 (바냐) 나는 25년 동안 이 영지를 관리하고, 일하면서 가장 양심적인 관리인으로서 당신에게 이익금을 송금했어요. 하지만 당신은 그동안 단 한 번도 내게 고맙다고 말한 적 없었죠. 젊었을 때나 지금이나 당신에게서 고작 1년에 500루블의 봉급을 받았을 뿐이야. 거지가 1년 동안 적선 받는 돈도 그거보다는 많을 거야. 그런데도 당신은 단 1루블이라도 올려줄 생각조차 한 적 없죠! p.205 (바냐) 우리는 당신을 거의 신과 같은 존재로 생각했었지. 하지만 내 눈에 씌어 있던 가리개가 벗겨졌고, 이젠 당신이 어떤 인간인지 똑똑히 알게 됐어! 당신은 예술에 관해 글을 쓰지만, 예술에 대해 아는 게 아무것도 없어! 내가 그토록 우러러 보았던 당신의 모든 저작은 동전 한 닢의 가치도 없다고! 당신은 우릴 속였어! p.206 (바냐) 그래 나는 미친놈이고, 교수라는 가면 아래 자신의 어리석음과 무정함을 숨기고 있는 인간은 제 정신이란 말이지. 모두가 보는 데서 늙은 남편을 속이는 여자는 제 정신이라는 거야. 난 봤어, 봤다니까. 자네가 그 여잘 껴안고 있는걸! p.211 (소냐) 바냐 아저씨, 우린 살아야 해요. 길고도 긴 낮과 밤들을 끝까지 살아가요. 운명이 우리에게 보내 주는 시련을 꾹 참아 나가는 거예요. 우리, 남들을 위해 쉬지 않고 일하기로 해요. 앞으로도, 늙어서도, 그러다가 우리의 마지막 순간이 오면 우리의 죽음을 겸허히 받아들여요. 그리고 무덤 너머 저세상으로 가서 말하기로 해요. 우리의 삶이 얼마나 괴로웠는지, 우리가 얼마나 울었고 슬퍼했는지 말이에요. 그러면 하느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실 테죠. 아, 그날이 오면, 사랑하는 아저씨, 우리는 밝고 아름다운 세상을 보게 될 거예요. 기쁜 마음으로, 이 세상에서 겪었던 우리의 슬픔을 돌아보며 따스한 미소를 짓게 될 거예요. 그리고 마침내 우린 쉴 수 있을 거예요. 나는 믿어요, 간절하게 정말 간절하게. 그곳에서 우린 쉴 수 있어요. 평화롭게 쉴 수 있을 거예요. 천사들의 날갯짓 소리를 들으며, 보석처럼 반짝이는 천상의 세계를 바라보면서요. 모든 악과 고통은 온 세상을 감싸는 위대한 자비의 빛 속으로 가라앉게 될 거예요. 그날은 평화롭고 순수하고 따스할 거예요. 난 믿어요. 굳게 믿어요. (중략) 우리는 쉴 수 있을 거예요. 쉴 수 있어요. p.220-221
[그믐밤] 45. 달밤에 낭독, 체호프 3탄 <바냐 아저씨>
@꽃의요정 어제 채팅창에서 광고, 팡팡 이런 글을 얼핏 보고 쿠팡 광고인가 했는데 김한결 님이 활동하시는 플레이팡팡 모임 이야기였군요. ㅋㅋㅋ 어제 또 새로운 배우를 발견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플래이팡팡이 대 배우들이 탄생하는 연극판이었군요. 그믐밤도 안주하지 않고 꾸준히 신인배우들을 발굴해야겠어요.
<플레이팡팡>과 <극단 발연기>의 콜라보가 돋보이는 밤이었어요~! 점점 배우님들의 연기가 늘어 극단명을 변경해야 할 수도 있겠단 생각을 했어요. ㅎㅎㅎ 불륜 연기 너무 하고 싶었는데, 지하철에서 '웬 아줌마가 전화기로 불륜을 저지르고 있다'는 신고가 들어갈까 봐 마음을 접었습니다. 대신 대배우님들의 연기를 보는 즐거움이 더 컸습니다.
발연기 극단 굿즈가 아직 쌓여 있는데 극단명을 변경하면 안됩니다아아아 ㅋㅎ
@수북강녕 의 예쁜 굿즈들이 아른거리네요!!^^ 연말에 발연기 극단의 연기 시상식 한번 진행해야 하는거 아닐까요??^^ 참가상까지해서 모두의 잔치로 말이죠^^
오늘도 회사에서 손을 씻고, 발연기 손수건으로 손을 닦았지요~
저 멘트는 놓쳤었는데, 이번에도 채팅창에서 @꽃의요정 님의 재치있는 멘트가 있었군요! 저는 아직도 '맥베스와 조무래기들' 멘트에서 헤어 나오지를 못하고 있는데 말이죠(이 글을 쓰면서도 웃음이 터진 건 안비밀). 그믐밤의 신인 배우님들 발굴도 너무 즐겁습니다:)
(홍보)라고 올릴 걸 그랬어요. ㅎㅎ 올려놓은 제가 봐도 쿠팡 광고 같더라고요 심지어 '낭독회의 차은우님'이 '낭독 회의'로 읽혀서 무슨 회의?라고 제자신도 잘못 읽고... 한국 희곡할 날도 기다려 봅니당 ^^
ㅎㅎ 낭독회의 차은우님이셨군요^^ 저도 낭독회의 하시는 분인줄 알았어요 그런데 한결님은 이방에서 아이디가 어떻게 되세요??
와, 한국 희곡! 이것도 너무 좋은데요. 아이디어가 '팡팡팡' 터지는 게 즐겁습니다. 낭독 모임도, 그믐도 오래오래:)
한국 희곡도 하면 좋겠네요! [그믐연뮤클럽]에서도 한국 창작 작품 보기도 했고, 플레이플레이땡땡땡 모임에서 다루었던 <팬데믹플레이>도 아주 흥미롭고요 재작년에 두산연강재단에서 그믐에 신진작가 연극 티켓을 지원해 주셔서 그믐 분들과 <시차>라는 연극도 보러 가고 희곡집도 선물받았던 기억이 나네요 수북강녕에도 한국 희곡집이 몇 권 있는데 ‘인터뷰집’만큼 안 팔리는 ‘희곡집’이다 보니 늘 얌전히 놓여 있어요 :)
아웅~인기없는 희곡집;;;; 하긴 저도 와즈디 무아와드의 희곡집만 샀어요. <화염> , 아시겠지만 영화 <그을린 사랑>을 워낙 좋아해서요. <숲>, <연안지대>, (예전에 저희 이거에 대해서 얘기한 적도 있지요? 기억아~~~) <하늘>은 제가 사려고 했을 당시엔 안 팔았는데 지금 검색해 보니 작년에 출판됐네요!! 그리고 <팬데믹 플레이>가 수북강녕에 있다니~ 역시 격조있는 동네서점 같은 작가님들이 모여 내신 <당신이 잃어버린 것>도 넘 좋았습니다! 저 사실 희곡에 별로 관심없는데, 저 왤케 얼굴에 홍조 띠고 얘기하고 있는 거쥬? 낭독회도 열심히 참여하고;;;
이야기 나눈 적 있지요 저는 지난 3년간 관극한 작품 중 가장 괴랄한 것 중 하나로 와즈디 무아와드의 <연안지대>를 꼽;;; 세종문화회관에서 관극했는데도 정말 비대중적이었던 기억이 납니다 <바냐 아저씨>를 이렇게는 못 보내겠다며, 아쉬운 마음으로 희곡에 대한 모든 기억을 끌어올리고 있습니다 :)
<연안지대>가 그랬나요? ㅎㅎㅎ 전 정말 재미있게 봤거든요. 수북강녕님이 괴랄하다고 하시니 더 매력적으로 다가옵니다. <숲>도 작년인지 재작년인지 아르코 극장에서 했는데, 러닝타임이 3시간인가 4시간인가 해서 포기했던 기억이 납니다.
와, 한국 희곡 작품들! 귀하네요. 재작년에 두산연강재단에서 티켓도 지원해주셨다니! 연뮤클럽 모임글도 간간이 들여다보는데, 대표님의 기획력이 늘 멋지다 생각하고 있답니다:) 올려주신 세 권의 책 사진을 보며 가운데 작품은 제목을 읽지를 못 해서 이것저것 검색을 해봤어요(하하). 찾고 나니 읽히네요. 『은의 혀』의 소개 글을 읽다가 '선 긋기,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타인의 인생에도 개입하지 않는 삶의 형태를 이상향으로 추구하는 무해의 시대에 사회적 연대와 돌봄의 가치를 말하는 작품이다.'라는 대목이 눈에 콕 들어왔답니다. 수북강녕에 얌전히 놓여있는 이 희곡집들로도 '족연'이 함께할 수 있기를 바라며! 여담이지만요. 플레이플레이땡땡땡 모임이라는 말씀 덕분에 그믐에 '한국 작가들의 희곡 낭독모임'이 존재한다는 것도 처음 알았어요. @꽃의요정 님의 광고(?)도 그런 맥락에서 탄생한 것이였을까요(모르는 게 너무 많습니다, 하하).
은의 혀 - 국립극단 희곡선 2023‘국립극단’의 프로젝트 2023 [창작공감: 작가] 희곡선으로 박지선 작가의 『은의 혀』가 출간되었다. 선 긋기,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타인의 인생에도 개입하지 않는 삶의 형태를 이상향으로 추구하는 무해의 시대에 사회적 연대와 돌봄의 가치를 말하는 작품이다.
이번에 @레비오로스 님과 @꽃의요정 님 덕분에 플레이플레이 땡땡땡의 광고 효과가 컸습니다👍👍 희곡의 매력을 매번 상승시키는 달밤의 낭독입니다!!
의외로 한국의 연극 수준이 상당하더라고요. @수북강녕 님과 함께 두산아트센터에서 보았던 <애도의 방식>이라는 연극도 밀도가 참 높아 보는 내내 집중하게 되더라고요. <팬데믹 플레이>를 낸 제철소 출판사는 꾸준히 한국 희곡들을 내고 있는데, 희곡집이 참으로 안 팔리는 걸 생각하면 굉장한 헌신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미>라는 작품은 김혼비 작가님이 강추하기도 하셨어요.
하미올해로 창단 10주년을 맞은 극단 신세계의 신작 희곡집. 『생활풍경』에 이은 두 번째 희곡집으로, 대표작과 최근작을 아우르는 다섯 편의 희곡을 실었다.
@김새섬 님과 @수북강녕 님 같이 '애도의 방식'보셨군요!! 와~부럽습니다 전에 그믐에서 <이효석문학상 수상작품집 2023> 읽을 때 함께 읽었는데 그때 안보윤작가님의 <애도의 방식>과 <너머의 세계> 너무 재미있게 읽었거든요. 근래에 읽은 작품들 중 문체와 전개가 세련되면서도 슬픔이 가득해서 저릿합니다 그래서 연극화한다는 기사를 보고 싶었는데 또 일상에 치여 포기했네요~ㅜㅜ 연극도 밀도있게 잘 만들었다니 무척 궁금하네요 앞으로도 계속 공연하면 좋겠어요 그리고 안톱체홉 뿐 아니라 한국 희곡들로 여러 공연들이 만들어져 많은 관객들의 사랑을 받으면 좋겠습니다💕 달밤의 낭독, 안톤체홉의 <벚꽃동산> 냉큼 신청했습니다
안보윤 작가님의 문체와 전개가 세련되면서도 슬픔으로 저릿하다, 는 말씀이 확 와닿네요 저도 다음 그믐밤 당장 신청하고 왔습니다 :)
밤은 내가 가질게상처 입은 이들의 시선으로 우리가 사는 세계의 가혹한 진실을 들여다보며 아픔을 어루만지고 회복의 길을 열어온 작가 안보윤의 세번째 소설집 『밤은 내가 가질게』가 출간되었다.
<애도의 방식>은 찾아보니 안보윤 작가님의 작품을 원작으로 한 연극이네요. 학생들의 이야기라(개인적으로 청소년들이 등장하는 작품을 좋아합니다) 더 눈길이 갔어요. 줄거리 자체는 굉장히 묵직해보이지만요. 한국의 연극 수준이 상당하다는 말씀도 정말 공감합니다. 저는 재작년에 봤던 <사운드 인사이드>라는 연극이 아직도 너무 생생한데요. 등장인물은 단 두 명 뿐인데, 그 둘의 대사와 연기가 어찌나 강렬하던지요. <하미>라는 작품도 찾아봤답니다. 이 희곡집의 주제도 전쟁과 학살이라는 점에서 묵직하게 느껴졌어요. 지금 이 순간에도 전쟁을 하고 있는 나라들이 떠오르기도 했고요. 이번 모임을 통해 희곡이라는 장르에 대해 제가 얼마나 무지했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이 세계도 정말 무궁무진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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