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냐) 오, 그래요! 저는 계몽 정신의 소유자였지요. 그걸로 누군가를 계몽시키는데 성공한 적은 없지만요. (사이) 계몽 정신의 소유자! 이보다 더 신랄한 말이 어디 있을까요. 내 나이 마흔일곱이에요. 작년까지 나는 어머니처럼 스콜라 철학으로 내 눈을 흐리게 하려고 애썼지요. 참된 현실을 보지 않으려고 말입니다. 그러면서도 난 좋은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어떤지 아세요? 어머니가 제 심정을 알아주신다면! 모든 걸 가질 수 있었던 시기를 너무 어리석게 허송해 버린 것을 생각하면, 울분과 증오로 밤잠을 이룰 수가 없어요. 이젠 다 늙어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고요. p.170
(바냐) 그런 충실함이라는 건 전부 가짜고 부자연스러운 것이기 때문이지. 그럴 듯하게 들리지만 파보면 아무 근거도 없는 이야기야. 끔찍하게 싫은 남편을 속이는 건 부도덕하고 가슴에서 솟아오르는 자연스러운 젊음의 욕망을 억누르는 건 도덕적이라는 그런 생각 말이야. p.168
(엘레나) 자기 아내도 아닌데 어째서 당신들은 여자를 무심하게 바라볼 수 없는 건가요? 그 의사가 말했듯이 당신들 속에는 파괴의 악령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에요. 당신들은 숲도, 새도, 여자도, 다른 그 무엇에 대해서도 동정심이라고는 없어요. p.174
(세레브랴코프) 나는 평생을 학문 연구에 바쳤고, 서재와 대학 강의실에서 존경할 만한 동료들과 함께 지냈어. 그런데 느닷없이 이렇다 할 이유도 없이 이런 무덤 속에 갇혀서 날마다 속된 인간들을 보고, 하잘것 없는 얘기나 들어야 하나... 살맛 나게 살고 싶어. 내가 원하는 건 성공과 명성, 시끌벅적한 세상이야. 그런데 난 이곳에 유배된 신세지. 매순간 지난날을 그리워하고, 다른 사람들의 출세를 부러워하며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다니... p.178
(아스트로프) 여자가 남자의 친구가 되려면 순서가 있어. 처음에는 아는 사람, 그 다음엔 애인, 그러고 난 다음에 친구. p.184
(아스트로프) 인간은 모든 면에서 아름다워야 해. 얼굴, 옷차림, 마음, 생각까지. 물론 네 새어머니는 미인이지, 하지만... 그녀는 먹고 자고 산책하고 그 미모로 우리를 매혹시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 그게 전부라고. 하는 일이 아무것도 없어. 모든 게 그녀를 위한 것이지. 내 말이 틀렸나? 게으른 인생은 결코 순수할 수 없어. p.186
(아스트로프) 농부들은 하나같이 똑같아, 어리석고 더럽고. 교양 있는 인간들은 함께 어울리기가 어려워, 금세 싫증이 나고 말거든. 하나같이 옹졸하고 편협하지. 한마디로, 따분한 인간들이야. 좀 똑똑하다는 인간들은 신경질적이고, 자기 분석에 열을 올리지. 불평하고, 증오하고, 어디서든 문제점을 찾아내야만 직성이 풀리는 병적으로 예민한 인간들이야. p.187
(엘레나) 지루해서 죽을 지경인데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소냐) 일은 얼마든지 있어요. 하시려고 한다면야... (중략) 집안일을 해도 되고, 아이들을 가르치거나 환자들을 보살피거나 얼마든지 있잖아요.
(엘레나) 나에게는 무리야... 흥미도 없고. 여자가 밖에 나가 농민들을 가르치고 환자를 보살핀다는 건 소설 속에서나 가능한 얘기야. 나 같은 사람이 갑자기 그런 일을 어떻게 하겠어?
(소냐) 하지만 어떻게 아무 일도 않고 살아요? 두고 보세요. 금세 익숙해지실 거예요. p.193
(아스트로프) 여전한 늪지와 모기, 보기 흉한 도로, 가난과 티푸스, 디프테리아, 화재... 우리 고장은 격렬한 생존경쟁으로 인해 날로 퇴락해 가고 있습니다. 이는 굶주림, 추위와 질병에 시달리는 주민들의 무지와 무관심에서 비롯된 결과입니다. 제 자식을 살리기 위해, 몸을 따뜻하게 덥히고 배를 채우기 위해,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써버린 탓이지요. 미래에 대한 생각 없이 무분별하게 모든 걸 파괴해버렸기 때문입니다. 거의 모든 게 파괴된 반면, 새롭게 창조된 건 아무것도 없지요. p.198
(아스트로프) 당신은 교활한 사람이에요. 당신 말대로 소냐가 실제로 괴로워하고 있다고 칩시다. 하지만 당신의 그 심문이 뜻하는 바는 뭡니까? 아니, 놀란 얼굴 하지 마세요. 내가 어째서 매일 여기 오는지 당신은 잘 알고 있습니다... 왜, 누구 때문에 여기 오는지 당신은 잘 알고 있어요. 사랑스러운 암호랑이여, 날 그런 눈으로 보지 말아요. 늙어빠진 참새니까... p.200
(바냐) 나는 25년 동안 이 영지를 관리하고, 일하면서 가장 양심적인 관리인으로서 당신에게 이익금을 송금했어요. 하지만 당신은 그동안 단 한 번도 내게 고맙다고 말한 적 없었죠. 젊었을 때나 지금이나 당신에게서 고작 1년에 500루블의 봉급을 받았을 뿐이야. 거지가 1년 동안 적선 받는 돈도 그거보다는 많을 거야. 그런데도 당신은 단 1루블이라도 올려줄 생각조차 한 적 없죠! p.205
(바냐) 우리는 당신을 거의 신과 같은 존재로 생각했었지. 하지만 내 눈에 씌어 있던 가리개가 벗겨졌고, 이젠 당신이 어떤 인간인지 똑똑히 알게 됐어! 당신은 예술에 관해 글을 쓰지만, 예술에 대해 아는 게 아무것도 없어! 내가 그토록 우러러 보았던 당신의 모든 저작은 동전 한 닢의 가치도 없다고! 당신은 우릴 속였어! p.206
(바냐) 그래 나는 미친놈이고, 교수라는 가면 아래 자신의 어리석음과 무정함을 숨기고 있는 인간은 제 정신이란 말이지. 모두가 보는 데서 늙은 남편을 속이는 여자는 제 정신이라는 거야. 난 봤어, 봤다니까. 자네가 그 여잘 껴안고 있는걸! p.211
(소냐) 바냐 아저씨, 우린 살아야 해요. 길고도 긴 낮과 밤들을 끝까지 살아가요. 운명이 우리에게 보내 주는 시련을 꾹 참아 나가는 거예요. 우리, 남들을 위해 쉬지 않고 일하기로 해요. 앞으로도, 늙어서도, 그러다가 우리의 마지막 순간이 오면 우리의 죽음을 겸허히 받아들여요. 그리고 무덤 너머 저세상으로 가서 말하기로 해요. 우리의 삶이 얼마나 괴로웠는지, 우리가 얼마나 울었고 슬퍼했는지 말이에요. 그러면 하느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실 테죠. 아, 그날이 오면, 사랑하는 아저씨, 우리는 밝고 아름다운 세상을 보게 될 거예요. 기쁜 마음으로, 이 세상에서 겪었던 우리의 슬픔을 돌아보며 따스한 미소를 짓게 될 거예요. 그리고 마침내 우린 쉴 수 있을 거예요. 나는 믿어요, 간절하게 정말 간절하게. 그곳에서 우린 쉴 수 있어요. 평화롭게 쉴 수 있을 거예요. 천사들의 날갯짓 소리를 들으며, 보석처럼 반짝이는 천상의 세계를 바라보면서요. 모든 악과 고통은 온 세상을 감싸는 위대한 자비의 빛 속으로 가라앉게 될 거예요. 그날은 평화롭고 순수하고 따스할 거예요. 난 믿어요. 굳게 믿어요. (중략) 우리는 쉴 수 있을 거예요. 쉴 수 있어요. p.220-221 ”
『[그믐밤] 45. 달밤에 낭독, 체호프 3탄 <바냐 아저씨>』
문장모음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