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트칼라] 어디에나 있지만,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계급

D-29
관료는 전망 좋은 직업을 얻은 다음 미리 정해진 위계질서 속에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간다. 새로운 기업가는 기존 관료제 조직 안에서 그리고 그 사이에서 지그재그 패턴으로 위로 올라간다.
화이트칼라 - 현대 중간계급의 초상 p.163, 찰스 라이트 밀스 지음, 조형근 옮김
껍데기 벌린 굴 무더기를 제힘으로 딸 수 있던 세상에서 활동한 고전적인 소기업가와는 달리, 새로운 기업가는 이미 모든 진주가 채취되어 면밀하게 지켜지고 있는 세상에서 활동해야 한다. 그가 자신의 진취성을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자기 몫을 얻기 위해 권력자에게 봉사하는 것이다. 그는 대기업과 대기업 사이에서, 그리고 기업 전체와 대중 사이에서 '일을 해결하는' 방식으로 그들을 섬긴다.
화이트칼라 - 현대 중간계급의 초상 p.163, 찰스 라이트 밀스 지음, 조형근 옮김
작가는 '새로운 기업가'라는 단어로 설명하지만 현실로 치면 조직과 임원의 불안과 욕망을 빠르게 파악하고 충족시켜주는 일종의 행동대장이나 오른팔 같은 사람들을 말하는 것 같네요. 꼭 회사가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위계가 형성된 조직에서라면 이런 유형들을 찾아볼 수 있죠. 업무나 지식의 전문성과 실력보다는 흔히 말하는 '줄타기'와 권력의 균형을 오가며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인물들이죠. 관료제의 정형화 된 '관료'들은 이미 절차와 형식이 완성된 순서대로 직급을 타고 올라갑니다. 반면 정해진 길을 그대로 따르기 보다는 자신만의 방식을 추구하는 이 '기업가'들은 스스로 자신의 지위를 높일 길을 개척하죠. 관료제가 완벽히 조직에 적용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이런 점 같습니다. 관료제는 형태와 정신으로서 존재할 수 있지만 자기 자신을 유지할 수단인 '몸'이 없죠. 관료제를 실행해줄 손과 발은 기계만으로는 한계가 있으며 결국 인간이 개입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아무리 관료화 되더라도 그들이 가진 각자의 욕망으로 인해 어느 정도의 비합리성도 가지고 있죠. 최고의 자리에 오른 대표와 경영자들조차도 불안과 욕망이 있으며, 비공식적인 권위와 권력다툼이 이면에서 경쟁을 벌이며 때론 조직의 효율성을 방해하기도 합니다. 관료제라는 생태계에서 누군가는 순응함으로써 자신의 출세를 추구하는 반면, 빈틈과 경계지대를 활용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의미로 해석했습니다.
재산 소유자가 직접 노동자에게 명령을 내리지 않는 이유는 노동자는 너무 많은 반면, 소유자는 충분히 집중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화이트칼라 - 현대 중간계급의 초상 p.170, 찰스 라이트 밀스 지음, 조형근 옮김
소유자와 경영자는 더 이상 같은 인물이 아니지만, 경영자가 소유자의 소유권을 전유한 것도 아니고 노동자와 시장에 대한 기업 소유권의 힘이 쇠퇴한 것도 아니다. 권력이 재산에서 분리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재산의 힘이 소유권보다 더 집중된 것이다. 이것이 비민주적으로 보인다면, 민주주의의 부재는 소유계급 내부에 있다. 밴스웨링겐 형제가 단 2,000만 달러로 20억 달러 상당의 철도 8개 노선을 통제했다 하더라도, 그들이 행사한 힘은 20억 달러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힘이다.
화이트칼라 - 현대 중간계급의 초상 p.171, 찰스 라이트 밀스 지음, 조형근 옮김
일반적으로 기업의 소유자와 경영자를 분리하는 것이 합리적인 기업 운영 방향으로 여겨지죠. 기업의 창업주 일가나 오너들이 소유와 경영의 구분을 명확히 하지 않아 언론의 사회나 경제면에서 안좋은 일로 기사에 오르는 경우들도 있고요. 저는 이 둘의 분리가 오히려 재산의 권위와 권력을 약화시키고 제동을 거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재산의 힘이 더 강화된 것이라는 작가의 의견이 기억에 남습니다. 주주나 전문경영인, 창업주나 회장 일가 같은 특정한 개인이나 인간 집단의 손길을 떠나 재산이 마치 그 자체로 하나의 독립적 존재가 되었다는 의미 같은데요. 오히려 재산과 자본은 그동안 융합되어 있던 소유와 경영의 측면마저도 전문화함으로써 보다 효율적으로 재산의 유지와 존속이 가능해진 거죠. 아무리 뛰어난 경영자나 창업자도 인간이라는 한계로 인해 언젠가는 자리에서 물러나야 하죠. 반면 장수하는 기업/법인은 그 자체로는 생명이 없는 무정물임에도 자신의 창업주보다 더 오래 몇 대에 걸쳐 유지됩니다. 중간관리자나 하급자 뿐만이 아니라 경영진이나 최고 지도자마저 교체되더라도 관료조직은 본래의 목적과 기능을 계속 유지할 수 있죠. 과거 구중간계급의 시대를 생각해 본다면, 개별적인 사업가가 자신의 수완으로 장사를 잘 하더라도 그 재산과 사업을 변동성 없이, 꾸준하게 장기간에 걸쳐 유지하기는 힘들었을 겁니다. 사건과 사고도 일어날 수 있고, 순간적인 판단의 실수나 잘못된 선택을 할 수도 있으며, 다음 후계자가 이전과 같지 못할 수도 있으니까요. 그러나 일정 수준 이상의 크기와 조직을 갖추고 조직이 되면 기업이나 국가는 이제 사람으로부터 독립되어 자신만의 육체와 정신을 가지게 됩니다. '대마불사'라는 말은 어쩌면 이런 의미가 아닐까 생각이 드네요.
기업의 임원이 최종 결정권을 갖는 이유는, 재산의 힘이 관료화되는 과정에서 대자본을 대변하고 대주주들과의 관계에서 동등한 지위로 대우받으며 그들의 클럽에 소속되어 그들을 대신해서 행동하기 때문이다.
화이트칼라 - 현대 중간계급의 초상 p.176, 찰스 라이트 밀스 지음, 조형근 옮김
자신이 소유한 재산이나 소유자 대신 관리하는 재산을 원하는 대로 다룰 수 있다면 그는 타인에 대한 권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재산의 크기와 분포의 변화로 인해 일부 사람들의 권력은 커지고, 그에 상응하여 다른 사람들에게는 무력감이 생겼다. 이는 광범위한 기업가적 재산에서 협소한 계급적 재산으로의 전환을 뜻한다. 이제 재산의 소유는 소유한 사물에 대한 권력 그 이상을 의미하며, 그 사물을 소유하지 않은 사람에 대한 권력을 의미한다. 그로 인해 명령할 수 있는 사람과 복종해야 하는 사람이 선별된다.
화이트칼라 - 현대 중간계급의 초상 p.176, 찰스 라이트 밀스 지음, 조형근 옮김
조작은 은밀하거나 비인격적인 권력 행사이며, 이에 좌우되는 사람은 명시적으로 무엇을 하라는 지시를 받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지에 따르게 된다.
화이트칼라 - 현대 중간계급의 초상 p.181, 찰스 라이트 밀스 지음, 조형근 옮김
무정형의 20세기 세계에서는 조작이 권위를 대체하며, 희생자는 자신이 희생자인 줄도 모른다. 최신의 심리 장비에 의해 구현된 공식적인 목표는 사람들이 자신의 동기를 알지 못하면서도 경영 간부들이 시키는 것을 내면화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들의 내면에는 많은 채찍이 있는 것이어서, 그는 자신이 어떻게 거기에 왔는지도 모르거나 혹은 실제로 거기에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다. 권위에서 조작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권력은 가시적인 것에서 비가시적인 것으로, 알려진 것에서 익명의 것으로 이동한다.
화이트칼라 - 현대 중간계급의 초상 p.182, 찰스 라이트 밀스 지음, 조형근 옮김
작가가 말하는 조작은 아마도 영어원문에서는 Manipulation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한국어에서도 조작이라는 말의 어감이 그렇지만 영어에서도 그렇게 좋은 의미는 아닌데요. "어떤 사람이나 상황을 교묘하게 통제하거나 영향력을 행사하는 행위" '조작'이란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기업문화나 조직분위기를 지칭하는 것 같습니다. 관료제의 특성상 직위와 직책, 직급이 존재하고 개인보다 조직이 우선시 되지만 어느 순간부터 우리의 정신이나 내면은 '자발적으로' 조직으로 사고의 관점이 이동할 때가 있죠. 개인보다는 조직을 먼저 생각하는 태도를 배양하도록 안팎으로 요구받고, 자신이 하는 말과 느낌이 조직의 상황에 적절한지 자기검열을 하게 됩니다. 그것이 더 심화되면 특정한 상황이나 인물에 대해 필요 이상으로 부담감을 느끼거나, 상대가 요구하지 않음에도 자신을 먼저 양보하는 경우도 생기고요. 카피라이터이자 광고인인 박웅현 작가의 <여덟 단어>라는 책에서 읽은 문장이 떠올랐습니다. "사회생활 초년병 때 친구가 어느 대기업 비서실에서 일을 했는데, 그 당시 비서실은 높은 분과 제일 가까운 부서였어요. 전화를 걸면 비서실 특유의 고압적인 말투가 들려오는데 그게 참 싫었습니다. 수화기 너머에 있는데도 상대방을 위축되게 하는 말투였죠. 어느 날 그 친구와 소주를 한잔 하면서 이야기를 했죠. “적어도 너는 그러지 마라. 그거 아주 밥맛이다.” 그런데 그 친구가 그러더군요." “일부러 그러는 게 아냐. 이상하게 전화를 건 쪽에서 더 긴장을 하더라고.” - p.154
여덟 단어 - 인생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책은 도끼다>의 저자이자 광고인 박웅현이 인생을 위해 생각해봐야 할 여덟 가지 단어를 말한다. 저자는 우리가 한번쯤 마주쳤을 여덟 가지 가치에 대해 자신의 경험과 만난 사람들, 그리고 책과 그림, 음악 등을 예로 들며 생각해보기를 권한다.
대부분의 전문직 종사자는 이제 급여를 받는 근로자가 되었고, 많은 전문직 업무가 분업화되고 표준화되어 교육받은 기술과 서비스의 새로운 위계 조직에 끼워 맞춰졌으며, 집중적이고 좁은 전문화가 자기 수양과 광범위한 지식을 대체하고, 조수와 하위 전문직은 곧잘 복잡하지만 일상적인 업무를 수행하는 반면, 성공한 전문직 종사자는 점점 더 경영자 유형으로 바뀌고 있다.
화이트칼라 - 현대 중간계급의 초상 p.187, 찰스 라이트 밀스 지음, 조형근 옮김
새로운 전문의는 제도의 '안'에 있으면 자신의 지위를 경제적으로 이용할 수 있지만, 제도의 '바깥'에 있으면 훈련된 무능력으로 인해 일반 의료행위 밖에 할 수 없다.
화이트칼라 - 현대 중간계급의 초상 p.193, 찰스 라이트 밀스 지음, 조형근 옮김
병원이 의료계의 중심이 되어 의사의 개인 진료실을 대체하게 되자 젊은 의사는 더 이상 1840년대까지처럼 다른 의사에게서 도제 교육을 받는 것이 아니라 병원 제도의 도제인 인턴이 되었다. 나중에 개인 개업의로서 운이 좋으면 환자를 위해 병원의 시설을 이용하게 된다. 나아가 경력 내내 병원 보직에 임명되는 것은 그의 의료활동에 매우 중요하다. 오즈월드 홀은 "더 중요한 병원 보직은 고도로 전문화된 진료와 관련이 있으며 일반적으로 가장 수익성이 높은 유형과 관련이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화이트칼라 - 현대 중간계급의 초상 p.194~195, 찰스 라이트 밀스 지음, 조형근 옮김
새로운 사업 시스템이 고유한 영역과 특정한 법률 문제들을 동반하며 전문화됨에 따라 변호사 역시 고유한 영역과 특정한 문제들에 대한 전문가가 되고, 사업 시스템의 외부에 머물기보다는 이 영역들의 이해관계를 좇으며 각 사회 부분을 조정하는 법률에 봉사하게 된다.
화이트칼라 - 현대 중간계급의 초상 p.200, 찰스 라이트 밀스 지음, 조형근 옮김
이런 사무실을 운영하려면 막대한 간접비가 들어가기 때문에 꾸준한 사업 흐름을 확보해야 하며, 따라서 사무실은 '거대한 상업 및 투자 은행의 부속 기관'이 된다. 그들은 법정에 서기보다는 '금융 전문가이자 금융 서류의 초안 작성자'로서 더 많이 등장한다.
화이트칼라 - 현대 중간계급의 초상 p.201, 찰스 라이트 밀스 지음, 조형근 옮김
법률 공장은 기업 시스템에 봉사하지만, 그 공장의 변호사들도 이 시스템에 침투한다. 그들은 운행과 철도, 제조업, 주요 교육기관의 이사회에서 최고위직을 맡고 있다. … 이렇게 기업의, 기업을 위한, 기업에 의한 일들이 진행된다. 어디에나 존재하는 이 법률적 사고의 소유자이자 법정의 관료인 변호사는, 모든 주요 이사회 회의에 참석하고 모든 문제에 대해 공개적으로 성명을 발표하면서, 기업을 돕고 기업을 보호하며 기업의 이해관계를 돌본다.
화이트칼라 - 현대 중간계급의 초상 p.204, 찰스 라이트 밀스 지음, 조형근 옮김
이런 중심들에서는 "교수는 가르치는 것 빼고는 다 한다"는 이야기를 곧잘 듣게 된다. 그는 대기업, 부동산 기관, 노사 위원회의 상담역이면서, 자기 연구소를 차료 연구 영역과 대학의 전통적 공평함이라는 위신을 팔고 있다. … 그러나 동기나 결과에 관계없이 학계 경력 중의 일정 부분은 점점 더 사업상의 수완가와 기업 관리자의 특성에 의존하고 있다.
화이트칼라 - 현대 중간계급의 초상 p.214, 찰스 라이트 밀스 지음, 조형근 옮김
오~길을 잃고 헤매다 드디어 5장부터 재미있어지기 시작했어요! 저도 @밥심 님처럼 읽다가 포기하려고 했었거든요. 그 당시의 연봉 수준이 지금 연봉으로 환산했을 때 얼마인지 몰라 그 부분은 계산 안 하고 그냥 넘어갔는데, 총괄지배인에 대한 해석은 요새 추세와도 맞는 것 같아 흥미로웠습니다.
화이팅! 저처럼 포기하지 마시고 완독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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