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트칼라] 어디에나 있지만,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계급

D-29
이 위계질서와 집단 내에서 그는 자신이 수행하는 기능에 따라 분류되지만, 때로는 지위, 직위, 그리고 무엇보다도 직함에 대한 '인위적인' 구분도 존재한다. … 이 부분은 한편으로는 직원이 자신에게 주어진 작은 공간을 개인화하려는 욕구에서 비롯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기를 높이고 직원 사이의 '연대'를 약화시키기 위해 경영진이 장려할 수도 있다.
화이트칼라 - 현대 중간계급의 초상 p.315, 찰스 라이트 밀스 지음, 조형근 옮김
복잡한 방식으로 공식적인 권위와 연결되는 직함과 그 부속물은 외적이고 결정적인 지위의 표시다. 책상에 전화기가 있거나, 화장실을 사용하거나, 문에 명패가 달려 있거나, 책상 위에 현수막이 달려 있거나 하는 것들은 모두 직원들이 의식적으로 노력하고 소망하는 바가 된다. … 카를 드레푸스는 그것들이 '인위적인 위계질서'를 형성한다고 주장했는데, 연대를 원치 않는 고용주가 장려하고 악용하는 것이다.
화이트칼라 - 현대 중간계급의 초상 p.317, 찰스 라이트 밀스 지음, 조형근 옮김
전반적으로는 모든 관료제 조직이 합리화의 방향으로 향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조직 안에는 비합리적 요소들이 아직도 많이 남아있죠. 업무의 합리화와 조직/위계의 합리화는 별개로 움직이는데 이는 관료제가 아무리 합리화를 추구해도 최소한의 수단으로서 여전히 인간이 필요하기 때문일 겁니다. 그리고 인간이 존재하는 한 비합리성도 남을 수밖에 없죠. 작가는 회사가 여러 부서와 직급을 나눠놓지만 조직도상의 표면적인 공식적 체계와는 또 다른 권력 체계가 작동한다고 말합니다. 우리에게도 많이 익숙한 얘기죠. 특정 경영진이나 임원의 개인적 요소와 배경들 때문에 만들어지는 파벌이나 줄서기, 성별이나 지역 또는 연령이나 학력에 따라 뭉치고 흩어지는 직원들의 비공식적 커뮤니티 등이 해당될 겁니다. 외면적으로는 성과와 노력에 기반한 공정한 보상을 약속하지만... 실상은 다른 경우들이 있다는 걸 우리는 알죠.
그래서 작가는 조직이 진정으로 모든 면에서 합리화되고 기계화/자동화 되는 날이 온다면, 권위와 운 또는 개인적 호불호 같은 인격적 수단마저 사라지는 때가 올 것이라고 추정하는데요. 일부 회사들은 기존의 단계적으로 나뉘어 있는 직급 체계를 없애고 공식적으로 직함을 OOO님이나 별명으로 부르는 곳들이 있죠. 또는 임원과 평직원만으로 나누기도 하고요. 이런 추세는 어느 정도 기술에 의한 합리화도 영향이 있을 겁니다. 과거에는 관리자 또는 부서의 장의 역할이 실무 보다는 의사결정과 조직/인재관리가 중요했죠. 말 그대로 관리자로서의 역할이 더 강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팀장이라도 실무를 요구하는 조직도 늘고 있죠. 전 직급에 걸쳐 합리화가 확산됨에 따라 관리자와 실무자의 구분이 모호하고 옅어지기 때문이 아닐까 싶네요. 인공지능이나 생성형 AI가 단순작업, 실무, 가공, 분석의 많은 업무를 지원하거나 보조하게 된다면 기존의 '의사결정 지원자'로서의 중간관리자의 정체성도 위협받을 수 밖에 없을 것 같고요. 기업이 정말로 원하는 궁극적 합리화는 절대 다수의 일반 직원과 소수의 경영자만으로 양분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은화님이 말씀하신 조직 개편이 지인 회사에서도 그대로 일어났는데요. 딱 선임과 책임 and 임원들로요. 위에 은화님이 말씀하신 내용 외에도, 저렇게 간소화하면서 직급에 따른 부가적인 추가월급을 줄 필요 없게끔 딱 두 개로만 나눴다고 하더라고요. 기존의 사원/주임/대리/과장/차장/부장 등으로 했을 때는 회사에서 직급에 따른 월급을 부가적으로 줘야 했다고 하는 거 같아요.
저도 예전에 다녔던 회사 중에 재직 중일 때 직급 개편을 했던 곳이 있는데 꽃의요정님 사례처럼 통합했더라고요. 이게.. 겉으로는 직급 구분을 최소화하고 직원들의 권위의식이나 수직적 문화를 줄이는 의도라고는 하는데.. 회사가 직급별 급여 테이블을 퉁치기(?) 위한 수단으로 쓸 때도 있다 보니 애매한 것 같습니다. 직급을 통합하다 보니 직급 인상분을 선임에서 책임으로 올라갈 때 말고는 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요. 그러다 보니 과장이나 차장급 경력자들은 불만이 생겨서 나가는 사례도 많이 보였어요.
마지막에 "....우리는 알죠."에 방점이 찍히네요. 알지만....
루터에 이르러 처음으로 노동이 현대인의 마음속에서 '삶의 기초이자 열쇠'로 자리 잡았다. 루터는 노동이야말로 타락한 인간에게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계속 말하면서, 바울의 말을 인용하여 노동할 수 있는 모든 사람은 모두 노동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게으름은 부자연스럽고 악한 도피였다. 노동으로 자신을 유지하는 것은 신을 섬기는 방법이었다. 이로써 종교적 경건과 세속적 활동 사이의 거대한 격차가 해소되었고, 직업은 '소명'이 되었으며, 노동은 구원을 향한 종교적 길로 가치를 부여받았다.
화이트칼라 - 현대 중간계급의 초상 p.327, 찰스 라이트 밀스 지음, 조형근 옮김
창조적인 노동에 가져다주는 기쁨은 점점 더 소수에게만 국한된다. 화이트칼라 대중, 그리고 일반적으로 임금노동자에게 노동은 신을 섬기는 것도 아니고, 신성에 대한 체험도 아니다. 그들에게는 노동에 대한 강박적인 의지가 없고, 일상적인 일과에서 오는 긍정적인 기쁨도 거의 없다.
화이트칼라 - 현대 중간계급의 초상 p.330, 찰스 라이트 밀스 지음, 조형근 옮김
장인은 완성된 제품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으며, 자신이 모든 것을 만들지는 않더라도 전체에서 자신의 역할이 무엇인지 알고, 따라서 전체의 관점에서 자기 노력의 의미를 이해한다. 결과에 대한 만족은 그것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에 영향을 미치며, 이런 방식으로 그의 노동은 그에게 의미 있는 것일 뿐만 아니라 제품에 대한 만족의 일부가 된다.
화이트칼라 - 현대 중간계급의 초상 p.333, 찰스 라이트 밀스 지음, 조형근 옮김
그는 결과에 대한 책임이 있으며 그 책임을 자유롭게 맡을 수 있다. 맞닥뜨리게 되는 문제와 어려움은 그가 원하는 최종결과의 형태에 따라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화이트칼라 - 현대 중간계급의 초상 p.334, 찰스 라이트 밀스 지음, 조형근 옮김
장인정신은 대체로 '취미'로 취급되어 노동의 일부가 아닌 여가의 일부로 취급되거나, 노동, 즉 시장성이 있는 활동이라고 해도 수공예품 거래에 종사하는 흩어진 직인의 노동이나, 자유를 유지하는 데 성공한 전문가의 노동으로 취급된다. 윤리적으로 장인정신은 특권을 가진 소수의 전문가와 지식인 집단에 국한되어 있다.
화이트칼라 - 현대 중간계급의 초상 p.337, 찰스 라이트 밀스 지음, 조형근 옮김
노동자는 생산물이나 생산 도구를 소유하지 않는다. 노동 계약에서 그는 자신의 시간, 에너지, 기술을 타인의 힘에 대해 판매한다. … 특정한 화이트칼라 분야에서는 성격 시장의 부상으로 인해 자기 자신과 사회 간의 소외가 극단적인 수준에 이르렀다.
화이트칼라 - 현대 중간계급의 초상 p.338, 찰스 라이트 밀스 지음, 조형근 옮김
오랜 시간 동안 노동은 괴롭고 고된 작업이었으며, 서구의 기독교적 종교관에서는 신이 내린 추방이자 벌이었죠. 루터는 노동이 오히려 나태함에 빠지지 않는 수양의 요소이며, 신에게 가까워질 수 있는 길이라는 대안을 내놓습니다. 덕분에 기피하고 싶지만 지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행해야 했던 필요악은 이제 하나의 덕목이 되었죠. 하지만 노동에 대한 인식의 전환은 20세기를 거치며 종교적 세계관이 해체됨에 따라 권위를 잃습니다. 작가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던 소기업가와 농민의 독립된 세계는 점차 대형화에 따른 권력/재력의 집중으로 현대 자본주의의 모습을 띄면서 작업이 업무가 되고, 업무들은 분화됨에 따라 전문화/자동화 되어가죠. 이전 시대에는 일의 계획 단계부터 수행, 마무리까지 대부분의 노동과 고민을 개인이 책임져야 했습니다. 본인이 얼마나 고민하고 또 전념하느냐에 따라 자신이 얻을 산출물이 결정되었기에 노동의 모든 과정에 관심을 갖게 되고, 이는 결과물에 대한 애착과 자부심으로도 이어지고요.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공예품이나 작품을 만들던 장인들은 이를 '장인정신'으로 발전시켰습니다. 저자는 장인과 화이트칼라를 비교하며 현대의 임금노동자나 화이트칼라 모두 노동의 모든 단계에서 소외당했다고 말합니다. 이제 현대인은 누군가에게 고용된 입장으로서, 다른 사람의 지시에 따라서만 업무를 시작할 수 있죠. 또 업무나 작업의 내용(시간, 강도, 집중, 휴식)을 모두 통제받습니다. 고된 지적/육체활동에 따라 만들어낸 모든 유무형의 결과물을 현대인은 소유할 수 없고요.
노동에서 배제된 화이트칼라는 자신의 고유한 특성마저 업무와 조직을 위해 바쳐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됩니다. 조직이나 고객이 불편함을 느끼지 않을 적합한 외형과 미소, 태도와 성격을 갖추고 유지해야 하죠. 일터에서는 자신의 산출물을 갖지 못하며, 자신의 성격마저 바쳐야 하는 화이트칼라는 결국 아무것도 일에서 얻어가지 못합니다. 근로소득으로서의 급여 외에는 받지 못하고, 대신 남에게 바쳐야 하는 것은 많으며, 그나마 얻은 급여로 할 수 있는 행위는 소비밖에 없는 존재가 됨에 따라 삶에서 '유의미함'과 '가치'를 느끼지 못해 공허감과 결핍에 둘러싸이는 것 같고요. 개인적으로 작가의 책 내용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이 이 10장의 <노동>이라고 생각해요. 업무가 화이트칼라를 어떻게 빚어내는지 알 수 있었거든요. 결국 인간은 일을 통해 생계를 해결해야 했기에 어떻게든 의미를 부여해야 했지만, 이제는 어디서도 의미를 찾을 없는 이유가 주도성의 박탈이라는 점이 와 닿았습니다. 저는 사무직이다 보니 회사에서 만드는 결과물이 모두 보고서나 파일인데요. 회사 안에서는 의미가 있을지 몰라도 이 자료들은 바깥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의미 없는 숫자와 문자의 배열이죠. 이런 문서들을 제가 소유하는 것도 아니고요. 가끔은 1년이 마무리 되거나, 바쁜 업무 주기가 끝나고 나면 무엇을 했는지 돌이켜봐도 남는 게 없다고 느낄 때가 있었습니다. 깊게 생각해봐야 답이 나오는 것도 아니니, 이내 잊어버리고 일상의 즐거움에 집중해보려고 하지만 그래도 가끔씩 생각나는 건 어쩔 수 없더라고요. 하루의 1/3을 회사에서 보내지만 그 끝에 기다리고 있는 건 무엇일까... 하는 생각 말이죠.
더이상 자신의 노동을 계획할 수 없고, 따라야 할 계획을 수정할 수도 없는 개인은 자신의 노동 중 상당한 부분을 관리받고 조작당한다.
화이트칼라 - 현대 중간계급의 초상 p.339, 찰스 라이트 밀스 지음, 조형근 옮김
기업은 이제 옛날 개인기업의 지휘관 아래 있었던 시절과는 달리 위대한 인물의 제도적 그림자가 아니며, 소규모 생산에서와 같이 사람들이 노동 속에서 자신을 실현하던 수단도 아니다. 기업은 비인격적으로 낯선 명목이며, 인간이 더 많이 투입될수록 인간에게는 더 적게 투입된다.
화이트칼라 - 현대 중간계급의 초상 p.339, 찰스 라이트 밀스 지음, 조형근 옮김
참 잘 쓴 문장이라고 느꼈어요. "인간이 더 많이 투입될수록 인간에게는 더 적게 투입된다"... 현상과 본질이 모두 담긴 문장 같습니다.
도구(경제수단)가 기계화(관료화)되면서 인간은 지적 잠재력과 노동의 측면으로부터 소원해지고, 단위당 생산성 향상과 비용 절감을 위해 각 개인은 규격화된다.
화이트칼라 - 현대 중간계급의 초상 p.339, 찰스 라이트 밀스 지음, 조형근 옮김
사람이 다른 사람의 거짓말을 팔게 되면 자신도 팔게 된다. 자신을 판다는 것은 자신을 상품으로 만드는 것이다. 상품은 시장을 통제하지 않으며, 그 명목 가치는 시장이 제공하는 것에 의해 결정된다.
화이트칼라 - 현대 중간계급의 초상 239p, 찰스 라이트 밀스 지음, 조형근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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