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트칼라] 어디에나 있지만,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계급

D-29
우리 시대의 불안과 불만은 정치와 경제, 가정생활과 종교 등 우리 존재의 거의 모든 영역에서 18세기와 19세기의 확실성이 해체되거나 파괴되었고, 동시에 우리가 살고 있고 또 살아야 하는 새로운 일상에 대한 새로운 제재나 정당화는 자리 잡지 못했다는 근본적인 사실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수용도 없고 거부도 없으며, 전면적인 희망도 없고 전면적인 저항도 없다. 삶의 계획도 없다.
화이트칼라 - 현대 중간계급의 초상 p.32, 찰스 라이트 밀스 지음, 조형근 옮김
어딘가에서 그런 글을 읽은 적이 있는데요. 시간이 지나서 정확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요지는 종교가 지배하던 시대에는 사람들이 두려워하든, 원망하든, 의지하든 기댈 구석이 있었다는 글이었습니다. 신은 보이지 않았지만 개인의 일상 곳곳에서 그 존재감을 드러냈는데요. 식사 전에 기도를 올리고, 추수 이후 감사를 드리고, 종교적인 날에 모여 회합의 시간을 가졌죠. 종교는 모든 것이었지만 그렇기에 개인의 삶에서 좋든 싫든 커다란 한 덩어리로서 인생과 의식세계에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현대에는 개인이 믿을 만한 절대적 존재를 찾기가 쉽지 않죠. 꼭 신이 아니더라도 어떤 이데올로기든 이념이든 절대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느낌이 곧 현대의 정서일 겁니다. '나'의 문제인지 또는 사회의 문제인지도 확신할 수 없으며, 지금의 선택과 길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알 수 없고 옳고 그름을 판별할 수 없는 시대. 맹신할 것이 없지만 그렇기에 믿음도 배반도 없는 시대. 애착이 없기에 증오도 없는 시대. 화이트칼라를 넘어 현대사회의 무미함의 근원을 파헤치는 문장이 인상깊습니다.
일반적인 또는 추상적인 관념으로서, 보통 말하는 나약한 삶에 집착하는 것은 사회가 고도로 문명화되고 부자연스러워진 결과다. 그전에는 사람들이 전쟁의 온갖 곡절과 위험에 뛰어들기도 하고 단 한 번의 죽음이나 열정에 모든 것을 걸기도 했다. 열정을 해소하지 못하면 그들에게 삶은 짐이 되었다.
혐오의 즐거움에 관하여 - 거장의 재발견, 윌리엄 해즐릿 국내 첫 에세이집 p.80~82, 윌리엄 해즐릿 지음, 공진호 옮김
혐오의 즐거움에 관하여 - 거장의 재발견, 윌리엄 해즐릿 국내 첫 에세이집국내 처음 소개되는 윌리엄 해즐릿의 에세이 선집이다. 스무 권에 달하는 그의 전집 가운데 표제작을 포함하여 중요한 에세이들을 엄선하여 실었다.
(…) 그들은 자신들이 추구하는 것에 대한 맹목적 사랑을 광기가 서릴 정도까지 최고조로 끌어올리고 그것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라면 아무것도 아끼지 않는다. 다른 것은 전부 무가치하다. 그들은 신방을 달려가듯 죽음을 향해 내달린다. 사랑이나 명예나 종교나 다른 어떤 지배적인 감정의 제단에 일말의 후회도 없이 목숨을 바친다.
혐오의 즐거움에 관하여 - 거장의 재발견, 윌리엄 해즐릿 국내 첫 에세이집 p.80~82, 윌리엄 해즐릿 지음, 공진호 옮김
(…) 그것은 종교와 관련이 있었을 것이다. 내세에 대한 맹신은 현세를 가치 없는 것으로 만들고 그 너머의 무언가에 상상의 형체를 부여했다. 그렇게 해서 거친 군인들이나 사랑에 미친 사람들이나 용맹한 기사들이 현세의 운을 집어던지고 내세의 품으로 뛰어들었던 것이다.
혐오의 즐거움에 관하여 - 거장의 재발견, 윌리엄 해즐릿 국내 첫 에세이집 p.80~82, 윌리엄 해즐릿 지음, 공진호 옮김
다른 책이지만 <혐오의 즐거움에 관하여>에서는 과거 시대의 사람들이 어떻게 그토록 사랑이나 충성심, 명예, 종교적 사명, 정의감 같은 감정이나 이념을 위해 쉽게 몸을 던지고 바칠 수 있었는가를 생각한 대목이 있습니다. 가령 전 이런 비슷한 생각을 학생 때 위인전을 읽으며 느꼈는데요. 우리가 순국선열이나 열사라고 부르는 분들이 어떻게 그토록 자기 자신이나 가족의 안위를 아무렇지 않게 여기며 의거를 행할 수 있었는지가 늘 궁금했습니다. 사람이라면 비슷한 수준의 욕망과 한계를 가질 터인데 그 분들은 어떻게 그런 선택을 하고, 그런 결심을 할 용기와 동기가 있었는지가 항상 의문이었어요. 오히려 충성심이나 지조, 절개나 충/효에 대한 절대적 믿음이 강했고 또 그것이 인간이 세상을 이해하고 인지하는 틀이었던 시대였기에 가능했을까요. 윌리엄 해즐릿도 그런 의문에서 종교에 대한 믿음으로 두려움을 극복했으리라고 추측했습니다. 이번 책을 읽으며 과거에 읽었던 대목이 떠올라 가져왔습니다.
재산은 노동의 결실이다. 어떤 사람이 부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도 부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며 따라서 산업과 기업에 대한 격려일 뿐이다.
화이트칼라 - 현대 중간계급의 초상 찰스 라이트 밀스 지음, 조형근 옮김
1부를 읽으며 노동과 재산이 하나의 단위로 긴밀하게 결합된 그 시절이 더 평화롭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네요. 아이러니하게도 산업혁명과 기술의 발전이 노동과 재산을 분리해 불평등과 탐욕, 갈등이 생긴게 아닐까 싶어요.
1부의 구중간계급은 서부개척 시대 때의 마을의 잡화점이나 가게들이 떠오르더라고요. 구체적으로 직업이 분화되기 이전에 사람들이 땅이든 가게든 자신만의 재산을 가지고 스스로 생계를 꾸려야 하던 시대.. 유럽은 계급제와 신분제의 압력이 오래도록 작용하여 농민(farmer)이 아닌 소작농(peasant)으로서의 계급으로 유지될 수밖에 없었던 반면, 미국은 상대적으로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웠기에 비슷한 수준의 고만고만한 재산을 가진 농부들이 형성되었다는 분석이 흥미로웠습니다. 국가와 상위계급에게 제공할 농작물을 산출해야만 하는 생산 집단으로서가 아니라, 자신만의 재산을 기반으로 노동을 통해 이익을 추구할 수 있던 '자유'가 있던 세상이니까요. (재산 ≒ 노동 ≒ 자유) 자신이 노력에 어느 정도 비례하여 보상을 받을 수 있었고, 이를 위해 근면함과 성실함이라는 삶의 가치를 추구하고, 축적된 이익을 통해 개인의 권리를 실현할 수 있는 삶.. 직업에 익숙하며 누군가로부터 고용되어야 하는 처지인 현대사회의 우리로서는 겪어보지 못했기에 낭만적으로 보이면서도 쉽게 머리에 그려지지 않는 인생이네요.
사유재산을 침탈하는 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첫 번째는 가난한 사람이 부자를 약탈하는 것으로 갑작스럽고 폭력적이며, 두 번째는 부자가 가난한 사람을 약탈하는 것으로 느리고 합법적이다.
화이트칼라 - 현대 중간계급의 초상 찰스 라이트 밀스 지음, 조형근 옮김
소기업가는 토지를 소유함으로써 단순한 '투자'가 아니라 자신의 사업 영역을 소유하게 됐고, 그렇게 소유했기 때문에 독립적인 존재가 되었다. … 자기 관리와 노동, 재산이 일치했고, 이 일치 속에서 원초적 민주주의의 심리적 기반이 마련되었다.
화이트칼라 - 현대 중간계급의 초상 p.50, 찰스 라이트 밀스 지음, 조형근 옮김
노동의 기술은 자신의 재산을 기반으로 수행되었고, 사회적 지위는 주로 자신이 소유한 재산의 양과 상태에 달려 있었으며, 소득은 자신의 재산으로 노동해서 얻은 지역에서 파생되었다. 따라서 소득, 지위, 노동, 재산은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화이트칼라 - 현대 중간계급의 초상 p.50, 찰스 라이트 밀스 지음, 조형근 옮김
"자유로우며 자기 자신의 노동에 뿌리를 내릴 수 있는" 인간의 권리는 재산의 변화에 의해 부정되고, 노동은 이제 자신의 재산과 결합된 것이 아니라 타인에게 판매되는 일련의 기술이기 때문에 노동해서 자신을 실현할 수도 없다.
화이트칼라 - 현대 중간계급의 초상 p.58, 찰스 라이트 밀스 지음, 조형근 옮김
여담이지만 이런 배경이 있었다는 걸 알게 되니 왜 미국에서는 정부의 개입을 최소화하고자 하며, 자유에 대한 침범을 거부하는 자유주의 사상이 있는지 조금은 이해가 됐습니다. 구성원들이 계급이나 재산의 큰 차이가 없이 각자의 자율적인 행동에 따라 균형을 유지하면서도 삶을 이어갈 수 있다면 권력의 등장을 원하지 않았겠죠. 어찌 보면 작가가 구중간계급의 시대를 미화한다는 느낌이 들기도 하고, 공권력이 미치지 못하는 실질적 무정부 상태의 혼돈도 당시에 분명 있었을텐데 말이죠. 책은 직업과 계급의 관점에서 이를 '경제적 자유'의 가치로 덮는 것 같지만 분명 지금과는 다른 가치관과 매력이 있던 시대로도 느껴집니다.
맞아요. 마냥 낭만적이지만은 않았을 구중간계급을 미화하는 느낌이 약간 있긴 하지만 그때는 이런 세상을 몰랐으니 다들 만족하며 살았을 테고.. 지금의 세상을 아는 우리는 감히 돌아가고 싶다는 말은 못할 것 같네요.
재산이 집중되자 인간의 본질적 자유의 기초인 재산과 노동의 통합이 종식됐고, 개인이 독립적인 생계수단으로부터 분리되면서 그의 인생 계획의 기초와 그 계획의 심리적 리듬도 바뀌었다. 재산에 기반한 기업가의 경제생활은 생애 전체에 걸쳐 이뤄지며 가족이 주고받을 유산 범위 안에서 규정되는 반면, 근로자의 경제생활은 고용 계약과 보수의 기간에 기반한다.
화이트칼라 - 현대 중간계급의 초상 p.59, 찰스 라이트 밀스 지음, 조형근 옮김
20세기에도 기술은 급속도로 발전했지만 시장의 확대는 훨씬 더디게 진행되었다. 상황을 안정시키기 위해 개인기업의 지휘관들은 힘을 합치기 시작했고, 치열한 경쟁 속에서 비인격적인 독점이 등장했다. 소기업가의 세계에서 질서의 주된 원리인 경쟁의 자유는 새로운 사회를 형성할 자유가 되었다. 소기업의 집중되면서 지배적인 사업가 유형이 바뀌기 시작했고, 개인기업의 지휘관은 연금 수령자, 부재지주, 기업 경영자, 그리고 지금부터 묘사할 새로운 유형인 ‘새로운 기업가’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화이트칼라 - 현대 중간계급의 초상 p.68, 찰스 라이트 밀스 지음, 조형근 옮김
경영자는 비인격적인 기업의 일부이며, '작은 사람'들 사이에서 우호적인 평판을 얻기에는 너무 냉정한 탓에 절대로 중간계급의 인기 있는 우상이 되지 못한다. 엔지니어로서 그는 냉혹한 과학의 일부일 뿐 경제 영웅이 아니며, 사업가로서 그는 모든 큰돈이 불가사의하게 굴려지는 숨겨진 금융 세계의 일부다.
화이트칼라 - 현대 중간계급의 초상 p.68, 찰스 라이트 밀스 지음, 조형근 옮김
그러나 대기업의 지배가 모두 완전한 합병이나 파산으로 귀결되거나, 집중이라는 사실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다. 대기업의 힘은 많은 소기업이 독립성을 유지하면서도 실제로는 대기업의 대리인이 될 정도로 막강하다. 중요한 점은 소기업가가 예전의 기업가적 기능을 박탈당했다는 것이다.
화이트칼라 - 현대 중간계급의 초상 p.73, 찰스 라이트 밀스 지음, 조형근 옮김
제가 다니는 직장은 본사가 각 지방의 사업가들과 계약을 맺고 대리점을 관리하기 때문에 이 문장이 공감이 됐습니다. 대리점주들은 경우에 따라서는 회사와 전속/독점계약을 체결하기도 하고, 또 다른 여러 제조업체들의 물건을 조금씩 가져와 파는 총판 역할을 하는 분들도 있는데요. 근로자-회사의 고용관계가 표면적으로는 대등한 독립된 구성원간의 계약이라고 해도 실제로는 근로를 통해서만 소득을 받을 수 있는 직원의 입장에서 회사가 평등할 수 없는 것과 비슷한 상황이 많이 펼져집니다. 본사와 대리점은 서로 다른 사업자이고, 양자의 합의를 통해 계약을 했지만 실제로 사업을 해보면 서로의 입장 차이와 그로 인한 불만이 많은데요. 사업가이지만 결국 본사의 제품이나 서비스에 점점 의존하게 되어 다른 사업이나 수익 창출을 못하고, 그로 인해 재무상태가 안 좋아지는 분들을 봐왔기 때문에 남의 얘기 같지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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