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3월에도 벽돌 책 함께 읽기는 계속됩니다. 이번 벽돌 책을 읽게 된 계기는 작년(2025년) 3월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권보드래의 『3월 1일의 밤』(돌베개)을 여러분과 함께 읽으면서, 모두가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표로 파견되었던 우사 김규식의 활약에 놀라고 또 그의 삶을 좀 더 알고 싶어 했습니다.
공교롭게도 몇 달 뒤에 역사학자 정병준이 1881년 태어나 만 5세에 고아가 되고 나서부터 1945년 해방까지 김규식의 삶과 그가 살아온 시대를 정리한 『김규식과 그의 시대』(전 3권)를 펴냈죠. 세 권 모두 합하면 1,800쪽에 달하는 대작입니다. 원래 『김규식과 그의 시대』 마지막 권으로 기획했던 책은 이미 2023년 『1945년 해방 직후사』(돌베개)로 나왔고요.
이번에 오랫동안 벽돌 책 함께 읽기를 같이 했던 여러분 가운데 특히 『3월 1일의 밤』을 읽으면서 여러 의견을 나눴던 이들이 의기투합해서 2026년 2월과 3월 두 달에 걸쳐서 『김규식과 그의 시대』 세 권을 독파하기로 했습니다. 2023년 8월부터 매월 한 권씩 때로는 1,000쪽이 넘는 진짜 벽돌 책을 읽어온 모임이라서 감히 시도할 수 있는 일이죠.
*
『김규식과 그의 시대』 세 권의 구성은 이렇습니다. 우선 1권은 1881년부터 1919년 3월 1일 직전까지 즉 김규식의 어린 시절부터 30대 후반까지를 다룹니다. 2권의 시간 배경은 딱 3년입니다. 김규식의 가장 빛나던 시기, 1919년부터 1921년까지 3년을 보다 자세하고 풍부하게 다루기 위한 저자의 선택입니다.
3권은 1922년부터 1945년까지, 김규식의 40대부터 60대 초반까지의 시간을 다룹니다. 이 시기 김규식이 주로 중국에서 활동했기에, 1920년대부터 해방까지 엄혹했던 시기 중국에서 전개된 독립운동의 역사도 살펴볼 수 있는 기회입니다. 해방 이후부터 1950년 12월 김규식이 납북 후 세상을 뜰 때까지의 5년을 정리한 책도 꼭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
김규식은 ‘실패한 정치인’입니다. 저자의 말대로 “성공과 실패가 분명치 않은 길을 걸어간 사람인 데다 정치적 추종자를 거느리지 않은 외로운 존재였고, 납북되어 사망함으로써 정치적 유산을 남기지 못한” 비운의 정치인입니다. 오랫동안 그는 “실현 가능성이 없는 이상주의적인 학자형 정치 지도자” 정도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강하고 카리스마 있는” “군중을 호령하고 이끌고 지배하는” “생사를 불문하고 권력을 추구하는 강한 독재자 지도자” 같은 한반도에서 해방 이후에 지금까지 인기 있었던 정치인과는 궤를 달리합니다. 하지만 남북이 대립하고, 한반도 남쪽에서도 정치적 대립이 극단으로 치닫는 지금이야말로 김규식의 “합리적인 중도파 노선”을 성찰해야 하지 않을까요.
들여다보면 볼수록 김규식의 삶도 극적입니다. 미국 유학생 출신이며,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는 어학의 천재였지만, 일신의 영달을 추구하려고 마음만 먹는다면 보장되었을 안락한 삶을 뒤로 하고 공동체의 더 나은 선택을 위해 행동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저자는 『김규식과 그의 시대』를 통해서 역사의 “보이지 않던 장면들, 들리지 않던 목소리들의 이야기를 드러내길 희망”한다고 말합니다. 이 책을 함께 읽으면서 20세기에 한반도가 가지 않았던 길을 상상해 보고, 지금이라도 그 가능성이 우리를 어떻게 다른 방식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할지 고민해 보면 좋겠습니다.
*
『김규식과 그의 시대』 함께 읽기는 온라인 독서 플랫폼 ‘그믐’에서 2월 6일부터 3월 29일까지 두 달에 걸쳐서 진행합니다. 매일 30~40쪽씩 분량을 꾸준히 읽으면서 온라인 게시판에서 자유롭게 인용과 감상을 나누며 이해의 폭을 넓힙니다. 저는 최소한의 가이드 역할만 담당합니다. 우리 2월과 3월에도 벽돌 책 『김규식과 그의 시대』 함께 읽어요!
*
지금까지 함께 읽은 벽돌 책(총 30권)
2023년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 (2023년 8월)
『권력과 진보』 (2023년 9월)
『위어드』 (2023년 10월)
『변화의 세기』 (2023년 11월)
『어떻게 살 것인가: 삶의 철학자 몽테뉴에게 인생을 묻다』 (2023년 12월)
2024년
『사람을 위한 경제학』 (2024년 1월)
『경제학자의 시대』 (2024년 2월)
『앨버트 허시먼』 (2024년 3월)
『감정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2024년 4월)
『나쁜 교육』 (2024년 5월)
『화석 자본』 (2024년 6월)
『세상이라는 나의 고향』 (2024년 7월)
『증오의 시대, 광기의 사랑』 (2024년 8월)
『메리와 메리』 (2024년 9월)
『중국필패』 (2024년 10월)
『마오주의』 (2024년 11월)
『노이즈』 (2024년 12월)
2025년
『행동』 (2025년 1월)
『호라이즌』 (2025년 2월)
『3월 1일의 밤』 (2025년 3월)
『세계를 향한 의지』 (2025년 4월)
『어머니의 탄생』 (2025년 5월)
『냉전』 (2025년 6월)
『소련 붕괴의 순간』 (2025년 7월)
『일인 분의 안락함』 (2025년 8월)
『조지 오웰 뒤에서』 (2025년 9월)
『경이로운 생존자들』 (2025년 10월)
『왜 선한 지식인이 나쁜 정치를 할까』 (2025년 11월)
『미셸 푸코: 1926~1984』 (2025년 12월)
2026년
『항해사 흰닭, 파드레, 그리고 오렌지 반란군의 기이한 모험』 (2026년 1월)
『김규식과 그의 시대 1』, 『김규식과 그의 시대 2』 (2026년 2월)
[책걸상 '벽돌 책' 함께 읽기] #32. <김규식과 그의 시대> (2)
D-29

YG모임지기의 말
화제로 지정된 대화

YG
오늘 3월 1일 삼일절부터 『김규식과 그의 시대 2』, 『김규식과 그의 시대 3』을 이 모임에서 이어서 읽습니다. 감상, 토론, 인용 이 모임에서 하시면 됩니다. 오늘은 쉬시고 내일 3월 2일부터 다시 읽기 시작합니다.

연해
“ 그렇다면 김규식은 누구의 도움으로 청원서를 완성했는가? 김규식은 2명의 성명 미상, 국적 미상의 율사에게 도움을 받아서 "뽑을 것을 뽑고 교정할 것을 교정한 후에 원만한 청원서"를 법률적으로 검토하여 완성했다고 했다. 이들이 누구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김규식은 이들에 대한 기록을 남기지 않았으며, 파리위원부 문서 어디에도 이들의 이름은 거론되지 않았다. ”
『[세트] 김규식과 그의 시대 1~3 세트 - 전3권』 p.279, 정병준 지음
문장모음 보기

연해
“ 김규식과 그를 조력한 국제법 전문가들의 공략 지점이 어디였는가 하는 점을 알 수 있다. 1910년 병합조약이 사기와 강압으로 이뤄져 원천 무효이며, 국민주권론에 입각하여 한국의 주권은 4천 년 이상 지속되어서 황제가 마음대로 넘길 수 있는 물건이 아니며, 한국인 모두가 이 병합조약에 반대했고, 개항 이래 한국이 여러 국가와 맺은 조약 및 국제조약에서 한국의 독립 및 주권이 보전되었으니 이것이 지켜져야 하며, 국제정의와 인도에 입각한 윌슨의 14개조를 기본 정신으로 한 파리강화회의는 당연히 병합조약을 폐지해야 한다는 것이 핵심 주장이자 논리였음을 알 수 있다. 때문에 청원서∙비망록의 제목이 1910년 병합조약의 폐기∙무효였던 것이다. ”
『[세트] 김규식과 그의 시대 1~3 세트 - 전3권』 p.292, 정병준 지음
문장모음 보기
aida
“ 일본의 한국 점렴이 대륙 팽창으로 이어고 , 나아가 태평양 지배로까지 나아갈 것이라고 한 부분은 선견지명이자 미국.영국.프랑스 등 강대국을 상대로 한 한국 독립 주장의 근거이기도 했다. ”
『[세트] 김규식과 그의 시대 1~3 세트 - 전3권』 정병준 지음
문장모음 보기

연해
“ 김규식은 파리강화회의가 실질적으로 종결될 때까지 최선을 다해 한국 입장을 호소하고 독립을 청원했지만, 결국 파리강화회의 석상에서 기회가 제공되지는 않았다. 김규식은 국제연 맹 회의에 기대를 걸었다. 국제연맹 회의는 처음 제네바에서 개최된다고 알려졌으나, 이후 1919년 9월 미국에서 첫 회의를 개최했다고 했다. 파리에서 못 다한 시도를 제네바나 워싱턴에서 한다는 것이 김규식의 주요 목표가 되었다. ”
『[세트] 김규식과 그의 시대 1~3 세트 - 전3권』 p.310, 정병준 지음
문장모음 보기

오구오구
어제 우연히 kbs에서 하는 삼일절 다큐를 보았는데 (시간여행자나오는) 눈물이 찔끔찔금... 감동이었어요~

YG
@오구오구 이 책 읽으면서, 김규식도 KBS 같은 곳에서 돈을 많이 들여서 1918년부터 1922년까지 중국-프랑스-미국-중국-러시아 등까지 그의 여정을 따라가는 다큐멘터리나 드라마를 만들어주면 좋겠다, 이런 생각도 했어요. 저는 NHK에서 1년에 역사 속 인물 한 명씩 정해서 일요일마다 한 시간씩 드라마로 만드는 프로젝트를 한다는 얘기를 듣고서, 우리나라도 그렇게 했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하면서 부러워했거든요. 그리고 그 드라마 주인공으로 김규식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하고요.
화제로 지정된 대화

YG
오늘 3월 2일 월요일은 (대체 휴일이긴 하지만) 5장 2절 '외로운 파리강화회의 외교'를 읽습니다. 273쪽부터 312쪽까지입니다.
처음엔 파리에 홀로 도착해서 고군분투하는 김규식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당시 김규식을 도왔던 중국인 유학생, 파리의 현지 인사 이야기도 흥미롭고, 그가 그들의 도움을 받아서 작성한 공식 청원서 내용도 선견지명이 있습니다.

YG
“ 프랑스는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노동력 부족으로 중국인 노동자 약 20만 명을 수용하고 있었으나, 하층 노동자들의 무뢰배적 행동은 중국의 평판을 악화시킨 측면이 있었다. 이에 따라 이욱영 등은 중국 지식인, 학생 등을 프랑스에 유학시켜 장래의 인재로 자라게 만들자는 근공 검학 운동을 시작한 것이다. ”
『[세트] 김규식과 그의 시대 1~3 세트 - 전3권』 2권 5장 2절, 280쪽, 정병준 지음
문장모음 보기

YG
오늘 읽을 부분에서 이 대목 놓고서 갑자기 다른 책 한 권이 생각나서 까먹기 전에 메모합니다. @밥심 님께서도 병행 독서 하셨다는 『바벨』의 작가 R. F. 쿠앙의 그 다음 작품이 『옐로페이스』라는 화제작인데요. 이 『옐로페이스』에서 주인공이 훔친 (사망한) 친구의 작품의 소재가 바로 제1차 세계 대전 당시에 참전했던 중국인 노동자 이야기입니다. 저는 이렇게 책과 책이 아주 우연히 연결될 때마다 괜히 기분이 좋습니다.

옐로페이스20대 중반의 나이에 네뷸러상, 로커스상, 영국도서상 등을 수상하며 영미권에서 가장 핫한 젊은 작가로 떠오른 R. F. 쿠앙이 자신이 반짝 스타가 아니라 대중성과 문학성을 겸비한 차세대 작가임을 전 세계 독서계에 강렬하게 각인시킨 문제작.
책장 바로가기

오구오구
추천해 주셔서 저도 읽었어요~
마지막까지 스릴러 읽는 듯 아주 재밌었어요
이야기 해주시니 내용도 생각나네요

YG
“ (1919년 4월 5일(제출일은 1919년 5월 10일) 김규식의 파리 강화 회의 청원서) 둘째, 일본의 한국 점령이 대륙 팽창으로 이어지고, 나아가 태평양 지배로까지 나아갈 것이라고 한 부분은 선견지명이자 미국, 영국, 프랑스 등 강대국을 상대로 한 한국 독립 주장의 근거이기도 했다. ”
『[세트] 김규식과 그의 시대 1~3 세트 - 전3권』 2권 5장 2절, 291쪽, 정병준 지음
문장모음 보기

YG
이 대목은 정병준 선생님도 지적하셨듯이 선견지명인데. 여러분 혹시 이 글 읽어보셨나요? 이시바 시게루 전 총리가 재임 당시였던 2025년 10월 10일 발표한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80주년 개인 명의 담화입니다.
*
「전후 80년에 부쳐서」
서문
지난 대전의 종전으로부터 80년이 흘렀습니다.
이 80년 동안 우리나라는 일관되게 평화국가로서의 길을 걸으며, 세계의 평화와 번영에 힘써왔습니다. 오늘날 일본의 평화와 번영은, 전몰자를 비롯하여 수많은 분들의 고귀한 생명과 고난의 역사 위에 세워진 것입니다.
저는 3월의 이오지마 방문, 4월 필리핀 카릴라야의 일본 전몰자 위령비 참배, 6월 오키나와 전몰자 추도식과 히메유리 평화기념자료관 방문, 8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폭 희생자 위령식, 그리고 종전기념일의 전국 전몰자 추도식 참석을 통해, 지난 대전의 반성과 교훈을 다시금 깊이 가슴에 새길 것을 다짐했습니다.
전후 50년, 60년, 70년의 각 이정표마다 내각총리대신 담화가 발표되어 왔으며, 역사 인식에 관한 역대 내각의 입장을 저 역시 계승하고 있습니다.
다만, 과거 세 차례의 담화에서는 “왜 그 전쟁을 피할 수 없었는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전후 70년 담화에서도 “일본은 외교적·경제적 막다름을 힘의 행사로 해결하려 했다. 국내 정치 시스템은 그것을 제어하지 못했다”는 구절이 있을 뿐, 그 이상의 세부 논의는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정치 시스템은 제어장치가 될 수 없었는가.
제1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세계가 총력전의 시대에 들어서 있었던 가운데, 전쟁 전 내각이 설치한 ‘총력전연구소’나 육군성이 설치한 ‘아키마루 기관’ 등의 분석에 따르면, 패전은 필연이었습니다. 많은 식자층이 전쟁 수행의 어려움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정부와 군부의 수뇌부 또한 그것을 인식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전쟁을 피하는 결단을 내리지 못한 채 무모한 전쟁으로 돌진하여 국내외의 수많은 무고한 생명을 희생시키는 결과가 되었는가. 전 총리 요나이 미쓰마사가 “지리한 궁핍을 피하려다 한꺼번에 몰락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고 경고했음에도 불구하고, 왜 근본적인 노선 전환을 하지 못했는가.
전후 80년의 이 시점에서, 국민 여러분과 함께 깊이 생각하고자 합니다.
대일본제국헌법의 문제점
먼저 제도적 문제를 들 수 있습니다. 당시 일본에는 정치와 군사를 적절히 통합하는 구조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대일본제국헌법 아래에서 군을 지휘하는 통수권은 독립된 권한으로 간주되었고, 정치가 군보다 상위에 있어야 한다는 ‘문민통제’의 원칙이 제도적으로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내각총리대신의 권한도 제한적이었습니다. 제국헌법하에서 내각총리대신을 포함한 각 국무대신은 대등한 관계로 간주되었으며, 총리는 내각의 수반으로서의 지위를 가지되 내각을 지휘·명령할 권한은 부여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러일전쟁 무렵까지는 ‘원로’들이 외교, 군사, 재정을 통합하는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무사 출신으로 군사를 잘 이해한 원로들이 이를 통제할 수 있었습니다. 마루야마 마사오의 표현을 빌리면, “헌법을 초월한 존재인 원로·중신들의 매개”가 국가의 의사 일원화에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이 원로들이 세상을 떠나고 비공식적 조정 메커니즘이 쇠퇴한 뒤, 다이쇼 민주주의 아래에서 정당이 정치와 군사의 통합을 시도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세계 질서가 크게 변동하는 가운데 일본은 국제협조의 주요 주체 중 하나로서 국제연맹 상임이사국이 되었고, 1920년대의 시라하라 외교 등은 제국주의적 팽창을 억제했습니다.
그 시기 여론은 군에 비판적이었고, 정당은 대규모 군축을 주장했습니다. 군인은 위축감을 느꼈으며, 이러한 반발이 쇼와기에 군부가 대두한 배경 중 하나로 여겨집니다.
당시 문민통제의 부재라는 제도적 문제를 원로, 그리고 정당이 운영상으로 보완하고 있었던 셈입니다.
정부의 문제
점차 통수권의 의미가 확장되면서 군부는 이를 정부와 의회의 통제를 배제하는 수단으로 이용하게 되었습니다.
정당내각 시대에는 정권 획득을 위한 스캔들 폭로전이 이어져 정당은 국민의 신뢰를 잃었습니다. 1930년, 야당 입헌정우회는 해군 일부와 손잡고 런던 해군 군축조약의 비준을 둘러싸고 ‘통수권 침해’라 주장하며 정부를 공격했습니다.
1935년에는 헌법학자 미노베 다쓰키치의 ‘천황기관설’을 공격 대상으로 삼아 군부까지 휘말리는 정치문제로 비화했습니다. 당시 오카다 내각은 학문적 문제는 학자에게 맡길 수밖에 없다며 거리를 두려 했으나, 결국 군부의 요구에 굴복해 ‘국체명징 성명’을 두 차례 발표하고 미노베의 저작을 금서로 만들었습니다.
이로써 정부는 군부에 대한 통제력을 완전히 잃었습니다.
의회의 문제
군을 통제해야 할 의회 또한 그 기능을 상실했습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1940년의 사이토 다카오 의원 제명 사건입니다. 그는 본회의 연설에서 전쟁의 수렁화를 비판하고 정부의 전쟁 목적을 추궁했는데, 육군은 이를 모욕이라 반발했고, 압도적 다수(찬성 296표, 반대 7표)로 제명되었습니다. 의회 내에서 책임 있는 발언을 하려 했던 드문 사례였지만, 당시 회의록의 3분의 2는 아직도 삭제된 상태로 남아 있습니다.
예산 심의에서도 의회는 군에 대한 견제 기능을 전혀 하지 못했습니다. 1937년 이후 군사비는 특별회계로 처리되어 내역이 공개되지 않았고, 심의는 비공개·단시간에 이루어졌습니다.
심지어 육해군 간에는 조직 이익과 체면을 걸고 예산 쟁탈전이 벌어졌습니다.
또한 다이쇼 말기부터 쇼와 초기에 걸쳐 15년 동안, 현직 총리 3명을 포함한 수많은 정치인이 국수주의자나 청년 장교들에게 암살당했습니다. 이들은 모두 국제협조와 문민통제를 중시한 인물들이었습니다.
5·15사건과 2·26사건을 포함한 이런 테러들은 문민들이 군의 정책과 예산을 논의하는 자유를 심각하게 위축시켰습니다.
언론의 문제
언론의 책임 또한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1920년대 언론은 팽창정책에 비판적이었고, 이시바시 단잔은 식민지 포기를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만주사변 이후 언론은 전쟁 지지로 돌아섰고, 전쟁 보도로 신문 판매는 급증했습니다.
1929년 세계대공황 이후 보호무역이 확산되며 일본의 수출이 타격을 받자, 불황과 함께 민족주의가 고조되고 독일의 나치, 이탈리아의 파시스트당이 득세했습니다. 자유주의·민주주의·자본주의가 끝났다는 인식이 퍼지며 전체주의와 국가사회주의를 수용하는 토양이 형성되었습니다.
이런 가운데 관동군 일부가 만주사변을 일으켰고, 언론은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해 국민의 열광을 부추겼습니다.
1937년 이후 언론 통제가 강화되어 정부 비판은 사라지고 전쟁 찬양만이 남았습니다.
정보 수집·분석의 문제
1939년 독·소 불가침조약 체결로 평화내각이 총사퇴한 사건은 일본이 국제정세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음을 보여줍니다. 정보 수집, 분석, 공유 체계 모두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오늘날의 교훈
전후 일본은 문민통제를 제도적으로 확립했습니다. 내각총리대신과 국무대신은 모두 문민이어야 하며, 자위대는 총리의 지휘 아래 있습니다.
내각의 통일성과 책임 구조가 헌법상 보장되었고, 국가안전보장회의(NSC)가 설치되어 외교·안보의 종합조정이 강화되었습니다.
그러나 제도는 운용이 제대로 되어야 의미가 있습니다. 정치가 자위대를 이해하고 활용할 능력과 식견을 갖추어야 합니다.
무책임한 포퓰리즘에 휘둘리지 않고, 대세에 따르지 않는 정치가로서의 자존과 책임이 필요합니다.
자위대는 전문가 집단으로서 정치에 대해 적극적으로 설명하고 의견을 제시해야 합니다.
정치는 조직 간의 분열을 넘어 국가이익을 통합해야 합니다. 육해군의 대립과 내부 불통으로 국가 의사가 일원화되지 못해 전쟁으로 치달았던 과거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정치는 항상 국민 전체의 복지와 이익을 생각하며, 장기적·합리적 판단을 해야 합니다. 책임의 소재가 불분명한 상황에서, 용감한 구호나 감정적 결단이 환영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일본은 냉정함을 잃고 파멸로 향했습니다.
정부의 오판을 막는 것은 의회와 언론의 책임입니다.
국회는 헌법이 부여한 권한으로 정부를 견제해야 하며, 여론영합이나 인기영합의 정치를 해서는 안 됩니다.
사명감을 지닌 언론과 건전한 공론장이 필요합니다. 대전 당시 언론이 국민을 무모한 전쟁으로 몰아넣었던 사실을 되풀이해서는 안 됩니다. 상업주의, 배타적 민족주의, 차별·배외주의를 용납해서도 안 됩니다.
아베 신조 전 총리가 폭력에 희생된 사건을 포함하여, 폭력에 의한 정치의 유린, 자유로운 언론을 위협하는 차별적 언동은 결코 용납될 수 없습니다.
이 모든 기반은 역사를 배우려는 자세입니다. 과거를 직시하는 용기와 성실성, 타인의 주장에 귀 기울이는 관용, 이것이 진정한 리버럴리즘이며, 건강하고 강건한 민주주의의 근간입니다.
윈스턴 처칠이 통찰했듯, 민주주의는 완전한 제도가 아닙니다. 비용과 시간이 들고, 때로는 잘못을 저지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역사 앞에 겸허해야 하며, 교훈을 깊이 새겨야 합니다.
자위와 억지력을 위한 실력 조직을 보유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지만, 그것이 민주적 통제를 벗어나 폭주한다면 민주주의는 단숨에 붕괴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문민 정치가의 오판으로도 전쟁은 일어날 수 있습니다. 문민통제와 적절한 정군 관계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의회, 정부, 군, 언론 모두가 이를 항상 인식해야 합니다.
사이토 다카오 의원은 “정의가 이기는 것이 아니라 강자가 약자를 정복하는 것이 전쟁이다. 성전(聖戰)의 이름 아래 국가의 백년대계를 그르쳐서는 안 된다”고 현실주의적 정책의 중요성을 주장하다가 제명되었습니다.
이듬해, 공습 시 시민의 대피를 ‘전쟁 지속 의지의 결여’로 본 육군의 발언도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과거의 일이지만, 의회의 책임 포기, 정신주의의 만연, 인명과 인권 경시의 위험성을 강하게 경고합니다.
역사에 정면으로 마주하지 않고는 밝은 미래를 열 수 없습니다. 전후 일본이 가장 복잡한 안보 환경에 처한 지금, 우리는 다시금 역사의 교훈을 되새겨야 합니다.
전쟁의 기억이 점차 희미해지는 지금이야말로, 젊은 세대를 포함한 모든 국민이 전쟁과 평화의 의미를 능동적으로 생각하고 미래에 살려야 합니다. 그것이 평화국가로서의 토대를 더욱 견고히 하는 길입니다.
저는 국민 여러분과 함께, 지난 대전의 다양한 교훈을 가슴에 새기며, 다시는 그러한 참화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향팔
감사합니다.
관련해서 강유원샘의 코멘트를 들은 적 있는데 도움이 될 듯하여 올려봅니다. 함께 읽을 만한 책들도 소개되어 있네요.
https://buymeacoffee.com/booklistalk/shokan

왜 전쟁까지 - 일본 제국주의의 논리와 세계의 길 사이에서2017년 기노쿠니야 인문 대상 수상작. 전작에서 청일전쟁에서 태평양전쟁까지 이어진 일본의 근현대 50년을 탁월한 시각으로 분석한 가토 요코가, 이번에는 일본이 진 주만을 기습 공격하기까지 10년간 어떤 상황에서 무엇을 검토하고 결국 어떤 선택을 내렸는지를 면밀하게 추적한다.

도조 히데키와 제2차 세계대전 - 일본을 패망으로 몰고 간 한 우익 지도자의 초상일본을 대표하는 논픽션 저널리스트로 손꼽히는 저자가 6년에 걸쳐 도조 히데키 시대의 자료와 관련자 수백 명을 취재해 도조 히데키의 실체를 드러낸 역작이다. 그저 '혐오감을 유발하는 A급 전범' 정도의 이미지로만 남아있던 도조 히데키의 실체를 드러냈다.

참모본부와 육군대학교 - 제국육군의 영광과 종언대일본제국이 파멸로 이르는 과정을 추적하는 책이다. '야마가타의 참모본부', '환상으로 끝난 통합참모본부', '육군대학교와 멕켈', '참모본부의 초진', '의문시된 육대의 가치', '충격 속의 어지러운 질주', '이시하라 간지의 좌절', '조직이 만든 광기' 총 8장으로 구성되었다.

키메라 - 만주국의 초상1932년에 중국 동북지방에서 건국되었다가 1945년에 태평양전쟁에서의 일본의 패망과 함께 홀연히 자취를 감춘 나라 만주국. 이 책은 만주국이 왜 건국되었고 그 목적은 무엇이었는지, 운영과정은 어떠했고, 일본인과 중국인은 이 과정에 어떻게 관여했는지 등 만주국의 전체상을 알 수 있는 입문서다.

제국의 기획 - 혁신관료와 일본 전시국가영미권 일본사 연구의 최신 성과로 출간되자마자 큰 반향을 일으킨 책이다. 저자는 당대 독일과 일본의 사상사적.학문적 연원을 추적했고 그 상호작용을 드러냈다. 이론적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실질적으로 일본과 독일 등에서 나온 당대 1차 자료들을 충실하고 치밀하게 활용하였다.
책장 바로가기

오구오구
무표정의 이시바 총리가 이런 담화를 했었군요. 기존의 사과 반성을 넘어서 구조적인 분석을 제시한 부분이 이전 총리들과 다른 부분이죠?
무엇보다 시스템의 문제. 특히 여론의 위험까지.
훌륭하네요. 한국뉴스에서 볼수 없는 내용이네요
사이토 다카오 같은
소수를 제명한 부분까지 비판하였네요.
이 담화가 일본내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 궁금하네요

향팔
일본 총리가 이렇게 상식적이고 역사 의식을 갖춘 얘길 하는 걸 저는 처음 본 것 같아요. 물론 단기간 재임 후 물러나기 전 개인 명의로 발표한 의견이긴 하지만 (마지막으로 할말은 하고 가겠다는?), 그래도 충분히 의미가 있는 듯합니다. 여러 번 읽어볼 만하다고 생각했어요.

YG
@향팔 @오구오구 저는 그 글 읽고서 이런 헛생각도 했었어요;
[이시바 시게루와 헛생각]
예전에 『도련님의 시대』(세미콜론)를 재미있게 읽을 때도 들었던 생각이고, 오늘(10월 13일) 일본 이시바 시게루 총리의 종전 80주년 메시지를 읽으면서도 들었던 생각. 만약 이시바 총리의 비판적 평가대로 다이쇼 후기와 쇼와 초기(1920~1930년대)에 일본이 군부에 휘둘리지 않은 정상 국가의 길로 갔다면 지금 우리는 한반도에서 레이와 7년을 살고 있을 수도.
아니면 제2차 세계 대전 후에 인도, 인도네시아 나중에 알제리, 베트남처럼 뒤늦게 독립했을까? 냉전기 그 독립의 과정은 어땠을까? 한국 전쟁이나 분단 없이 독립했을까? 독립 후에는 일본의 속국 형태로 경제적 식민지로 종속되었을까? 아니면 냉전기 동북아시아의 스웨덴이나 핀란드 혹은 독일 베를린처럼 서울이 나중에 세계 첩보 소설의 무대가 되었을까?
이시바 총리의 명문을 읽으며 출근하다가 든 헛생각.

향팔
으앜 ㅋㅋㅋ 레이와 7년이라니 (진짜 그랬을 수도.) 갑자기 소름이 막 돋네요

적륜재
복거일의 "비명을 찾아서"의 부제가 "경성, 쇼우와 62년"이었습니다. 안중근 의사가 아니었으면(이토 히로부미는 병합에 반대 입장이었다고 합니다. 대신 위성국 같은 형태로 끌고 가려 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혹은 일본 군부의 폭주가 아니었다면 정말 그렇게 되었을거란 생각에 동감입니다.

향팔
두분 글을 보니 한편으론 아찔하면서 정신이 번쩍 드네요. 이시바 총리의 합리적인 담화 속에 숨은 서늘한 가능성, 어쩌면 전혀 다른 방향으로 튈 수도 있었을 역사의 아이러니…. 역사는 정답을 찾기보다는 질문을 던지는 공부라고 하던데, 왜 그런지 조금 알 것 같습니다.
작성
게시판
글타래
화제 모음
지정된 화제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