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성(결국 자금을 받으려면)을 둘러싼 분열/갈등구조가 복잡하고 난투극이라 세세히 납득하기는 어렵지만 가장 답답한 분량이었습니다.
새로운 대안으로 소비에트러시아가 떠올랐으나, 무너지고 있는 임시정부와 고려공산당 분파들은 실제 자금이 나오는 곳이엇기에 서로 주도권을 잡으려 사력을 다했을 거겠지요.. 이르쿠츠크파도 그런 명분을 세우려 외교교섭단장에 김규식을 세웠을까요?
가는 도중에 붕괴되고 있던 임시정부의 특사단이 김규식에 대한 원색적 비난. 이해할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세 파벌 중 아무도 이기지 못했고, 챕터 마지막에 가서야 등장하는 여운형의 판단력과, 희망에 매몰된 고지식한 김규식과 대비가 여운을 남기는 장이었습니다.
[책걸상 '벽돌 책' 함께 읽기] #32. <김규식과 그의 시대> (2)
D-29
aida

YG
@aida 짐작해 보면, 김규식은 자기 맡은 책임에 굉장히 신실했던 분 같아요. 예를 들어, 어떤 책임을 맡아도 자아가 항상 우선인 분들이 있잖아요? 그런데 김규식은 일단 책임을 맡으면, 조직 논리에 따라서 최선을 다하는 그런 스타일? 반면, 여운형은 훨씬 상황에 따라서 유연하고 또 자기가 낄 때, 끼지 않을 때를 예민하게 포착하는 스타일?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왠지 웃프네요.

오구오구
정치인으로 중요한 역량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ㅠㅠ
aida
@YG 님의 댓글 읽으니, 파리에 갈때도 갑작스럽게 신한청년당의 대표가 되어 홀로 몸 버리며 최선을 다했었죠. 그 때도 대표로 가서 잘해낼수 있는 사람이었고, 모스크바에서도 그런 경력과 성격의 인물이었기에 책임지는 자리에 추대되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신한청년당도, 고려공산당도 활동하다가 대표가 되지 않았네요. 일단 이 길이 가능성이 있다 싶으면 매진하셨네요. 정치가로는 여운형이 맞는 것 같습니다. 김규식은 속으로 내상을 참을 타입 같아요..ㅡㅡ

향팔
그러게요. 미국에서 공채 팔러 다닐 때도 너무 열심히 하고… 고지식한 원칙론자 스타일 ㅜㅜ

stella15
여기서 자아가 우선시되는 사람은 이승만 같은 사람을 말하는 걸까요? 암튼 김규식이나 여운형 같은 스타일은 어느 조직에나 필요한 것 같습니다. 근데 이승만에 대해서 좀 알고 싶어졌습니다. 어제 무슨 자료를 찾다 의외로 이승만에 대한 업적이나 신뢰가 제가 알고 있는 것 보다 상당히 높은 것 같더군요. 김규식과 이승만이 서로 앙숙이긴 하지만 이승만은 왜 그랬을까? 둘을 따로 떼어 놓고 볼 필요도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요. 이때나 지금의 정치 상황도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독립을 이루었지만 반쪽짜리라는 것. 뭔가 시사하는 바도 큰 것 같고. 이 분야는 파고 파도 끝이없을 것 같습니다. 다른 나라는 어떻게 독립을 이루었을까도 궁금하고. 아, 이런 얘기는 마지막 날에 해야하는 것 같은데 미리하는 분위기가 됐네요. ㅋㅋ

거북별85
저도 @stella15 님의 의견에 동감합니다. 이승만이라는 인물은 그냥 보면 화가 나는 지점이 많은데 또 어떻게 보면 다른 면들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알수가 없습니다. 저도 별로 관심없던 당시 우리와 비슷했던 다른 나라들의 독립과정도 궁금해 지더라구요.
화제로 지정된 대화

YG
오늘 3월 11일 수요일은 1장 3절 '모스크바에서의 분열'을 읽습니다. 79쪽부터 112쪽입니다.
앞에서 얘기한 대로, 모스크바에서 한국 독립 운동 진영은 두 개의 공산당 조직과 임시 정부가 각각 자기의 대표성을 인정해 달라면서 극심한 분열에 시달렸고, 김규식은 딱 그 중심에 서서 한쪽 경향을 대변하는 악역을 맡게 됩니다. 후대 사람인 우리가 보기에는 참으로 답답한 상황이죠;

YG
“ 외교교섭단(이르쿠츠크파), 상해파, 임시정부 등 3대 세력은 소련 정부와 코민테른을 상대로 레닌 자금을 둘러싼 쟁탈전, 국민 대표 회의 개최를 둘러싼 충돌을 벌였다. 또한 고려공산당 연합 중앙 간부 내부에서는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의 대충돌이 벌어졌다. 갈등과 혼란, 대충돌은 중층적이고 복잡했다. 레닌 자금은 한국 공산주의 운동, 혁명 운동, 민족 해방 운동의 통일이 아니라 극한적 분열적 대립의 단초가 된 것이다. ”
『[세트] 김규식과 그의 시대 1~3 세트 - 전3권』 3권 1장 3절, 91쪽, 정병준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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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G
“ 상해파-이르쿠츠크파-임정 세력 간 대충돌 와중에서 김규식은 1918년 이래 자신이 걸어온 길을 부정함으로써 자신의 현재와 미래를 규정하게 된 셈이다. 상해파는 그가 상해 임시정부 대표로 친미 외교 활동을 벌인 주역이라고 비난했고, 임시정부 특사단은 임정을 폄하하는 가장 사악한 인물이자 중풍 환자, 기회주의자라고 비난했다. 코민테른이 그의 고려공산당 활동을 중단시키기에 이르자 짧은 고려공산당원 생활도 사실상 중단되었다. 그의 삶을 규정해 온 상해 임시정부와의 연계망, 인간관계의 그물망은 회복할 수 없는 손상을 입은 듯했다.
모스크바행에서 김규식의 일면이 드러났다. 이것이 여운형과 김규식의 차이점이기도 했다.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원으로 공산주의 문헌을 번역하는 적극 선전자였던 여운형은 모스크바에서 다른 선택과 판단을 했다. 모스크바 체류 중 여운형은 자유시 참변에 대한 이르쿠츠크파의 선전에 의문을 가졌고, 외교 교섭단에 포함되지 않았다. 모스크바에서 이르쿠츠크로 갔다가 만주로 돌아오는 도중 여운형은 독자적 조사를 통해 자유시 참변의 실상이 극동 민족 대회의 보고와는 달리 마녀 사냥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판단했다. 강덕상의 해석에 따르면 여운형이 국민 대표 회의에서 창조파의 입장을 견지한 김규식과는 달리 개조파로 남게 된 이유이기도 했다. 자유시 참변에 대해 정통 이르쿠츠크파와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던 여운형은 반대파에 의해 억류되거나 테러를 당할 위험에 처했다. 여운형은 이르쿠츠크-만주리를 거쳐 체포를 면하고 겨우 하얼빈으로 와서, 동화대학 교장이자 공산당원으로 여운형의 친구인 등려민의 자택에 도착했다. 여운형은 장춘-봉천-천진-북경을 거쳐 상해로 귀환했는데, 장춘과 봉천에서는 체포하려는 밀정을 피해 해당 역 이전에 내려서 다음 역에서 탑승하는 일을 반복했다. 여운형은 1922년 3월 하순에 고려공산당 합동 문제를 신채호, 박용만 등과 논의하기 위해 천진으로 갔고, 4월에는 북경에서 개최된 북경 만국 기독교 청년회 회의에 참석한 이상재, 여운홍, 김필례, 신흥우 등에게 극동 민족 대회의 경과를 알렸다. ”
『[세트] 김규식과 그의 시대 1~3 세트 - 전3권』 3권 1장 3절, 110~111쪽, 정병준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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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G
계속해서 등장하는 ‘자유시 참변’을 놓고 잠깐 최신 연구 경향을 살펴봤습니다.
자유시 참변은 1921년 6월 28일 극동 공화국 아무르주 자유시(스보보드니) 인근 수라젭카에서 사할린 한인 부대가 네스토르 칼란다리시빌리가 지휘한 극동 공화국 인민혁명군에게 진압당한 사건입니다. 이 과정에서 수십 명이 사망하고, 수천 명이 무장 해제된 후 포로가 되거나 흩어진 비극적인 사건이죠. (과거에는 사망자 숫자도 부풀려져 알려지곤 했습니다.)
저도 자유시 참변의 존재를 처음 알았던 게 대학교 입학 전 겨울 방학 때 조정래의 『아리랑』을 읽으면서였던 것 같아요. 그때도 ‘무슨 이런 황당한 일이 다 있지’ 싶어서 화가 많이 났던 기억이 납니다. 당시만 하더라도 철저한 민족주의 시각에서 그 사건을 바라봤던 것이죠.
대중적으로는 여전히 그런 시각이 득세하고, 또 이 사건을 이르쿠츠크파와 상해파 사이의 갈등, 피해자인 상해파를 ‘선’으로, 이르쿠츠크파를 ‘악’으로 보는 경향도 강합니다. 하지만 최근의 연구 경향은 훨씬 복잡한 당시 사건의 실체를 보여줍니다. 이 자유시 참변을 놓고는 이반 사블린과 알렉세이 게오르기예비치 테플랴코프, 두 역사학자의 연구 성과가 주목받고 있습니다.
1. 이반 사블린: ‘국가 만들기’라는 거시적 압력
사블린은 자유시 참변을 다양한 민족적, 정치적 행위자가 충돌했던 당시 극동 공화국의 지정학적 상황 속에서 살펴야 한다고 봅니다. 볼셰비키 중앙 권력은 시베리아와 극동의 혼란스러운 상황을 종식하고, 베버적 의미에서의 ‘정당한 물리적 폭력의 독점’을 행사하는 근대적 정규군 체계와 국가 주권을 관철하려고 했습니다. 자유시 참변은 이 국가화(Statization) 과정에서 발생한 비극적 부산물이라는 해석이죠.
즉, 볼셰비키 중앙 권력은 통제되지 않은 민병대 성격의 사할린 한인 부대를 국가 기구 내부로 편입시키려 했으나, 사할린 부대가 무장 해제 명령에 저항하면서 충돌이 발생했다는 것입니다. 이는 자유시 참변이 왜 일어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구조적 필연성을 설명해 줍니다.
2. 알렉세이 테플랴코프: 특무 기구와 폭력의 기술
테플랴코프는 소비에트 국가 기구 내의 감시와 폭력 기관(특무 부서)의 활동을 집요하게 추적한 국가 폭력 연구자입니다. 테플랴코프의 연구를 보면 자유시 참변의 실행 과정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우선, 소비에트 정규군은 한인 독립군 부대에 무장 해제 혹은 본거지인 만주로의 귀환을 요구했습니다.
사할린 한인 부대는 만주로 귀환하지도, 무장 해제 요구에 응하지도 않았습니다. 비정규 파르티잔 특유의 자율성은 근대적 군율과 충돌했고, 이 과정에서 발생한 현지 민원 등은 소비에트 당국에 진압의 명분을 제공했습니다. 이때 사건의 주역인 네스토르 칼란다리시빌리가 해결사로 투입됩니다. 테플랴코프가 ‘모험가적 범죄성’을 지녔다고 비판한 그는 이 통제 불능의 부대를 단순한 해산이 아닌 물리적 제거의 대상으로 대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더구나 칼란다리시빌리는 이르쿠츠크파 공산당과 긴밀히 연계되어 있었기에, 사건의 전개와 사후 수습 과정이 정치적 파벌 싸움의 양상까지 띠게 되며 더욱 복잡해졌습니다. 이런 국제정치적 구조와 미시적 폭력의 결합을 염두에 두면, 당시 현장에서 정보를 습득하고 대응해야 했던 김규식, 여운형 등의 고뇌와 행보가 더욱 입체적으로 다가옵니다.

오구오구
정리해 주셔서 감사해요. 그렇지 않아도 궁금해서 찾아볼까 했거든요.
아리랑을 20대에 저도 읽었는데, 기억이 하나도 안 나네요. 이제 50즈음에 다시한번 읽어봐야겠네요 ㅎ

stella15
ㅎㅎ 저는 이 나이 먹도록 조정래는 읽어 볼 엄두도 내지 못했습니다. 반성합니다. ㅠ

YG
@stella15 책은 모두 시대적 역할이 있는데, 제 짧은 견해로는 조정래 작가의 책은 그 역할이 다한 게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해봐요. 굳이 읽으실 필요 있겠나, 싶습니다만. :)

stella15
아, 그런가요?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위로가 되는데요? ㅎㅎ 그래도 이 책이 한창 인기있었을 때는 제가 구한말, 개화기 뭐 이런데 관심이 없어서 읽을 필요를 못 느꼈다가 요즘 관심이 생기니까 덩달아 읽고 싶은 생각이 들어서요. 요즘 영화 <왕사남>이 뜨니까 이광수의 <단종애시>가 옷을 새로입고 서점에 출격했더군요. 예전같으면 쳐다보지도 않았을텐데. 책은 돌고도는 것 같아요.

향팔
중학교 때 국어 선생님의 강력 추천으로 <아리랑>과 <태백산맥>을 읽었어요. 그때 그 책이 얼마나 난리였는지, 배달하던 신문지 하단에 “이제 대학생이 되셨다면 태백산맥을 넘으세요”(?) 같은 광고 문구가 있었던 게 아직 기억나네요. 어릴 때는 혼자 막 분노하면서 재미있게 유용하게 잘 읽었고 오랫동안 집에 보관하다가, @YG 님 말씀대로 이제 다시 읽을 일은 없을 것 같아 10년 전 이사할 때 몽땅 처분했지요.
조정래의 <한강>은 20대 때 읽기 시작했는데 너무 재미가 없어서 중간에 때려치웠답니다.

stella15
ㅎㅎㅎ 그러니까 조정래는 딱 <아리랑> 까지만! 사실 저도 20대 초중반 무렵에 오빠가 <태백산맥> 한 질을 산 적이 있는데 그땐 읽어 볼 생각도 안 했습니다. 그러다 이사하면서 오빠가 버렸는데 버리지 말고 끌고 올 걸 그랬나 한 3초 후회한 적이 있었죠. 그때 조정래 작가 정말 인기가 하늘을 찔렀죠. 그 시절 남성작가 트로이카하면 이문열, 황석영, 조정래가 아니었나요. 그때 모 대학 국문과 과제가 <태백산맥>을 읽고 감상문인가 레포트를 내는 거라고 하던데, 어떤 학생이 책 읽기 싫어 그냥 영화 보고 냈다는 전설같은 이야기가 있었죠. 요즘 같으면 이해할 것 같기도한데 말입니다. ㅎㅎ 저도 그땐 역사소설엔 영 흥미가 없어서 말입죠. 지금은 생각만 그렇지 언제 읽겠단 계획은 없습니다. ㅋ

향팔
아 맞아요 영화도 있었군요. 스틸컷을 찾아보니 고 안성기 님이 참 젊으시네요. 그러고보니 오래전에 일 때문에 광주에 갔다가 벌교에도 살짝 들른 적이 있었는데, 태백산맥 문학의 거리?가 조성되어 있더라고요. 그때는 일행이랑 대강만 휙 둘러보고 꼬막에 쏘주 먹으러 가기 바빴었네요.


stella15
아, 그러고보니 그곳에 조정래 문학관 있지 않나요? 전에 TV 보니까 어디 있다고 들었는데. 암튼 거기가면 그가 쓴 육필 원고가 사람 키 보다 높이 쌓였다고 들은 것 같습니다. 일행이 향팔님처럼 문학에 관심있어 하는 분이 아니셨나 봅니다. 하하.

향팔
맞아요, 문학관도 있었고 그 거리 전체가 태백산맥 문학거리였던가 그랬어요. 보성여관도 있고 소화의 집도 있고…. 일행들도 거의 그 책을 읽어본 사람들이었지만 그땐 저도 그렇고 다들 책보다는 꼬막에 정신이 팔려 있어서 문학관에는 아예 들어가볼 생각도 안했답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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