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19년 4월 5일(제출일은 1919년 5월 10일) 김규식의 파리 강화 회의 청원서) 둘째, 일본의 한국 점령이 대륙 팽창으로 이어지고, 나아가 태평양 지배로까지 나아갈 것이라고 한 부분은 선견지명이자 미국, 영국, 프랑스 등 강대국을 상대로 한 한국 독립 주장의 근거이기도 했다. ”
『[세트] 김규식과 그의 시대 1~3 세트 - 전3권』 2권 5장 2절, 291쪽, 정병준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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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G
이 대목은 정병준 선생님도 지적하셨듯이 선견지명인데. 여러분 혹시 이 글 읽어보셨나요? 이시바 시게루 전 총리가 재임 당시였던 2025년 10월 10일 발표한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80주년 개인 명의 담화입니다.
*
「전후 80년에 부쳐서」
서문
지난 대전의 종전으로부터 80년이 흘렀습니다.
이 80년 동안 우리나라는 일관되게 평화국가로서의 길을 걸으며, 세계의 평화와 번영에 힘써왔습니다. 오늘날 일본의 평화와 번영은, 전몰자를 비롯하여 수많은 분들의 고귀한 생명과 고난의 역사 위에 세워진 것입니다.
저는 3월의 이오지마 방문, 4월 필리핀 카릴라야의 일본 전몰자 위령비 참배, 6월 오키나와 전몰자 추도식과 히메유리 평화기념자료관 방문, 8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폭 희생자 위령식, 그리고 종전기념일의 전국 전몰자 추도식 참석을 통해, 지난 대전의 반성과 교훈을 다시금 깊이 가슴에 새길 것을 다짐했습니다.
전후 50년, 60년, 70년의 각 이정표마다 내각총리대신 담화가 발표되어 왔으며, 역사 인식에 관한 역대 내각의 입장을 저 역시 계승하고 있습니다.
다만, 과거 세 차례의 담화에서는 “왜 그 전쟁을 피할 수 없었는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전후 70년 담화에서도 “일본은 외교적·경제적 막다름을 힘의 행사로 해결하려 했다. 국내 정치 시스템은 그것을 제어하지 못했다”는 구절이 있을 뿐, 그 이상의 세부 논의는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정치 시스템은 제어장치가 될 수 없었는가.
제1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세계가 총력전의 시대에 들어서 있었던 가운데, 전쟁 전 내각이 설치한 ‘총력전연구소’나 육군성이 설치한 ‘아키마루 기관’ 등의 분석에 따르면, 패전은 필연이었습니다. 많은 식자층이 전쟁 수행의 어려움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정부와 군부의 수뇌부 또한 그것을 인식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전쟁을 피하는 결단을 내리지 못한 채 무모한 전쟁으로 돌진하여 국내외의 수많은 무고한 생명을 희생시키는 결과가 되었는가. 전 총리 요나이 미쓰마사가 “지리한 궁핍을 피하려다 한꺼번에 몰락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고 경고했음에도 불구하고, 왜 근본적인 노선 전환을 하지 못했는가.
전후 80년의 이 시점에서, 국민 여러분과 함께 깊이 생각하고자 합니다.
대일본제국헌법의 문제점
먼저 제도적 문제를 들 수 있습니다. 당시 일본에는 정치와 군사를 적절히 통합하는 구조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대일본제국헌법 아래에서 군을 지휘하는 통수권은 독립된 권한으로 간주되었고, 정치가 군보다 상위에 있어야 한다는 ‘문민통제’의 원칙이 제도적으로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내각총리대신의 권한도 제한적이었습니다. 제국헌법하에서 내각총리대신을 포함한 각 국무대신은 대등한 관계로 간주되었으며, 총리는 내각의 수반으로서의 지위를 가지되 내각을 지휘·명령할 권한은 부여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러일전쟁 무렵까지는 ‘원로’들이 외교, 군사, 재정을 통합하는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무사 출신으로 군사를 잘 이해한 원로들이 이를 통제할 수 있었습니다. 마루야마 마사오의 표현을 빌리면, “헌법을 초월한 존재인 원로·중신들의 매개”가 국가의 의사 일원화에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이 원로들이 세상을 떠나고 비공식적 조정 메커니즘이 쇠퇴한 뒤, 다이쇼 민주주의 아래에서 정당이 정치와 군사의 통합을 시도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세계 질서가 크게 변동하는 가운데 일본은 국제협조의 주요 주체 중 하나로서 국제연맹 상임이사국이 되었고, 1920년대의 시라하라 외교 등은 제국주의적 팽창을 억제했습니다.
그 시기 여론은 군에 비판적이었고, 정당은 대규모 군축을 주장했습니다. 군인은 위축감을 느꼈으며, 이러한 반발이 쇼와기에 군부가 대두한 배경 중 하나로 여겨집니다.
당시 문민통제의 부재라는 제도적 문제를 원로, 그리고 정당이 운영상으로 보완하고 있었던 셈입니다.
정부의 문제
점차 통수권의 의미가 확장되면서 군부는 이를 정부와 의회의 통제를 배제하는 수단으로 이용하게 되었습니다.
정당내각 시대에는 정권 획득을 위한 스캔들 폭로전이 이어져 정당은 국민의 신뢰를 잃었습니다. 1930년, 야당 입헌정우회는 해군 일부와 손잡고 런던 해군 군축조약의 비준을 둘러싸고 ‘통수권 침해’라 주장하며 정부를 공격했습니다.
1935년에는 헌법학자 미노베 다쓰키치의 ‘천황기관설’을 공격 대상으로 삼아 군부까지 휘말리는 정치문제로 비화했습니다. 당시 오카다 내각은 학문적 문제는 학자에게 맡길 수밖에 없다며 거리를 두려 했으나, 결국 군부의 요구에 굴복해 ‘국체명징 성명’을 두 차례 발표하고 미노베의 저작을 금서로 만들었습니다.
이로써 정부는 군부에 대한 통제력을 완전히 잃었습니다.
의회의 문제
군을 통제해야 할 의회 또한 그 기능을 상실했습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1940년의 사이토 다카오 의원 제명 사건입니다. 그는 본회의 연설에서 전쟁의 수렁화를 비판하고 정부의 전쟁 목적을 추궁했는데, 육군은 이를 모욕이라 반발했고, 압도적 다수(찬성 296표, 반대 7표)로 제명되었습니다. 의회 내에서 책임 있는 발언을 하려 했던 드문 사례였지만, 당시 회의록의 3분의 2는 아직도 삭제된 상태로 남아 있습니다.
예산 심의에서도 의회는 군에 대한 견제 기능을 전혀 하지 못했습니다. 1937년 이후 군사비는 특별회계로 처리되어 내역이 공개되지 않았고, 심의는 비공개·단시간에 이루어졌습니다.
심지어 육해군 간에는 조직 이익과 체면을 걸고 예산 쟁탈전이 벌어졌습니다.
또한 다이쇼 말기부터 쇼와 초기에 걸쳐 15년 동안, 현직 총리 3명을 포함한 수많은 정치인이 국수주의자나 청년 장교들에게 암살당했습니다. 이들은 모두 국제협조와 문민통제를 중시한 인물들이었습니다.
5·15사건과 2·26사건을 포함한 이런 테러들은 문민들이 군의 정책과 예산을 논의하는 자유를 심각하게 위축시켰습니다.
언론의 문제
언론의 책임 또한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1920년대 언론은 팽창정책에 비판적이었고, 이시바시 단잔은 식민지 포기를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만주사변 이후 언론은 전쟁 지지로 돌아섰고, 전쟁 보도로 신문 판매는 급증했습니다.
1929년 세계대공황 이후 보호무역이 확산되며 일본의 수출이 타격을 받자, 불황과 함께 민족주의가 고조되고 독일의 나치, 이탈리아의 파시스트당이 득세했습니다. 자유주의·민주주의·자본주의가 끝났다는 인식이 퍼지며 전체주의와 국가사회주의를 수용하는 토양이 형성되었습니다.
이런 가운데 관동군 일부가 만주사변을 일으켰고, 언론은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해 국민의 열광을 부추겼습니다.
1937년 이후 언론 통제가 강화되어 정부 비판은 사라지고 전쟁 찬양만이 남았습니다.
정보 수집·분석의 문제
1939년 독·소 불가침조약 체결로 평화내각이 총사퇴한 사건은 일본이 국제정세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음을 보여줍니다. 정보 수집, 분석, 공유 체계 모두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오늘날의 교훈
전후 일본은 문민통제를 제도적으로 확립했습니다. 내각총리대신과 국무대신은 모두 문민이어야 하며, 자위대는 총리의 지휘 아래 있습니다.
내각의 통일성과 책임 구조가 헌법상 보장되었고, 국가안전보장회의(NSC)가 설치되어 외교·안보의 종합조정이 강화되었습니다.
그러나 제도는 운용이 제대로 되어야 의미가 있습니다. 정치가 자위대를 이해하고 활용할 능력과 식견을 갖추어야 합니다.
무책임한 포퓰리즘에 휘둘리지 않고, 대세에 따르지 않는 정치가로서의 자존과 책임이 필요합니다.
자위대는 전문가 집단으로서 정치에 대해 적극적으로 설명하고 의견을 제시해야 합니다.
정치는 조직 간의 분열을 넘어 국가이익을 통합해야 합니다. 육해군의 대립과 내부 불통으로 국가 의사가 일원화되지 못해 전쟁으로 치달았던 과거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정치는 항상 국민 전체의 복지와 이익을 생각하며, 장기적·합리적 판단을 해야 합니다. 책임의 소재가 불분명한 상황에서, 용감한 구호나 감정적 결단이 환영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일본은 냉정함을 잃고 파멸로 향했습니다.
정부의 오판을 막는 것은 의회와 언론의 책임입니다.
국회는 헌법이 부여한 권한으로 정부를 견제해야 하며, 여론영합이나 인기영합의 정치를 해서는 안 됩니다.
사명감을 지닌 언론과 건전한 공론장이 필요합니다. 대전 당시 언론이 국민을 무모한 전쟁으로 몰아넣었던 사실을 되풀이해서는 안 됩니다. 상업주의, 배타적 민족주의, 차별·배외주의를 용납해서도 안 됩니다.
아베 신조 전 총리가 폭력에 희생된 사건을 포함하여, 폭력에 의한 정치의 유린, 자유로운 언론을 위협하는 차별적 언동은 결코 용납될 수 없습니다.
이 모든 기반은 역사를 배우려는 자세입니다. 과거를 직시하는 용기와 성실성, 타인의 주장에 귀 기울이는 관용, 이것이 진정한 리버럴리즘이며, 건강하고 강건한 민주주의의 근간입니다.
윈스턴 처칠이 통찰했듯, 민주주의는 완전한 제도가 아닙니다. 비용과 시간이 들고, 때로는 잘못을 저지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역사 앞에 겸허해야 하며, 교훈을 깊이 새겨야 합니다.
자위와 억지력을 위한 실력 조직을 보유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지만, 그것이 민주적 통제를 벗어나 폭주한다면 민주주의는 단숨에 붕괴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문민 정치가의 오판으로도 전쟁은 일어날 수 있습니다. 문민통제와 적절한 정군 관계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의회, 정부, 군, 언론 모두가 이를 항상 인식해야 합니다.
사이토 다카오 의원은 “정의가 이기는 것이 아니라 강자가 약자를 정복하는 것이 전쟁이다. 성전(聖戰)의 이름 아래 국가의 백년대계를 그르쳐서는 안 된다”고 현실주의적 정책의 중요성을 주장하다가 제명되었습니다.
이듬해, 공습 시 시민의 대피를 ‘전쟁 지속 의지의 결여’로 본 육군의 발언도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과거의 일이지만, 의회의 책임 포기, 정신주의의 만연, 인명과 인권 경시의 위험성을 강하게 경고합니다.
역사에 정면으로 마주하지 않고는 밝은 미래를 열 수 없습니다. 전후 일본이 가장 복잡한 안보 환경에 처한 지금, 우리는 다시금 역사의 교훈을 되새겨야 합니다.
전쟁의 기억이 점차 희미해지는 지금이야말로, 젊은 세대를 포함한 모든 국민이 전쟁과 평화의 의미를 능동적으로 생각하고 미래에 살려야 합니다. 그것이 평화국가로서의 토대를 더욱 견고히 하는 길입니다.
저는 국민 여러분과 함께, 지난 대전의 다양한 교훈을 가슴에 새기며, 다시는 그러한 참화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왜 전쟁까지 - 일본 제국주의의 논리와 세계의 길 사이에서2017년 기노쿠니야 인문 대상 수상작. 전작에서 청일전쟁에서 태평양전쟁까지 이어진 일본의 근현대 50년을 탁월한 시각으로 분석한 가토 요코가, 이번에는 일본이 진 주만을 기습 공격하기까지 10년간 어떤 상황에서 무엇을 검토하고 결국 어떤 선택을 내렸는지를 면밀하게 추적한다.
도조 히데키와 제2차 세계대전 - 일본을 패망으로 몰고 간 한 우익 지도자의 초상일본을 대표하는 논픽션 저널리스트로 손꼽히는 저자가 6년에 걸쳐 도조 히데키 시대의 자료와 관련자 수백 명을 취재해 도조 히데키의 실체를 드러낸 역작이다. 그저 '혐오감을 유발하는 A급 전범' 정도의 이미지로만 남아있던 도조 히데키의 실체를 드러냈다.
참모본부와 육군대학교 - 제국육군의 영광과 종언대일본제국이 파멸로 이르는 과정을 추적하는 책이다. '야마가타의 참모본부', '환상으로 끝난 통합참모본부', '육군대학교와 멕켈', '참모본부의 초진', '의문시된 육대의 가치', '충격 속의 어지러운 질주', '이시하라 간지의 좌절', '조직이 만든 광기' 총 8장으로 구성되었다.
키메라 - 만주국의 초상1932년에 중국 동북지방에서 건국되었다가 1945년에 태평양전쟁에서의 일본의 패망과 함께 홀연히 자취를 감춘 나라 만주국. 이 책은 만주국이 왜 건국되었고 그 목적은 무엇이었는지, 운영과정은 어떠했고, 일본인과 중국인은 이 과정에 어떻게 관여했는지 등 만주국의 전체상을 알 수 있는 입문서다.
제국의 기획 - 혁신관료와 일본 전시국가영미권 일본사 연구의 최신 성과로 출간되자마자 큰 반향을 일으킨 책이다. 저자는 당대 독일과 일본의 사상사적.학문적 연원을 추적했고 그 상호작용을 드러냈다. 이론적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실질적으로 일본과 독일 등에서 나온 당대 1차 자료들을 충실하고 치밀하게 활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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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구오구
무표정의 이시바 총리가 이런 담화를 했었군요. 기존의 사과 반성을 넘어서 구조적인 분석을 제시한 부분이 이전 총리들과 다른 부분이죠?
무엇보다 시스템의 문제. 특히 여론의 위험까지.
훌륭하네요. 한국뉴스에서 볼수 없는 내용이네요
사이토 다카오 같은
소수를 제명한 부분까지 비판하였네요.
이 담화가 일본내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 궁금하네요
향팔
일본 총리가 이렇게 상식적이고 역사 의식을 갖춘 얘길 하는 걸 저는 처음 본 것 같아요. 물론 단기간 재임 후 물러나기 전 개인 명의로 발표한 의견이긴 하지만 (마지막으로 할말은 하고 가겠다는?), 그래도 충분히 의미가 있는 듯합니다. 여러 번 읽어볼 만하다고 생각했어요.
YG
@향팔@오구오구 저는 그 글 읽고서 이런 헛생각도 했었어요;
[이시바 시게루와 헛생각]
예전에 『도련님의 시대』(세미콜론)를 재미있게 읽을 때도 들었던 생각이고, 오늘(10월 13일) 일본 이시바 시게루 총리의 종전 80주년 메시지를 읽으면서도 들었던 생각. 만약 이시바 총리의 비판적 평가대로 다이쇼 후기와 쇼와 초기(1920~1930년대)에 일본이 군부에 휘둘리지 않은 정상 국가의 길로 갔다면 지금 우리는 한반도에서 레이와 7년을 살고 있을 수도.
아니면 제2차 세계 대전 후에 인도, 인도네시아 나중에 알제리, 베트남처럼 뒤늦게 독립했을까? 냉전기 그 독립의 과정은 어땠을까? 한국 전쟁이나 분단 없이 독립했을까? 독립 후에는 일본의 속국 형태로 경제적 식민지로 종속되었을까? 아니면 냉전기 동북아시아의 스웨덴이나 핀란드 혹은 독일 베를린처럼 서울이 나중에 세계 첩보 소설의 무대가 되었을까?
이시바 총리의 명문을 읽으며 출근하다가 든 헛생각.
향팔
으앜 ㅋㅋㅋ 레이와 7년이라니 (진짜 그랬을 수도.) 갑자기 소름이 막 돋네요
적륜재
복거일의 "비명을 찾아서"의 부제가 "경성, 쇼우와 62년"이었습니다. 안중근 의사가 아니었으면(이토 히로부미는 병합에 반대 입장이었다고 합니다. 대신 위성국 같은 형태로 끌고 가려 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혹은 일본 군부의 폭주가 아니었다면 정말 그렇게 되었을거란 생각에 동감입니다.
향팔
두분 글을 보니 한편으론 아찔하면서 정신이 번쩍 드네요. 이시바 총리의 합리적인 담화 속에 숨은 서늘한 가능성, 어쩌면 전혀 다른 방향으로 튈 수도 있었을 역사의 아이러니…. 역사는 정답을 찾기보다는 질문을 던지는 공부라고 하던데, 왜 그런지 조금 알 것 같습니다.
화제로 지정된 대화
YG
3월 읽기 표입니다. 이미 확인하셨겠지만, 3권은 1권과 2권보다 분량이 많아요. 본문 697쪽에 꼭 읽어야 할 부록의 30쪽 분량 논문까지. 그래서 빡빡하지만, 3월 29일까지 완독하는 일정입니다. 1권, 2권 호흡으로 따라오시면 무리가 없습니다.
화제로 지정된 대화
YG
향팔
“ 7. 일본에 병탄된 뒤 1,870여만 명에 달하는 한인이 일본의 가혹한 통치 아래 신음하고 있다. 한인의 자유가 회복되지 않는 한, 원동의 평화도 보장할 수 없다. 한국이 발칸 반도의 전철을 밟아 또 다른 세계대전이 발발하는 것을 막으려면, 한국이 독립을 회복하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된다.
8. 만일 한국이 자유를 획득하지 못하면, 일본은 분명 만주와 시베리아까지 차지하려는 야심을 갖게 될 것이다. 그다음에는 아시아의 모든 민족을 무력으로 굴복시키려 들 것이다.
9. 일본이 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하게 되면, 분명 열강 각국의 경제와 상업이익을 해치게 될 것이다.
- 「신한청년당이 평화회의에 제출한 청원서 역문」 중 ”
『[세트] 김규식과 그의 시대 1~3 세트 - 전3권』 정병준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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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팔
“ 이에 따르면 김규식의 본뜻은 “13. 열강이 만일 한국과 영구중립조약을 맺을 의사가 있다면, 우리 한국도 기꺼이 응할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1900년을 전후한 시점에 데니의 청한론을 필두로 한반도 중립화 혹은 전시중립 문제가 다각도로 검토된 바 있다. 이승만과 김규식 등 미국에서 공부하고 국제정세를 파악했던 외교독립론자들은 미약한 한국의 현실과 강대국 포위라는 객관적 상황 속에서 한반도 중립화를 독립 유지나 독립 회복의 방안으로 고려했던 것이다. ”
『[세트] 김규식과 그의 시대 1~3 세트 - 전3권』 정병준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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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팔
“ 김규식은 파리 도착 후 20일 이내에 프랑스 재야인사, 하원의원, 각국 기자들과 긴밀히 접촉했고, 상해에서 준비해 간 신정·김성 명의의 청원서, 파리로 오며 준비한 신한청년당 명의의 비망록, 이를 간략화한 서신을 윌슨 대통령과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한 것이다. 김규식은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으나 강대국은 자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침묵과 무시로 일관했다. ”
『[세트] 김규식과 그의 시대 1~3 세트 - 전3권』 정병준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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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팔
“ 3·1운동 발발 이후 상해에는 1천 명 이상의 독립운동가가 집결하였고, 임시의정원·대한민국임시정부가 설립(1919. 4. 11)되었다. 상해 임시정부는 4월 13일 김규식을 외무총장, 평화회의 대한민국 위원 겸 파리 주재 위원으로 임명하고 신임장을 파리로 발송했다. 3·1운동의 에너지를 반영한 임시정부로부터 공식적 지위가 부여되자, 김규식은 4월 하순경 파리 제9구 샤토덩가 38번지에 사무실을 연 다음, 사서함-전화-텔렉스를 갖추고 본격적인 외교 홍보 활동을 펼쳤다. 이곳 은 프랑스 시인 블라베 부부의 자택이었다. 김규식이 샤토덩가 38번지로 옮긴 정확한 일자와 배경, 블라베를 만나게 된 경위는 알 수 없다. 다만 이욱영, 진우인, 오조추 등의 조언과 인맥으로부터 도움을 받았을 것이다. 파리위원부에 합류했던 여운홍의 회고에도 중국인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는 내용이 나타난다. ”
『[세트] 김규식과 그의 시대 1~3 세트 - 전3권』 정병준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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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팔
“ 김규식·파리위원부가 재불 중국 지식인 및 중국대표단의 도움을 받고 협력했다는 사실은 지금까지 전혀 주목받지 못했다. 심지어 중국대표단은 산동성 문제로 조선 문제에 눈을 돌릴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강화회의에서 중국대표단과 김규식이 협력한 흔적이 눈에 띄지 않는다는 평가까지 있었던 것이다. ”
『[세트] 김규식과 그의 시대 1~3 세트 - 전3권』 정병준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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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팔
“ 파리시 한가운데에 위치한 이 집에는 전등도 없어서 대표단은 촛불을 켜 가며 밤새 각지에서 오는 정보를 받고, 각지로 보낼 카피를 쓰고, 전보를 놓고 편지를 쓰고, 누군가를 방문하고, 신문사를 찾는 등 “실로 눈코 뜰 싸이 업시 우리 전원은 김규식 이하 만흔 분주를 거듭”하였다고 한다.
[…] 결국 김규식의 가장 중요한 활동이던 한국 독립을 요구하는 공식 청원서·비망록·부록 세트를 5월 10일 파리평화회의에 제출했을 시점에 파리위원부에는 김규식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아직 이관용, 여운홍, 조소앙, 황기환 중 아무도 파리에 도착하지 않은 상태였다. 바꿔 얘기하면 김규식이 혼자 힘으로, 파리평화회의에 한국 측 청원서·비망록·부록을 제출했음을 알 수 있다. ”
『[세트] 김규식과 그의 시대 1~3 세트 - 전3권』 정병준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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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팔
“ 당신들이 아는 바와 같이 나는 만국공법이나 외교상 법문(法文)에 그리 한숙(嫺熟)지 못합니다. 그럼으로 나는 우리의 법식적 청원서를 저술하는데 조역할 사람이 있는 것이 제일 필요한 줄로 생각하였으나 그러나 나는 할 일 없이 나 혼자 모든 일을 보는 동시에 각국 외교원도 심방하며 인쇄소에도 가보아야 하며 통신도 하여야 됨으로 어떤 때는 앉아서 전보 한 장을 쓸 시간도 없었나이다.
[…] 나는 아메리카에서 보내는 3대표자를 도와줄 목적을 가지고 유럽으로 건너올 때에 이와 같이 정계 파도가 흉흉한 가운데 호을로 일엽편주를 타고 애쓸 줄을 알았으리오. 어떻든지 우리는 우리 정형에 대하여 할 수 있는데까지는 능력과 정성을 다할 것뿐이라 하며 또는 우리 성공할 희망은 전능하신 하눌님께 맏겨둘 뿐이외다. ”
『[세트] 김규식과 그의 시대 1~3 세트 - 전3권』 정병준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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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팔
“ 일본의 한국 점령이 대륙 팽창으로 이어지고 , 나아가 태평양 지배로까지 나아갈 것이라고 한 부분은 선견지명이자 미국·영국·프랑스 등 강대국을 상대로 한 한국 독립 주장의 근거이기도 했다. ”
『[세트] 김규식과 그의 시대 1~3 세트 - 전3권』 정병준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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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팔
“ 김규식과 그를 조력한 국제법 전문가들의 공략 지점이 어디였는가 하는 점을 알 수 있다. 1910년 병합조약이 사기와 강압으로 이뤄져 원천 무효이며, 국민주권론에 입각하여 한국의 주권은 4천 년 이상 지속되어서 황제가 마음대로 넘길 수 있는 물건이 아니며, 한국인 모두가 이 병합조약에 반대했고, 개항 이래 한국이 여러 국가와 맺은 조약 및 국제조약에서 한국의 독립 및 주권이 보전되었으니 이것이 지켜져야 하며, 국제정의와 인도에 입각한 윌슨의 14개조를 기본 정신으로 한 파리강화회의는 당연히 병합조약을 폐지해야 한다는 것이 핵심 주장이자 논리였음을 알 수 있다.* 때문에 청원서·비망록의 제목이 1910년 병합조약의 폐기·무효였던 것이다.
*「통신전」 제7호(1919. 5. 10)도 청원서·비망록의 핵심이 “1910년 8월 22일에 서울에서 체결된 한일 합병조약을 취소하라고 평화회의에 요구”하는 것이라며 위의 사항을 강조하고 있다. “6. 이 청원서는 한국과 폴란드, 그리고 알자스 로렌의 입장이 같음을 강조하는 바이다”라는 부연설명을 덧붙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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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의 대표 작가, 조영주
[책 증정] <탐정 소크라테스> 조영주 작가와 함께 읽어요[책증정] 작가와 작가가 함께 등판하는 조영주 신작 <마지막 방화> 리디셀렉트로 함께 읽기[장맥주북클럽] 1. 『크로노토피아』 함께 읽어요[박소해의 장르살롱] 19. 카페 조영주로 오세요
4월 12일은 도서관의 날! 도서관과 함께 했어요.
[경상북도교육청 구미도서관] 박준 시인 북토크 <계절 산문> 온라인 모임첫 '도서관의 날'을 기념하는 도서관 덕후들의 독서 모임[서강도서관 x 그믐] ③우리동네 초대석_차무진 <아폴론 저축은행>
짧은 역사, 천천히 길게 읽고 있습니다
[함께 읽는 과학도서] 천천히 곱씹으며 느리게 읽기 <지구의 짧은 역사> 1부[함께 읽는 과학도서] 천천히 곱씹으며 느리게 읽기 <지구의 짧은 역사> 2부
꽃잎처럼 다가오는 로맨스
잃어버린 나와 내 로맨스의 복원🛠️『사랑도 복원이 될까요?』함께 읽기103살 차이를 극복하는 연상연하 로맨스🫧 『남의 타임슬립』같이 읽어요💓[북다/책 나눔] 《하트 세이버(달달북다10)》 함께 읽어요![북다] 《정원에 대하여(달달북다08)》 함께 읽어요! (+책 나눔 이벤트)[장르적 장르읽기] 5. <로맨스 도파민>으로 연애 세포 깨워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