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약 김규식이 상해나 파리에 있었더라면 뇌종양 수술을 받고 생존했을 가능성이 거의 없었을 것이다. 다행히 김규식은 구미위원부 위원장으로 워싱턴디씨에 체류 중이었고, 당대 최고 군병원이던 월터리드 병원에서 최고 의료진에게 치료를 받았고, 구미위원부의 치료비 후원을 받을 수 있었으므로 살아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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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김규식이 상해나 파리에 있었다고 한다면 불가능한 재정적 후원이었다. 미주였기에, 또한 3·1운동 직후였기에, 김규식의 명성이 자자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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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뇌종양 수술 후 살아났으니, 김규식이 구미위원부나 재미 한인들에게 느끼는 부담감과 부채의식은 감당하기 힘들 정도였을 것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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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에서 서부로 일주하는 대장정이었다. 미국 전역을 순회하는 공채 세일즈맨의 여정이었다. 문제는 이것이 단 3개월 여정이었다는 것이다. 김규식은 죽음의 고비에서 살아나자마자 미 대륙 전역을 순회하는 강행군을 해야 하는 처지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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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식은 병들고 지쳤다. 번아웃(burn-out) 상태였다. 미국에 도착한 지 1년 만이었다. 파리강화회의는 무위로 돌아갔고, 워싱턴에서 기대했던 국제연맹회의는 취소되었다. 미국에 도착한 직후 워싱턴과 샌프란시스코를 오가며 공채표-애국금 분쟁을 조정해야 했다. 병으로 쓰러져 입원했고, 1920년 3월에는 뇌수술을 받은 후 3주 만에 퇴원해 3개월 동안 미국 전역을 다니며 공채표를 판매해야 했다. “도대체 나는 지금 어디에 서 있고, 무슨 일을 하고 있는가?”라고 김규식은 자문자답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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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는 김규식은 마지막 임무를 수행했다. 자신의 사임과 후임 현순의 임명 사실, 재정 관할권, 민단 등의 문제를 임시정부에 문의했다. 구미위원부 위원장으로서 맡은 바 직책에 속한 일이었다. ”
『[세트] 김규식과 그의 시대 1~3 세트 - 전3권』 정병준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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